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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은혜를 복되게 하려면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650 추천 수 0 2011.03.15 23: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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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4:17-21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주신 은혜를 복되게 하려면
막14:17-21

은혜라는 것은 아무 대가 없이 받은 것입니다. 부모님이 계시는 것 은혜입니다. 어떤 분은 시어머니가 계시는 것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늘 구박을 받고 사는 한 주부가 있었답니다. 친구들은 시어머니 없는 집에 가서 행복하게 사는데 자신만 시집을 잘 못 와서 시어머니를 잘못 만나 고생만 지긋지긋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남편은 효심이 강해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답니다. 그러니 남편도 보시 싫어졌답니다. 그날도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속상해 밖에 나갔는데 이상한 풍경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상복을 입은 여인이 맹견을 데리고 두 개의 관을 앞세워 가고 있는데 그 뒤를 100명 쯤 되는 여자들이 줄줄이 따라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상복입은 여인에게 물었답니다. “누가 돌아 가셨나요?" "제 남편이에요." " 무슨 일로요 ? " " 우리 개, 바로 이놈이 물어 뜯었어요 ." " 두번 째 관에는요 ? " " 우리 시어머니에요. 남편을 구하려다 그만 같이 물려 죽었지요." 이러자 이 주부가 " 이 개를 빌려주실 수 있나요 ?"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상주가 하는 말이 "줄을 서세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100여명이 그 개 빌려가려고 줄을 서 따라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면 어떤 것일지라도 우리는 복된 삶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로 받지 않으면 저주거리롤 삼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일 지라도 부모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의 직장도, 가족도, 교회도, 나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특히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은혜로 죄를 사해주셨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었습니다. 나의 나됨은 은혜로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은혜입니다. 건강을 가지고 태어난 것, 좋은 머리를 가지고 사는 것, 대한 민국에 태어난 것 다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복되게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쇄 살인 법처럼 받은 은혜 멋 있는 외모를 저주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은혜를 은혜로 누리지 못하고 저주로 만들어 인생을 비참하게 끝낸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제자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은 친히 그를 12제자로 선택해 주었습니다. 선택받은 제자 중에 그는 공동체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임명되었습니다.(요 12:4~6, 13:29) 당시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세리 마태가 있었습니다. 세리 공무원 출신인 마태는 상당히 수리에 밝아 회계에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를 예수님이 재정담당으로 세웠을 정도로 예수님은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요즘도 보통 관공서나 은행의 공금을 관리하는 자리에 사람을 임용할 때는 그의 재산 상태, 금전거래 상황, 청렴 여부, 인성까지 조사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믿고 돈을 맡길 정도의 인정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그 은혜로 복된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스승을 판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름조차 부르기 싫은 사람입니다. 통한이 남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생이 되었습니다.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주의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은 30냥에 팔아 먹고 자살한 저주받은 인생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비참한 죽음을 하게 됩니다. 죽은 후에 세상에 오명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복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신 은혜를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1. 받은 은혜를 탐욕(욕심)의 도구로 바꾸지 말고 하나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유다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름의 뜻이 '하나님을 찬양'이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그를 낳아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12제자로 선택받았습니다. 갖가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갈릴리 어촌의 농, 어부 출신으로서 무학자(無學者)인 반면, 가룟 유다는 예루살렘 남단의 도시 출신으로서 비교적 교육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정일을 맡길 정도로 신뢰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기 위해 불렀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마10:6;눅9:1). 그런데 그는 받은 은혜가 축복이 되지 못하고 배신자의 대명사, 멸망의 자식(요 17:12), 마귀의 조정자(요6:17), 반역자(눅6:16), 도적(요12:6;13:29)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선택받은 제자됨을 이용하여 스승인 예수님을 은 30에 대제사장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11절을 보면 유다가 돈을 받기로 약속하고 팔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활하게 대제사장을 찾아가 은혜를 주신 예수님을 놓고 흥정을 합니다. 배은망덕한 흥정을 합니다.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 26:14-15)” 제사장들보다 먼저 가룟 유다가 제안을 합니다(눅22: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2:4-5)”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가 민족주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팔았다고 미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룟이라는 말이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당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한 열심당으로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을 위해 예수님 따라 다녔는데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려고 하자 마지막 방법으로 혁명에 불을 붙이기 위해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비밀 제롯당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주의적인 꿈을 예수를 통해 성취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집권하면 자신도 집권의 주체로서 역할과 위치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꿈이 좌절되자 예수님께서 잠재된 힘을 발휘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런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판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십시오. 돈 때문입니다.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주신 은혜를 저주거리고 만들어 버립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탐욕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었습니다. 아간의 가족이 몰살을 당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탐욕으로 인하여 범죄를 하고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탐심을 설명하기를 '충족한 것보다 우리가 더욱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충분한 것을 가지고도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탐심은 '타바(tabah)'라는 말로 "악한 소유, 또는 불법적인 욕심"을 의미합니다. 이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가 된다고 했습니다. 돈은 죽음 보다 강하다고 말합니다. 백만장자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 한탕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탐욕이라는 호르몬으로 움직이는 제도요 체제입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물사관입니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공산주의 유물론은 돈만이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을 하고 한편 자본주의 유물론은 돈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했습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 돈은 절대 군림자입니다. 돈 앞에 사족을 못쓰게 합니다. 세계는 돈의 권세 앞에 줄을 서게 됩니다.
