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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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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8.12.7
희망의 복음 시리즈(4)
"그래도 믿을 데가 있다"
(Yet There Is Someone to Trust)
요한복음 John 1:1-5, 14
1.
오늘로써 네 주일 동안의 ‘희망의 복음: 경제 위기를 영적 기회로!’라는 단기 시리즈 설교를 마칩니다. 첫째 시간에 저는 이 모든 경제 위기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회개만이 희망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경제 위기를 당하여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 어두운 터널을 능히 통과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자족하는 능력이 이 경제 위기를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저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 미국 경기가 침체(recession)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우리 마음을 침체되도록 하는 뉴스가 발표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혹시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의 편집 책임자(senior editor)인 대니엘 그로스(Daniel Gross)가 대공황을 염려해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이유를 기고했습니다. 무려 43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대공황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 그 당시의 실업률은 25%까지 올라갔습니다. 네 명 중 한 사람은 일자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실업률은 6.5%이고, 내년에는 최대 7.5%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수치입니다만, 대공황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둘째, 1929년부터 33년까지 약 4천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반면, 최근에 문을 닫거나 매각된 은행은 2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도산하는 은행들이 더 나오기는 하겠지만, 대규모의 은행 도산이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셋째, 대공황 때 강대국들은 서로 담장을 쌓고 자기만 살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관세를 무려 50%나 올려 외국 물건이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대국들이 서로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넷째, 당시의 행정부는 경기가 바닥을 칠 때까지 내버려 두자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돈을 들여 구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차이점이 남아 있습니다. 1929년에 침체가 시작된 후, 미국 국민들은 3년 이상이나 새 대통령과 새 행정부의 출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반면, 이번에는 한 달 정도만 더 참으면 됩니다.
이 말은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부적격자고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적격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든 현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부시 대통령이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대국민 담화를 몇 번 했는데, 담화를 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주식 시세가 곤두박질했습니다. 현 정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국민이 믿지 않는 겁니다. 이럴 경우, 새로운 정부가 들어와 분위기를 일신하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의 상실’에 있습니다. 이 불안한 국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은 새 정부가 결국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새 정부가 앞으로 좋은 정책을 펼쳐서 국민의 신뢰를 더욱 회복하면 경제는 곧 정상화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오바마를 지지했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지금은 새 정부가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새 정부를 믿어 주고 밀어 주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믿어 주자’는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나 새 정부가 믿을 만 하니 믿고 기다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지금까지 여러 대통령을 경험했고, 또한 여러 정부를 경험했습니다. 독재 정권 하에서 신음하며 민주 정부를 염원했지만, 그 민주 정부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실망했습니까?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줄 것으로 믿었던 MB 정부는 또 어떻습니까?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국민들은 지난 세월동안 케네디에게, 존슨에게, 닉슨에게, 카터에게, 레이건에게, 부시 부자에게, 클린턴에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오바마라고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어 주는 겁니다. ‘믿는 것’(to trust)과 ‘믿어 주는 것’(to give the benefit of the doubt)은 크게 다릅니다. 믿는 것은 상대방에게 믿을만한 근거가 있어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믿어 주는 것은 상대방에게 믿을만한 근거가 부족하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속는 셈 치고 믿어 주는 겁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믿어 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실패할 수 있음을 알지만, 성공할 가능성을 보고 믿어 주고 밀어 주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배신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보고 믿어 주는 겁니다. 그렇게 믿어 주고 밀어 주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물론, 예상한 대로 실패할 수도 있고,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믿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현실이 되어도 크게 분노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보고 믿어 주고 밀어 주었을 때, 믿어 준 그대로 되는 것을 볼 때면, 그 보다 더 기쁠 수가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믿어 주는 겁니다. 서로 믿어 주고 ‘그런 사람이니라. 고 생각하고 살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들, 자기 아이가 천재이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발등 찍힙니다. 믿어 주셔야 합니다. 아이의 약점과 한계를 분명히 알면서도 믿어 주시고 밀어 주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정부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오바마이든 맥케인이든, 나라가 잘 되게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는 믿어 주고 밀어 주어야 합니다.
3.
‘믿어 줄 만한’ 사람 말고, 진정으로 ‘믿을만한’ 사람은 없습니까? 사랑 깊고 자애로운 부모라면 어떻습니까? 많은 부모들은 절대자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합니다. 러시아의 속담에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 어머니만 그렇겠습니까? 자식을 위하는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자식을 위하는 마음에서는 아버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랑 깊은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있어서 거의 전능자와 같습니다. 저절로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성장하면서 부모의 전능성은 점점 축소됩니다. 나중에 부모는 자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부모가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몇 년 뿐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믿을만한 존재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인생을 맡기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진 사람, 우리를 사랑하시되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 그런 사람, 과연 있습니까?
