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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8: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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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인간의 지혜와 인생의 허무
본문: 전8: 1- 17
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2.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6.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9.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10.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실패가 인생의 끝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어진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현실을 바로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현실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물고기의 IQ는 0.3 이라고 합니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 바늘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 나가며 발버둥치는 것을 보면서도 입질을 합니다. 그것은 낚시꾼이 낚싯대를 쥐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또 그 일에 뛰어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모든 현실을 움직이고 계심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의 어른이 되라.’’고 권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 18- 20)
베드로가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베드로는 어부의 달인이요, 깊은 곳은 이미 실패한 장소이며, 새벽미명에는 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쯤은 상식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말합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리이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고 말씀에 일단 순종해봅니다. 그리고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습니다. 한 가지 교훈이 무엇입니까? 자기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고는 깊은 곳에서 고기를 잡는 경험을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일단 순종해봐야 누가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바로 이 과정 아닙니까? 인간의 지혜와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입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
독일 베를린의 막스 플랑크교육연구소가 15년 동안 1천명을 대상으로 나이와 지혜의 연관성을 연구했습니다. 연구소는 오랜 연구를 통해 지혜로운 사람들이 갖는 몇 가지 공통점을 밝혀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대부분 역경을 극복했거나 고난을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과 일찍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체험한 사람들이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보다 훨씬 지혜로웠습니다. 또한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지혜의 빛을 발합니다. 연구소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혜를 얻는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고집이 세고 괴퍅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지혜와 신용을 잃는다고 경고합니다. 성경도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3:13, 14, 잠16:16)
솔로몬이 지혜자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자를 가리켜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기 때문에 말을 해도 사리에 닿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사리에 닿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모하게 처신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은 이어서 지혜자에게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의 얼굴은 환하게 광채가 납니다. 예컨대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스데반 집사가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잠시 잠깐 후면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시고 자기를 품에 안으시며 위로해 주실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한 일을 맞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곤고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환경에서든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전 7:9에 기록된 대로 우매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이 급한 것입니다. 쉽게, 성급하게 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매한 사람은 아무래도 적은 일에도 쉽게 얼굴이 일그러지게 마련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주시되 후하게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얼굴이 지혜로운 자의 얼굴처럼 환하게 은혜롭게 광채로 빛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나운 표정은 짓지 마세요. 근심, 걱정, 어두운 그늘이 여러분의 얼굴에서 다 사라지고 언제나 은혜가 충만하고, 덕스럽고, 밝게 웃는 얼굴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전도자(솔로몬)는 2절 이하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왕이 옳지 못한,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인지 2∼9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모순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잘되고, 또 악인들은 잘못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은 오히려 형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순된 현실입니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이것에 대해 10∼15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이 차이입니다. 그러니 이 작은 머리로 어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지혜로운 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이것이 16∼17절 말씀에 나옵니다.
왕이 명령을 내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즘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국왕 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있습니다. 나라에 따라서 왕에게 많은 권세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나라는 왕이 그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는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가 신하의 목숨을 좌우하던 때였습니다. 우선 2절에서 솔로몬은 하나의 원리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것이 원리입니다.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을 받기에 앞서서, 왕과 백성 사이에 서로 언약을 맺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왕의 통치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했으면 마땅히 신하는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하가 생각하기에 불합리한, 뜻에 맞지 않는 명령을 왕이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아무리 자기 생각과 다른 명령을 왕이 내린다 할지라도 신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듣기 거북하다는 듯이 왕 앞에서 급히 물러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이 싫어하는 것, 왕에게 해가 되는 것 등을 꾀해서는 안됩니다. 신하가 왕을 배반하고 반역하는 것은 벌 받아 마땅합니다. 왜 그런 것을 해서는 안됩니까? 그 이유가 3절 하반부∼4절에 나옵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왕에게는 절대 권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부친이었던 다윗 왕이 나이 들어 늙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솔로몬의 이복형이었던 아도니야가 자의로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겠다고 계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도니야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즉시 달려가서 제단의 뿔을 꽉 잡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제단의 뿔을 잡기만 하면 그를 벌할 수 없었습니다. 아도니야가 제단의 뿔을 쥔 채 사람을 솔로몬에게 보냈습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네가 선하게 살면 너의 머리카락 하나도 상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 속에 악한 것이 보이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왕이 명령을 내렸으면 아도니야가 지혜롭게 처신을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도니야가 어리석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다윗 왕을 모시고 있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기에게 아내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아무리 그 여자가 아름답고 자기 마음에 들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왕의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것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솔로몬이 듣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직도 아도니야의 마음속에 왕위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복형이지만 가차 없이 처단했습니다.
