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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7: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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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지혜로운 삶
전 7: 1- 29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자원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공급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소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음식을 공급받아야 하고 매일 물을 마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충족해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황폐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생은 공급의 문제입니다.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 인생은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공급이 원활해지면 인생은 풍요로워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자원만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위대한 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적 자원, 인적 자원, 재정적 자원, 그리고 영적 자원을 동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업을 성취하는 능력은 결국 다양한 자원을 동원하는 능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활용해야 할 가장 소중한 자원은 하나님의 자원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을 활용할 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자원을 보고 목표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원을 보고 목표를 설정합니다. 위대한 일을 성취하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쳐 준 하나님의 자원 중에 가장 소중한 자원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히11:3). 말씀은 지식과 지혜를 줍니다. 말씀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성령의 검입니다(엡6:17).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는 천국열쇠입니다(마16:19).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기도로 천국의 보화가 임하고 이 땅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릴 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의 손에 들려진 물매 돌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골리앗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주셨고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요14:13).
넷째, 성령님이 가장 소중한 자원이 되십니다. 성령님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십니다(사11:2). 성령님 안에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부디 성령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자원을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본문 2, 4절을 보겠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2)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4)
얼마 전에 미국의 마리 겔트먼씨는 친지와 친구 1백여 명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미리 자신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살아있을 때 자신의 장례식을 치러볼 정도로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남은 시간을 좀 더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12절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유한한 인생인만큼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겐 영혼이 있습니다. 결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모두 부활할 때 천국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영원히 수치당하며 형벌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잘 심어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도하여 영혼구원에 힘쓸 때 영원히 빛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
본 절에서 잔치집은 인생의 즐거움과 각종 쾌락이 넘치는 곳을, 그리고 초상집은 그와 반대로 인간의 본질적인 유한성과 연약함을 깨닫고 근심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곳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왜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교훈하고 있을까요?
첫째, 예비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잔치집에 가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래 부르고 노는 데만 마음을 두지만 초상집에 가는 사람은 슬프고 송장 냄새나는 인생의 죽음이란 것이 이렇구나 하는 죽음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잔치집에 가는 마음은 쾌락주의요 현실주의자의 마음이나 초상집에 가는 마음은 인생의 끝날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며 예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일의 끝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긴 안목을 가진 사람이요,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혜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살아 있을 때 죽음의 날을 미리 생각하고 예비하는 자입니다. 평안할 때 환난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건강할 때 병드는 날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평화로울 때 전쟁을 대비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지금 평화롭다고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초상집에 가 있는 것처럼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조심하는 생활을 해야 될 때인 줄 압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미리 초상집에 가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예비하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보호해 주는 것이지 음란 방탕하고 죄악을 범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는 어쩔 수 없이 비극의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쾌락과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람은 미구에 영원한 슬픔과 고통의 날을 보내게 될 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에는 잔치를 즐기다가 재난과 비극을 만난 기사가 많이 있습니다. 바벨론 나라의 벨사살 왕은 1,000여명의 귀빈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배설하고 금은 명기에다 술을 부어 마시고 고급 산해진미를 먹다가 그날 밤 메데와 바사군이 쳐들어 와서 대리석 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음을 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또 욥의 자녀들은 맏형의 집에서 잔치하며 먹고 마시다가 태풍이 몰아쳐 집이 무너져서 몰살을 당했습니다. 물론 기뻐할 때 가서는 기뻐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더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쾌락주의를 삼가하고 조심하고 근엄한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는 비관주의 염세주의(Pessimism)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고 조심하고 삼가고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모스 6장 3-7절부터 보면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 한 자리로 가까와지게 하고 상아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양과 우리에게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 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조심하며 초상집에 마음을 두는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스바냐 2장 1-2절을 보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러할지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하여 예비하는 자는 지혜있는 자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은 어느 청지기가 재산을 허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 청지기에게 사무를 정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이 청지기는 내가 청지기를 그만 두면 무얼 먹고 사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하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옳지 내가 아직 청지기로 있을 때 인심이나 써 두자. 