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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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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윤식 목사 |
참고 : |
본문 : 삼상 31장 1-13 2011.3.12
제목 :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자의 최후
본문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려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 7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8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9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10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11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
본문 주제 관찰 ①사무엘서의 긴장이 사울의 죽음과 함께 풀린다 ②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섰다 왕이 되고 잃어버린 왕권을 찾아 다윗을 쫒다가 삶을 마감한다 ③사울의 죽음은 다윗은 개입하지 않으므로 책망도 없는 상태이나 “다윗의 선악과”라 할 수 있다 |
1. 자신의 힘을 의지한 자의 최후(1-6절). (적용 : 자신만을 의지할 때 실패한다)
①자신의 힘을 의지한 자의 최후 ②이스라엘이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 ③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다 (결)자신만을 의지할 때 실패한다 |
①내 욕망의 왕에게 의지할 때 ②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후의 삶 ③바울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 (결)하나님 만을 온전히 의지하라 |
①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②하워드 헨드리스 - 인생을 생명선과 목적선의 두 개의 선 ③영적 발전을 나타내는 목적선이 가늘어지면 생명선이 가늘어 질 수밖에 없다 (결)하나님의 영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어 목적선이 튼튼해지는 영적 발전을 이루라 |
2. 부끄러운 죽음(7절). (적용 :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라)
①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②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피폐 ③사울의 죽음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에 (결)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라 |
①말씀이 생명이기에 ②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 ③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담아라 (결)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라 |
①악어 물속에서 헤엄칠 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한 위석 ②하나님의 말씀의 심비로 우리 영혼의 균형을 잡으라 ③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에 균형을 잃어버린다 (결)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균형 잡힌 영성을 이루라 |
3. 비참한 최후(8-13절). (적용 : 하나님 나라의 가치 있는 삶을 살자)
①사는 것 못치 않게 죽는 것도 중요 ②삼손의 죽음 ③사나 죽으나 사명 감당 못한 사울 (결)하나님 나라의 가치 있는 삶을 살라 |
①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고 죽느냐 ②죽은 후에 비참한 결과 ③길르앗 야베스 주민들 (결)하나님 나라의 가치 있는 삶을 살라 |
①죽은 나를 살리기 위해 살아계신 주님이 죽어야 했던 예수님의 사랑의 수고 ②에셀 나무아래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던 사울 에셀 나무아래 허무하게 묻힘 ③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순종하며 가치 있는 삶과 죽음을 맞이하라 (결)하나님 나라의 가치 있는 삶을 살라 |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자의 최후”입니다. 이 제목처럼 사울은 자신의 힘으로 살기를 애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31장은 사무엘 상을 마감하면서 그동안 사무엘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위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내주리라 했던 것처럼 그 말씀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동시에 사무엘 상을 마치기까지 변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함을 요구했고 이 요구대로 왕이 있었으나 결국 블레셋과 같은 적의 침략은 계속되었습니다. 인간이 요구해서 세운 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빼앗고 취하여 갈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로인해 하나님께서 너희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으리라 하셨던 것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이미 예견된 길을 걸어가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울의 최후를 보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슬리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위험한 가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지 말고 사무엘서에 흐르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다시 한 번 깨닫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자신의 힘을 의지한 자의 최후(1-6절).
