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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7: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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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과 축복의 언약
본문: 창17: 1- 27
삶은 곧 관계입니다. 가정생활은 부부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직장생활은 직장의 고용인과 피 고용인 그리고 나와 내게 맡겨진 과제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의 본질도 결국 관계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 교회의 지체된 성도의 관계야말로 교회생활의 질을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관계의 신실성을 테스트하는 시금석은 약속의 문제에 대한 관점과 그 이행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해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약속(promise)이라는 말을 좀 더 성경적으로 사용한다면 언약(covenant)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어떤 언약은 조건적이기도 합니다. 무조건적인 언약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조건적인 언약들은 그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무조건적인 언약들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기억하셨음을 회고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각해 보면 출애굽의 은혜도 가나안의 기업을 허락하심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오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구원의 은혜도 조건 없는 선물이며, 천국의 소망도 조건을 초월한 그의 언약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보다 조건적인 언약들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의 책임은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약속한 일들에 대하여 신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이 모습만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신실한 자녀의 본분을 다하는 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은 신명기 18장 13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신약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했습니다.
또 골로새서 1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1장 4절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48절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그런데 이 권면은 꼭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모두 온전함같이 우리 사람이 동등적인 의미에서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온전함같이 사람은 사람으로서 온전하라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가령, 작은 촛불이 햇빛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햇빛이 온전히 낮에 비치는 것과 같이 작은 촛불이라도 가리우는 것이 없으면 작은 촛불로서 온전히 비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봄 동산에 피는 여러 가지 꽃 가운데 앉은뱅이 꽃이 모란꽃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란꽃이 온전히 피는 것 같이 앉은뱅이 꽃도 앉은뱅이 꽃으로서 온전히 피는 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라’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 ‘완전하다’ 는 뜻은 장성하고, 성숙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가령, 어른과 아이를 비교하면 어른은 장성하여 성숙한 의미에서 완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는 불완전합니다. 완전하다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장성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온전하게 자라서 온전한 자리에까지 이르라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주신 모든 능력을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뜻하신 그 온전한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인격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성의 최고 표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완전한 자리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가장 높은 표준에 이르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할 뿐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 1서 3장 2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육신으로 이런 완전한 자리에 이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다음에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도 장성해서 주님과 같이 되겠다고 성경에 가르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보다 높은 은혜를 사모하십시다. 낮은 데를 보지 말고 높은 데를 바라보십시다. 작년보다 금년은 좀 더 높이, 지난 달보다 이 달은 좀 더 높이, 어제보다 오늘은 좀 더 높은 은혜에 올라가서 완전한 그 지경에 이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람은 99세에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신 언약을 되풀이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늘 들으면서도 신뢰하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잠시 잊은 채 하갈이 낳아준 아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의 믿음을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기의 행복이 더 중요했습니다. 지금 아브람의 나이는 99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직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첫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에는 그를 통해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아주 큰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자기 마음대로 포기해 버리는 불순종으로 잘못된 상황에 처한 아브람에게 거기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하시는 것은 내 고집을 버리고 우리 삶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온전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이미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또다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브람이 이 언약을 받기에 충분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아브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는지 알려주시고 신실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그 즉시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거기에 전적으로 복종할 뜻을 보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선포되는 것입니다.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들 하나로 만족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아브라함’, 즉 ‘아주 큰 무리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그 표적으로 그의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결국 그는 이스마엘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른 아들을 기대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후손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가족 안으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피부색이나 언어나 성별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저앉아 있지 말고 자기만 바라보지 말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위치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오는 가정마다 성령의 강한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5절과 15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5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15절)
사래와 아브람은 마침내 사라와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게 됩니다. 우리는 죄된 상태의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자유자로 이름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가게 되리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예배하게 되리”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이루어 가실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이루실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의 성취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거나 열심히 노력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은 선하고 경건하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본문 6- 7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히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뜻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중심으로 사랑하며 살았던 아브라함은 후에 4대 복(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자손의 복, 물질의 복)을 받았고 성도들에게 믿음의 모본을 보여줍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떠났습니다(창 12: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믿음은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화목하기 위하여 양보했습니다(창 13:8∼9).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화목하기 위하여 겸손히 양보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양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셋째,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창 14;20).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구별된 하나님의 것이 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돈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지켜야 합니다.
