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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9: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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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인생의 허무와 성도의 자세
본문: 전도서 9장 1- 18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1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13.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영국의 제일 위대한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대영 제국의 뛰어난 의사와 의술이 총동원이 되었으나 그녀의 죽음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여왕은 통곡을 하며 “누구든지 생명의 한치라도 연장해 준다면 100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노라”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생애에 최대의 부와 권력과 명성을 누렸고, 일만 벌 이상이나 되는 호화스런 의상들, 언제든지 명령대로 움직이는 수많은 신하들,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할 만큼 광대한 제국의 주인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부와 명성, 또는 악함과 선함,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이 한번 정하신 죽음을 비켜 갈 수는 없습니다.
휼륭한 전도자요, 부흥사로서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던 D.L. 무디 역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나 그의 모습은 오늘 많은 성도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말하기를 “지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보이는 구나.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죽음의 문턱에서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실로 삶과 죽음의 문제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고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맡김으로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성도된 우리의 삶의 원칙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한 사람의 일생동안에 다가오는 각종 행운과 불운,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과정들이 실제로는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발생하고 있는 일임을 나타냅니다. 본 절에서는 이처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인간의 행, 불행이 도덕적, 종교적 선행의 유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죄인의 비극은 죄에서 돌아설 기회를 놓친 것에 있습니다. 죄를 범하고 살아도 당장 형벌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도 당장 벌을 받지 않는 것은 다행한 것이 아니라 정말 비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말 비극인 이유,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히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클로드 시몽은 인생은 아무런 살 가치도 의미도 목적도 없고 자신은 그저 펜을 들고 계속 무의미하게 쓰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구라파 정신계를 짙은 먹구름처럼 덮은 절망의 하늘 아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나아갈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2만의 히피들은 1주일 동안 "우리는 모두 미쳤다 미쳤어."라고 했고 텍사스의 소수의 히피들은 ‘너 죽고 나 죽자’는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인민사원 교회의 짐 존스는 가이아나에서 900여 명의 자살자를 모집해서 집단 자살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허무의 강가에서, 절망의 벽 앞에서, 불안의 안개 속에서 의미 없는 소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은 무덤사이에서 2천 귀신들린 거라사인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제 정신이 듭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5:15)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의 말입니다. 솔로몬 왕은 아무리 용맹한 사자라도, 죽으면 그만이요, 천하고 용맹스럽지 못한 개라도 살아 있음이 낫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절망이요 끝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음은 생명이 있다는 것이요, 희망과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에서 삶의 고귀성과 살아 있음의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간증입니다.
그분은 얼마 전 심장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심장경색증 때문에 가슴을 가르고 다리에서 동맥 30㎝를 잘라 심장의 낡은 혈관을 대체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 시간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개척해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새삼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러면서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절망이요, 끝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음은 생명이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떠올랐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냥 그것으로 끝났으면, 인류는 절망과 고통의 종말 속으로 영원히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인류에게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살려만 주신다면 내 피 한 방울이 남도록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붓글씨 성경을 쓰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생명을 연장받은 그는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붓글씨 성경을 두 번째 쓰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붓글씨 성경은 10년 동안 작업해 1992년 출간됐으니 20년 만에 하나님께서 다시 붓글씨 성경을 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살아 있는 민중이었지, 죽은 사람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의식과 영혼이 살아 있고,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택함받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벧전 2:9).
시편 89편 48절에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까?”라고 했습니다. 죽음과 음부의 권세에서 건져 줄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 있는 날까지 힘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불가사의를 봅니다. 그들은 나라 없이 2000년을 유랑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유랑을 끝내고 나라를 세웠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영을 받았고, 거듭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방인들의 뜻을 좇아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그쳐야 합니다. 그것은 과거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자들입니다. 거룩한 영으로 살아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요새 "교회가 타락했다, 성도가 타락했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저는 그 말을 역으로 생각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로 듣고 싶습니다.
타락이라는 용어를 개나 돼지에게는 쓰지 않습니다. 그 말은 오직 사람에게만 씁니다. 왜 사람에게만 그 말을 쓸까요? 그 말을 좋게 해석하면 아직도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했다는 말에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타락했고, 성도가 타락했다는 말은 좋게 해석하면 아직도 세상은 교회와 성도가 바른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성도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 지켜야 할 마땅한 본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본문을 통해 성도의 본분과 자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기본적인 본분은 무엇일까요?
