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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재앙의 교훈

출애굽기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755 추천 수 0 2011.04.13 16: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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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10:21-29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흑암 재앙의 교훈
출10:21-29

오늘날도 세상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 못하는 신비한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지난 6월 19일 중앙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日 곳곳서 `올챙이 비` 소동]이라는 기사입니다. "올챙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달 초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노토(能登)반도에서 시작된 올챙이 비 소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4일 저녁 나나오(七尾)시의 시민센터의 주차장에서 직원이 '툭, 툭'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 보니 비와 함께 하늘에서 올챙이가 떨어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후 북쪽으로는 도호쿠(東北)지방에서 남쪽으로는 규슈(九州)까지 수십마리 단위로 죽은 올챙이가 비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새가 떨어뜨렸다"는 설과 "돌풍으로 인해 날아온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때 신비한 10가지 재앙이 내렸습니다. 신비나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단지 자연현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레타 호르트(Greta Hort)는 과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호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애굽의 첫 번째 재앙인 피(blood)의 재앙은 대량으로 번식한 붉은 색의 조류(red algae)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비시니안 고원(Abyssinian Plateau)에 내린 폭우로 붉은 색의 토사들이 씻겨져 나일강으로 유입되어지면서 더 색깔이 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조류들은 물속에 산소 농도를 낮추어, 물고기들을 죽게 했고 탄저균이 증식되어 개구리들이 병들어 강을 떠나서(두 번째 재앙)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은 홍수 물에서 번식한 모기(mosquitoes)들이었고 네 번째 재앙으로 임한 무는 파리는 나일강의 홍수가 물러가면서 남겨진 부패한 식물들에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재앙인 생축들에서 발생한 악질은 죽은 개구리들로부터 전파된 탄저병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재앙인 사람과 동물들에서 발병한 독종은 무는 파리에 의해서 전파된 피부 탄저라고 말합니다.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과 뇌성의 재앙은 지역적으로 이상 기후 현상이 일치하여 일어난 것으로,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의 재앙을 촉진 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오는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은, '캄신(Khamsin)'으로 알려진 사막의 모래폭풍에 의해 태양빛을 차단한 것이라고 합니다. 열 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은 추수하고 남아있던 마지막 첫 열매들이 손상된 것을 성경이 잘 못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베푸신 기적이라고 단순하게 믿습니다. 호르트가 말하는 붉은 색의 두 조류는 혼탁하게 흐르는 물에서는 보통 붉은 색이 아니고, 녹색(green)을 띤 것을 밝혀졌습니다. 이들 조류들은 탄저병의 원인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식량 공급원으로 사용되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고기들이 호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산소결핍(anoxia)으로도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탄저균은 개구리 같이 물에 사는 수생 생물들에게는 감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흑암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막의 폭풍으로 애굽 전역에 어둠이 임하였겠습니까? 애굽인들은 종종 사막의 폭풍을 경험하곤 했을 텐데 바로가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애굽에 내린 재앙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특별한 경우에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 박물관(Leiden Museum)에는 이푸워(Ipuwer) 라는 이름의 고대 이집트인에 의해서 쓰여진 한 파피루스(a papyrus)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일반 애굽 사람들이 겪었던 출애굽 당시의 재앙들에 대한 목격담이 기록되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 기록에는 "재앙은 온 땅을 휩쓸고 지나갔다. 피는 모든 곳에 있다..... 강은 피로 변했다. 한 사람이 그것을 마시려고 했다. 그러나 마실 수 없었다. 그는 목이 타들어 갔다..... 오, 문과 기둥, 벽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오,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형제들의 무덤 옆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오, 그러나 왕궁에 있는 사람은 지금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오, 곡식(corn)들은 모든 곳에서 죽어버렸다. 옷도 없고, 향료도 없고, 기름도 없다. 모두가 말한다. "이제는 아무 것도 없다'.... 곡식 창고는 텅 비었다.... 올 것이 왔다." 애굽에 내린 재앙은 역사적 사실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기적임을 저는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된 재앙이 역사적 사실이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기록된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모든 성경의 기록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기록해 놓았는데 오늘날 흑암 재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우리는 인생의 핵심원리를 하나님은께 두고 살아야 합니다(21-23).