넷째, 이삭을 바치는 절대 순종입니다(창 22:10). 아브라함은 언약을 믿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 제일 중심의 삶이요 신앙입니다. 어려운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다섯째, 제단 신앙입니다.(창 12:7, 13:18)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모든 일에 복을 받아 형통케 되지만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일에 실패합니다.
성경은 명령과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생명처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며 지키고 있습니까?
본문 9, 10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화가 도레가 유럽을 여행하던 때의 일입니다. 여행자의 필수품인 여권을 잃어버리고 내심 초조한 마음으로 국경선을 지나려는데 관리 하나가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여권 좀 보여 주시죠." 당황한 도레는 자초지종을 말하고서는, "나는 화가 도레요. 좀 봐주시오." 하며 자기 신분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관리는 들으려 하지 않으며, 모두가 그런 변명을 내세워 봐달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해진 도레였지만, 계속 부탁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좋소. 당신이 진짜 화가 도레라면 내 얼굴을 그려보시오." 도레는 살길을 만난 듯 얼른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열심히 그의 얼굴을 그려냈습니다. 한참을 지켜보던 관리는 함성을 지르며 말을 이었습니다.
"정말 당신은 화가가 맞군요. 이렇게 멋지게 그려내다니. 어서 가십시오." 결국 도레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이 화가임을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우리의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증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 28, 29)
본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언약은 어떤 구체적인 조항으로 나타나지 않고 할례라는 의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할례를 행하고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과 후손들이 이 할례를 행하면 언약을 지킨 것으로 간주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속한 남자나 후손 중에서 누구든지 할례를 행치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것이므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할례가 이렇게 중요한 의식이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이 할례를 가장 엄격하게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를 율법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는 상종하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1. 할례란 무엇인가?
할례란 사내아이의 양피를 베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즘에 사내아이들에게 포경수술을 해주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표로 정하셨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를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표현하기도 얄궂은 곳에 언약의 표시를 주셨을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이 언약의 표시를 다른 데 새겨 놓으셨다면 그들은 그것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묘한 곳에다가 언약의 표시를 새겨 놓았기 때문에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랑하려면 보여주어야 할텐데 그것을 꺼내 보여주면서 자랑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언약의 표시는 자랑이 아니라 자기만 보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날마다 이 언약의 표시를 보게 될 것인데,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늘 기억해야 했습니다.
2. 할례의 의미
할례는 이렇게 언약의 증표로 채택되기 이전에도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성인의식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는 사람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아마도 이제부터는 스스로 책임지는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할례는 악하고 추한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를 통하여 그 백성들 안에 있는 죄악된 것을 멸하시고 새 생명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옛 사람을 멸하시고 우리를 거룩한 새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새 사람,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살에 깊이 새겨 놓으심으로 그들이 연약한 인간임을 상기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고 싶어도 육신의 정욕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연약하고 소망 없는 죄인임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바로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열린 문
우리는 대개 이스라엘 사회가 폐쇄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서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는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사회가 폐쇄사회가 아니라 개방사회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할례를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는 할례를 누가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 집에서 난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사람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12절). 아브라함의 혈통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는 이방인들까지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함께 사는 이방인이라면 대개 종들을 의미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서 종으로 팔려온 사람들, 또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까지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러한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들도 할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부터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은 열려 있었습니다. 구원의 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4. 이방인의 구원
오늘 우리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입니다. 구약시대에 노예가 되어 이스라엘로 끌려온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놀랍게도 그들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중에 자발적으로 예수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도 교회 안나오려고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다보니 결국은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보니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내가 오랫동안 기도하고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된 남편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임직 받은 분들도 있고, 믿음이 정말 좋아진 분들도 많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절대로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던 남편들이 아내와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한 번 두 번 교회에 나오다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남편을 전도해서 구원받게 한 아내들은 가장 중요한 사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 때문에 교회 나와서 구원받게 된 남편들은 평생 그 은혜를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편들 중에 걸핏하면 교회 안가겠다고 하면서 아내를 협박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주일 아침에 아내가 조금만 맘에 안 들게 하면 교회 안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것을 제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약점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남자들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못난 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인간이 아내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쁜 마음으로 앞장서서 예배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신앙적으로도 명실상부한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5. 할례를 받으라.
