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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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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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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5:35 아직 말씀하실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시고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있었는데 그의 열두살 된 예쁜 딸이 아주 큰 병에 걸려 중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부탁을 드려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해변가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발 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중대한 문제를 만난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아와 <많이> 간구했습니다. (23절)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와 함께 그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하십니다. 야이로는 뛸 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이렇듯 수많은 무리가 추종하는 예수님이 자신의 말에 거절하지 않으시고 딸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함께 길을 가고 있다니요.
야이로는 이제 자기 딸의 병은 다 나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기쁘고 감사하였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그 길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소망이 넘치고 발에 힘이 넘쳐서 춤을 추는 듯 걸었습니다. 근심 걱정 염려가 다 무엇입니까! 이렇게 지금 주님과 함께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던 야이로 앞에 돌발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주님이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한 여인과 길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열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을 고쳐주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주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이 항상 평탄하니는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매우 실제적인 책입니다. 예수님과 동행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과 동행만 하면 궁극적으로 잘 됩니다. 그렇지만 그 궁극에 도달하기 까지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인생의 계곡을 지나고 삶의 굴곡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셨고 착실히 진행되는 것 같았던 일이 어느날 딱 멈추어섭니다. 또다시 막막해집니다. 주님의 응답이 의심이 가고 예수님께 많이 간구한 나 자신의 믿음이 시련을 받게 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순간입니다. 잠시 전 까지만 해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함께 대화하고 그의 말씀을 들은 것 같은데 오늘은 갑자기 전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소! 예수를 더 붙잡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나, 빨리 다 포기하고 죽은 딸을 위해 성대한 장례나 치룹시다. 지금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판국에 예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35절)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애처로운 내 딸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한데, 예수님은 그 절박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그 여인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입니다. 회당장의 마음은 착찹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낙심과, 혈루증 앓는 여인 때문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과, 그 여인에 대한 원망의 생각이 갑자기 한 순간에 마음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잘 가시던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는가? 왜 그러시는가?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사건은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한 불쌍한 여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 대한 사건은 6장 23절에서 시작되어 43절에서 끝나는 야이로 이야기의 중간에 들어있는 사건입니다. 35절에 '아직 말씀하실 때에' 라는 단어는 이 두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이로의 간구를 듣고 그의 딸을 고쳐주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보시고 아직 연단되지 못한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믿음에 대한 연단을 염두에 두신 듯 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가셔서 고쳐주신 것이 아닌 예수님의 '치밀한'계획을 보게 됩니다.
혈루증 여인이 자기의 수치스러운 병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더욱 여자라서 쉽지 않은 모든 당시의 관례까지도 무시하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그 간절함과 믿음을 회당장 야이로는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34절) 선언하는 그 감격적인 순간에 '딸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좋은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배워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넘칠 때, 바로 그 순간에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야이로가 흔들렸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내가 혈루증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방금 말한 것을 너도 들었지? 그러니 너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하라' 뭐 그런 말이 아니겠습니까?
왜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다가 때때로 가장 절박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걸음을 멈추십니까? 그 이유는 전에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과 꿈도 꾸지 못했던 커다란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죽은 딸이 살아났을 때의 기쁨과 그냥 앓고 있던 딸이 나음을 입었을 때의 기쁨 중 어느 것이 크겠습니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고 살리시는 주님을 더욱 믿고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을 그래서 저는 한껏 기대하는 부푼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들꽃편지229호>
환자를 치료하시는예수님 / 이요한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있었는데 그의 열두살 된 예쁜 딸이 아주 큰 병에 걸려 중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부탁을 드려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해변가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발 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중대한 문제를 만난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아와 <많이> 간구했습니다. (23절)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와 함께 그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하십니다. 야이로는 뛸 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이렇듯 수많은 무리가 추종하는 예수님이 자신의 말에 거절하지 않으시고 딸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함께 길을 가고 있다니요.
야이로는 이제 자기 딸의 병은 다 나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기쁘고 감사하였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그 길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소망이 넘치고 발에 힘이 넘쳐서 춤을 추는 듯 걸었습니다. 근심 걱정 염려가 다 무엇입니까! 이렇게 지금 주님과 함께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던 야이로 앞에 돌발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주님이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한 여인과 길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열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을 고쳐주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주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이 항상 평탄하니는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매우 실제적인 책입니다. 예수님과 동행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과 동행만 하면 궁극적으로 잘 됩니다. 그렇지만 그 궁극에 도달하기 까지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인생의 계곡을 지나고 삶의 굴곡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셨고 착실히 진행되는 것 같았던 일이 어느날 딱 멈추어섭니다. 또다시 막막해집니다. 주님의 응답이 의심이 가고 예수님께 많이 간구한 나 자신의 믿음이 시련을 받게 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순간입니다. 잠시 전 까지만 해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함께 대화하고 그의 말씀을 들은 것 같은데 오늘은 갑자기 전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소! 예수를 더 붙잡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나, 빨리 다 포기하고 죽은 딸을 위해 성대한 장례나 치룹시다. 지금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판국에 예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35절)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애처로운 내 딸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한데, 예수님은 그 절박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그 여인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입니다. 회당장의 마음은 착찹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낙심과, 혈루증 앓는 여인 때문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과, 그 여인에 대한 원망의 생각이 갑자기 한 순간에 마음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잘 가시던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는가? 왜 그러시는가?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사건은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한 불쌍한 여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 대한 사건은 6장 23절에서 시작되어 43절에서 끝나는 야이로 이야기의 중간에 들어있는 사건입니다. 35절에 '아직 말씀하실 때에' 라는 단어는 이 두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이로의 간구를 듣고 그의 딸을 고쳐주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보시고 아직 연단되지 못한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믿음에 대한 연단을 염두에 두신 듯 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가셔서 고쳐주신 것이 아닌 예수님의 '치밀한'계획을 보게 됩니다.
혈루증 여인이 자기의 수치스러운 병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더욱 여자라서 쉽지 않은 모든 당시의 관례까지도 무시하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그 간절함과 믿음을 회당장 야이로는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34절) 선언하는 그 감격적인 순간에 '딸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좋은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배워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넘칠 때, 바로 그 순간에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야이로가 흔들렸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내가 혈루증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방금 말한 것을 너도 들었지? 그러니 너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하라' 뭐 그런 말이 아니겠습니까?
왜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다가 때때로 가장 절박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걸음을 멈추십니까? 그 이유는 전에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과 꿈도 꾸지 못했던 커다란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죽은 딸이 살아났을 때의 기쁨과 그냥 앓고 있던 딸이 나음을 입었을 때의 기쁨 중 어느 것이 크겠습니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고 살리시는 주님을 더욱 믿고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을 그래서 저는 한껏 기대하는 부푼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들꽃편지229호>
환자를 치료하시는예수님 / 이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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