그러면 그들이 내가 관리인의 자리에서 떨어질 때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영접해 주겠지 하고는 빚진 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100만원은 50만원으로 80가마는 50 가마로 다 탕감해서 보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주인은 미래를 위해서 예비하는 청지기를 보고 지혜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주인의 재산을 축낸 것을 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인생의 청지기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과 시간과 생명을 맡겨 주시는 동안 인생의 사표를 내기 전에 내세와 영생을 위하여 써 두라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쓰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쓰면 그것이 내 것이 되고 내게 축복과 상급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동안 남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쓸 때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내 생명도 자녀도 다 내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생명이 있는 동안 물질이 있는 동안 시간이 있는 동안에 가치있고 보람있는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해 두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날 물질을 거두어 가시는 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6장 8절에 보면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된 진리가 아니고 구원의 도리가 아닌 불교를 믿는 사람도 30억 원을 불교를 위해 바치는데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를 아는 빛의 아들들은 이런 일을 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은 죽음의 날을 예비하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인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죽음이 출생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생은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의 시작이지만 죽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잘 죽어야 복 있는 자이며 죽음을 예비하는 자가 참으로 지혜있는 자인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보이는 육체의 생명은 100년 미만의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다시 보면 청지기의 비유 다음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는 육체로 살 동안에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호화롭게 살았으나 천국과 지옥의 영원한 세상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참으로 죽은 후의 세상을 몰랐던 우매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비록 남의 집 문턱에 엎드려 다 부스러기를 얻어 먹는 거지 생활을 했으나 영생을 위하여 죽음을 준비한 지혜로운 자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내세의 영생복락의 준비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고로 잠깐 동안의 육신의 삶에만 얽매여서 영생을 잊어버리고 살지 말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모시고 신앙 생활을 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요, 이렇게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일의 끝을 생각하고 사는 자는 지혜있는 자입니다.
셋째, 초상집에서는 나도 언젠가는 결국 죽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상집에 가서 자신도 언젠가는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대열에 끼이고 말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됨으로써 제한된 자신의 삶이 가지는 궁극적인 의미와 그러한 제한된 삶 속에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고귀한 수분 3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땀과 눈물과 피입니다. 그런데 이 초상집에는 고귀한 수분인 땀과 눈물이 많이 있습니다. 시체를 다룰 때 수고의 땀을 비오듯 흘리며 애통의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울어야 할 곳에서 울지 않으면 웃어야 할 곳에서 영원히 우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애통해야 할 때 애통하지 않으면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수분이 없으면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수분이 없으면 아름다운 꽃도 필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위하여 땀을 적게 흘리면 피를 많이 흘린다고 합니다. 여인이 어린 생명을 낳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립니까? 일할 때 땀을 흘리면 가난이 물러갑니다. 찬송할 때 땀을 흘리면 기쁨이 옵니다. 기도할 때 땀을 흘리면 능력을 받습니다. 교회도 땀과 눈물이 있는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눈물과 땀으로 기도하지 않는 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노래 부르고 흥겹게 노는 잔치집에 가 있지는 않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쾌락과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지금의 평안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좀 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우리는 초상집에 마음을 두는 지혜있는 자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4:5)
본문 11, 12절을 읽겠습니다.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옛날에 작지만 평화로운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이웃 나라의 왕 때문에 이 평화스러운 나라에 괴로움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저것 시비를 걸어오는 것입니다. 평화스러운 나라의 왕은 고심 끝에 젊고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신을 보고 이웃 나라의 왕은 몹시 언짢아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에는 그다지도 인재가 없단 말이오? 수염도 나지 않은 사람을 내게 보내다니..." 젊은 사신은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수염의 길이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신다는 것을 저희 왕께서 미리 아셨다면 아마도 저 대신 염소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웃 나라의 왕은 다시는 그 나라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이와 같은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구하지 않은 많은 것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부귀와 행복의 근원이 지혜로부터 시작됨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제일 좋은 것으로서 우리를 유익되게 하며 생명까지 지켜준다고 전도자는 고백했습니다. 혹시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풍부히 주시며 여러분 개개인 모두가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지혜가 없을 때 꾸짖지 아니하시고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참 지혜를 얻으므로 승리하는 삶을 삽시다.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도서 3장 4절에도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형통한 날도 있고 곤고한 날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병행합니다. 그런데 형통할 때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어렵지 아니합니다. 문제는 곤고한 날, 환난의 날입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생로병사(生老炳死)의 사고(四苦)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는 것이 고통이요 늙는 것 이 고통이요 병나는 것이 고통이요 죽는 것이 고통입니다. 환난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 귀천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고 환난의 날은 예고 없이 갑자기 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병은 눈썹에서부터 떨어진다’ 고 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미신이지 기독교의 진리는 아닙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환난을 당합니다. 아마 예수 믿어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을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환난을 당합니다. 아마 예수 믿어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을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 어떻습니까! 모든 환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 성경의 교훈은 그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세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6장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름없이 환난을 당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병이 나서 입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사업에 실패해서 고생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사랑하는 식구를 갑자기 잃고 슬퍼합니다. 전에 요셉같은 청년을 보세요. 그는 본래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고이 자랐습니다.
