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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장식품이 아닙니다"(Beauty Is Not A Decoration)"
디모데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109 추천 수 0 2011.04.30 23:51:29| 성경본문 : | 딤전4: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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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 1. 14
새해에 받은 말씀 2:
"아름다움은 장식품이 아닙니다"(Beauty Is Not A Decoration)"
--디모데전서 4:11-16; 창세기 1:1-4 지금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그분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셔서 아름다움을 이루십니다. 영적 생활의 목표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1. 내용 연구
1) 창세기 1장에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십시오.
2) '좋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조화'를 뜻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천지가 조화롭게 지어졌다는 말은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3) 디모데에게 주신 바울의 권고를, 신앙에 있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다시 읽어 보십시오.
2. 토의 문제
1) 당신의 신앙을 성찰해 보십시오. 혹시 한 편으로 기울어진 면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p> 2) 당신으로부터 재채기를 유발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혹시 당신의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재채기를 불러 일으키는 면이 없을까요? 나와 다른 색깔의 신앙인들에게 너그럽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우리 교회가 균형을 잡아야 할 면이 있다면, 어느 면일까요? 그 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4) 성령께서 당신 자신을 그리고 우리 교회를 다스려 주셔서 조화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시도록 함께 기도하십시다.
1.
여러분은 지금 이 강단에 있는 stained glass를 보고 계십니다. 이 작품은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상징(emblem)인 십자가와 성령의 불꽃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불꽃이 타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저 아래는 진한 색깔의 유리 조각이 많이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연한 색깔의 유리 조각이 많습니다. 색깔의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색깔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 stained glass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는 이유는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색깔의 균형이 맞지 않거나, 색깔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균형과 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술 작품도 그렇지만,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고, 신앙 생활에서 있어서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교회들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아, 저 교회는 참 잘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교회가 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균형과 조화에 큰 원인이 있을 것 입니다. '아, 저 교회는 왜 저렇게 늘 불미스러운 모습만 보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교회를 살펴 보십시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균형이 깨져 있고 조화가 안된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저분은 정말 믿는 사람 다워'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는 분이 주변에 계십니까? 그분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필경 그분의 신앙과 삶 속에 다양한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그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느낌을 주는 분이 계시면, 왜 그런지를 한 번 질문해 보십시오. 그분의 신앙에 있어서 균형이 잡히지 않는 면이 있고, 또한 그분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서 조화되지 않은 면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신 것들을 보시면서 "좋다, 참 좋다"라고 감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번 그렇게 하고 만 것이 아니라, 6일 동안, 한 단계의 창조 사역이 끝날 때마다 그렇게 감탄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말 '토브'는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창조된 것들의 외적인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된 것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균형과 조화는 우주의 원리이며, 따라서 인생의 원리라는 말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2.
인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기독교인들 중 하나였던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살아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믿고,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걱정과 염려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찌되나?' '우리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으면 어쩌나?'