1. 성도는 기쁨과 즐거움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기독교를 가리켜 소위 ‘기뻐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었을 때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라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해야 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성령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혀 있을 때에 비로소 환경을 초월해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늘 기뻐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 9- 11)
성도의 삶은 기본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기적 중의 기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정말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얼굴이 밝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처럼 밝게 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왜 얼굴이 어두워집니까? 대개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로서 얼굴을 펴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어야 합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마음이 예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쁜 마음을 가지고 즐거워하면 실질적으로 얼굴도 예뻐 보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피부가 검은 흑인이었지만 마음이 예쁘니까 얼굴도 예뻐 보입니다. 그러니까 천 명의 처와 첩을 둔 솔로몬 왕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지 않습니까? 사실상 사람을 끄는 것은 예쁜 얼굴이 아니고 예쁜 마음입니다. 얼굴이 예쁘지만 마음이 추하면 그 예쁜 얼굴이 더 추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예쁜 마음을 가지면 말씨도 예뻐지고, 표정도 예뻐지고, 인상도 좋아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추하면 표정도 이상해지고, 말도 이상해지고, 인상도 이상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말 예쁜 마음을 가지려고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속한 곳'을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믿는 사람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자주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고 너무 세상적인 축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보십시오. 너무 세상적입니다. 그러니까 불행해집니다. 물론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필요한 것이 한이 없고, 너무 배고픈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소원보다는 우리 주님을 크게 보고, 하나님 자녀 된 것을 감사하며 항상 밝은 표정으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소중한 것이 되고, 주님이 소중한 분이 되지 않습니까? 주님을 가졌는데도 다른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의 얼굴이 어둡다면 우리로부터 무엇을 얻겠다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의 진원지가 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성도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성결한 삶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결한 삶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깨끗한 삶일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렇다면 죄를 적게 지으려는 노력일까요? 그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적게 짓는 것을 보고 "성결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우리 인간은 죄를 실행하지 않아도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결하다는 것이 생각으로 짓는 죄를 멀리하는 것을 말할까요? 물론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성결함의 모습은 그런 차원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차원의 성결함을 원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성결함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성결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는 것 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믿지 않는 것 같은 모습, 어떤 때는 믿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믿는 것 같지 않은 모습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 말씀을 보면 그런 모습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우리의 믿음이 바람에 밀려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성결함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결한 믿음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생각을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결국 우리의 시험은 대개 우리가 가진 믿음의 성결함을 시험하는 시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가게에 불이 났소!" 그때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흔들립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믿는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보여줄 때 하나님은 최종적인 선을 반드시 보장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성결함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큰 시험이 와서 우리를 흔들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세상의 화려한 불빛에도 결코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때 그러한 성결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이 고이게 될 것입니다.
3. 성도는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8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이 구절을 우리는 기도와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사고가 많은 세상입니다. 내 배우자, 내 자녀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합니까? 기도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울타리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예방기도가 사후약방문 기도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기도를 절대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소리가 입에서 나가면서 우리의 귀에는 다시 들리지 않지만 어느 한 시간의 기도라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는 법은 정말 없습니다. 기도의 진짜 능력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해서 나타납니다. 그것을 모르고 눈앞으로 열매로만 생각하니까 기도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20년 후에 자녀의 생명을 지켜주는 힘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떤 열매를 맺는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도 기도가 꼭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 이전에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는 기도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고 나면 아주 중요한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와 삶을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거룩한 지혜입니다.
오늘날 살다보면 얼마나 인내를 요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넉넉하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고독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그냥은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있을 때도 그냥은 참기 힘듭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으면 참을 힘이 생깁니다. 믿는 것은 결국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귀가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우리를 무서워하겠습니까? 마귀가 가장 싫어하고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성도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성도의 기도를 막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막습니까? 일에만 몰두하게 하고 기도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우리는 이 마귀의 전략을 알고 무엇보다도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마귀는 기도가 없다면 어떤 유능한 성경연구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의 마땅한 본문이며 은총과 축복의 통로입니다.
4. 성도는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기에 힘써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가정은 사실상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리고 큰 의미에서 교회도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교회생활도 사실상 그것이 바로 천국생활입니다.