바로의 인생 핵심 원리는 태양신 라신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홉 번째 흑암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는 최고의 신인 태양신 즉, 라(Ra)신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최고의 신은 창조자라는 뜻을 가진 라신입니다. 바로는 자신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태양 숭배 사상은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태양이 빛이 없으면 식물이 자랄 수 없습니다. 식물을 양식으로 하는 인간과 동물도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양의 열이 없으면 지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는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별입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별입니다. 저녁에 지고 아침에 뜨는 것이 신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을 생명 존재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의 신화에서 태양을 대자연계의 주재자로 인간의 행․ 불행을 주관하는 최고신으로 나타납니다. 태양 숭배 사상은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농경 사회인 애굽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궁중에서는 매일 아침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북을 치고 노래 부르며 경배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태양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전능한 신(神)임을 고백하고 하루의 생활을 인도해 주실 것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태양신이 그들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어둠을 임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흑암 재앙은 단수한 어둠이 아닙니다. 태양과 상관 없는 어둠의 실체를 알려줍니다. 당시 애굽에 내렸던 흑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태양을 가려 빛이 없는 상태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빛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흑암이 있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발광체인 태양빛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흑암을 존재하게 하여 태양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더듬을 만한 흑암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느껴질 수 있는 흑암입니다. 실체를 가지고 더듬어질 수 있는 흑암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이 임하였습니다. 섬뜩한 흑암, 재난의 흑암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의 초자연적이고 공포스러운 어둠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사8:22;ㅡ 욜2:1 습1:15). 기름으로 불을 켜도 없어지지 않는 흑암입니다. 불을 켠다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흑암입니다. 불을 켜면 흑암이 사라지고 환한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흑암입니다. 단순히 짙고 엷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 앞에서 짙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신비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비추는 광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흑암이 임한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서로 볼 수도 없습니다. 애굽 사람이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식생활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전기가 끊기는 정도의 피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흑암 재앙이 앞의 8가지 재앙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앞의 8가지 재앙은 모두 누구나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이해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물이 피로 바뀌고, 개구리, 이, 파리테가 생기면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가축의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재앙도 글자 그대로 재앙입니다. 그런데 흑암 재앙은 인간 상식을 뛰어넘는 재앙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비웃는 재앙입니다. 당시 인간의 과학문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태양과 관계없는 이런 흑암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첫째 날 어둠과 빛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양은 넷째 날 창조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태양이 없으면 빛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태양과 관계없는 어둠과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에서는 지금으로부터 45억 년 전,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으며 그 지구는 자전에 의해 낮과 밤이 나타나는데 바로 발광체인 태양빛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태양 이전의 지구를 생각할 수도 없고 성경에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낮과 밤이 교대했다는 내용은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할 때 ‘있으라’라는 의미는 히브리어의 ‘발생하다’라는 뜻입니다. 빛의 에너지는 물질로부터 발생할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창조되기 전, 빛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지구는 어떤 고정된 빛의 원천으로부터 낮과 밤의 주기를 나타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 없이 자전했다는 의미입니다. 과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 나오기까지는 이런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에너지는 물질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태초에 시간과 공간과 물질(원소)이 창조됐고(창 1:1) 그리고 빛이 발생했으며 나중에 태양이 존재했다는 성경의 내용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해 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빛의 원천은 태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양은 낮을 주관키 위해 창조되었습니다(창 1:16). 태양은 발광체이며 발열체일 뿐입니다. 이런 발광체는 태양 말고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열을 동반하지 않고 발광하는 형광이나 인광 물질, 그리고 물체가 서로 마찰했을 때 일어나는 발광체, 반딧불이나 조개물벼룩과 같은 발광생물도 있습니다. 우주에는 빛의 종류가 30만 종류나 있다고 합니다. 시리우스성은 태양보다 약 27배 밝고, 안타레스성은 14000배 밝다고 합니다. 태양의 빛은 수많은 종류의 빛을 발하는 발광체들 중에서 한 종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류가 태양을 빛의 원천 즉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고 그것을 숭배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지금도 올림픽이 열린 때마다 태양신 숭배의 모습을 봅니다. 세계 곳곳에 태양 숭배문화 아폴로 문화, 빛 숭배 문화가 퍼져있습니다. 하나님은 흑암 재앙을 통해 바로에게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교훈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섬겨야 할 대상은 태양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핵심 원리로 삼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은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은 태양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신약의 계시를 통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46)"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밝게 보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 빛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명이 보이지 않던 눈에 사명이 보입니다. 이사야처럼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어지고 이해되어 집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실 때 이성이 살아납니다. 지성이 새로워집니다. 양심이 살아납니다. 이성이 제 구실을 하게 됩니다. 정확하고 바르게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빛을 받으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죽음의 어두움, 죄의 어두움, 근심의 어두움, 시기와 질투의 어두움, 전쟁과 기근의 어두움, 두려움과 불안의 어두움, 질병과 고통의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죄의 깊은 수렁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죄의 수렁에서 용서받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어두움의 사상, 어두움의 지식, 어두움의 도덕, 어두움의 문화가 달아납니다. 이 빛이 임하면 음란한 밤의 문화가 달아납니다. 타락한 어거스틴이 이 빛을 받으니까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방탕하게 살던 부시가 이 빛을 받으니까 새사람이 되어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깡패 대장이었던 김익두가 이 빛을 받으니까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빛은 받으면 나라의 어두움이, 가정의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바이킹족이었던 스웨덴이 변하고 해적들이 신사로 변합니다. 온갖 죄악과 우상으로 타락한 로마가 이 빛을 받으니까 2천년동안 엄청난 축복을 누렸습니다. 불모지의 땅 미국이 이 빛을 받으니까 세계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헨델과 베토벤,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가정이 밝아집니다.
