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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손님접대와 중보기도

창세기 복음............... 조회 수 3162 추천 수 0 2011.04.20 07:05:31
.........
성경본문 : 창18:1-33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아브라함의 손님접대와 중보기도

본문: 창세기 18장 1 - 33절

 

 얼마 전 모 일간지에 실린 한국의 중산층에 대한 기사입니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10여년 정도 한 직장에 다니고, 월소득은 400만 원 이상 되고, 30평 이상 되는 아파트에 살며, 2000cc 이상 된 중형차를 타야한다.’ 중산층 삶의 질이 집, 차, 소득이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프랑스의 전 대통령 퐁피두는 중산층에 대해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중산층은 외국어 하나쯤 자유롭게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추고, 스포츠를 즐기거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접대를 할 줄 알며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설 줄 알아야 한다.’

풍피두가 말한 중산층이란 남에 대한 배려가 강하게 묻어있으면서 사회정의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건전한 문화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실과 노력,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손길들이 인정받는 사회, 그런 사람들을 중산층이라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13: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찾아온 손님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손님으로 온 분이 누구였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이 손님의 말씀이 진행되면서 손님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손님은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이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셔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나타난 사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손님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오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손님의 몇 가지 특성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 손님은 예기치 않을 때 찾아왔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오정)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손님이 오정에 찾아왔습니다. 여기 오정은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곳은 사막 지대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사막 지대의 한 부분입니다. 사막 지대의 사람들은 대개 오정에는 점심을 먹든지 아니면 낮잠을 잡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달콤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귀찮은 일 아닙니까? 가족끼리 둘러앉아 시간을 가지면서 한가롭게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방문할 때도 식사시간은 피해서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까? 그런데 한참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식구끼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예고 없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귀찮게 생각할 수 있는 때를 선택해서 찾아오셨을까요? 이것은 문자 그대로 테스트였습니다. 내가 손님을 맞이하기에 가장 귀찮고 거북스러운 이 시간에 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맞이하는가 하는 것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수한 상황이 아닌, 간단하고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장에서 우리를 시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만, 찬송할 때만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맞이하기에 가장 귀찮고 피하고 싶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이런 일상생활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삶의 아주 간단한 부분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시험받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손님은 어디에 찾아왔습니까?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장막 문 앞에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단에 찾아 오셨다면 우리가 얼른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도 제단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제단에 나타나지 않으시고 장막 문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주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내 가슴에 뜨겁게 성령의 감동이 찾아옵니다. 내 마음이 새로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신선한 성 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예배드리는 순간에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집 문 앞에도 방문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성전이 처음으로 세워졌을 때 하나님이 이 성전 안에 특별한 의미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음을 구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성전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성전 밖에는 하나님이 안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밖에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한 장소를 택하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당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예배당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 같고 집에서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우리의 의식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뜻밖의 다른 모습으로 예기치 않았던 장소에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주님을 만나 보셨습니까? 주님은 우리 집에도 찾아오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직장에도 찾아오십니다. 여기서도 뜻밖의 장소에, 뜻밖의 때에 찾아오신 것을 보세요. 더구나 이 손님은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까? 손님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세 사람의 손님 중에 한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아마 천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천사를 대동하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창세기 19장 1절과 비교해 보시면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날이 저물매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했습니다. 내용으로 보아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돔에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손님은 천사였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 세 손님과 아브라함이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13절에 보면 주어가 갑자기 바뀝니다. 여기서는 세 사람의 손님과 아브라함밖에는 없는데 주어가 바뀌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여기 두 천사를 대동하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꿈에 본 것처럼 금빛 찬란한 흰 옷을 입으신 분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손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내가 늘 접촉하는 친구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고객을 통해서 나를 깨우쳐 주시고, 교훈을 던져 주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곁에 있는 친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 친구를 통해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깨우쳐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빛 찬란한 모습으로 환상이나 꿈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날마다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환경을 통해서 나를 깨우쳐 주시고 만나주신다는 사실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때, 예기치 못한 장소에,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 귀한 손님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귀한 손님을 친절하게 맞이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 2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바로 이 말씀과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구약 창세기의 말씀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 손님들을 시원치 않게 대접했다면 나중에 자기를 방문한 그 낯선 손님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 치며 후회했을까요.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하는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손님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로마서 12장은 흔히 헌신의 장이라고 말하는데 1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는데 이 은사를 가지고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3절에 보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헌신하는 것은 추상적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열심히 나오시는 것도 헌신입니다. 그런데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도 헌신입니다.