가정과 교회! 이 둘은 땅에 존재하는 가장 소중한 천국공동체입니다. 이 가정과 교회가 평화로우면 그것은 어떤 소중한 보약보다도 보약입니다. 그러나 가정과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기에 힘써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어려운 환경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환경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러한 환경은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주신 분복인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비슷한 원리로 가정은 이루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특히 남자에게는 3가지가 꼭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책임감입니다.
성경은 남자에게 말합니다. "모든 책임을 떠 맡으라." 바운즈는 말합니다. "모든 남자는 가정의 책임적인 도구들이다."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경제적, 도덕적, 신앙적 책임을 지는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자상함입니다.
남편은 손이 큰 남자가 되어야 하고, 통이 큰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보살피고, 베풀고, 칭찬하는 마음의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외유내강해야 하지만, 남자는 외강내유해야 합니다.
셋째는 확고한 중심입니다.
남편은 변덕이 심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지도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 비위 맞추기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도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특히 남편을 존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제대로 하는 것이 뭐 있냐?"라는 말은 남편에게는 치명타입니다. 가정에서는 서로간에 자존심 지켜 주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특히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꺾는 일이 없도록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 꼭 기억할 것은 헌신하려는 마음입니다. 가정은 행복을 채굴하는 곳이 아니라 행복을 저축하는 곳입니다. 얻으려는 사람, 주장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가정과 교회는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헌신하고 베풀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가정과 교회는 천국이 됩니다.
일본에서 동경 올림픽이 열리기 전해의 일이었습니다. 올림픽 때문에 스타디움을 확장하기 위해서 인부들이 지붕을 헐었습니다. 그런데 지붕을 헐어보니 벽에 도마뱀이 꼬리에 못이 박힌 채 살아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전에 공사했던 사람들에게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3년 전에 박은 못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인부들은 어떻게 3년 동안 도마뱀이 그런 상태에서 살아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사를 중단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한참 공사를 중단하고 지켜보니까 한 구석에서 도마뱀 한 마리가 나오더니, 그 도마뱀이 꼬리에 못이 박힌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3년 동안 친구를 위해서 하루에 서너 차례 먹이를 물어다 주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부들은 사랑과 헌신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랑과 헌신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를 만들기를 원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부를 행복하게 만드는 세미나에 가서 좋은 말 많이 들으면 됩니까? 다른 오묘한 방법을 생각할 것 없습니다. 사랑과 헌신이 있으면 됩니다. 성도는 사랑과 헌신으로 가정과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기에 힘써야 합니다.
5. 성도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킹슬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당신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만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을 능력을 다해 수행한다면 당신의 내면에 자제력, 근면함, 만족감 등 게으른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수많은 덕이 쌓여질 것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에는 근면하게 일할 것을 촉구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에 얼마나 충실하십니까? 죤 밀턴은 더 나은 시를 쓰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골3:23)하면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까지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가끔 믿는 성도 중에 믿음을 오해하고 땀을 흘리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놀고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열심히 땀을 흘려야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믿는 사람으로서 바른 인간상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유명한 작품에서 지옥을 9층 3단계로 분류했는데, 거기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정신이 똑바르지 않습니다. 믿음은 똑바른 정신을 반드시 수반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그 작품에서 제일 위 단계에는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가 있습니다. 신세를 졌으면서 "언제 졌더라!"라고 오리발 내리는 사람이 거기에 있고, 절제하지 못해서 많이 먹고 숨을 헐떡이는 사람도 거기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 단계에는 예수님을 믿다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있고, 지옥의 제일 아래 단계에는 남을 때리는 사람과 사기꾼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이 똑바른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정신이 비뚤어질까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정신이 비뚤어질까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의 의미, 그리고 땀의 의미를 모르면 정신이 비뚤어집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똑바른 정신을 반드시 수반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의 정신을 바르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기도를 합니까? 기도도 일을 안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의 면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잘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제목도 놀고먹으려는 심리가 담긴 기도제목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에게 복권 심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복권을 사고 당첨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복권 당첨을 위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복권은 아니더라도 그런 유사한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할 때에 그 기도에 응답되지 않는 순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땅, 내일에 대한 약속은 신적 가능성을 가지고 잉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여호수아의 책무와 땀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약속하시고 마련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 약속된 것을 소유하는 일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약속된 내일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난주일 예배에 말씀드린 대로 바로 발바닥으로 밟는 일입니다. 