이 빛을 받으면 아름다워집니다. 가정이 아름답고 교회가 아름답고 자녀가 아름답고 아내가 아름답고 남편이 아름다워집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 빛을 받으면 생명이 살아납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빛입니다. 이 빛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 아니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심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2. 우리는 핵심가치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10:24).
바로는 핵심 가치를 돈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섬기던 태양의 신, 라신이 흑암 앞에 아무 소용이 없자 바로는 모세에게 협상안을 내 놓습니다. 10가지 재앙 가운데 바로는 네 가지 협상안을 제시하는데 오늘 이 협상안이 마지막 협상안인 네 번째 협상안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세 가지 제안입니다. 첫째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 시내산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끝까지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가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파리 재앙이 임하니까 첫 번째 타협안으로 8장 25절을 보면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라고 말합니다. 태양신을 섬기는 자신들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적당히 섞여서 애굽 사람과 함께 어울려 그들과 조화하며 예배드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혼합주의 장벽입니다. 뭐 그렇게 독특하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고상한 것처럼 보입니다. 편협하지 않고 너그러운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계속 요구하니까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28). 오늘날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적당주의 장벽입니다. 적당히 신앙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흑암 재앙을 통하여 원하는 데로 가라는 것입니다. 혼합주의를 넘어서 적당주의를 넘어서 순순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흑암 재앙이 임하니까 제시한 타협안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어린이도 가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을 내리니까 바로가 세 번째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장정만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개인주의 장벽입니다(10:11) 신앙 생활을 하는데 너나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희 대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홉 번째 재앙을 통하여 바로는 이제 어린 아이들도 같이 가라고 허용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허용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양과 소는 놓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산이며 재물입니다. 바로의 핵심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돈에 그의 핵심 가치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사단이 끝까지 우리를 유혹하고 올무로 잡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재물이라고 합니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무릎끓지 않는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돈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돈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돈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1-6)”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돈은 최고의 군주다."라는 말로 돈의 위력을 표현하였습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리 펑이 지은 "부자들의 좋은 생각, 좋은 습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강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물 속에서 '사람 살려!' 하고 외치면서 허우적거렸습니다. 그의 아들도 수영을 못하여 아버지를 구할 엄두를 못 내고 강가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젊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급히 남자에게 뛰어가 부탁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물에 빠졌는데 좀 도와주세요!" 남자는 상황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 아버지를 구하러 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내 옷이 모두 젖을 겁니다. 그러니 100달러를 준다면 당신 아버지를 구해주겠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경우 대부분, '돈은 얼마든지 상관없으니 어서 저희 아버지를 구해주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00달러는 너무 비싸요. 70달러로 합시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가격을 흥정하고 있을 때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뭐라고? 이 망할 녀석! 얼마를 주겠다고? 50달러면 충분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들으셨죠? 50달러에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 하니…, 그럼 내가 가서 50달러에 당신 아버지를 구해 줄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지요." 남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대로 물에 잠겨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돈의 위력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재물과 하나님을 동등한 레벨에 놓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6)" 신앙인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돈을 훌륭한 신하로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언젠가 정금길을 밟으며 "돈이 별거 아니야"라고 말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이 때 모세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달라고 합니다. 먹고 살 것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하나님께 드릴 제물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신앙입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한 신앙입니다.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입니다.
출애굽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처음부터 여호와를 섬기는 데 있습니다(3 : 12 ; 5 : 1 ; 7 : 16 ; 8 : 1 ; 9 : 1).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출애굽 요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데있습니다(고전10:31). 예배드리는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취하여 여호와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제사 제도에 관한 지시(레 1-7장)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규례대로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계시의존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드리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핵심 인간관계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를 붙들어야 합니다(27-29).