십계명에서는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십계명을 범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죄가 탐욕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탐욕이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탐욕이 부모를 바로 공경하지 못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고, 간음하게 하고, 도적질하게 하고, 거짓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라고 하셨습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을 망하게 하는 삼독 '탐, 진, 치'를 말하면서 독성이 가장 센 것이 탐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은 전염성이 강하여 한도 끝도 없어서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 불치병이 되어 결국 우리가 사는 가정과 사회를 무덤처럼 만들어 버리게 합니다. 문호 단테는 탐욕이란 '꺾을 수 없는 원수'라고 지적했습니다. 탐심에 포로가 되면 어떤 사람이라도 타락하고, 어떤 권력이라도 부패하며, 어떤 나라라도 멸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청교도 에스겔 홉킨스는 이 탐욕이 어떻게 인간을 포로로 만드는가를 4단계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첫째 단계는 죄가 우리 안에 형태를 갖추기 전에 악한 생각 또는 죄의 싹이 움트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이러한 악한 생각을 채워줄 대상이 나타날 때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부패한 육욕적인 세력과 죄악으로 눈이 멀고 마지막 단계는 탐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멸망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무저지는 세계 경제를 보고 있습니다. 땅을 많이 찾지하려고 저물도록 걷기만 하다 쓰러져 죽은 톨스토이의 우화에서 나오는 농부처럼, 딸을 황금으로 만들어놓고 통곡하는 미다스의 왕처럼,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롯의 아내, 가룟 유다처럼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주신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쓰임받는 것보다 더 채우려고 합니다. 프랑스의 루이14세처럼 324명으로 시중을 들게 하여 한 끼에 각종 짐승 81마리가 오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동양의 대식왕 서태후(西太后)는 요리사 120명으로 하여금 한 끼에 99첩의 요리를 올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가도 참 만족과 평안을 누렸습니까? 요즈음 금융 위기의 주범인 욕심많은 유대인을 풍자한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파선되어 표류하는 유대인 두 사람이 구명보트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답니다. 생명이 위태로우니까 한 유대인 기도했답니다. "오! 하나님, 만약 저를 구해 주신다면 저의 재산 반을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이 보이질 않았고, 오히려 풍랑만 더 심해질 뿐이었답니다. "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신다면 재산의 3분의 2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희망이 없자 "하나님, 제발 저의 이 간절한 기도를 받아 주십시오. 제 목숨을 구해 주신다면 제 재산........."라고 할 때 다른 유대인이 소리쳤답니다. "이봐 거래를 중단해. 저기 섬이 보여!" 욕심이 너무 많은 노총각이 예쁘고 돈 많은 여자를 구하자 하나님이 돈 여자를 주었다는 웃기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탐욕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적재 한계선이 있습니다. 과적의 비행기나 배는 결국 추락하고 침몰되게 됩니다. 한 때 탐심의 사람이었던 록펠러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사는 것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땅에 쌓는 인생인 아니라 하늘에 쌓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탐욕의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탐욕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탐심은 위장하고 나타납니다. 명분을 찾습니다. 헌신을 회피하고 자신을 합리화할 그럴듯한 찾습니다. 탐욕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합니다. 관점을 흐리게 합니다.
