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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Godless and Silly Stories)

디모데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267 추천 수 0 2011.03.30 17:18:48
.........
성경본문 : 딤전4:6-10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6. 4. 30 김영봉 목사

4회 연속 설교: '다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2)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Godless and Silly Stories)

--디모데전서 4:6-10

 

오늘의 본문은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지, 어떤 훈련이 우리에게 진실로 도움이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의 양육을 위해 필요한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6절)

2. 그리스도인들이 물리쳐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

3. 몸의 훈련과 경건의 훈련은 어떻게 다릅니까? (8절)

 

토의할 질문

1. 요즈음 당신이 읽는 글이나 드라마나 음악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당신은 말씀을 읽거나 말씀을 듣거나 신앙적인 대화를 얼마나 자주 나누십니까?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지배할 정도로 많이 하십니까?

3. 당신의 경건 생활에 대해 반성해 보십시오. 영적 성장을 위한 경건의 훈련을 얼마나 잘 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1.

얼마 전에 <유다복음서>가 공개되어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이 문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끈 이유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 대해 전혀 색다른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가룟 유다는 지옥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 만큼,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겨 죽게 한 유다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유다복음서>를 보면, 가룟 유다가 스승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제자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유다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아니라 유다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 차립니다. 유다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벨로라는 영원한 나라에서 오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보내신 분의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유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 모두(다른 제자들)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너는 나를 담고 있는 사람을 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너는 열 세 번째가 될 것이며, 다른 세대 사람들이 너를 저주할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그들 모두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이 이르면 그들은 네가 거룩한 세대로 올라간 것에 대해 저주할 것이다.

꽤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반한 사람이 아니라, 스승의 영혼을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도와 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오는 세대에서 유다가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십니다. 하지만 결국 유다는 가장 높은 자리로 올려질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동정론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다면, 그 중대한 사건을 가능하게 한 가룟 유다는 죄인이 아니라 공로자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유다복음서>는 그 질문을 제기한 사람이 이미 2세기에도 살았었음을 증언해 줍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의 공개가 여러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롭고 반가운 일인 것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러면 그렇지! 내 생각이 맞았잖아?”라고 반겼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게 웬 일인가? 그러면 성경에 있는 유다에 관한 말씀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혼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 “왜 이런 문서가 이제 공개되었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2.

<유다복음서>가 지금에 이르러서 공개된 것을 두고, 교회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 지금까지 감추어 두었는데,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드디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라고 상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소설 <다빈치 코드>가 교회와 성경의 복음서들에 대해 던지는 심각한 혐의입니다. 영국왕립역사학회의 전 회원이며 역사 문제에 있어세계 최고의 권위자 중 하나로 등장하는 레이 티빙(Leigh Teabing)이 복음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왜곡은 이런 거야. 예수가 죽은 지 사백년이나 지나서 그의 지위를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시켰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으로서 예수의 삶을 연대기로 기록한 문서들이 이미 수천개나 존재했다는 사실이야.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대담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는 알았지.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역사의 가장 심오한 순간이 튀어나온 거야.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성서 제작을 의뢰하고, 재정적으로 뒷받침했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모두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한 거야.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 (1권 355쪽, 원작 p. 234)

 

역사가들에게 다행한 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멸실하려고 했던 복음서들 중 일부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야. 후딘 사막에 있는 쿰란 근처 동굴에 숨겨진 사해의 두루마리가 1950년대에 발견되었어. 1945년에는 나그함마디에서 콥트어로 쓰인 콥트 두루마리가 발견되었고. 이 두루마리들은 진짜 성배 이야기뿐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얘기하고 있어요. 물론 거짓 정보의 전통을 지키려는 바티칸은 이 두루마리의 공개를 강력히 막고 있지. 왜 바티칸은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현대의 성서는 정치적 의제를 내건 인간들에 의해 편집되고 꾸며진, 역사적 허구와 편견임을 두루마리들이 극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지.” (1권 355-6쪽, 원작 p. 234)

 

여기서 레이 티빙은 복음서와 관계된 비밀들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까지 수천개의 복음서들이 있었다.

2.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325년에 현재 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을 새로이 제작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도록 명령했고, 그 때까지 있던 모든 복음서들을 소각시키고 금지시켰다.

