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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4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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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본문: 시편 43편: 1- 5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희랍 사람들의 신화 가운데 탄타로스라는 거인의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탄타로스는 희랍 신들의 비밀을 폭로했다는 죄로 제우스신의 진노를 받아서 종신형을 받고 지옥의 호수 속에 결박당한 채 갇혀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탄타로스가 결박당해 있는 바로 그의 턱 밑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탄타로스가 목이 타서 그 물을 마시려고 하면 물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맛있고 탐스럽게 익은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 과일을 따 먹으려고 하면 역시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탄 타로스의 비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흐르는 맑은 물을 눈앞에 보면서도 마시지를 못하고 탐스러운 과일을 바라보면서도 먹지를 못합니다.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긴장, 갈등, 초조, 불만 속에서 탄타로스는 신음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받은 저주라는 얘기입니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갈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은 돈이나 학식이나 권세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39편 7절에 보면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소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
본 시편 43편은 전42편에 이어서 우리 영혼이 불안하고 낙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함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덧입고 승리하는 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우리 영혼이 왜 불안하고 낙망하고 있습니까?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두 사람의 종에게 각각 한 채씩 집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돈 아끼지 말고, 최고급 자재로 최신식 인테리어를 곁들인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종은 주인의 당부대로 주인이나 그 아들이 살집이려니 생각하고 최고급 주택을 건축했습니다. 면밀한 설계, 탄탄한 시공, 최고급 자재로 최신 문화주택을 완공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 종은 심술이 나 있었습니다. ‘사는 집이면 됐지 무슨 놈의 집을 또 지으라는 건가. 아들도 좋은 집에 살고 있는데 웬 집 타령인가.’라며 저질 자재만을 골라 불량시공으로 건축을 마무리했습니다. 날림 집을 지은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두 종을 불렀습니다. “그동안 수고들 했다. 나를 위해 몸 아끼지 않고 봉사한데 대해 보답을 하고 싶다. 너희들이 그동안 정성 들여 지은 집을 선물로 주고 싶다. 받아주기 바란다.” 한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한 사람은 땅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가에 의해 우리의 삶이 결정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 가에 따라 교회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교회는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성경은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같이 재물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1. 세상과 재물에 소망을 둔 자
이 세상과 재물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마치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곡식을 그득히 채우고는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외치는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부자가 우선적으로 곳간을 더 크게 짓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처럼 좀 더 큰 아파트와 좀 더 거창한 예배당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세상의 편안에 취해서 더 이상 하나님의 평안을 추구하지 않으며, 자기만족에 안주해서 더 이상 버려진 자들은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없으면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질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남의 눈을 의식해서, 즉 가족들의 비난을 의식해서 교회에 출석하고, 경제적이거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교회에 등록하며, 교우들의 눈치를 의식해서 봉사에 참여하고, 사역자들의 책망을 의식해서 헌금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이 늘 피곤하고 힘들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자
반면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 - 14)같이 찾아갈 본향이 있기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잠시 머무는 곳에서 백년천년 살 것처럼 거창한 건물을 짓지도 않고, 짐이 될 것들로 가득 채우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모세가 그러했듯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처럼 소망, 즉 상 주심을 바라보기에 잠시 죄악의 낙보다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소망을 계속 붙잡고 나갈 수 있을 가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4- 36)에서 같이 먼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을 분명히 알아야하고, 세상을 추구해야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세상의 강력한 주장에 대해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하며,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끝까지 참아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소망을 굳게 잡고 나갈 수 있는 근거는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 10:23)같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즉 절대로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심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6:19)처럼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은 소망을 소유하길 소망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본문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련의 스파이 로젠버그를 재판할 때의 일입니다. 검찰의 구형이 있고 피고인 로젠버그의 최후 진술이 끝났습니다. 이제 재판정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재판장인 카프만 판사에게로 쏠려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피고의 변호사는 ‘판사님, 공정을 기해 주십시오. 너무나 여론에 치우쳐서 내린 판결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항의했습니다. 이때 카프만 판사는 ‘정의와 공정은 이미 집행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구할 것이 있다면 자비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법의 적용과 집행은 공정하고 준엄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한 사회의 질서와 기강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모든 것을 판단하십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기에 가장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동의나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어떨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잣대 앞에서 부끄럼 없을 만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이 말씀은 앞 장(시편 42편) 9절 말씀과 동일합니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낙심될 때 우리 성도는 할 일이 무엇입니까?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간구입니다.
본문 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빛과 진리를 만나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러야 합니다.