요한 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 집에서 만찬을 하였습니다. 이 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 나드 한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약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1데나리온이면 노동자 하루 품싻이니까 안식일과 명절을 빼고 일년 12달 일한 가치의 향유입니다. 일년 연봉입니다. 이 때 유다가 말합니다. 이것을 팔아 어찌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헌신하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헌금하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 돈 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 12:6)”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도둑놈이라는 것입니다. 13명의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상당한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요즈음 돈으로 생각하면 한 끼 3000원 든다면 한끼 당 3만 9천원 하루 11만 7천원입니다. 한 달이면 3백 5십 1만원입니다. 기초 생활을 위한 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돈의 일부를 훔쳐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적도 행하고 회계를 맡아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난한 자의 구제를 핑계로 공급을 착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의 스승된 예수님까지도 황소에 밟힌 종의 값인(출21:32) 은 30에 팔아 넘겨 버렸습니다. 그는 탐욕 때문에 사도로서 선택된 축복된 생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모든 불행의 배후에는 가장 밑바닥에 탐욕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 잘 하다가 교회를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왜 교회 다니면서 상처를 받습니까? 다른 사람 때문입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4)” 내면 깊숙이 꿈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라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배를 읽고 밥만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19)”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탐욕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후회가 아니라 회개의 은혜 누려야 합니다. 회개함으로 은혜를 더욱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고 실수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 장사를 준비하였지만 그들을 십자가를 거부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파멸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어 수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베드로로 짓습니다.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베드로는 그렇게 축복의 사람이 되었는데 유다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저주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승을 은전 30에 판 잘 못을 깨닫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합니다. 죄책감을 자살로 해결해 버립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해결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용서받고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들어와 쓰임 받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자신의 인생도 축복이 될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사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연으로 남을 죽이고 자신이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축복으로 누리지 못하고 저주로 만드는 사람을 그것을 잘못 처리합니다. 뼈에 사무친 사연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고 그 사연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해 버립니다. [사연으로 움직이는 가정]의 저자 도은미 박사는 인간은 자신의 사연으로 작동한다고 말하며 사연은 4가지 심리와 함께 활동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사건의 값을 결정하는 “허세 심리”입니다. 사건이 터질 때 자기 나름대로 값을 매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난 만큼 객관적인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연의 값으로 값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연으로 값을 정하는 사람은 물을 엎지르는 아이를 보며 “엄마가 쉬는 꼴을 못 봐, 네 아버지 닮아서 조심성이 없지...”라고 허세를 부리며 머리를 쥐어박는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값을 잘 못 매기면 병자라고합니다. 둘째는 “보상 심리”입니다. 이 허세 심리는 보상을 원한다고 합니다. 보상받는 것은 사연자의 마땅한 권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피해를 입었으니 마땅히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보상되지 않을 때는 피해의식, 핍절의식, 피곤 의식, 열등의식 등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보복 심리”입니다. 보상이 되지 않으면 보복심리가 작동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서도 자신의 헌신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 없다고 해석되면 교역자에게 보복심리가 작동합니다. 넷째가 “사망 심리”입니다. 사연의 종착지로 보복은 사망 심리로 연결되어 자살하던지 타살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가식과 가면, 가설(가짜 이야기), 가명을 가지고 상대를 지적하고 자신이 살려고 하는 사망 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향하면 우울증, 강박증, 삐짐, 노여워함, 울화, 중독, 현실 기피, 대인 기피, 자학 등으로 나타나고, 타인을 향하면 비난, 조롱, 학대, 언어폭력, 폭행 등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연이 많은 사람마다 자신을 읽어 주길 원하고, 타인이 헤아려 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분노합니다. 젊은 날 연인으로부터 배신당한 사연으로 남자는 다 ‘늑대’이고 여자는 다 ‘여우’라고 해석하면서 살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사연의 부채 원장을 만들어 대를 이어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사연은 이미 그리스 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회개하면 사연은 복음 안에서는 교훈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심각한 죄를 외면하고 합리화하고 자기가 하는 일의 정당화를 위해 애써 회피해 버립니다.