(적용 : 자신의 힘을 의지할 때 실패한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대치하고 있다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은 도망가고 죽어 길보아 산에 엎드려졌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하나님께 응답하여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과 둠밈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은 응답을 받지 못한 채 자신의 생의 마지막 길을 떠나기 위하여 길보아 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산에서 세 아들이 먼저 죽고 자신 역시 죽고 말았습니다. 내레이터는 사울의 죽음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활 쏘는 적의 병사로부터 중상을 당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무기를 든 자에게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 죽기를 원치 않다며 자신을 칼로 찌르라고 하였습니다. 무기를 든 자가 주저 하자 사울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자기의 칼로 자살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셔서 전쟁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는 전쟁은 승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손을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방관하시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왕을 요구해서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 줄 왕이 필요하다고 하였지만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졌습니다. 이미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지만 사울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힘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죽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 죽기를 원했습니다. 자기의 힘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힘만 의지하며 살아갈 때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2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 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그렇습니다. 내 힘만 의지하며 살아갈 때는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은 대신 싸우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난 승리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 하나님 없이 이방인들 같이 우리도 내 힘으로,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아닌 욕망이라는 왕을 세워 살아갑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기보다 내 욕망의 왕에게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왕을 세워 살겠다고 하였지만 결과는 길보아 산의 죽은 시신들뿐입니다. 자기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 속에 욕망이라는 왕을 세워 살아가지만 그 결과는 허무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내면에 유대교의 율법이라는 왕을 세우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후에 그의 삶은 놀랍게 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환상과 계시를 받고 삼층천까지 올라가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주께서 바울에게 사탄의 가시를 육체에 주신 것은 이것이 자신을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환상과 계시를 보고 하늘에 올라가 비밀을 보고 듣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간증을 하며 자랑할 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을 다 뺀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고후 12:9-10
나에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능력은 약한데서 옵니다. 할렐루야!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한 나를 대신하여 내게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사울은 수치와 모욕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결을 했습니다. 그가 피하고자 했던 수치와 모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접한 여인에게 묻고 하나님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범죄 하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워드 헨드리스는 인생을 생명선과 목적선의 두 개의 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두 개의 선이 있다. 하나는 생명선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선이다. 생명선은 생물학적 발전을 나타내며, 목적선은 영적 발전을 나타낸다. 일단 목적선이 가늘어지기 시작하면 생명선이 가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영적 발전을 나타내는 목적선이 가늘어지면 생명선이 가늘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서 목적선이 가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자 생명을 연장시키지 못하고 오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영적 발전을 나타내는 목적선은 얼마나 튼튼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단히 붙들어 맬 정도로 굵고 튼튼한지요? 하나님의 영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어 목적선이 튼튼해지기를 소원합니다. 내 영을 거스리고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려는 육신을 쳐서 날마다 내 영의 영적인 발전을 이루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의 최후(7절).
(적용 :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라)
사울은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죽는 일은 다 반사입니다만 특히 사울의 경우는 독자들은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사울이 죽음을 당하자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사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 순간에 풀리고 말았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죽었다는 소식은 온 이스라엘에 퍼졌습니다.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 건너편인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등 갈릴리 지방까지 퍼졌습니다. 또한 요단강 건너편 동쪽에 거하는 르우벤, 갓, 므나셋 반지파에 이르기까지 사울과 함께 한 병사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마지못해 세운 왕이나 사울왕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사울이 전쟁에 나가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이들이 버리고 간 성읍을 자연스럽게 차지 할 수 있었습니다. 왕이 없음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울이 할례 없는 자에게 수치와 모멸을 받을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까지 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살고 있던 성읍이 할례 없는 자들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블레셋에게 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그 백성들의 삶까지도 피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이 죽은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그가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몸부림치며 자신의 힘으로 살기를 원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고 역대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대상 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말씀 하신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네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사울의 최후를 보면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갔음을 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은 비극은 사울 개인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의 시작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듣지 않음으로 험난함을 보여줍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울의 실패로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이 비교적 하나님의 말씀이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였던 다윗을 끝으로 솔로몬을 거치면서 르호보암 때 이르러 나라가 둘로 나뉘고 영영 쇠락을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편 기자는 범죄하지 않으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시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담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지 않으면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인생은 범죄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면 세상의 것이 내 마음의 왕 노릇합니다. 죄가 왕 노릇하고 맙니다.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붙들고 있을 때 우리 삶이 균형 잡힌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어떡해야 하나님의 말씀의 균형을 잡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QT를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설교를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균형을 잡는 것은 악어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악어는 자신의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하여 위에 돌을 담아 준다는 것입니다. 악어의 위(胃) 속에도 닭이나 새처럼 모래주머니가 있습니다. 악어도 모래주머니에 돌을 담아 두는데 그 위 속에는 위석(胃石)이라 불리는 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돌은 닭의 모래주머니처럼 소화를 돕기 위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어가 물속에서 헤엄칠 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 위 속에 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악어의 돌의 무게는 자신의 몸 무게에 약 1%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솜씨가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인 줄 모릅니다. 악어의 이 같은 특성을 보고 저도 균형을 잡기 위하여 돌을 위 속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건강검진에서 위속에 담아 둔 돌이 균형을 잡아 주는 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담석이었습니다. 담석증이라는 검진을 받고 담석제거 수술을 하였습니다. 쓸개가 없어지고 나서 깨달은 것이 아! 나는 악어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때에 알았습니다. 사람이 돌을 위속에 넣고는 균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균형을 잃어버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은 악어의 위 속에 들어 있는 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담아야 하는 위석은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비(心碑)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담아야 하는 영적인 위석은 하나님의 말씀의 심비인 줄 믿습니다. 고후 3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개역 한글)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돌비에 새길게 아니라 육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십시오. 그 마음판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의 심비로 우리 영혼의 균형을 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 속에 개입하셔서 우리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붙잡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균형을 잡아줍니다. 그러나 사울은 욕망을 담고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개인의 욕망을 붙잡으므로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섰다 왕이 되고 잃어버린 왕권을 찾아 다윗을 쫒다가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씀을 잃어버리니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울이 쫓아야 할 것은 헛된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쫒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에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바라고 원하는 것을 쫓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하나님을 바라고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내 마음에 담아 균형 잡힌 영성을 이루기를 축원합니다.
