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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6:4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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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하원양 목사 |
참고 : | 에드몬톤 벧엘교회 |
제 목 : 십자가와 세 사람의 손
본 문 : 마26:47-48. 마27:24-31.
부지런한 사람은 손을 많이 놀리고 게으른 사람은 입을 많이 놀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손을 만들어 주시고 일찍부터 도구를 만들어 쓰도록 하셨습니다. '공작할 수 있는 동물'(Homo Faber)이기 때문에 인간은 문명을 창조하고 역사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며 살아 왔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손은 외부의 두뇌다'고 하였습니다. 생각을 표현하는 두뇌의 역할을 손이 한다는 뜻입니다. 배우의 연기, 음악인들의 연주 혹은 평소 생활에서의 손짓 등 인간의 자기의사를 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손을 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시 28:2, 63:4)과 백성을 축복하는 것(레 9:22, 눅 24:50)이 되고 맹세 맹약의 뜻도 있습니다(신 32:40).손을 치는 것은 약속을 지킬 것을 표시하고(잠 6:1),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것은 계약을 굳게 확인하는 표시입니다(애 5:6, 겔 17:18).
손을 씻는 것은 결백의 표명이고(신 21:6, 마 27:24), 남의 손에 물을 붓는 것은 그의 종이라는 표시이며(왕하 3:11), 희생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죄를 전가하는 표시입니다(레 1:4, 사 53:6). 손은 축복, 임직, 안수, 안찰, 병 고치는 일과 같은 선한 일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죄를 짓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인체에는 죄를 짓는데 명수인 세 개의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눈과 손과 입입니다. 이 세 가지는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악을 범할 때 앞장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이 범죄 하면 "빼어버려라", 손이 범죄 하면 "찍어버려라"고 하신 것은 눈과 손과 입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기관 중 손은 참 묘합니다.손은 남을 위해서 한없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생명에 결정적인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이 어떤 손인가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던 마지막 주간,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세 사람의 손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을 해한 사람의 손, 남을 위해 끝까지 붙들어주려고 했던 손, 부드러운 손길을 뿌리쳤던 손, 이 세 사람의 손이 다 같이 십자가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골고다의 십자가에는 이 세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습니다.
(1)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는 빌라도의 책임회피의 손이 있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 마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는 물로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다는 빌라도의 책임 회피의 손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임을 알았습니다.
아내가 예수님은 좋은 사람이다고 알려 주면서 그를 사형에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빌라도는 망설였습니다. 빌라도가 망설이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평소에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강압 정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군기는 깃발이 아니고 장대의 꼭대기에 독수리상(像)이나 황제의 상(像)을 달았습니다. 독수리는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황제 숭배도 유일신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조금도 납득할 수 없는 우상입니다.유대인들의 정서를 알고 있는 통치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인들의 증오심을 사지 않기 위해 독수리 상이나 황제 상을 제거했습니다. 빌라도는 강직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깃발에서 상(像)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유대인들의 분노와 반발을 샀습니다.
또 하나,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좋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 새 상수도 건설을 했습니다. 물을 공급하는 일은 좋은 일이었으나 거기에 드는 비용을 성전 재정에서 충당했습니다. 성전의 헌금은 성전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성전의 헌금을 사용했으니 분노가 폭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과 빌라도 사이에는 이처럼 극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개인적 비리와 약탈, 학정을 고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집단적인 민원이 들어가면 빌라도의 출세에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이런 약점을 갖고 있는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라도는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내의 간청하는 소리도 메아리쳤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유대인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이 약점이 되어 소신 있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출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성난 유대인들에게 내주었습니다.빌라도는 양심에서 들려오는 책망의 소리에 귀를 막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두려웠는지 대야의 물로 손을 씻으면서 ‘나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더 유지하기 위하여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매주 수억의 크리스챤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란 말을 빼지 않고 외우므로 그는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오점을 남겨 놓았습니다.
양심과 책망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자신의 책임에 대하여 발뺌을 하는 야비한 발라도의 욕심의 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묻게 되었습니다.이처럼 무죄한 사람을 죽음의 십자가에 내어준 야비한 빌라도의 책임회피의 손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묻었습니다.눈 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육신의 안일과 평안만을 위한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빌라도의 욕심의 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묻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빌라도처럼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여러 가지 더러운 때를 묻히고 있습니다. 지금 내 자신의 모습과 빌라도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세상에 나가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하여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는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삶입니다.세상에 나가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는 삶이 빌라도처럼 책임을 회피는 손입니다.