이 질문이 좀 유치해 보입니까? 그럴지 모릅니다.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처 음 믿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먼저 믿은 사람들의 예를 거울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하는 일들이 모두, 그들에게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일도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시기를 알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면, 그 시기에 맞춰 모든 준비를 할터인데, 그것을 알 수 없으니, 불안하게 느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몇 년 후에 쓰여진 데살로니가후서를 읽어 보면,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너무나도 절실히 기다리다가 지쳤던지, 이 즈음에는, '예수의 재림은 없다'거나, '예수의 재림은 이미 이루어졌다. 더 이상 올 것이 없다'는 식의 가르침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게으름과 안일함에 빠져서 놀고 먹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자주 균형을 잃었던 영역을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재림의 날을 알아냈다고 주장하거나, 성경에 담긴 비밀을 풀어서 그 날을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끊임 없이 있어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재림은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5장에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며 현재를 살도록 신앙에 있어 균형을 잡으라는 말입니다. 하루 하루를 온전히 살아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균형 잡힌 신앙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늘 경건하고 참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라도 주님 앞에 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면서, 동시에 먼 훗날을 내다 보며 사과 나무를 심을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영역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먼저, 초대 교회의 예배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약 20명 정도의 신자들이 데살로니가의 어느 집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중간 중간, 사도들로부터 전해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고, 다시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으로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방언을 통역해 줍니다. 때로는,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어느 사람의 죄가 방언 기도를 통해 밝혀지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통곡하고는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러면 함께 모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일어나서,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라고 말하면서,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아멘,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계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또 한참을 기도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을 성 경에서는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두 시간 혹은 세 시간 동안 계속합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다시 모일 것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기도회였습니다. 저는 어릴 적 시골에서 이런 분위기 의 기도회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기도회는 강력한 영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영적 모임에서는 방언, 신유, 축사 등 놀라운 일들이 발생합니다. 저는 그런 역사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일상사처럼 알고 자랐습니다. 제 어릴 적, 제가 살던 지역에 은사 운동이 뜨겁게 일어났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기도회에는 문제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방언을 하고 싶은 나머지 방언을 흉내 냅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았다 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믿고 말하지만, 실은 그 말이 성령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인 경우도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을 통해 역사하고 있다고 믿지만,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오도되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순수성을 잃어 버리고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이같은 기도회는 치명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안수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질식시키는 경우도 있고, 예언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원한을 퍼붓는 경우도 있습니다.
순수한 영적 모임이 이렇듯 잘못 가게 되면, 그것을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령이 나를 통해 말씀하신다"면서 예언을 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기도회를 통해 일어나는 즉흥적인 모든 행동들을 억압하고,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한 대로, 모든 것을 예정대로만 행하도록 억압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방언도 식고, 기도의 능력도 식고, 예언도 소멸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던 두 극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과 20절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라는 권고합니다. 이 권고는 성령 운동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준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들의 염려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그런 염려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억압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라 는 뜻입니다.
반면, 21절의 말씀, 즉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라는 말씀은 열광적인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권고입니다. 말하자면, "기도하는 중에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해서 다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오인하지 마십시오. 뜨겁게 기도하는 중에도 차갑게 분별하십시오. 뜨거운 기도를 통해 뭔가 느껴지거나 들리거나 보여진다고 느낄 때, 바로 그 때가 가장 속기 쉬운 때입니다. 마음은 뜨겁게 하지만, 머리는 늘 차갑게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 능력을 구하되, 미혹하는 영에 속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4.
신앙 생활에서 걸려 넘어지는 경우를 보면, 대개 극단적인 경향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믿는 것은 좋지만, 그 믿음이 극단으로 흘러, 거기에 모든 희망을 두고 망연히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로 염려하게 하라"(마 6:34)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좋은 태도이나,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하루살이'가 되고 맙니다.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성령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운동은 좋은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 니다. 우리가 신적인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성령 즉 하나님의 영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총을 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열망하며,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흘러,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분별 없이, 아무 배려 없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열광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그러한 열광주의적인 경향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성령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것도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내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통합'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도 필요하고, 하루 하루를 정성스럽게 사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성령을 사모하여 그분을 향해 부르짖는 믿음도 필요하고, 냉철하게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고,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필요하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감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불길 같은 주 성령"을 목청 다해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머물러 앉아 "끼리에"를 음송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균형과 조화를 이룬 신앙이어야 비로소 덕을 끼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살전 1:8)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좋은 소문이 날만한 믿음은 균형과 조화를 이룬 믿음입니다.
디모데에게 준 교훈에서 바울 사도는, "이 일들을 명심하고 힘써 행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딤전 4:15)라고 권고하십니다. 신앙의 발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요소들 사이에 균형이 잡히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디모데전서 4장 1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런 일을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 자신도 구원하고,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이 믿는 바를 항상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균형을 잃고 조화가 깨어져 버립니다. 균형을 잃은 삶은 얼마나 불안하고, 조화가 깨진 삶은 또한 얼마나 흉한지요!