이와 같이 왕의 손에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잘 지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이 비록 자기 귀에 듣기 거북하다 할지라도 왕 앞에서 급히 물러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왕을 배반하고 악한 것을 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안전합니다. 화를 당하지 않습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전도자는 왕이 가진 통치권을 비롯한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으로 인정하고 왕의 수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의 말에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는 구절은 왕권의 신성불가침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왕의 명령을 지켜야 안전합니다. 그런데 신하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기에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시기와 판단을 잘 분변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으로 처신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세 친구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3년 동안 내가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훈련을 받아라."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들의 몸을 더럽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왕이 하사하는 음식을 거부하면 왕명을 어기는 셈이 되니까 목숨이 위태롭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을 감독하는 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왕이 주는 포도주와 진미 대신에 채식과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해서 그 결과에 따라 감독자의 좋을 대로 처분하라고 했습니다. 3년 가운데서 열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감독자가 다니엘의 제안을 좋게 여기고 수락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자기가 대신 취하고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는 채식과 물을 주었습니다. 열흘 동안의 시험기간이 끝났습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다른 동료 소년들보다 윤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음식으로 자기들의 몸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때(시기)와 판단을 분변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때가 있음을 알고 그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자가 진정한 지혜자인 것입니다.
본문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사람은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하게 될 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옆 사람이 말해 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매한 사람이지요. 한번은 다윗 임금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주할 때였습니다. 길가에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온갖 독설을 퍼부으면서 다윗 임금을 저주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쫓아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만류했습니다.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을 때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시므이를 눈여겨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시므이를 불렀습니다. "너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선왕 다윗이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했기 때문에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제부터 너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 안에서만 살아라." 솔로몬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시므이가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러면 시므이가 왕의 명령을 귀담아 듣고 지혜롭게 처신해야지요. 그런데 시므이가 어떻게 했습니까? 3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시므이의 종 두 사람이 도망쳤습니다. 그때 시므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나귀에 안장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두 종을 쫓아가서 데리고 왔습니다. 자기가 왕의 명령을 어기고 예루살렘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거니까 괜찮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시므이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할 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합니다. 왕이 화를 내리기로 작정하면 그 화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미리미리 지혜롭게 처신을 해야지요. 일단 왕이 화를 내리기로 작정하면 그 화에서 벗어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8절에서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첫째로, "바람(생기)를 주장하여 바람(생기)을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지금 생기가 몸에서 떠나가려고 합니다. "생기야 떠나가지 말아라"고 하면서 생기를 손으로 잡는다고 잡힙니까?
둘째로,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살려주세요. 며칠만 살려주세요." 애원한다고 해서 통합니까?
셋째로,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여기서의 전쟁은 죽음과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사자를 물리치고 죽음을 모면할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넷째로,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우매한 사람이 왕을 대항해서 꾀한 악들이 그를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화를 당하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본문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이 땅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세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순복하는 사람들은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무시하면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될 때는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롬 13: 1∼2에서 그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위에 있는 모든 권세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 권세를 인정하고 권세에 순복해야 합니다.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컨대 부모의 권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보기에 부모가 온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실수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면 되겠습니까?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장로님 가운데 어떤 분이 여러분보다 나이가 더 어리고 또 배운 것도 없다고 가정해보십시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면 다야? 저 따위가 장로야?"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히 여러분이 하려고 합니까?
나라의 지도자든지, 교회의 지도자든지, 가정의 어른이든지 간에 그 권위를 인정하고 웃어른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입니다.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고,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모순된 현실을 볼 때 어떻게 처신해야 지혜로운 것입니까? 10∼1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악인이 죽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성대하게 장사가 치러졌습니다. 좋은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반대로 선을 행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니면서 예배드리던 거룩한 곳을 떠나는 순간, 그가 살던 성읍을 떠나는 순간 그는 사람들의 잊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습니다. 초라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됩니다. 얼마나 부조리합니까? 모순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만 그와 같이 모순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도 얼마든지 모순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악한 일을 해도 벌 받는 일이 속히 일어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겁 없이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끝내 멸망하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데도 죽지 않고, 벌 받지 않고 오히려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요."