하나님 백성들은 누구나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에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라”(14절) 이 언약의 표시를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아무리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백성된 표시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믿는다고 해도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아무리 무식하고 게을러도, 아무리 믿음이 부족하다 해도 최소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해야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받는 세례가 구약의 할례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백성된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 제가 세례 받는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이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다음부터는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지키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6.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신체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언약의 징표로 할례를 주신 것은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정말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해보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배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부싸움이 벌어져 저녁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들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이렇게 은혜가 식어지고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뭔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징표가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병에서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에게 일어난 큰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기도 중에 체험한 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질 때 바로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기억하고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게 됩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증거,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는 할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특별한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마다, 낙심될 때마다 그것을 기억하고 가슴이 다시 뜨거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증거들을 망각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7. 은밀한 믿음, 마음의 할례
할례는 은밀한 곳에 표시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자기와 하나님만 아는 비밀입니다.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떠벌릴 필요가 없습니다.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누가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사이만 진실하고 되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이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1968년 북한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자녀들이 모두 월남하고 혼자 남은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반동분자로 찍히게 되었습니다. 사상이 불순하다고 체포되어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역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였으면 좋겠는 데 죽이지 않고 고생만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수용소를 옮겨갈 때마다 이상하게도 소중히 들고 다니는 방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본 감시원이 그 방석을 찢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서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성경책이고 하나는 태극기였습니다. 은밀하게 간직하며 자기 신앙을 기르던 두 가지였습니다. 격노한 정치 간부는 군중을 모아 놓고 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성경책과 태극기를 불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그 노인은 조용히 그리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간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경과 태극기를 저 불속에 던져라"
그러나 그 노인은 역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당당하였습니다. 마침내 이 노인은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태극기를 품에 안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이 조국에 평화를..."
그는 은밀하게 감추어 가지고 신앙생활하던 성경과 태극기를 품에 안고 목이 잘렸습니다. 붉은 피가 하늘로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렬하게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싱싱한 믿음을 은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남이 볼 수 없고, 남에게 보일 수도 없는 할례입니다. 누가 보자고 할 수도 없는 할례입니다. 할례 믿음은 자기만이 간직한 은밀한 믿음입니다.
할례를 신체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행한 것은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진정한 할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8-29)
할례를 마음에 해야 한다는 것은 마음이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 백성은 형식적인 신앙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아는 것도 많지만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다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 믿고 마음이 새로워졌습니까? 당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달라졌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여 섬기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까?
하나님께서 할례를 몸에 행하신 이유는 신앙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진 것은 삶이 변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검증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로 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우리 몸을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있는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통하여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할례는 비록 몸에 행하는 것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란 선택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거룩한 의식이었습니다. 나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본문 17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표정이 선진국에 비해 굳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미소 짓는 모습,웃는 표정은 부유한 나라일수록, 그리고 민주주의 나라일수록 풍부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벌써 2000년 전에 “웃는 것은 전신운동이다. 많이 웃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삭의 탄생 기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삭’이란 히브리어로 웃는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사라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주셨도다”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17장에 나타난 아브라함 부부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닌 기가 막힌 웃음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우리가 어떻게 생산을 하리오’(창17:17)라면서 기가 막혀 웃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가 막힌 그 웃음을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실현 불가능의 약속이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주시고 이루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이 기가 막히는 웃음에서 즐겁고 기쁜 웃음으로 변하기까지는 구체적인 몇 단계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첫째로 기막힌 웃음을 기쁨이 넘치는 웃음으로 변화시키려면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세상을 살다보니 어느 사이에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정녕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새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감사와 기쁨의 웃음으로 변화를 기대하려면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즉 이방 여인 하갈을 취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86세에 얻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100세에 낳은 이삭이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기막힌 웃음을 기쁜 웃음으로 변화받기 위해서는 이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많은 조상의 아버지’란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주셨으며 사래를 ‘많은 조상의 어머니’란 뜻을 가진 ‘사라’로 바꾸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름을 바꾸기 전에는 “우리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우리는 원래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다”는 절망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나이 많은 부부의 이미지를 바꾸어주시려고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게 하셨으며 또한 바닷가의 모래들을 헤아려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 스스로가 꿈을 가지며 이미지를 바꾸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슬픔의 생활, 절망적인 환경, 괴로운 인생살이에서 벗어나 즐거운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었으면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적을 전적으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기쁨의 웃음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바라보면서 나는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웃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로 웃고 기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언약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축복의 언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속에 우리를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나타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여 주옵소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 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되게 하시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로 주를 닮아 언약에 신실한 종으로 한 평생을 살게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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