가브리엘 박사는 이슬람 최고학부인 알아즈하르대학교 최연소 교수이자 무슬림 이맘이었다가 기독교인 된 세계적인 변증가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변화를 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온갖 고문후유증과 여러 정신적인 충격으로 번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웃에 사는 기독교인 약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해준 성경을 통해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뒤 체계적인 기독교교육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예수제자훈련학교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첫 번째 만난 남아공 백인목사와 두 번째 만난 나이지리아 목사는 이슬람 교리로 이미 철저하게 무장된 그의 신앙 멘토가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만난 한국인 선교사는 끝까지 단념하지 않고 그를 부둥켜 앉고 울면서 멘토가 돼주었습니다.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양육해주었습니다. 그는 불안하고 낙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에게 성경을 전해준 약사와 따뜻한 말로 그의 멘토가 되어준 한국 선교사 덕분에 큰 구원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성경 속에서 마호메트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을 알게 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는 무리들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나서서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물러났지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라면 간음한 여인이 임신을 해 붙잡혀 온 똑같은 상황을 연출된다면 이렇게 할 거에요. 여인에게 아이를 낳고 2년 뒤 다시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온 여인을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구덩이를 파놓고 돌로 쳐 죽일거에요. 즉,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관용과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반면 무함마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증오와 폭력, 살인을 말했죠." 가브리엘 박사는 한국교회 안에 있는 ''이슬람교를 대적해야 한다'' ''무슬림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두 관점의 충돌에 대해 이슬람교와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박사가 주님의 빛을 만나서 그의 갈망이 해갈된 것을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빛과 진리를 통해 열린 인생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열린예배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는 열린 예배입니다. 다소 형식이 진부하다해서 닫힌 예배라고 속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북 치고, 손 흔들고, 소리 지른다고 열린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는 모두 열린 예배입니다.'
'사람은 그 눈으로 두 개의 세계를 봅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세계입니다. 긍정적인 눈은 미래, 비전, 세계, 이웃, 국가, 그리고 영원을 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눈은 절망, 좌절, 실패, 그리고 과거를 봅니다. 문제는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 판도가 바뀌고 앞길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 또는 극락의 하나님이란 ‘내 기쁨 중의 기쁨 이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의 최고의 기쁨의 원천이시라는 시인의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잘 드러내 줍니다. 또한 이 표현은 기쁨의 날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만 자신과 함께 계시면 자신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합3: 17- 19, 고후6:10)
세상을 갈망하지 말고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때,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세상을 갈망할 때, 세상은 우리로 낙망의 늪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십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시150:3)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존 해거이라는 미국의 전도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에게는 존이라고 하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정신박약아였습니다. 존은 휠체어를 타고 앉아서 아버지가 설교를 하면 뒤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했습니다. 부모님은 어떻게 하든지 그 아이를 고쳐 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이 아이를 안고 다니면서 22년간을 지내다가 결국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들이 죽은 후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거이 인스티튜트’(Haggai Institute)라는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제3세계의 선교를 연구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사람들을 보내는 휼륭한 기관입니다. 해거이 박사는 자기 가정의 실망과 낙담과 좌절을 통해, 선한 일을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실망과 좌절만 바라볼 때 우리는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헌신하게 될 때에 새 소망의 길이 열립니다. 아무리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그분을 생각하면 소망이 샘솟듯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어려운 일이 우리에게 닥칠는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겁내지 맙시다. 더구나 낙심하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이사야 49장 23절에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생 가운데는 고난이 끊이질 않습니다. 어쩌다 저명한 인물들의 회고록을 잃어 보아도 고난 없이 삶을 일군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창47:9) “나의 일생은 온전히 평안하고 행복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환난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삶에 필연적으로 닥치는 고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다만 수동적으로 운명에 맡기고 눈물과 한숨 가운데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곧 주님 앞에 나아가 꿇어 엎드려 자신의 고난의 길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께 간구함으로써 죄와 고통의 짐을 내려놓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2.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우리의 심령에 은혜와 기쁨이 넘치게 하는 가장 능동적인 방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욥도, 하박국도, 바울과 실라도 결국은 승리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이 크고 어려울수록 더욱 뜨겁게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시140: 1- 3)
3.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홀어머니 한 분이 부산에 계십니다. 그분은 행상을 하시고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식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자식들이 다 성공하고 장성했는데도 자식들과 같이 살지 않으시고 혼자 자그마한 오두막집에서 사셨습니다. 자식들이 “어머니, 이제는 아파트로 이사 가시지요. 아니면 단독 주택으로 옮겨 가시게 해 드릴게요”하며 졸라대자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정 원한다면 나를 위해 집을 한 채 지어라. 내가 원하는 집은 바닥을 반드시 유리로 지어야 하느니라. 유리뿐만 아니라 기둥을 꼭 12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의 밑바닥은 반드시 보석을 박아야 하는데, 그 보석의 색깔이 다 달라야 하고 문은 12개 만들어야 한다.” 자식들은 “어머니, 농담하지 마세요. 그런 집이 어디 있어요?” 하자, “없으면 그만둬라. 나는 그 집을 하늘나라에 갖고 있으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소박한 삶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또한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당당하게 사셨던 이 어머니의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빛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있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때때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낙망하게 한다 할지라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는 힘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 넘치는 소망은 우리에게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롬8: 24, 25)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이처럼 우리의 삶의 중심에 들어와 적극적으로 현재의 슬픔을 기쁨으로 뒤바꾸어 놓는 능력있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소망을 붙잡을 때 우리는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소망을 놓치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편 37: 7~9)
성도 여러분! 인간이 갖은 노력을 다해 평안을 추구한다 해도 고난은 그림자처럼 따라 붙습니다. 또 고난을 스스로 헤쳐 나가다 보면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금 절망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이기는 바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났을 때 뒷걸음치지 마시고 지혜롭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고난을 극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 28- 31)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는 중에 새 힘을 얻어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 주님을 멀리하여 소망을 잃고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고 소망 속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 행사를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길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안에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말씀으로 승리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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