디도서 1장 7∼8절에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그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도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 중에 하나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중국에 황대라고 하는 관리가 있었습니다.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그는 또한 애처가로서 자기 모든 것을 부인에게 맡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인색하기 그지없는 사람으로서 한번 움켜쥔 것을 절대로 내놓는 일이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황대의 부인이 집을 비우고 식모인 홍옥 이 집을 잠시보고 있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나그네가 동냥을 하러왔습니다. 홍옥은 가엾은 생각이 들어 먹다 남은 떡 몇 개를 집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잠시후 황대의 부인이 황급히 들어서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골목에서 허름한 나그네를 봤는데, 너 혹시 뭐라도 집어준 것 아니냐?"

"예. 먹다 남은 떡 몇 개 집어주었어요ㅣ."

"뭐라고?" 떡! 우리 집에는 먹다 남은 떡이라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는지 모르느냐. 빨리 가서 도로 가져와!" 하는수 없이 홍옥은 뛰어나가 나그네를 찾았습니다. 한참을 가다 나무아래서 쉬고 있는 그를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그녀는 대신 자기가 갖고 있던 돈 몇푼을 건네주었습니다. 나그네는 떡을 돌려주고 돈을 받으며, 허리춤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대신 이걸 받으세요. 제 정성입니다.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올겁니다."

홍옥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펴보니 작은 거울이었습니다. 그 후로 거울을 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이것을 안 황대의 부인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습니다. 그녀는 거울을 빼앗아 자기 방에 두고 수시로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더욱 험상궂게 변해갈 뿐이었습니다. 며칠 후 황대의 부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홍옥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한 홍옥은 그길로 현지사의 아내가 되어 더욱 많은 선행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나그네 대접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자 마련하신 기회로서, 이를 잘 감당한자만이 축복받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3:2)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여기서 ‘내 주여’ 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선 주라는 표현이 자기의 주인이나 높은 사람에게 두루 쓰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님에 대한 도리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얼마나 친절한 대접입니까? 이렇게 아브라함은 친절하고 공손하게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혼자서만 손님을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 모두를 동원해서 대접했습니다. 집을 개방해서 손님을 대접하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가장 한 사람의 결심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렇게 손님 대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면 양상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성도님 가운데 남자 분이 교회에 나오시고 부인은 신앙생활 하지 않는 댁이 혹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교회에서 심방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일에 대한 헌신에서 반드시 부부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부부가 함께 주님께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참으로 많습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이 마음을 상쾌하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단순히 손님의 몸만 접대하고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까지 평안하게 해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 진정한 손님 대접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섬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종이 여럿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물론 종들도 일했지만 아브라함이 앞장서서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하고’

사라는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부부의 헌신을 봅니다. 그리고 종들도 일사불란하게 아브라함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한 가족이 일체를 이룬 이 헌신을 보십시오. 이런 가족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브라함은 손님을 마음 중심으로 섬겼습니다. 그의 섬김은 의무적인 섬김이 아니었습니다. 의무적인 섬김은 섬김이 아닙니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인 줄 알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십니까?

본문 8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버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 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섬김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손님을 대접함으로 그에게 임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손님을 대접한 것 이 부지중에 행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알지 못하고 한 일이었습니다. 지나가는 평범한 손님을 그저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천사였습니다. 우리가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무 천사입니다. 그때 저를 당신 집에서 잘 대접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니, 우리 집에 언제 오셨었습니까? 하고 놀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주린 사람이 있습니까? 목마른 이웃이 있습니까? 손님이 있습니까? 헐벗은 사람이 있습니까?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옥에 갇힌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이 지구촌에서 하루에 삼만 명이 단순히 먹지 못해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부지중에 손님을 대접해서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십시오.