육신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만한 분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을 감사하고, 앞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지금 성령을 통해 오시는 주님을 예배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심오한 언어로 빚어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심오하여 1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그 일부만 읽은 ‘로고스 찬가’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태어나신 유대 청년 나사렛 예수는 바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는 두 차원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말씀 즉 성자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사역 성경(private translation) <메시지>(The Message)에서 요한복음 1장 14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이웃집으로 이사 오셨다"(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 and moved into the neighborhood.).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우리 집으로 이사 오셨다."
4.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신비를 만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이해함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천재들이 나타나 이 신비를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풀어보려 했지만,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2천년 동안 이 신비를 ‘믿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언어로’ 이 신비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지만, ‘삶으로’ 담아내려는 시도는 모두 성공했습니다. 이 신비를 ‘머리로’ 담아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모두 성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접하고 그분을 모셔 들인 사람들은 그분이야말로 진실로 믿을만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을 맡길만한 능력자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그분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할만한 안내자입니다. 그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진실로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 주실 분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에게 오십니다. 2천 년 전에만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언젠가 미래에 재림을 통해 오실 뿐만 아니라, 오늘, 그리고 또 오늘, 매일 같이 우리가 ‘오늘’이라고 부르는 날에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의 침실에 오십니다. 우리의 일터에 오십니다. 우리의 부엌에 오십니다. 우리의 자동차 옆자리에 오십니다. 바로 이 이분이 우리가 진실로 믿고 의지할 대상입니다.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가 대림절을 맞아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다시’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한 번’이라는 말로 오해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거처로 정하신 인간의 실존을 주님은 결코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거라는 말은 여전히 진실입니다. 주님이 이미 저희에게 오셨다는 사실이 더욱더 분명하게, 끊임없이 드러나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본질이 당신의 존재에 맞닿음으로 이미 이루어진 변화가 더욱더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더욱 더 오셔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근저에서 이미 일어난 일이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이 세상의 거짓 모습이 더욱더 철저하게 뿌리 뽑히고 파괴되어야 합니다. 영원하신 당신께서 유한한 생명을 취하심으로 우리의 유한한 존재가 당신의 영원을 입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의 오심은 과거도 미래도 아닙니다. 지금 오십니다. 바로 지금, 주님의 오심은 충만히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하나의 대림절, 이 계절에 주님이 진실로 오셨음을 저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오실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주시어 지금, 대림의 한 때를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영원히 당신 안에, 그 복된 영원한 한 때를 살게 하소서.
5.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분이야말로 진실로 믿고 의지할 유일한 대상임을 인정하고 마음 문을 여시겠습니까?
전도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는다는 것은 마치 도박과 같습니다. 당신 같으면 어느 편에 걸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을 선택했다 칩시다. 그랬다가 죽고 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는 되돌릴 수 없이 비참한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편을 선택했다 칩시다. 그랬다가 죽고 나서 하나님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잃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 속는 셈치고 믿어 보십시오."
믿음의 처음 단계에서는 혹시 이런 마음으로 결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계속 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속는 셈치고 믿어 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겁니다. 속는 셈치고 시작했다 해도,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믿음이 깊어져서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믿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보니, 진실로 믿을만한 분은 그분밖에 없어서 믿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만 그분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돈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돈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며, 결국 우리를 배신할 것입니다. 권력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그 권력은 우리를 시종으로 만들 것입니다. 사람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사람은 필경 우리를 배신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그 정부는 결국 우리를 실망시킬 것입니다. 목사는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여러분은 목사로 인해 시험을 당할 것입니다. 교인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목사인 저는 여러분으로 인해 낙심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의 대상이 될 만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그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 그분,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분,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분, 마침내 다시 오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 분, 내 이름을 아시는 그 분, 내 머리카락 수까지 다 헤아리고 계신 그 분,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리는 것 같은 이 시기에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세상이 다 우리를 향해 등을 돌려도 여전히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지키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다. 그분을 의지하십시다. 아직도 시험 삼아 믿어 보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뭔가 필요한 것이 있어서 속는 셈 치고 하나님을 믿어 주는 분이 계십니까? 이번 대림절을 지내시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아시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믿을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그분께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변화가 있기를 빕니다.
6.
저는 이번 ‘희망의 복음 시리즈’를 통해 회개, 감사, 자족 그리고 믿음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혹시, 이번 시리즈를 통해 허황된 희망의 복음을 기대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근거가 없더라도 "잘 될 것이다. 걱정 말아라. 곧 해결될 것이다"라는 허황된 말을 듣고 싶어 했을지 모릅니다. 혹은,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과 계시를 받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전해 주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의 메시지를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야말로 계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켜야 할 때입니다. 이제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되찾아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할 때입니다.