이미 세족식 때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요13:11)” 예수님이 아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만찬 때입니다. 직접적으로 지적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근심하여 서로 “내니이까?” 물어보았습니다. 이 때 유다가 마음에 찔렸을 것입니다. 유다가 말합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위선적입니다. 뒤에서는 스승을 죽일 음모를 하면서 겉으로는 천사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손을 넣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같이 예수님께 손을 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깨닫는 것도 은혜입니다. 회개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21절을 보세요.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막 14:21)”
요한 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요한에게 누가 배신자냐고 구체적으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 13:26)”
아주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간접적인 방법(요13:10, 막 14:18)으로 해도, 깨닫지 못하니까 직접적으로 콕 찍어서(요13:26) 지적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이 바로처럼 강퍅해져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누가복음에는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눅 22:3)”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탐욕에 중독된 유다의 마음을 이미 사단이 점령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단에 속한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과 불의의 아비인 사단(요 8:44)에게 지배를 받으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세상의 구원자 되신(요 4:42)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이 배신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배신을 충성과 성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더욱 사탄에게 성실하여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하나님 편이 아니라 사단의 편에 서니까 교회를 파괴하고 하나님 나라를 해치고 성도를 비난하고 남을 정죄하는 것을 자기 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이고 교활함을 지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그들을 만나 스승을 파는 치밀함과 사랑과 신뢰와 친근감을 표시하는 입맞춤의 평화적 행동으로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는(마 16:48-49) 기지를 보일 만큼 교활해져 버립니다. 그러면서고 그것을 죄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자기 발로 찾아가 지존하신 예수님을 겨우 은 삼십에 팔기로 계약할 정도로 비굴한 행위를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비굴한 행위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스승을 파는 매매를 하면서도 면전에서 “내니이까?”라고 말할 정도로 양심이 마비되어 뻔뻔해져 버립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탕자처럼 나간 아들도 반겨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초대와 사울과 다윗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사울은 은혜를 비극으로 끝냈지만 다윗은 은혜를 축복으로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울은 죄가 있고 다윗은 죄가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못했고 다윗은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간음하고 살인한 사람도 회개하면 은혜로 용서해 주시고 축복의 도구고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의로운 채 하면 다른 사람 정죄하지 말고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 회개하면 됩니다. 중생을 위한 회개는 한 번이면 족하지만 성화를 위해, 거룩한 삶의 축복을 위해 우리는 매순간 순간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미국에 유명한 목사님 중에 찰스 스윈돌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 번은 설교 중에 "우리 크리스찬들은 법과 질서를 지켜야합니다. 교통신호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예배가 다 끝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만 이 목사님이 딴 생각을 하다가 빨간 불인데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옆을 보니까 자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설교해 놓고 자신이 규칙을 어긴 것이 교인들에게 들켜 너무나 창피했답니다. 그래서 그냥 쳐다보지 않고 차를 몰아서 얼른 집으로 와버렸답니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답니다. "목사님, 아까 차 가지고 지나가셨죠? 내일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교인들이 아마 따지려고 그러나 보다'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냥 점심 같이 해요"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걱정스러웠답니다. 그 이튿날 점심시간에 굉장히 유머가 많으셨던 목사님은 목에다 무얼 걸고 약속 장소에 나갔답니다. 거기에는 '나는 죄인이다'(I am guilty)라고 쓰여져 있었답니다. 교인들은 막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환영했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갑자기 뒤로 돌아섰답니다. 뒤 등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쓰여 있었답니다. 우리는 다 용서받고 용서해 주어야 할 죄인입니다.
회개하면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은혜를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누릴 길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후회했을 뿐이지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잘 못을 통회 자복하고 주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
죄는 후회하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참으로 복되게 살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치유의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안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죄는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내 법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죄는 선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인 줄 알면서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아무 말이나 쏟아 놓으면 그것 역시 죄입니다.
죄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 내 수준, 사람수준이 아니라 믿음 수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 죽음을 경험하고 주님의 통치권 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를 삶을 살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후회하는 것은 야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를 돌이키지 않습니다. 유다는 가책은 너무 커서 자신의 목을 매달만큼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마 27:3-5). 후회의 결과 그는 돈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고 자살로 양심의 가책을 처리해 버렸습니다. 자신의 죄를 철저히 인식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의지하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내 죄 문제 내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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