3. 죽어서 맞이한 비참한 최후(8-13절).
(적용 : 하나님 나라의 가치 있는 삶을 살자)
전쟁이 끝나고 그 이튿날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인들이 죽은 이스라엘 병사들의 옷을 벗기고 전리품을 챙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갑옷과 소지품으로 인해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신분을 구분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의 관습대로 이들은 적장의 목을 베고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블레셋 사람들에게 순회 전시를 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원대로 살아서 수치와 모욕을 보지 않았으나 죽어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는 것 못치 않게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제 일어난 일본이 대지진을 보면서 아! 우리 인생은 한 순간이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렵게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것이 지진과 해일로 인하여 집어 삼켜지는 것을 어떻게 해 볼 도리 없이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손을 쓸 수 없이 소중한 인명과 재산이 순식간에 물에 바닷물에 떠내려가고 사라져버렸습니다. 단 하루의 재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진의 공포가 한 달간이나 지속된다고 합니다.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대재앙을 보면서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가치 있는 생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생각 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울의 죽음을 보면서 사사시대의 사사였던 삼손을 생각해봅니다. 삼손이 들릴라에 의해 블레셋에 잡혀 눈이 빠지고 놋줄로 맨 상태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재주나 피우게 되는 조롱을 당하게 되자 삼손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기의 원수를 갚아 줄 것을 기도한 후 성전의 기둥을 붙잡고 블레셋 사람과 같이 죽기를 원한다며 성전 기둥이 무너져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죽었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아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삼손은 죽기 전에야 자신이 나실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했나를 깨달았습니다. 삼손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좀 아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달란트를 죽기 전에 충실히 감당하였더라면 삼손의 생애가 더욱 빛났을 것입니다. 사울은 이마져도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왕으로서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왕을 죽이려고 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몽땅 소진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삶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삶을 소모품 인생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최대의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삼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나 죽을 때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살아서도 하나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하나님 말씀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을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고 죽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할례를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에 의하여 목은 베어지고 갑옷이 벗겨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목 따라 몸 따라 분리되었습니다. 사울의 목은 블레셋의 아스다롯 신전에 바쳐진 상태입니다. 가나안의 여신으로 풍요와 다산의 신에 받쳐졌습니다. 사울이 살아서 수치와 모멸을 당하지 않으려 자살을 택하였지만 죽은 후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블레셋은 자신들의 승리를 축하기 위해 사울의 머리를 베어 신전에 두었습니다. 사울은 패배자가 되어 아스다롯의 신전에 바쳐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이고 머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삼상 17:54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그리고 후에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성막에 기증했다가 사울의 쫓김을 당하게 되자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서 받아가지고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과 다윗은 사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할례 없는 이방인을 대하였지만 사울은 반대였습니다. 그의 머리는 베어지고 갑옷은 벗겨져 블레셋의 아스다롯 신전에 있고 죽은 시신은 따로 벧산 성벽에 못 박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모든 힘센 장사들이 20Km의 길을 밤새도록 계곡과 산길을 걸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거두어 잘 수습하였습니다. 이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사울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암몬 사람 나하스의 공격으로부터 사울이 구해주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나하스에게 큰 모욕과 위험으로부터 사울이 구해 준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나서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것으로 끝났다고 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죽은 나를 살리기 위해 살아계신 주님이 죽어야 했던 예수님의 사랑의 수고를 생각해봅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이 찬양 가사 처럼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 속한 삶인 줄 믿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살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의 시신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불살라 장사되어 지고 그 뼈는 에셀 나무 아래에 묻혔습니다.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화장(火葬)을 하고 뼈는 추려 에셀 나무아래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한 때 사울은 에셀 나무아래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삼상 22: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에셀 나무아래에서 권력을 잡았던 사울은 에셀 나무아래 뼈를 묻었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도 부질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의 최후를 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헛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귀한 것이기에 헛되이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삶도 죽음도 하나도 헛된 것이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순종하며 살아 있을 때도 죽음을 맞아할 때도 하나님께 가치 있는 삶과 죽음을 맞이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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