회개, 감사, 자족 그리고 믿음?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이 네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말할 수 있고 또한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더 더욱 이 기본기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전한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환각적인 희망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음에 분명하지만, 이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도 남을만한 든든한 마음의 확신을 전해 주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터널에는 분명히 끝이 있습니다. 결국 밝은 날은 찾아 올 것입니다. 다만, 잠시 동안 어둠을 지날 때, 이 네 가지의 기본기를 잘 갖추고 그것을 의지하여 하루하루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둠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밝은 날이 왔을 때도 우리의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영성의 기본기가 충실해지는 은총이 이 대림절 기간 동안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주님,
더욱 주님을 우러릅니다.
더욱 주님을 사모합니다.
더욱 주님을 찾습니다.
저희에게 참된 믿음을 주소서.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저희 걸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저희 손이 떨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희망의 복음 시리즈(4)
"그래도 믿을 데가 있다"
(Yet There Is Someone to Trust)
요한복음 John 1:1-5, 14
1.
오늘로써 네 주일 동안의 ‘희망의 복음: 경제 위기를 영적 기회로!’라는 단기 시리즈 설교를 마칩니다. 첫째 시간에 저는 이 모든 경제 위기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회개만이 희망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경제 위기를 당하여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 어두운 터널을 능히 통과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자족하는 능력이 이 경제 위기를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저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 미국 경기가 침체(recession)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우리 마음을 침체되도록 하는 뉴스가 발표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혹시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의 편집 책임자(senior editor)인 대니엘 그로스(Daniel Gross)가 대공황을 염려해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이유를 기고했습니다. 무려 43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대공황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 그 당시의 실업률은 25%까지 올라갔습니다. 네 명 중 한 사람은 일자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실업률은 6.5%이고, 내년에는 최대 7.5%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수치입니다만, 대공황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둘째, 1929년부터 33년까지 약 4천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반면, 최근에 문을 닫거나 매각된 은행은 2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도산하는 은행들이 더 나오기는 하겠지만, 대규모의 은행 도산이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셋째, 대공황 때 강대국들은 서로 담장을 쌓고 자기만 살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관세를 무려 50%나 올려 외국 물건이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대국들이 서로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넷째, 당시의 행정부는 경기가 바닥을 칠 때까지 내버려 두자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돈을 들여 구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차이점이 남아 있습니다. 1929년에 침체가 시작된 후, 미국 국민들은 3년 이상이나 새 대통령과 새 행정부의 출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반면, 이번에는 한 달 정도만 더 참으면 됩니다.
이 말은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부적격자고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적격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든 현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부시 대통령이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대국민 담화를 몇 번 했는데, 담화를 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주식 시세가 곤두박질했습니다. 현 정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국민이 믿지 않는 겁니다. 이럴 경우, 새로운 정부가 들어와 분위기를 일신하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의 상실’에 있습니다. 이 불안한 국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은 새 정부가 결국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새 정부가 앞으로 좋은 정책을 펼쳐서 국민의 신뢰를 더욱 회복하면 경제는 곧 정상화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오바마를 지지했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지금은 새 정부가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새 정부를 믿어 주고 밀어 주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믿어 주자’는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나 새 정부가 믿을 만 하니 믿고 기다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지금까지 여러 대통령을 경험했고, 또한 여러 정부를 경험했습니다. 독재 정권 하에서 신음하며 민주 정부를 염원했지만, 그 민주 정부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실망했습니까?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줄 것으로 믿었던 MB 정부는 또 어떻습니까?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국민들은 지난 세월동안 케네디에게, 존슨에게, 닉슨에게, 카터에게, 레이건에게, 부시 부자에게, 클린턴에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오바마라고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어 주는 겁니다. ‘믿는 것’(to trust)과 ‘믿어 주는 것’(to give the benefit of the doubt)은 크게 다릅니다. 믿는 것은 상대방에게 믿을만한 근거가 있어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믿어 주는 것은 상대방에게 믿을만한 근거가 부족하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속는 셈 치고 믿어 주는 겁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믿어 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실패할 수 있음을 알지만, 성공할 가능성을 보고 믿어 주고 밀어 주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배신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보고 믿어 주는 겁니다. 그렇게 믿어 주고 밀어 주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물론, 예상한 대로 실패할 수도 있고,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믿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현실이 되어도 크게 분노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보고 믿어 주고 밀어 주었을 때, 믿어 준 그대로 되는 것을 볼 때면, 그 보다 더 기쁠 수가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믿어 주는 겁니다. 서로 믿어 주고 ‘그런 사람이니라. 고 생각하고 살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들, 자기 아이가 천재이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발등 찍힙니다. 믿어 주셔야 합니다. 아이의 약점과 한계를 분명히 알면서도 믿어 주시고 밀어 주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정부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오바마이든 맥케인이든, 나라가 잘 되게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는 믿어 주고 밀어 주어야 합니다.
3.