저는 우리 모두의 신앙이 이렇게 잘 균형잡힌 그리고 멋진 조화를 이루게 되기를 빕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다양한 요소들을 모두 포용하고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저 stained glass처럼, 우리의 영성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빕니다. 그럴 때, 바울이 소망한 바대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될"(딤전 4:12)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본이 되기 위해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5.
이것은 교회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의 극단으로 치우친 교회가 아니라 다양한 경향들이 함께 공존하고, 그러한 경향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서로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어느 하나의 경향을 고수하면서 그 방향으로만 나가고, 다른 경향을 억압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우리 몸에 일어나는 앨러지 반응이 그렇답니다. 앨러지 반응은 우리 몸의 체질이 약해져서, 전에 받아들이던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일단 앨러지 현상이 생기면, 앨러지를 일으키는 인자로부터 피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했으니, 앨러지 현상도 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체질이 약한 교회, 앨러지 증상을 앓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성령에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방언 기도에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침묵 기도나 관상 기도에 앨러지 반응을 보이면서, 뭔가 사이비가 들어오는 것 아닌가 경계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선교에 앨러지 반응을 가지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구제하는 일에 앨러지 반응을 보 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체질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들을 가면, 이쪽 저쪽에서 재채기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내어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는 것에 "애취"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는 것을 보며, '저게 무슨 기도냐?'라고 재채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란하고 시끄럽게 움직이면 좋은 신앙이고, 조용하게 행동하면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굴 모양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 신앙의 색깔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와 같지 않으면 모두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고, 여기서도 '애취', 저기서도 '애취', 항상 영적인 코에 휴지를 두르고 다니며, 이것 저것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일수록 영적인 자만심이 강합니다. 그런 재채기 현상이 모두 환경 탓이지, 자신의 체질이 약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거룩하고, 자신만이 바르고, 자신만이 정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아주 건강한 체질을 가진, 균형과 조화를 이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영성 목회를 통해 이루어야 할 매우 중요한 목적 중 하나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보고 재채기하며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가는, 그런 넉넉한 품의 영성을 기를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어떤 경향의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오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또한 자신과 다른 경향들을 만나 배움으로써, 균형감각과 조화로움을 기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영적 앨러지를 치료하여 건강한 체질로 바꿔주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6.
균형과 조화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봅니다. 균형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인 반면, 조화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물론, 꽃꽂이나 stained glass같은 예술품은 작가의 솜씨에 의해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의 조화는 인위적으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신앙의 균형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은 노력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에 이르고 성숙한 교회를 일구는 일에 있어서, 균형을 잡는 일은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몫에 속하고, 조화를 이루는 일은 성령께 맡겨야 할 몫에 속합니다. 우리로서는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거부하고, 나와 다른 것들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성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용기 있게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균형을 잡는 노력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자꾸만 재채기가 나오려고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견디기 힘든 이질적인 것들을 대면하고 견디고 배우고 흡수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께 우리를 맡기면, 그분께서 조화를 만들어 주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된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하신 분이 성령이셨습니다. 성령의 '조화의 영'이십니다. 그 러므로 지금의 내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배워가며 성숙하기를 위해 힘쓰면서, 성령께 나 자신을 맡기면, 성령께서는 그 다양한 요소들이 내 안에서 서로 화합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기도회를 하면서, 조화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를 자주 경험하곤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통성으로 합심 기도를 할 때, 온 성도들이 성령께 붙들려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기도 중에 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웅얼웅얼하는 소리는 들리지만, 말이 들리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마치 합창처럼 어울려 하나의 기도가 됩니다. 이것이 합심기도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재채기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한 번 몰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 꼭 기도를 그렇게 합심으로, 통성으로 해야 하느냐?"고 묻는 분은, "뭐, 꼭 노래를 합창으로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합창에는 독창과 다른 묘미가 있듯, 합심기도에는 홀로 기도하는 것과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합심기도를 하는데, 옆 사람의 말이 또렷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신비롭게도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말이 모두 또렷이 들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도 크게 기도해 봅니다만, '내가 지금 헛말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전혀 조화가 되지 않고, 어울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에게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목소리로 기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연합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는 억지로 합심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이래야 합니다. 