3. 가톨릭 교회는 그 이후 이 사실을 은폐해 왔다.

4. 1950년에 사해사본이 발견되고, 1945년에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면서 교회가 영원히 은폐하려던 복음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복음서들은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믿을만하다.

5. 새로 발견된 복음서들 안에는 성배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다.

6. 가톨릭 교회는 이 복음서들의 출판을 반대하고 방해해 왔다.

7. 하지만 결국 이 복음서들은 공개되었고, 이제 진실은 밝혀지게 되었다.

 

이번에 공개된 <유다복음서>는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 복음서와 같은 성격의 문서입니다. 그러니까 레이 티빙의 말에 의하면, <유다복음서>가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반대하고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National Geographic 홈 페이지에 들아가거나 이번에 출판된 The Gospel of Judas라는 책을 찾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서가 이제야 공개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그 문서가 골동품 암시장을 오랫 동안 전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원인은 이 문서가 학자들의 손에 넘어왔을 때, 마치 퍼즐 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에 원상태로 복구하느라고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교회가 이 문서의 공개를 반대한 일은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든 개신교회든, 이제는 학자들의 연구를 막을 아무런 권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복음서>와 관련하여 교회측의 음모는 전혀 없었습니다.

 

3.

위에서 레이 티빙이 말한 내용을 한 번 다시 되짚어 보십시다. 이 부분에서는 설교가 강의처럼 될텐데,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들이니,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 혹시 “내가 뭐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젠 아셔야 합니다. 그런 문서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몰라도 되었지만, 이제 그런 문서들이 발견되고 번역되어 어느 서점을 가든지 구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에 있는 복음서들과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기 쉽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해 오거나 도전해 오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리즈 설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첫째,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까지 수천개의 복음서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수천개’가 있었다는 말은 과장입니다. 역사적인 증거로 볼 때, 꽤 여러 개의 복음서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네 개의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말고도 여러 개의 복음서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325년에 현재 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을 제작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도록 명령했고, 그 때까지 있던 모든 복음서들을 소각시키고 금지시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왜곡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정경 문제에 대해 한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는 도시의 교회들을 위해 50권의 성경을 필사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것을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했을 뿐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은 후대에 날조된 것이고 초기에 기록된 복음서들은 모두 소각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믿을만한 학자 중에 이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한 사람도, 다시 강조합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네 개의 복음서가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복음서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오래되었고 더 믿을만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셋째, “가톨릭 교회는 그 이후 이 사실을 은폐해 왔다.” 가톨릭 교회가 요즈음 공개되고 있는 복음서들을 반대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복음서들이 담고 있는 신학이 초대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아주 위험한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복음서들의 사상에 반대한 것이지,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억압하려 한 적은 없습니다.

 

넷째, “1950년에 사해사본이 발견되고, 1945년에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면서 교회가 영원히 은폐하려던 복음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복음서들은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믿을만하다.” 여기에도 역사의 왜곡이 있습니다. 1950년에 발견되어 공개된 ‘사해사본’에는 복음서가 한 권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경과 구약 외경뿐입니다. 신약성경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이 이 사실을 알고도 이 문서를 여기에서 언급했다면 분명한 증거 조작이요, 모르고 이렇게 했다면 역사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연구를 너무 부실하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오늘 우리의 신약성경 안에 없는 복음서들과 편지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문서들은 영지주의라는 초대 교회의 이단 종파에서 만든 것입니다. 이 문서들의 쓰인 시기를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주후 15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은 주후 50년부터 90년 사이에 쓰여진 것들입니다. 역사적 가치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4.