부모의 많은 총애를 받으면서 커 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환난의 날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몸으로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몸으로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유혹을 잘 이겼으나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고생할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청년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아보려고 힘쓴 사람입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도 환난을 당합니다.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욥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욥으로 말하면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면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자, 이만큼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신앙을 가진 욥에게 뜻하지 않은 곤고한 날이 닥쳐왔습니다. 욥의 그 많던 소유가 스바 사람에게 빼앗기게 되고 남은 것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다 살라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대아 사람이 달려들어 욥의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재산의 피해를 보게 됐다고 보고가 채 끝나기 전에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차리고 같이 화목하게 즐기던 십 남매의 자녀가 거친 들에서 태풍이 와서 집에 모퉁이를 쳐서 그 집에 깔려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욥기에 기록된 말씀에서 욥의 자녀 십남매는 매우 사이가 좋은 화목하는 형제 자매였습니다. 아들들이 생일이 되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형제들과 누이 셋을 청해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욥은 그런 때는 특히 하나 하나의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 수대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왜요? 혹시 그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바로 깨끗이 살아보려고 애쓰던 하나님의 사람 욥도 곤고한 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닙니다.
어느 민족 국가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가서 요셉이 사는 날 동안은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요셉의 은공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즉위한 후 갑자기 예고 없이 곤고한 날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에 잡혀가서 7년동안 포로로서 핍박을 받을 때에도 환난의 날은 예고 없이 임하게 되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닙니다. 우리 한국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환난의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고구려 때 수양제가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침노해 온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난의 날이었 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가 침략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조 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환난의 날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36년간이란 긴 세월을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1945년 8월 광복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38선이 생겼고 공산당이 북한을 침략해서 아직도 우리 동포 1천 6백만이 북한 철의 장막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곤고한 날입니다. 그뿐입니까? 그 동안 6.25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그 후에도 우리 남한만 하더라도 4.19학생 혁명이 생기고 여러 가지 곤고한 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물론 남한 땅 대한민국은 그래도 비교적 이런 자유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먼 앞날을 내다볼 때 38선으로 두 동강이가 나서 있는 이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사실 이것은 이 민족의 곤고한 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국가 민족적으로 곤고한 일을 당할 때 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안할 일이 있습니다. 가령 곤고한 날에 불평 불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본래 성품이 무엇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지마는 무엇이 좀 잘되지 않는 것 같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대개가 불평하고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나 사회를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곤고한 날에 잘못하면 삶의 의욕을 잃어버 리게 되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을 이탈하려고 합니다. 아주 절망 상태에 빠집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이처럼 세상을 비관하여서 이탈하려는 데서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또는, 곤고한 날에 반항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겐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아니하고 그저 될대로 되라고 내맡겨두는 태도, 포기 내지 반항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사는 길이 아니고 오히려 멸망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퍽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극적인 말씀이라고 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곤고한 일을 당하고 그런 날을 만나기 마련인데 이런 때에 불평 불만하고 낙심하거나 자포자기 한다든지 반항을 한다고 하면 솟아날 길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더 솟아나올 수 없는 깊은 구렁으로 더 들어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원치 않는 불행을 사실대로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서 기자는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한한 실망을 무한한 희망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숙명론자들이 그 숙명을 비통하게 맞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는 참으로 나의 병이라 내가 담당하리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곤고한 날이 이를 때 조금이라도 도피하거나 잊어버리려 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고 내가 이 고통을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가 주어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세요.