성령께서 교인들을 모두 잡아 주셔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묶여야 합니다. 다 같은 소리를 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 같은 식으로 행동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 각각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모습대로 행동하지만, 한 분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심으로, 그 다양한 목소리와 모습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형형 색색의 유리 조각들을 상자 속에 담아 두면 서로 부딪혀 소음만 높아지고 상처만 깊어질 뿐입니다. 그 유리 조각들이 예술가의 손에 잡혀 조화를 이룰 때, 잡음도 없어지고, 상처도 생기지 않으며,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합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 가장 위대한 '조화의 영'이요 '예술의 영'에게 사로잡힐 때,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니, 올 한 해 동안, 인내심과 용기와 너그러움을 가지고 균형을 잡는 데 더욱 힘쓰십시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머물러 있지 마시고, 더 성숙할 수 있도록, 나와 다른 것들을 끌어안아 성장의 기회로 삼으십시다. 우리 교회가 더욱 넉넉한 품을 가지도록 균형을 잡는 일에 힘쓰십시다. 우리만의 노선을 정해놓고, 우리와 다른 것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품 안에 그것을 통합하여 아름다움을 한 층 더 성숙시키도록 하십시다.
하지만 우리의 인내심과 용기와 너그러움만 가지고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때,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연출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의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열망하는 하나님의 성령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십니다.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드러내셨던 그 위대한 조화의 아름다움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욱 성령께 맡기고 의지하고 따라 가십시다. 아름다움은 우리 인생에 있어 장식품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인생의 본질이며, 영성의 본질입니다.
조화의 영이시여,
아름다움의 영이시여,
저희를 사로잡으소서.
저희를 다스리소서.
저희를 물감으로 삼아
저희를 유리 조각으로 삼아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소서.
저희 각자가 주님의 작품이 되도록,
저희 교회가 주님의 걸작품이 되도록
저희를 도우시고
저희를 다스리소서.
아멘.
새해에 받은 말씀 2:
"아름다움은 장식품이 아닙니다"(Beauty Is Not A Decoration)"
--디모데전서 4:11-16; 창세기 1:1-4 지금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그분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셔서 아름다움을 이루십니다. 영적 생활의 목표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1. 내용 연구
1) 창세기 1장에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십시오.
2) '좋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조화'를 뜻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천지가 조화롭게 지어졌다는 말은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3) 디모데에게 주신 바울의 권고를, 신앙에 있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다시 읽어 보십시오.
2. 토의 문제
1) 당신의 신앙을 성찰해 보십시오. 혹시 한 편으로 기울어진 면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p> 2) 당신으로부터 재채기를 유발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혹시 당신의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재채기를 불러 일으키는 면이 없을까요? 나와 다른 색깔의 신앙인들에게 너그럽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우리 교회가 균형을 잡아야 할 면이 있다면, 어느 면일까요? 그 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4) 성령께서 당신 자신을 그리고 우리 교회를 다스려 주셔서 조화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시도록 함께 기도하십시다.
1.
여러분은 지금 이 강단에 있는 stained glass를 보고 계십니다. 이 작품은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상징(emblem)인 십자가와 성령의 불꽃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불꽃이 타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저 아래는 진한 색깔의 유리 조각이 많이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연한 색깔의 유리 조각이 많습니다. 색깔의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색깔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 stained glass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는 이유는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색깔의 균형이 맞지 않거나, 색깔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균형과 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술 작품도 그렇지만,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고, 신앙 생활에서 있어서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교회들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아, 저 교회는 참 잘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교회가 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균형과 조화에 큰 원인이 있을 것 입니다. '아, 저 교회는 왜 저렇게 늘 불미스러운 모습만 보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교회를 살펴 보십시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균형이 깨져 있고 조화가 안된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저분은 정말 믿는 사람 다워'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는 분이 주변에 계십니까? 그분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필경 그분의 신앙과 삶 속에 다양한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그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느낌을 주는 분이 계시면, 왜 그런지를 한 번 질문해 보십시오. 그분의 신앙에 있어서 균형이 잡히지 않는 면이 있고, 또한 그분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서 조화되지 않은 면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신 것들을 보시면서 "좋다, 참 좋다"라고 감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번 그렇게 하고 만 것이 아니라, 6일 동안, 한 단계의 창조 사역이 끝날 때마다 그렇게 감탄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말 '토브'는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창조된 것들의 외적인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된 것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균형과 조화는 우주의 원리이며, 따라서 인생의 원리라는 말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2.