다섯째, “새로 발견된 복음서들을 보면 성배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배에 관한 비밀’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가립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댄 브라운이 사용한 복음서는 <빌립복음서>와 <마리아 복음서>입니다. 두 복음서 모두 150년 이후에 쓰인 것들입니다. <빌립복음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옵니다. <빌립복음서>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의 이름을 빌어 창작한 책입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셋 있었다. 그의 모친 마리아, 마리아의 누이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주님이사랑하시는 사람’(his lover)이라고 불렀다.” (원본 32절)

 

여기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말이 영어로 his lover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표현으로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애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보면,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 즉 세대배의 아들 요한을 ‘주님의 사랑받던 자’라고 부릅니다. 댄 브라운과 같은 논리로 한다면, 예수님은 요한에게 同性愛를 가지고 있었다고 비약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엉터리 없는 논리입니까?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말라버렸다고 말하는 지혜는 천사들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의 짝은 막달라 마리아다. 주님은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하셨고, 그녀의 [……]에 입을 맞추곤 하셨다. 다른 [ ……]은 그분을 ……했다. 그들은 그분에게 말했다. “왜 당신은 우리 모두보다 [……] 하십니까? 주님이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원본 55절, 소설 2권 15쪽, 원작 p. 246)

 

여기서 괄호 안에 둔 부분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입을 맞추곤 하셨는데, 어디에 맞추었는지는 본문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뺨에 했을 수도, 이마에 했을 수도 혹은 입술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 했거나, 초대 교인들에게 있어서 서로 입을 맞추는 것은 지금 중동 사람들에게서 보듯 일상적인 인사입니다. 댄 브라운은 이 구절을 옮겨 적으면서 “입술에 자주 키스하곤 했다”고 덧붙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한 것입니다. ‘짝’이라는 말이 ‘연인’ 혹은 ‘애인’을 뜻한다는 주장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가까운 친구’라는 의미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구절을 삭제합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더 사랑한다는 제자들의 불평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왜 댄 브라운이 이 구절을 생략했을까요? 이 구절은,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특별하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댄 브라운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댄 브라운이 인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 증거는 <마리아 복음서>입니다. 누군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빌어 창작한 책입니다. 이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다른 누구보다도 막달라 마리아를 더 사랑하신다는 구절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한 군데를 보면, 베드로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여, 우리는 주님께서 다른 여자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신 줄 압니다. 그러니 당신이 기억하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은 아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 말씀 말이오.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씀 말이오.”

또 다른 곳에서는 베드로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거부하자, 레위가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 당신은 늘 그렇게 성마르지. 당신이 저 여자를 원수처럼 공격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네. 그러나 주님이 그녀를 영예롭게 하셨는데, 그녀를 거부하려는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진실로 주님은 마리아를 매우 잘 알고 계시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다 그녀를 더욱 사랑했던 것이오.” (소설 2권 17-18쪽, 원작, p. 247)

 

이것이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사라라는 여자 아이를 낳았다’는 이 소설의 핵심 주제에 대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추측과 비약과 왜곡을 섞지 않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결론입니다. <빌립복음서>와 <마리아의 복음서>가 이단적은 사상으로 물들었을뿐 아니라 아무런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결론은 더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개의 복음서보다 이 두 개의 복음서가 더 믿을만하다는 주장은 역사가들에게는 너무도 어이 없는 일입니다.

 

복음서에 대한 <다빈치 코드>의 주장이 두 개 더 남았습니다. 여섯째 주장은 “가톨릭 교회는 이 복음서들의 출판을 반대하고 방해해 왔다”는 것인데, 그런 일이 있지도 않았고, 그런 일이 이제는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일곱째 주장은 “하지만 결국 이 복음서들은 공개되었고, 이제 진실은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복음서들의 공개로 인해 밝혀진 진실은 초대 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진실뿐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 어떤 진실도 이 복음서들은 담고 있지 않습니다.

 

5.

이렇게 보면, 신약성경에 있는 네 개의 복음서들과 최근에 발견된 복음서들에 대한 <다빈치 코드>의 입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댄 브라운은 역사적 가치가 전혀 없는 복음서들을 가장 믿을만한 자료로 둔갑시키고, 그 대신 가장 믿을만한 네 복음서들을 날조된 것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웁니다. 게다가, 몇 개의 모호한 구절을 확대하고 변조시켜서 마치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독자를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다빈치 코드>로부터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에게로 돌려 보십시다. 이 복음서들을 두고 저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왜 후대에 이런 복음서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과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은 어떻게 다른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필요합니다만, 오늘은 설교의 결론으로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내는 일에 필요한 말씀과 행적만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반면,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쓰인 책입니다.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을 여러분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굳이 살 필요는 없으니, 서점에 가서 1시간만 앉아서 그 복음서들을 읽어 보십시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과 그 내용과 질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 신학교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쳐 오면서 자주 받은 질문이 “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자라실 때의 이야기가 없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궁금한 일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태어나실 때의 이야기에서 곧바로 공생애 이야기로 건너뜁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아예 태어나실 때에 관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러니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30여년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그것을 추적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도에 가서 수련하고 오셨다고 추측합니다. 뭐, 아무 증거 없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하고 싶은대로 추측하시고 말하시면 됩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믿을지가 의문입니다.

