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
성경본문 : | |
---|---|
구분 : |
[들꽃편지 2000.18 19호]
세례 요한은 왜 광야로 갔을까? 세례 요한은 어찌하여 만인이 들어야 할 회개의 메시지를 예루살렘 성의 번화가에서 외치지 아니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 물이 없고 건조한 땅, 광야에서 외쳤던가? 사람들더러 들으라고 외치는 것인가, 아니면 듣지 말라고 외치는 것인가? 요사이 기준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의 전도방법은 효과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으면 무엇에 쓸 것인가? 정작 그 내용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떠들면 도대체 어쩌자는 얘기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광야에서 외치고 다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요한이 광야로 간 까닭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외치는 자의 소리(사40:3, 요1:23)’임을 알았고 그리하여‘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순종했을을 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어찌하여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아무도 살지 않는 건조한 땅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도록 명령하셨을까요?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무엇을 외쳤는가?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회개가 무엇인가? '광야에서의 삶'이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이 입으로 외친 회개의 선포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이었다면, 그의 광야에서의 삶은 곧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회개 역시 관념과 머리 속에서 만의 회개로는 의미가 없고,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터전이 광야로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는 여전히 예루살렘 도성이면서, 머리 속으로 회개하고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고 회개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회개는 머리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움직여서 우리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 예루살렘 도성에서 광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사40:3)’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마3:5)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광야로 꾸역꾸역 몰려왔습니다. 회개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라면 구태여 몸이 광야로 나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요사이는 어떨지 모르지만 세례요한이 살던 시대엔, 어쨋든 회개를 위해서 광야로 나아가, 세례요한을 만나야 했던 것입니다.
광야란 어떤 땅인가?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신8:15)’에서 알 수 있듯이,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회개이며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광야로 나가지 않는 회개란 착각이며 관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이는 살 수 없고 마실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이 세상. 뿐만 아니라 권세가 있어야 하고 명예가 있어야만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권세도 영광도 없는 광야의 삶으로 자신을 옮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계속하여 말씀하는 것처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6-7)’를 ‘믿는’ 사람들만 광야로 나아갈 수 있고, 사막에서 주의 길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과연 풀과 같은가? 그 모든 영광은 과연 풀의 꽃 같은 것인가? 인생의 강건함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한낱 풀꽃에다 비긴단 말인가?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인생이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풀 같은 인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며, 꽃 같은 인생의 영광을 향하여 애쓰고 수고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은 거의 전부가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인생사에 매달려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풀과 꽃을 버리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풀과 꽃을 버림이 곧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다림이며 구함입니다. 광야는 풀이 자라지 않고 꽃을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풀을 구하고 꽃을 얻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풀을 버리고 꽃을 버리라는 외침이며, 그 자신이 광야생활을 하는 것은 자신이 외치는 내용에 대한 보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생활을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말씀에 대한 모형이며 그림자입니다. 그들이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다는 얘기는 아직도 풀과 같은 인생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는 뜻이며,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을 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었던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가나안)에 대한 기대보다는 풀의 꽃 같은 육신의 영광(애굽)을 더 좋아 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정말 회개하고 세례받은 사람들은 애굽적이며 육신적인,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영광을 인하여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는 커녕 대부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풀과 그 꽃을 남보다 더 많이 얻고자 하지 않는가요? 광야생활을 통하여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진 사람은 더 이상 풀과 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광야의 삶을 산 사람이며 회개한 사람이며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인데, 풀인 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더러 광야와 사막으로 나오라는 얘기는, 이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며,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서 죽여 없애겠다는 무지막지한 선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가? 꽃과 같은 인생의 영광도 남들보다 많이 아니 남들만큼은 누리고, 영원토록 있는 하나님의 영광도 같이 누릴 수는 없는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요삼1:2)’ 같은 말씀도 성경말씀인데… ??? (아아, 듣기 좋은 예화나 감동적인 언변으로 성도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죽은 설교를 하는 자들아 들으라!)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야만 했던 이유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 가나안에 가자니 광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빠져 나와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마3:2)’고 외친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빠져나가 천국으로 옮겨 가야하는데, 이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천국을 향하여 매진하는 삶이 주의 길을 준비함이며,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함입니다. 이 일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이르기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천국을 침노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 풀과 꽃에 연연하던 우리의 삶이 광야에서 죽어 없어지는 것. 이런 것들이 회개의 참 모습이며 이러한 회개는 요한의 물 세례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요한의 물 세례 역시 단순히 물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며(물 몇 방울 찍어 바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도바울이 설명한대로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는 것(고전 10:1)입니다. 다시 말하면 홍해를 건너는(그 다음부터의 삶이 광야이다) 영적인 사건이 물 세례의 실체이지 물에 들어간다고 홍해를 건넌 것은 아니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광야'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은 '들판'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데 아쉽습니다. 제가 교회의 이름을 왜 '들꽃피는교회'로 했는지 오늘 본문 말씀가운데 잘 설명이 되어 있어서 그냥 가지 못하고 이렇게 글이 길어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왜 광야로 갔을까? 