인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기독교인들 중 하나였던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살아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믿고,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걱정과 염려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찌되나?' '우리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으면 어쩌나?'
이 질문이 좀 유치해 보입니까? 그럴지 모릅니다.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처 음 믿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먼저 믿은 사람들의 예를 거울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하는 일들이 모두, 그들에게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일도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시기를 알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면, 그 시기에 맞춰 모든 준비를 할터인데, 그것을 알 수 없으니, 불안하게 느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몇 년 후에 쓰여진 데살로니가후서를 읽어 보면,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너무나도 절실히 기다리다가 지쳤던지, 이 즈음에는, '예수의 재림은 없다'거나, '예수의 재림은 이미 이루어졌다. 더 이상 올 것이 없다'는 식의 가르침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게으름과 안일함에 빠져서 놀고 먹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자주 균형을 잃었던 영역을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재림의 날을 알아냈다고 주장하거나, 성경에 담긴 비밀을 풀어서 그 날을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끊임 없이 있어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재림은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5장에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며 현재를 살도록 신앙에 있어 균형을 잡으라는 말입니다. 하루 하루를 온전히 살아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균형 잡힌 신앙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늘 경건하고 참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라도 주님 앞에 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면서, 동시에 먼 훗날을 내다 보며 사과 나무를 심을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영역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먼저, 초대 교회의 예배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약 20명 정도의 신자들이 데살로니가의 어느 집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중간 중간, 사도들로부터 전해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고, 다시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으로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방언을 통역해 줍니다. 때로는,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어느 사람의 죄가 방언 기도를 통해 밝혀지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통곡하고는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러면 함께 모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일어나서,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라고 말하면서,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아멘,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계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또 한참을 기도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을 성 경에서는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두 시간 혹은 세 시간 동안 계속합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다시 모일 것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기도회였습니다. 저는 어릴 적 시골에서 이런 분위기 의 기도회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기도회는 강력한 영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영적 모임에서는 방언, 신유, 축사 등 놀라운 일들이 발생합니다. 저는 그런 역사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일상사처럼 알고 자랐습니다. 제 어릴 적, 제가 살던 지역에 은사 운동이 뜨겁게 일어났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기도회에는 문제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방언을 하고 싶은 나머지 방언을 흉내 냅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았다 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믿고 말하지만, 실은 그 말이 성령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인 경우도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을 통해 역사하고 있다고 믿지만,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오도되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순수성을 잃어 버리고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이같은 기도회는 치명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안수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질식시키는 경우도 있고, 예언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원한을 퍼붓는 경우도 있습니다.
순수한 영적 모임이 이렇듯 잘못 가게 되면, 그것을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령이 나를 통해 말씀하신다"면서 예언을 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기도회를 통해 일어나는 즉흥적인 모든 행동들을 억압하고,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한 대로, 모든 것을 예정대로만 행하도록 억압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방언도 식고, 기도의 능력도 식고, 예언도 소멸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던 두 극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과 20절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라는 권고합니다. 이 권고는 성령 운동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준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들의 염려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그런 염려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억압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라 는 뜻입니다.