즉 우리의 사명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고, 구체적인 땀을 흘려야 합니다. 약속된 축복은 잘 익은 열매처럼 우리의 무릎에 그냥 던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땀을 흘려 약속된 축복을 얻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으로 주어진 다섯 가지 성도의 본분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 1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성애를 부각시킨 조창인 씨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는 실력으로 인정받던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이 저를 강타했습니다. 글 때문에 감방에 갇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은 제 책임이 아니어서 분한 마음에 죽고 싶었습니다. 만삭의 아내와 홀어머니를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33살의 나이에 글로써 신세를 망치게 됐던 것입니다. 저는 서양문화를 이해하고 지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긴 했지만 예수님은 몰랐습니다. 저는 구치소에서 폭력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는 몸에 낙서한 사람들도 많아 무서웠습니다. 거기에 조직폭력배 두목이 한 분 있었는데 그가 우리한테 찬양을 부르게 하고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배운 사람이라고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데 그가 저한테 설교를 시켰습니다. 정말 엉터리 같은 설교였지만 그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독방을 쓰면서 비로소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는, 완전히 엉터리 같은 말씀도 믿기로 작심하고 읽어갔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다짐했을 때 하나님은 기다리신 듯이 저를 감방에서 꺼내 주셨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네 입에서 나를 시인하는 그것이었다.' 하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감방에서 나가니 제 식구들이 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막힌 도우심으로 저는 전과자 신세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능력과 노력만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저의 한계를 깨뜨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 놀라운 능력에 엎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대로 저는 더 이상 기자생활을 하지 않고 전업 작가로 살아갔습니다. 7년 간 실업자와 같았던 저를 아내는 믿음으로 인내해 주었습니다.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저는 제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매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작가로 변해 갔습니다. 제가 제 한계를 인정했을 때 하나님은 저를 높여 주셨습니다. 저는 10만 명의 독자를 주시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제게 150만 명의 독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기쁨과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저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글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통해 「가시고기」라는 작품을 탄생시키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캄캄 절벽일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어디 기댈 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또 그 믿음을 따라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믿음과 기도, 기도와 믿음, 이 두 가지가 함께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2년 한국과 이탈리아 축구팀이 월드컵 16강전을 벌일 때 안정환 선수가 연장전 후반에 골든 골을 터뜨렸습니다. 그 날 저녁에 그는 아내 이혜원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머리에 공을 얹혀 주신 것 같았다. 네 기도 덕분이다. 고맙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크고 작은 문제를 놓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합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한국 축구팀이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이운재 골키퍼였습니다. 그가 한 번이라도 실수했으면 한국팀이 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거미손처럼 잘 막아낸 데는 가족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김현주 씨와 장인, 장모가 합심으로 계속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승리한 뒤에 이운재 골키퍼는 아내 김현주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을 쳐낼 때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인도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절감한다." 실력이 좋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전9:11).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이기는 것입니다.
본문 17, 18절을 보겠습니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미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개미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입니까?
첫째, 노동의 윤리를 배워야 합니다. 개미는 성충으로 겨울을 나기에 먹이가 부족한 계절을 위해 식량을 저장합니다. 여기서 개미의 저축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 컨베이어 벨트식 분업의 공정을 배워야 합니다. 개미는 군락을 이뤄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개미의 경영방식은 철저한 분업제도입니다.
셋째, 번식의 분업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신기한 것은 번식 분업입니다. 여왕 개미는 평생 알을 낳는 일에 전념하고, 일개미는 여왕을 도와 군락의 번식에 필요한 제반업무를 담당합니다. 개미는 그야말로 고도로 조직된 기업경영을 방불케 합니다.
하나님은 개미의 이런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과연 내가 속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가정 교회 사회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행여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에게 있어 지혜란 매우 소중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어지는 신본주의적 지혜가 아닌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지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함으로 나중에 하나님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으시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실로 우리는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죽고 나면 일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가치있게 보내도록 합시다.
* 기도: 영원히 영광 받으실 주님, 우리가 세상의 헛된 것을 사랑하고 헛된 세상일을 도모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거룩하신 주님의 형상을 닮아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간구하오니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고 자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과 진리를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신 하나님, 최후의 5분을 아름답게 장식하도록 더욱 할 일을 주시고 주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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