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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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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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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13:53;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54;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말씀하실 때 무리들에게 환영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태복음 11장에서부터 반대와 배척을 받으시기 시작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 속에서 말씀을 전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의 최대 고민은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은 성도들입니다. 왜 말씀이 성도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까? 성도들은 목회자의 허물 때문이라 하고 목회자는 성도들의 허물을 핑계삼습니다. 이렇듯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피차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조심스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이 진리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희에게는 아니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왕따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목적은 '저희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한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먹을것과 입을 것 혹은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나 그 누구의 위로를 받기 위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잘 입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만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난하고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영적으로 살 때, 인간의 진정한 보람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지혜롭고 너무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해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던 하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죄, 구원, 성경, 이혼의 문제, 살인의 문제, 봉사, 안식일, 율법, 사랑, 질투, 위선, 기도, 금식등등등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순수복음을 듣고 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왕따를 당하는 것은 꼭 잘못해서만은 아닙니다. 잘해도 배척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감탄하고 겸손하게 영광을 돌렸다면 얼마나 은혜로왔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성도와 성도간에 목회자와 목회자간에, 교회와 교회간에 이런 일들이 많다는 것은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나보다 공부를 잘하거나 출세를 해서 돈을 잘 벌거나 목회를 잘하면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심지어는 비판하고 정되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같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꼭 단점만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칭찬 받을 일도 합니다. 그런데 꼭 실수한 것만 말하고 기억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나사렛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왕따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어렸을 때같이 뒹굴고 놀았던 한 동네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웬일인가" 잘 안다는 그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겉모습이었지 그 깊은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입관과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 사람이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어느 스승님에게 공부를 했고, 어느 교단이며, 어느 학파라는 것과, 무슨 무슨 감투를 썼고, 무슨 학위를 받았고 하는 것들에 사실 너무나 민감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것은 껍데기에 불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며 얼마나 무릎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신실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은 껍데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삶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지 않으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예수님을 잘 믿는 흉내를 내도 나사렛 사람들 처럼 예수님을 왕따시키면 역시 예수님의 능력은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왕따시키지 마세요. (*)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말씀하실 때 무리들에게 환영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태복음 11장에서부터 반대와 배척을 받으시기 시작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 속에서 말씀을 전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의 최대 고민은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은 성도들입니다. 왜 말씀이 성도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까? 성도들은 목회자의 허물 때문이라 하고 목회자는 성도들의 허물을 핑계삼습니다. 이렇듯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피차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조심스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이 진리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희에게는 아니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왕따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목적은 '저희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한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먹을것과 입을 것 혹은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나 그 누구의 위로를 받기 위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잘 입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만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난하고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영적으로 살 때, 인간의 진정한 보람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지혜롭고 너무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해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던 하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죄, 구원, 성경, 이혼의 문제, 살인의 문제, 봉사, 안식일, 율법, 사랑, 질투, 위선, 기도, 금식등등등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순수복음을 듣고 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왕따를 당하는 것은 꼭 잘못해서만은 아닙니다. 잘해도 배척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감탄하고 겸손하게 영광을 돌렸다면 얼마나 은혜로왔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성도와 성도간에 목회자와 목회자간에, 교회와 교회간에 이런 일들이 많다는 것은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나보다 공부를 잘하거나 출세를 해서 돈을 잘 벌거나 목회를 잘하면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심지어는 비판하고 정되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같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꼭 단점만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칭찬 받을 일도 합니다. 그런데 꼭 실수한 것만 말하고 기억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나사렛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왕따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어렸을 때같이 뒹굴고 놀았던 한 동네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웬일인가" 잘 안다는 그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겉모습이었지 그 깊은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입관과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 사람이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어느 스승님에게 공부를 했고, 어느 교단이며, 어느 학파라는 것과, 무슨 무슨 감투를 썼고, 무슨 학위를 받았고 하는 것들에 사실 너무나 민감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것은 껍데기에 불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며 얼마나 무릎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신실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은 껍데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삶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지 않으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예수님을 잘 믿는 흉내를 내도 나사렛 사람들 처럼 예수님을 왕따시키면 역시 예수님의 능력은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왕따시키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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