반면, 21절의 말씀, 즉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라는 말씀은 열광적인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권고입니다. 말하자면, "기도하는 중에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해서 다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오인하지 마십시오. 뜨겁게 기도하는 중에도 차갑게 분별하십시오. 뜨거운 기도를 통해 뭔가 느껴지거나 들리거나 보여진다고 느낄 때, 바로 그 때가 가장 속기 쉬운 때입니다. 마음은 뜨겁게 하지만, 머리는 늘 차갑게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 능력을 구하되, 미혹하는 영에 속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4.
신앙 생활에서 걸려 넘어지는 경우를 보면, 대개 극단적인 경향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믿는 것은 좋지만, 그 믿음이 극단으로 흘러, 거기에 모든 희망을 두고 망연히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로 염려하게 하라"(마 6:34)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좋은 태도이나,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하루살이'가 되고 맙니다.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성령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운동은 좋은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 니다. 우리가 신적인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성령 즉 하나님의 영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총을 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열망하며,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흘러,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분별 없이, 아무 배려 없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열광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그러한 열광주의적인 경향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성령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것도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내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통합'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도 필요하고, 하루 하루를 정성스럽게 사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성령을 사모하여 그분을 향해 부르짖는 믿음도 필요하고, 냉철하게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고,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필요하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감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불길 같은 주 성령"을 목청 다해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머물러 앉아 "끼리에"를 음송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균형과 조화를 이룬 신앙이어야 비로소 덕을 끼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살전 1:8)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좋은 소문이 날만한 믿음은 균형과 조화를 이룬 믿음입니다.
디모데에게 준 교훈에서 바울 사도는, "이 일들을 명심하고 힘써 행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딤전 4:15)라고 권고하십니다. 신앙의 발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요소들 사이에 균형이 잡히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디모데전서 4장 1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런 일을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 자신도 구원하고,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이 믿는 바를 항상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균형을 잃고 조화가 깨어져 버립니다. 균형을 잃은 삶은 얼마나 불안하고, 조화가 깨진 삶은 또한 얼마나 흉한지요!
저는 우리 모두의 신앙이 이렇게 잘 균형잡힌 그리고 멋진 조화를 이루게 되기를 빕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다양한 요소들을 모두 포용하고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저 stained glass처럼, 우리의 영성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빕니다. 그럴 때, 바울이 소망한 바대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될"(딤전 4:12)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본이 되기 위해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5.
이것은 교회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의 극단으로 치우친 교회가 아니라 다양한 경향들이 함께 공존하고, 그러한 경향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서로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어느 하나의 경향을 고수하면서 그 방향으로만 나가고, 다른 경향을 억압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우리 몸에 일어나는 앨러지 반응이 그렇답니다. 앨러지 반응은 우리 몸의 체질이 약해져서, 전에 받아들이던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일단 앨러지 현상이 생기면, 앨러지를 일으키는 인자로부터 피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했으니, 앨러지 현상도 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체질이 약한 교회, 앨러지 증상을 앓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성령에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방언 기도에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침묵 기도나 관상 기도에 앨러지 반응을 보이면서, 뭔가 사이비가 들어오는 것 아닌가 경계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선교에 앨러지 반응을 가지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구제하는 일에 앨러지 반응을 보 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체질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들을 가면, 이쪽 저쪽에서 재채기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내어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는 것에 "애취"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는 것을 보며, '저게 무슨 기도냐?'라고 재채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란하고 시끄럽게 움직이면 좋은 신앙이고, 조용하게 행동하면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굴 모양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 신앙의 색깔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와 같지 않으면 모두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고, 여기서도 '애취', 저기서도 '애취', 항상 영적인 코에 휴지를 두르고 다니며, 이것 저것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일수록 영적인 자만심이 강합니다. 그런 재채기 현상이 모두 환경 탓이지, 자신의 체질이 약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거룩하고, 자신만이 바르고, 자신만이 정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아주 건강한 체질을 가진, 균형과 조화를 이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영성 목회를 통해 이루어야 할 매우 중요한 목적 중 하나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보고 재채기하며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가는, 그런 넉넉한 품의 영성을 기를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어떤 경향의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오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또한 자신과 다른 경향들을 만나 배움으로써, 균형감각과 조화로움을 기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영적 앨러지를 치료하여 건강한 체질로 바꿔주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6.