세례 요한은 어찌하여 만인이 들어야 할 회개의 메시지를 예루살렘 성의 번화가에서 외치지 아니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 물이 없고 건조한 땅, 광야에서 외쳤던가? 사람들더러 들으라고 외치는 것인가, 아니면 듣지 말라고 외치는 것인가? 요사이 기준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의 전도방법은 효과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으면 무엇에 쓸 것인가? 정작 그 내용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떠들면 도대체 어쩌자는 얘기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광야에서 외치고 다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요한이 광야로 간 까닭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외치는 자의 소리(사40:3, 요1:23)’임을 알았고 그리하여‘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순종했을을 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어찌하여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아무도 살지 않는 건조한 땅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도록 명령하셨을까요?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무엇을 외쳤는가?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회개가 무엇인가? '광야에서의 삶'이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이 입으로 외친 회개의 선포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이었다면, 그의 광야에서의 삶은 곧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회개 역시 관념과 머리 속에서 만의 회개로는 의미가 없고,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터전이 광야로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는 여전히 예루살렘 도성이면서, 머리 속으로 회개하고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고 회개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회개는 머리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움직여서 우리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 예루살렘 도성에서 광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사40:3)’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마3:5)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광야로 꾸역꾸역 몰려왔습니다. 회개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라면 구태여 몸이 광야로 나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요사이는 어떨지 모르지만 세례요한이 살던 시대엔, 어쨋든 회개를 위해서 광야로 나아가, 세례요한을 만나야 했던 것입니다.
광야란 어떤 땅인가?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신8:15)’에서 알 수 있듯이,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회개이며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광야로 나가지 않는 회개란 착각이며 관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이는 살 수 없고 마실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이 세상. 뿐만 아니라 권세가 있어야 하고 명예가 있어야만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권세도 영광도 없는 광야의 삶으로 자신을 옮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계속하여 말씀하는 것처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6-7)’를 ‘믿는’ 사람들만 광야로 나아갈 수 있고, 사막에서 주의 길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과연 풀과 같은가? 그 모든 영광은 과연 풀의 꽃 같은 것인가? 인생의 강건함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한낱 풀꽃에다 비긴단 말인가?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인생이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풀 같은 인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며, 꽃 같은 인생의 영광을 향하여 애쓰고 수고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은 거의 전부가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인생사에 매달려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풀과 꽃을 버리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풀과 꽃을 버림이 곧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다림이며 구함입니다. 광야는 풀이 자라지 않고 꽃을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풀을 구하고 꽃을 얻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풀을 버리고 꽃을 버리라는 외침이며, 그 자신이 광야생활을 하는 것은 자신이 외치는 내용에 대한 보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생활을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말씀에 대한 모형이며 그림자입니다. 그들이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다는 얘기는 아직도 풀과 같은 인생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는 뜻이며,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을 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었던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가나안)에 대한 기대보다는 풀의 꽃 같은 육신의 영광(애굽)을 더 좋아 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정말 회개하고 세례받은 사람들은 애굽적이며 육신적인,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영광을 인하여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는 커녕 대부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풀과 그 꽃을 남보다 더 많이 얻고자 하지 않는가요? 광야생활을 통하여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진 사람은 더 이상 풀과 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광야의 삶을 산 사람이며 회개한 사람이며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인데, 풀인 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더러 광야와 사막으로 나오라는 얘기는, 이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며,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서 죽여 없애겠다는 무지막지한 선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가? 꽃과 같은 인생의 영광도 남들보다 많이 아니 남들만큼은 누리고, 영원토록 있는 하나님의 영광도 같이 누릴 수는 없는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요삼1:2)’ 같은 말씀도 성경말씀인데… ??? (아아, 듣기 좋은 예화나 감동적인 언변으로 성도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죽은 설교를 하는 자들아 들으라!)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야만 했던 이유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 가나안에 가자니 광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빠져 나와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마3:2)’고 외친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빠져나가 천국으로 옮겨 가야하는데, 이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천국을 향하여 매진하는 삶이 주의 길을 준비함이며,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함입니다. 이 일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이르기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천국을 침노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 풀과 꽃에 연연하던 우리의 삶이 광야에서 죽어 없어지는 것. 이런 것들이 회개의 참 모습이며 이러한 회개는 요한의 물 세례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요한의 물 세례 역시 단순히 물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며(물 몇 방울 찍어 바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도바울이 설명한대로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는 것(고전 10:1)입니다. 다시 말하면 홍해를 건너는(그 다음부터의 삶이 광야이다) 영적인 사건이 물 세례의 실체이지 물에 들어간다고 홍해를 건넌 것은 아니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광야'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은 '들판'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데 아쉽습니다. 제가 교회의 이름을 왜 '들꽃피는교회'로 했는지 오늘 본문 말씀가운데 잘 설명이 되어 있어서 그냥 가지 못하고 이렇게 글이 길어졌습니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