둘째, 문제의 해결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한참 손님을 대접하고 있는데 찾아온 손님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장막 안에 있는데요. 그가 가라사대. 여태까지 주어가 복수로 나오다가 여기 와서는 단수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집중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처음에는 자신들을 방문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모르다가 차차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임을 알게 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이웃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접해야 할 나그네, 하나님의 사자는 누구입니까?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해결 못한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문제 해결의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문제에 빠지지 말고 문제보다 훨씬 더 커다란 아픔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 이웃을 보십시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섬기세요. 그때 나의 걱정이 사치에 속한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이 사치스런 고민일 수도 있습니다.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있는 우리의 이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고민은 차라리 사치에 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손님 대접을 힘썼더니 하나님이 ‘네 문제는 내가 책임져 주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라가 장막 안에서 이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나나 내 남편이나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때는 지났는데 하나님, 아무리 아들을 주신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이제는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설득 하십니다. 내가 하면 하는 거야.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이 두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흥미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사라더러 왜 웃어? 하셨습니다.

본문 1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여기서 양편의 말이 사실 다 맞습니다. 사라가 겉으로 소리나게 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웃었습니다. 손님을 대접한 자리에서 뜻밖에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을 받는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의 이 복된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사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가정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웃음’ 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이제 웃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로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왔던 손님들은 소돔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소돔성의 심판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손님들을 겸손히, 그리고 정중하게 전송했더니 그 다음을 성경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그 뜻을 숨기시겠습니까?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허락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브라함은 소돔성의 운명을 붙들고 하 나님 앞에 중보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왜 이 사실을 알리셨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 아브라함, 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 입니다. 구약 역대하 20장 7절에 보면 ‘주의 벗 아브라함’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벗 아브라함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일을 아브라함과 함께 경영하십니다. 이 영광, 이 특권을 어떻게 누리게 되었습니까? 굉장한 일을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찾아온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헌신도 이렇게 구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손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헐벗은 이웃입니다. 고생하는 내 동포입니다.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찾아와 우리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들을 마음속으로 맞아 정성껏 대접하면 나중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기억한다. 부지중에 네가 나를 대접했느니라. 성탄절에는 동방박사들이 귀한 예물 가지고 와 어린 예수님께 드리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귀한 분이 오십니다. 이 손님을 공손하게 친절하게 맞이합시다. 온 가족이 맞이합시다. 마음 중심으로 섬기십시다. 그럴 때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고, 내 문제가 해결 받게 되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귀한 분을 잘 영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사도행전 20:35에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25: 33- 46)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가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한참 가시다가 마음이 바뀌셨습니다. ‘아니지, 아브라함한테는 이야기해야지.’하며 돌아오셔서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 놓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친하기 때문입니다. 친한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더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친한 사람에게는 마음에 있는 비밀을 털어 놓습니다. 그러나 덜 친한 사람에게는 말을 골라서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지난 24년 동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얻고 나서도 13년간이나 믿음의 휴면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상급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 하실 때까지도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인간적인 모든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믿음을 받아들였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는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아브라함은 그 즉시 그냥 가지 못하게 붙들고 발을 씻기고 떡을 대접하고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해드리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에게서 전혀 볼 수 없었던 태도였습니다. 아마도 이 때 하나님과 굉장히 친해졌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과 친해지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친해지십시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도 열심히 나오는데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같이 전혀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음성도 들으며 그분의 비밀도 알게 되고 자신의 비밀도 하나님께 알려드립니다. 그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8~19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요점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아브라함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겠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모든 열방의 조상이 될 것이다.’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축복을 주기 위하여 너와 네 자녀들을 택했고, 그 약속은 이 자녀들에게도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미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새로운 것을 20~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새로운 말씀은 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나 심각해서 하나님이 그 사실을 친히 알아보려고 가시던 중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는 부르짖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는 소리를 지릅니다. 남을 억울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학대하고, 고통을 주면 그 고통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백년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압제 속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그 고통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기에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눈물 흘리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압제하고 고통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만약 그런 일을 하면 당장에는 힘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소리가 하나님께 들린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와서 확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그냥 심판하지 않으시고 일단 오셔서 확인하십니다.