균형과 조화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봅니다. 균형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인 반면, 조화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물론, 꽃꽂이나 stained glass같은 예술품은 작가의 솜씨에 의해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의 조화는 인위적으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신앙의 균형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은 노력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에 이르고 성숙한 교회를 일구는 일에 있어서, 균형을 잡는 일은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몫에 속하고, 조화를 이루는 일은 성령께 맡겨야 할 몫에 속합니다. 우리로서는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거부하고, 나와 다른 것들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성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용기 있게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균형을 잡는 노력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자꾸만 재채기가 나오려고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견디기 힘든 이질적인 것들을 대면하고 견디고 배우고 흡수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께 우리를 맡기면, 그분께서 조화를 만들어 주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된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하신 분이 성령이셨습니다. 성령의 '조화의 영'이십니다. 그 러므로 지금의 내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배워가며 성숙하기를 위해 힘쓰면서, 성령께 나 자신을 맡기면, 성령께서는 그 다양한 요소들이 내 안에서 서로 화합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기도회를 하면서, 조화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를 자주 경험하곤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통성으로 합심 기도를 할 때, 온 성도들이 성령께 붙들려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기도 중에 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웅얼웅얼하는 소리는 들리지만, 말이 들리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마치 합창처럼 어울려 하나의 기도가 됩니다. 이것이 합심기도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재채기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한 번 몰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 꼭 기도를 그렇게 합심으로, 통성으로 해야 하느냐?"고 묻는 분은, "뭐, 꼭 노래를 합창으로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합창에는 독창과 다른 묘미가 있듯, 합심기도에는 홀로 기도하는 것과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합심기도를 하는데, 옆 사람의 말이 또렷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신비롭게도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말이 모두 또렷이 들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도 크게 기도해 봅니다만, '내가 지금 헛말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전혀 조화가 되지 않고, 어울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에게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목소리로 기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연합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는 억지로 합심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이래야 합니다. 성령께서 교인들을 모두 잡아 주셔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묶여야 합니다. 다 같은 소리를 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 같은 식으로 행동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 각각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모습대로 행동하지만, 한 분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심으로, 그 다양한 목소리와 모습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형형 색색의 유리 조각들을 상자 속에 담아 두면 서로 부딪혀 소음만 높아지고 상처만 깊어질 뿐입니다. 그 유리 조각들이 예술가의 손에 잡혀 조화를 이룰 때, 잡음도 없어지고, 상처도 생기지 않으며,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합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 가장 위대한 '조화의 영'이요 '예술의 영'에게 사로잡힐 때,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니, 올 한 해 동안, 인내심과 용기와 너그러움을 가지고 균형을 잡는 데 더욱 힘쓰십시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머물러 있지 마시고, 더 성숙할 수 있도록, 나와 다른 것들을 끌어안아 성장의 기회로 삼으십시다. 우리 교회가 더욱 넉넉한 품을 가지도록 균형을 잡는 일에 힘쓰십시다. 우리만의 노선을 정해놓고, 우리와 다른 것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품 안에 그것을 통합하여 아름다움을 한 층 더 성숙시키도록 하십시다.
하지만 우리의 인내심과 용기와 너그러움만 가지고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때,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연출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의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열망하는 하나님의 성령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십니다.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드러내셨던 그 위대한 조화의 아름다움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욱 성령께 맡기고 의지하고 따라 가십시다. 아름다움은 우리 인생에 있어 장식품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인생의 본질이며, 영성의 본질입니다.
조화의 영이시여,
아름다움의 영이시여,
저희를 사로잡으소서.
저희를 다스리소서.
저희를 물감으로 삼아
저희를 유리 조각으로 삼아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소서.
저희 각자가 주님의 작품이 되도록,
저희 교회가 주님의 걸작품이 되도록
저희를 도우시고
저희를 다스리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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