솔로몬이 지금까지 알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자는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불변하는 신본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자가 궁극적인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악한 사람이 잘 안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본 절에서는 종국적으로 악인은 자신의 악행에 합당한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11: 7- 10)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라는 책에는 바다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바다에서 많은 날들을 기다리다가 천신만고 끝에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그 물고기를 배에 매달고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건져보니 오직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상어떼들이 습격하여 물고기를 다 뜯어먹어 버렸던 것입니다. 노인은 심한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헛된 목표를 정하여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허무한 삶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가 일생을 바쳐 헌신한 일의 결과는 앙상한 물고기의 뼈와 같이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더러 허무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목숨을 걸고 직장과 사업터에서 생존 경쟁을 치르지만 그 결과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이런 헛된 세상적 목표를 향해 줄달음질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자기 뜻과 자신의 목적대로 사는 인생은 결국 노인처럼 후회와 실망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12:21)
오히려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합니다. 이런 모순된 현실을 보면서 여러분은 결론을 어떻게 내리시겠습니까? 잠시 이 땅에서 잘살기 위해서 악을 행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의미가 없습니다. 잠시 잠깐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 영원한 형벌을 자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11절의 말씀처럼 악한 일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담대하게 악을 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왜 이 땅에 심판이 속히 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생들로 하여금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도 오래 참고 계신 것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솔로몬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본문 15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희락은 기쁠 희(喜), 즐길 락(樂)자입니다.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통하십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세요. 곤고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그 가운데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시고, 마음의 평강을 빼앗기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잠시 잠깐 뒤에 처형당할 자리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 안에서 기뻐했던 것처럼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등산해보셨지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울퉁불퉁한 길을 올라갑니다. 쉽지 않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픕니다. 그러나 마음은 즐겁습니다. 이따금씩 배낭에 준비해 간 오이를 꺼내서 씹어보세요. 얼마나 맛이 있습니까? 또 물통에 준비해 간 물 몇 모금을 마셔보세요. 얼마나 시원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을 이와 같이 소풍가는 심정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즐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를 이 세상에 잠시 소풍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 하반부에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우리의 여생이 짧을는지 길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남은 생애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우리의 수고하는 중에 이것, 곧 희락이 항상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수고의 낙을 누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참된 희락은 외적인 것, 환경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참된 희락은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충만히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주님 주시는 기쁨이 강물같이 흐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시는 참된 평강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넘쳐흐르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롭겠습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솔로몬이 마음을 다해서 깊이 탐구한 것이 그 다음에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로 탐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를 알고자 하며."
소위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탐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밤낮으로 애쓰면서 밤낮으로 탐구하는 사람들, 철학자들, 역사가, 과학자 등의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을 다해서 탐구해보았습니다.
세 번째로,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이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은 이 세 가지 탐구의 결과를 역순으로 하나씩 설명하였습니다. 먼저 세 번째 탐구했던 것에 대한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세 번째 탐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했습니다. 역사가, 철학자들이 하는 것을 탐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그 다음에 그가 첫 번째로 탐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16절에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였다’고 했습니다. 지혜자들이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친구가 되어 정답게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는 저녁이 되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얘, 하루살이야. 오늘은 이만 놀고 내일 다시 놀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하루살이는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얘, 메뚜기야. 내일이라는 게 뭔데?” 메뚜기는 열심히 내일에 대하여 설명하려 했습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캄캄한 밤이 지나고 나면 동쪽에서부터 밝은 빛이 나오고, 그 밝은 빛이 나오면 찬란한 아침이 있는 그 때가 내일이라는 거야.”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하루살이는 내일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메뚜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너의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돼. 너는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어. 너하고 다시는 안 놀아.”
하루살이가 화를 내며 가버리자 메뚜기는 “내일이란 틀림없이 있는데……”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내일의 천국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이 땅의 것에 애착을 갖지만 천국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 33)
솔로몬이 본 절에서 세 번이나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솔로몬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그만큼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슨 수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절대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서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인간이 얕은 꾀를 부리고 얕은 수작을 부리기 때문에 문제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르면서 살면 우리 인생은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지혜를 주시되 후히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신 자들을 공경하고 권위에 순복하고 그 권위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시기와 판단을 잘 분변해서 무슨 일에든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처신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영원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의 잠시 잠깐인 것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잃어버린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잠시 잠깐 후면 잡아먹힐 돼지의 운명을 부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무지함과 우리 인생의 한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은 모든 일과 사물에 대해서 깊이 궁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궁구”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을 깊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그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결국 삶이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인간들의 수고는 근본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이 범한 죄에 대한 형벌(창 3:17)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하여 아무런 대처 능력도 없습니다. 월등히 뛰어난 지혜를 소유했던 솔로몬 자신조차도 각종 방식으로 지혜를 알아보려 했으나 그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다”고 토로했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들에 대하여 지식은 연구자 자신의 어리석음과 한계점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해 줍니다. 지식과 지혜에 대한 탐구는 연구자 자신이 평생을 다 바친다 해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부여하신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의 뜻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가 없는 지식은 더할수록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기보다, 오히려 근심을 더하게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참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 기도: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나의 인간적인 한계와 무지함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오니, 제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을 따라 살게 하소서. 눈앞에 일과 육신의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 않게 하시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고 자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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