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어떤 귀신들린 여자를 불쌍해서 고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점쳐서 수입을 갖던 두목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끌고 관원에게 갖고 가서 무고해서 많은 매를 나중에는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이 곤고한 날에 억울하고 분한 생각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 날 밤이 깊을 때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때 뜻밖에 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그날 밤에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그 온 집에 구원을 얻게 되고 빌립보에 훌륭한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그의 전 생애가 그랬습니다. 그는 온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 이었지만 그 뜻대로 되지 아니하고 오랜 세월을 감옥 안에서 지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 에베소에, 골로새에, 디모데에게, 디도에게,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들을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없어서 안될 요긴한 불후의 저서가 되었고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창조적인 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 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8)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곤고한 날이 우리에게 임한다 하더라도 그날이 절대로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곤고한 날을 당할 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 하고 말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병 중에서 곤고한 날을 당하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왜 이런 어려운 병 을 주실까? 내가 생각하고 꿈꾸던 대로 안되어 곤고한 날을 당하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내 꿈을 왜 안 이뤄 주실까? 경영하던 사업이 큰 실패를 보아 곤고한 날을 만났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실패를 통해 서 내게 무슨 유익을 주시려는가? 사랑하던 분을 멀리 보내는 곤고한 날이 닥쳤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실패를 통해 서 내게 무슨 유익을 주시려는가?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곤고한 날이 임하는데 그때 걱정하라, 슬퍼하라, 염려하라, 생을 포기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적극적인 생활 태도입니까? 이런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전에 싱거(Singer)라는 사람은 실직하고 부인의 삯바느질에 생활을 의존하고 있었는데 밤늦도 록 손을 바느질하는 것을 보고서 내가 저 아내를 어떻게 도울 수 없을까? 깊이 생각하는 중에 나중에 연구해 낸 것이 재봉틀(Singer)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곤고한 날에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였습니다. 부른다고 하는 말은 찾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큰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중병에 걸려 고생할 때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환난의 날에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불러야 그를 만나고 살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곤고한 날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느혜미야가, 다니엘이, 에스겔이 사무엘이, 에스더가 백성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의 청년 사사로서 자기의 백성을 인도할 때 블레셋 원수 나라에서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겁이 나서 그런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미스바의 모든 사람을 모아 놓고 어린 양으로 하나님이 앞에 번제를 드리며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큰 돌풍우가 일어나게 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대오가 혼란하게 되었고 이 기회를 타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타나서 습격할 때에 이 블레셋 사람들이 쫓겨서 멀리 국경 밖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거기에다 에벤에셀 이라는 돌비석을 세웠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의 날에 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적은 옛 날에만 있은 것은 아닙니다. 20세기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의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이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곤고한 날이 임했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어 려움을 주실까? 환난의 날이 임하셨습니까?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하세요.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의 역사를 잘 아십니다. 그는 큰 환난의 날에 산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불탈 때 자기 집도 불타고 부모도 다 피살당했습니다. 이 외로움 젊은이는 외국으로 멀리 잡혀 갔습니다. 외국 왕궁에서 살 수밖에 없던 다니엘이야말로 환난의 날에 살던 사람입니다.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고 낙심하려면 얼마든지 낙심할 수도 있고 악하게 되려면 얼마든지 악하게 될 수 있는 환경에 있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 다니엘은 환난의 날에 오직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외국 궁중에서 사는 몸이지만 금주를 하고, 우상의 제물로 쓴 고기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와 같은 청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았습니까? 외국 궁중에서 살았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도 다니엘과 같은 청년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으세요. 그러면 반드시 건져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당하는 환난이 변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주님이 약속하신 보물인 지혜를 찾아 얻게 하옵소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공급받아 나의 생각이 바르고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더불어 나로 하여금 감정을 잘 통제하고 의지는 적극적으로 활동적이게 하사 주님이 주신 지혜를 잘 활용하게 하옵소서.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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