바로의 핵심 인간관계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기준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아홉 번째까지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전에처럼 이제 기도 부탁도 하지 않습니다. 개구리 재앙 때(출8:8) 모세와 아론에게 구하여 개구리를 떠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파리 재앙 때도 기도를 부탁했습니다(출8:28) 우박 재앙 때는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며 기도를 부탁했습니다(출9:27-28). 메뚜기 재앙 때는 죄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출10:17-18). 그러나 흑암 재앙 때는 죄를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기도를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교만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자 어떻게 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3중 명령을 합니다. “떠나가라, 삼가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마지막 항거이자 추악한 몸부림입니다. 어리석은 고집이며 하나님의 사람을 끝까지 외면하는 교만입니다. 마지막까지 사람을 통하여 주신 기회를 차버리는 것입니다. 바로의 눈에는 아직도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노예로만 보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며 아끼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자신에게 복주시는 기회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고 결국 자멸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말에 결별을 선언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 하나님의 전권 대사 모세가 그 권위로 바로에게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제 끝났읍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의 면전에서 이제 끝이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에게 주어진 회개에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핵심은 하나님께 복받는 기회로 붙들어야 합니다.
기회는 세 가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적성, 시의성, 준법성입니다. 어떤 기회든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기회로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비록 손해되어도 하나님 영광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분당에 종교부지를 받았습니다.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초기 분양을 받은 교회에서 계속 자신들에게 양보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기회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손해 보아도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이라고 판단하고 양보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갔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 때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30)”라고 했습니다. 이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는 모세는 죽여도 자신은 이익을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장이 정년 퇴임을 하는 직원에게 마지막 부탁이니 집을 최선을 다해 지으라고 했답니다. 이제 끝나는데 뭐 마지막까지 집을 지으라고 하며 그는 투덜거렸답니다. 그리고 적당히 지었답니다. 다 건축하고 나니 사장은 집문서를 주고 수십년동안 회사를 위해 수고했다고 하며 마지막 자신이 주는 선물이라고 그 집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얼마나 잘 지었겠습니까? 후회해도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시의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따름입니다. 오래 전에 구역장님들과 설악산에 수련회를 갔는데 한 휴게소에 들리니까 리어커에서 노래를 틀어 놓고 테이프를 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들은 노래가 “있을 때 잘해,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랫말이 반복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혜가 되었습니다. 기회 주어졌을 때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 주어졌을 때 잘해야 합니다. 요즈음 교회 건축을 합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부모에게 잘 해드리는 것도, 남편과 아내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도 기회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지나간 후 후회해 보았자 그 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 성공할 수 있는 기회, 치료 받을 수 있는 기회, 공부할 기회, 사업할 기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부자될 수 있는 기회, 충성할 수 있는 기회,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예배할 수 있는 기회 등 갖가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그 기회를 다 거두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1-3)”라고 말씀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신랑이 이미 왔는데 기름을 준비하러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기차 떠난 후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때가 지났기 때문에 슬피 울며 후회할 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아내와 롯의 사위를 보십시오. 롯의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받아들입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 롯의 사위는 유황불 속에서 살아졌고 롯의 부인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자녀들이 간음합니다. 제물을 도둑질 합니다. 자녀를 잘 가르칠 기회를 줍니다. 하나님은 “삼상 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라고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을 회개의 기회를 잃어 버립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습니다. 자신도 비참하게 죽습니다.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유다 역시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 버립니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는 준법성이 중요합니다. 기회라고 해서 제 마음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는 제 자신이 신이라고 하며 자신이 모든 기준이 되어 판단하고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건축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기준으로 기회를 내팽게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바로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는 것이 위기라고 판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으면 더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라에서 쓴 물이 나오니까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조금만 가면 엘림의 오아시스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오아시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 기준으로 기회를 헌신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고 원망의 도구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출15:27) 기회를 내 기준으로 불평의 도구로 사용하여 망하는 길로 가지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축복의 도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어려움에 처하면 교회 걱정보다는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며 도피처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받는 기회 선택이 아닙니다. 위기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최적의 기회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위기를 만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성군이 될 수 있습니다. 15c에 있었던 '흑사병'서 불란서 최고갑부 탄생한 사람이 있습니다. 1432년 어느날,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나르본은 시체로 넘쳐났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흑사병으로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체 치우기 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답니다. 이 때 새 항로 개척을 위해 시리아에 갔다가 돌아온 자크 쾨르는 그곳에서 기회를 보았답니다. 새로운 무역기지를 찾던 그에게 황폐해진 나르본은 저렴한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답니다. 그는 이곳을 기반으로 그는 베네치아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고려나 중국 도자기의 직거래 루트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 성취를 넘어 영국과의 100년 전쟁과 흑사병으로 황폐해진 프랑스 경제를 재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500년도 더 전의 사람이지만 전문가들은 그의 재산이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일푼에서 최고의 부자가 된 결정적 계기는 흑사병이라는 희대의 경제위기였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항상 지금이 기회입니다. 주어진 기회가 끝나면 심판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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