우리가 제자로서의 삶을 회피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회피할 때, 그 지저분한 책임 회피의 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럽히고 있습니다.내가 순종하지 못하고, 좀 더 낮아지지 못하고 옛사람이 완전히 죽지 못할 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야비한 책임회피의 더러운 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묻혀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럽히는 장본인들입니다.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주의 만찬을 대하게 되겠습니다.이제 우리가 주의 만찬을 받을 때 비겁하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함으로 또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럽힌 때들이 깨끗이 씻겨지기를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2)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다의 배신의 손이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 마26: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하였습니다.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에는 가룟 유다의 배신의 손이 있었습니다.귀족적인 요소를 갖추고 "찬양 받는다"는 뜻을 지닌 자랑스런 이름을 가진 유다의 출발은 훌륭했습니다. 그는 잠재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셨을 때에는 배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유다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밤하늘 아래서 함께 앉아 떡을 떼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유다는 산상수훈을 들었으며, 소경이 다시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회계의 직책을 가졌습니다.마태가 세리로써 돈을 다루는 데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다의 재정적인 전문지식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돋보였습니다. 그는 믿을 수 있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서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제자로 출발할 때에 그는 신중하고 정직했으며 유능하고 실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십자가의 수난을 듣고 배신을 꿈꾸기 시작합니다.예수님은 유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장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바라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냐?"고 여쭈었더니 "나와 같은 그릇에 손을 넣은 그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유다는 계획이 탄로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셨다면 그 앞에 꿇어 엎드리어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기대해서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그럼에도 유다는 은 30을 팔고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겨버립니다. 그의 손은 배신의 손이었습니다. 스승을 팔아서 은 30을 움켜쥐고 있는 탐욕의 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의 더러운 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묻었습니다.예수님께서 주신 회개할 기회를 버렸던 가룟 유다의 뻔뻔한 배반의 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묻혀졌습니다.인도인들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열 사람을 주어도 간디와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간디에게 간디 못잖은 조상이 있었습니다.
카디아와드라는 나라의 재상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는 정치적 모함에 빠져 이웃나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항상 왼손으로 경례를 올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왕실 의전관들이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른손은 이미 전 왕에게 충성선서를 한 불구의 손이다. 이 치욕의 손을 어찌 왕 앞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왼손으로 경례를 하는 간디의 할아버지의 한 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게됩니다. 간디의 할아버지를 통하여 한 왕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을 보게됩니다. 우리도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이 변하지 말아야합니다.계 2장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기를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셨으며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여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우리는 순탄만 기대할 수 없습니다. 태풍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결혼생활과 비슷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시되고 있습니다(엡 5:22-23). 남녀가 결혼을 할 때 뜨거운 사랑으로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가정생활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와 부딪치게 되며, 때로는 사랑이 식어질 때도 있습니다. 권태기에 들어가 권태증도 생깁니다. 전에 보이지 않던 배우자의 결점이 자꾸 드러납니다. 생활을 해 가는 동안 늘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남자나 여자가 한눈을 팔게 됩니다. 다른 가정하고 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은 불행하게도 가정이 파괴가 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시작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지속하는 힘을 가지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시작을 잘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시작뿐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잘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첫 열심, 첫 믿음, 첫 사랑 등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만일 지금 식어져 가고 있다면 빨리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집어치워 버리고 도망쳐 버리려고 합니다.예수님의 십자가에는 가룟 유다의 배신이 때가 묻어 있었습니다.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지금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가룟 유다와 나는 무엇이 닮았습니까?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뒤돌아서는 배신의 때를 묻히고 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에 포기하는 배반의 때를 우리가 묻히고 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에 배신의 때를 묻히고 있는 오늘 이 시대의 가룟 유다가 내 자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무엇입니까?가룟 유다처럼 배신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럽히고 있는 우리의 배반의 죄를 씻겨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용서의 떡과 용서의 잔이 주의 만찬입니다.힘들고 어려우면 도망치는 비겁한 배신의 죄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고 더럽힌 우리를 위하여 이 떡과 잔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룟 유다처럼 배신의 때로 십자가를 더럽힌 우리 모두 이 떡과 잔을 마심으로 깨끗이 씻겨 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3)예수님께서는 빌라도와 가룟 유다와 그리고 우리가 더럽힌 때들을 덮어주시는 희생과 용서의 손으로 골고다의 십자가를 붙드셨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마27: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고 하였습니다.십자가의 메달 죄수들은 대개 옷을 벗긴 채로 형장을 향하며, 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비웃음과 매질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관습이 예수님께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마 그가 너무 많은 매질을 이미 당했기 때문에 더 매질을 당하게 되면 아예 죽게 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넘어진 자, 외로운 자, 죄지은 자, 병든 자, 슬픔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시고 붙들어 주시던 손이었습니다.
그 손 아래 많은 사람들이 새 삶을 얻었고 일어섰습니다. 참 아름다운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친 손입니다. 환자들의 손을 잡으시며 어루만지시며 상처를 싸매시며 고쳐주시기 위해 희생하시던 손입니다.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손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교회학교 선생님들의 권유에 의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다녀오다가 건널목에서 기차에 치어죽고 말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자 너무너무 화가 나서 교회에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을 나오라고 해서 목사님이 나오시자 내 아들이 죽을 때 하나님이 어디 있었느냐고 따졌습니다. 목사님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그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가 죽을 때 거기 계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깊은 내용이 담겨 있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죽는 피 묻은 고난의 현장에 계셨습니다. 그러한 아픈 상처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맨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 원어로는 '테텔레스타이 '라고 하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헬라의 도시를 발굴해 냈을 때 옛날의 세금 영수증을 발견해냈는데 거기에 바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했다, 지불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고로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죄 값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책에서,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그렇게 멀리 옮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빌라도와 가룟 유다와 우리가 무책임의 때로, 배신이 때로 더럽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와 우리가 더럽힌 무책임의 죄와 때를 자신의 몸으로 덮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와 우리가 더럽힌 배신의 죄와 때를 자신의 피로 씻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우리가 또 지을 흉악한 죄들을 감싸시기 위하여 이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이 떡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때로 더럽힌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생겼습니다.
이 잔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한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창에 그 허리를 상하신 핏자국이 생겼습니다.
오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자마다 주님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주님의 외치는 고통의 절규를 들어야합니다.오늘 이 떡과 잔을 마시는 자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럽혔던 모든 죄들이 깨끗이 씻겨지기를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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