저는 30여년 동안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드릴 수 없지만, 왜 그것에 대한 정보가 다 사라졌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사생애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관심이 있었다 해도, 그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들은 사사로운 자리에서 심심풀이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초대교인들이 박해를 무릅쓰고 전도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안에 가장 의미있고 핵심적인 이야기들만을 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30년 동안 사셨던 이야기들은 그들의 신앙적인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해지지도 않았고,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긴장감이 서서히 누그러들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부를 누리기도 하고 권력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시간도 생기고, 돈도 생기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동시에 신앙적인 열기도 식어지고, 믿음의 열정도 식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생애에 대한 호기심은 이런 상황에서 고개를 들었을 것입니다. 공생에 동안에 하신 말씀과 행적을 연구하며 그분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행함으로 제자답게 살아가는 일에도 시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유있는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호기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고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호기심을 채움으로 이득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미 죽은지 100년도 넘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을 빌어 복음서를 써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물론, 꽤 진지한 복음서도 있습니다. <도마복음서>같은 경우에는 비록 이단적인 사상으로 물들어 있기는 하지만 꽤 진지한 사람에 의해 쓰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경 복음서들은 댄 브라운의 이 소설을 쓴 것과 비슷한 의도로 후대에 창작된 것들입니다.

 

6.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하나 발견합니다. 지금 불고 있는 이 ‘다빈치 코드 신드롬’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헛된 호기심으로 이끌어 신앙을 타락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믿음은 이단적인 경향으로 물들었을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 있어 아주 부실합니다. 그들은 진리보다는 소문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빈치 코드 신드롬’ 은 우리를 그같이 타락한 믿음으로 오도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뒤집어 보면, 우리가 그런 헛된 호기심에 이끌리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안일하고 편한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정말, 미국은 너무 편하고 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자극적인 것이 없이는 삶이 권태로와 살기 어렵습니다. 그런 욕구가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영화로, 책으로, 연극으로 그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댄 브라운은 “당신의 소설이 이렇게 인기를 누릴 줄 예상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혀 뜻밖의 일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이 소설이 이토록 기록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겠지만, 저는 두 가지의 이유를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동안 잘 못 행동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고 헐뜯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잘못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깊이 뉘우쳐야 할 대목입니다. 두 번째의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편해지고 안일해져서 진리를 찾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헛된 호기심만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교 시리즈를 들으면서 혹시나 “아니, 하루 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세상에 ‘다빈치 코드 연속 설교’가 무슨 말이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호기심이나 채우는 헛된 이야기에 이 귀한 시간을 보낼 여가가 없습니다. 오늘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만일 제가 이 헛된 이야기를 즐기자고 이런 시리즈 설교를 마련했다면, 저도 타락했다는 증거요, 목사로서 여러분을 오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도, 제가 이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을 그것을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에 덮어 씌우고 있는 것을 벗기고 진실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은 지금 이 시기에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에 마음을 주지 마십시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을 탄생시킨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할 수 있는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안에 거하여 참된 제자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진리를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이런 헛되고 해로운 이야기에 시간을 쏟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에 유익한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단단히 지킵시다. 허망한 것, 부정한 것, 악한 것, 거짓된 것, 추한 것, 야한 것, 어두운 것?이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참된 것, 깨끗한 것, 선한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 밝은 것에 두십시다. 세상에 가장 참되고 깨끗하고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유익하고 밝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을 거기에 묶어 두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온통 그렇게 변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그렇게 변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표정과 말과 행동까지도 온통 그렇게 변하도록 매일 정진해 가십시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부름입니다.

 

오 주님,
저희 마음을 참된 주인이신 주님께 바칩니다.
사로잡아 주소서.
결박하여 주소서.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저희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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