‘확인한다’는 말은 ‘기회를 준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때 회개를 하고 마음을 바꿨으면 무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들이 확인조사를 하려고 소돔과 고모라에 갔을 때 그들은 무례하게 행했을 뿐 아니라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심판하고자 하시는 마음을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 모든 말을 듣고 지금 천사들이 소돔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자기의 조카 롯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롯이 도대체 누구길래 아브라함을 이렇게 당황하게 만들었을까요? 사실 롯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극히 인간적이며 항상 부담되는 사람, 물질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에도 롯은 자기의 이익을 찾아 소돔과 고모라로 이사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상하게도 롯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롯이 한 때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동방의 왕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소돔과 고모라의 왕이 패하게 되어서 롯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앞뒤를 돌보지 않고 자기 집에서 기른 가신 3백18명을 데리고 그날로 무모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움을 줄 때 자기가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마칩니다.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고 문제가 생기면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손해보면서까지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행복을 찾아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던 이러한 롯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본문 22절을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마도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로 떠났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붙잡았는 데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고 그들에게 시간은 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시계폭탄이 작동되기 시작했을 때는 그 시간 안에 그 폭탄을 해체해야 하듯이, 아브라함의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별 볼 일 없고, 허물도 많고, 나에게 많은 해를 끼쳤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에 자기의 시간도 내고 헌신합니다. 가치 없는 것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귀어 봐야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에게 해를 끼치고 힘들게 했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 잊어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 배신을 잘 하고, 실수도 많고, 강퍅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이런 사람을 잊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예수님의 이 마음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롯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말 좀 붙여보려고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할까 고민했던 아브라함에게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해 보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자기 죄로 인하여 심판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약 혹시 그 소돔과 고모라 안에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본문 24절을 보겠습니다.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시한 카드는 ‘50명’이었습니다. ‘이 땅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죽일 수야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의인 50명을 소돔과 고모라 성과 함께 멸망시킨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라고 큰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마도 아브라함은 목소리를 제법 높이고 얼굴도 상기된 상태에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당당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별 볼 일 없는 롯 하나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의 예상을 깨고 하나님께서 너무나 쉽게 ‘OK’하셨습니다. 좋다고 허락하실 뿐 아니라 의인이 오십명만 있으면 이 땅의 모든 백성들까지 모두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27~28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이 작아 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티끌처럼 작아졌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다섯 명만 빼면 어떨까요? 그래도 그 성을 멸하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무 갈등 없이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9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다섯 명을 빼도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하나님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며 ‘사십 명’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0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삼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더 작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화내지 마십시오. 화내지 마시고 제발 그냥 들어만 주십시오. 삼십명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십 명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당혹스러워하며 질문하는 아브라함에게 스무 명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2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열 명’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열 명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는 끈질기고 집요하기까지 합니다. 열 명은 당시 이스라엘의 수 개념에 있어 무리를 나타내는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나는 나의 이웃을 위해 얼마나 지속적으로 중보기도를 합니까? 아브라함처럼 이웃의 죄를 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너무 비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명에서 45명으로, 다시 40명으로, 30명, 20명, 10명으로 숫자를 바꿀 때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이것이 중보기도자의 모습입니다. 하잘 것 없고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미움 받으면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붙잡고, 수치를 각오하는 모험을 시작합니다.

사랑은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수치를 겪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못 되었을 때 부모가 수치를 당합니다.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위하여 수치와 모멸감을 가져보지 못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셨고 모멸감을 맛보셨습니다. 내가 한 것은 배신과 죄 뿐인데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지 못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감당하기 힘드셨습니다.

‘제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 이 고난의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수치와 모멸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옆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소자, 가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데는 너무나 주저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치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도 내고 헌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 버려진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참된 중보기도자는 이러한 수치스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저는 여기서 또 한 가지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수치스런 중보기도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참된 중보기도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인생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고민은 다 ‘나’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내 인생을 바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의인 1명을 제안하였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참고로 예레미야서 5장 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신앙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바르게 중보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본문 3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떠났습니다. 이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의 능력은 살아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받았지만 롯은 심판 중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중보기도의 승리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이 비참하고 처절한 중보기도를 통하여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의 용서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 끝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예수님, 이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똑똑하고 그럴 듯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하고만 사귀고 있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와 힘없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과 창녀들과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자가 됩시다. 형제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이웃의 슬픔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아픔과 슬픔을 마치 내 아픔과 슬픔처럼 생각하고 하나님께 중보 기도합시다. 만일 우리 중에 두 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마18: 19, 20) 그렇게 된다면 우리 신앙 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되겠습니까?(딤전2:1, 약5:16)

 

 *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손님접대와 중보기도에 힘쓰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항상 기뻐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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