‘믿어 줄 만한’ 사람 말고, 진정으로 ‘믿을만한’ 사람은 없습니까? 사랑 깊고 자애로운 부모라면 어떻습니까? 많은 부모들은 절대자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합니다. 러시아의 속담에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 어머니만 그렇겠습니까? 자식을 위하는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자식을 위하는 마음에서는 아버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랑 깊은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있어서 거의 전능자와 같습니다. 저절로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성장하면서 부모의 전능성은 점점 축소됩니다. 나중에 부모는 자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부모가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몇 년 뿐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믿을만한 존재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인생을 맡기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진 사람, 우리를 사랑하시되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 그런 사람, 과연 있습니까?
육신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만한 분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을 감사하고, 앞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지금 성령을 통해 오시는 주님을 예배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심오한 언어로 빚어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심오하여 1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그 일부만 읽은 ‘로고스 찬가’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태어나신 유대 청년 나사렛 예수는 바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는 두 차원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말씀 즉 성자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사역 성경(private translation) <메시지>(The Message)에서 요한복음 1장 14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이웃집으로 이사 오셨다"(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 and moved into the neighborhood.).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우리 집으로 이사 오셨다."
4.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신비를 만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이해함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천재들이 나타나 이 신비를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풀어보려 했지만,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2천년 동안 이 신비를 ‘믿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언어로’ 이 신비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지만, ‘삶으로’ 담아내려는 시도는 모두 성공했습니다. 이 신비를 ‘머리로’ 담아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모두 성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접하고 그분을 모셔 들인 사람들은 그분이야말로 진실로 믿을만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을 맡길만한 능력자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그분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할만한 안내자입니다. 그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진실로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 주실 분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에게 오십니다. 2천 년 전에만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언젠가 미래에 재림을 통해 오실 뿐만 아니라, 오늘, 그리고 또 오늘, 매일 같이 우리가 ‘오늘’이라고 부르는 날에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의 침실에 오십니다. 우리의 일터에 오십니다. 우리의 부엌에 오십니다. 우리의 자동차 옆자리에 오십니다. 바로 이 이분이 우리가 진실로 믿고 의지할 대상입니다.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가 대림절을 맞아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다시’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한 번’이라는 말로 오해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거처로 정하신 인간의 실존을 주님은 결코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거라는 말은 여전히 진실입니다. 주님이 이미 저희에게 오셨다는 사실이 더욱더 분명하게, 끊임없이 드러나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본질이 당신의 존재에 맞닿음으로 이미 이루어진 변화가 더욱더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더욱 더 오셔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근저에서 이미 일어난 일이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이 세상의 거짓 모습이 더욱더 철저하게 뿌리 뽑히고 파괴되어야 합니다. 영원하신 당신께서 유한한 생명을 취하심으로 우리의 유한한 존재가 당신의 영원을 입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의 오심은 과거도 미래도 아닙니다. 지금 오십니다. 바로 지금, 주님의 오심은 충만히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하나의 대림절, 이 계절에 주님이 진실로 오셨음을 저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오실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주시어 지금, 대림의 한 때를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영원히 당신 안에, 그 복된 영원한 한 때를 살게 하소서.
5.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분이야말로 진실로 믿고 의지할 유일한 대상임을 인정하고 마음 문을 여시겠습니까?
전도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는다는 것은 마치 도박과 같습니다. 당신 같으면 어느 편에 걸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을 선택했다 칩시다. 그랬다가 죽고 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는 되돌릴 수 없이 비참한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편을 선택했다 칩시다. 그랬다가 죽고 나서 하나님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잃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 속는 셈치고 믿어 보십시오."
믿음의 처음 단계에서는 혹시 이런 마음으로 결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계속 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속는 셈치고 믿어 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겁니다. 속는 셈치고 시작했다 해도,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믿음이 깊어져서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믿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보니, 진실로 믿을만한 분은 그분밖에 없어서 믿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만 그분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돈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돈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며, 결국 우리를 배신할 것입니다. 권력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그 권력은 우리를 시종으로 만들 것입니다. 사람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사람은 필경 우리를 배신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그 정부는 결국 우리를 실망시킬 것입니다. 목사는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여러분은 목사로 인해 시험을 당할 것입니다. 교인은 믿어 줄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면 목사인 저는 여러분으로 인해 낙심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의 대상이 될 만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그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 그분,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분,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분, 마침내 다시 오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 분, 내 이름을 아시는 그 분, 내 머리카락 수까지 다 헤아리고 계신 그 분,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리는 것 같은 이 시기에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세상이 다 우리를 향해 등을 돌려도 여전히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지키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다. 그분을 의지하십시다. 아직도 시험 삼아 믿어 보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뭔가 필요한 것이 있어서 속는 셈 치고 하나님을 믿어 주는 분이 계십니까? 이번 대림절을 지내시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아시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믿을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그분께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변화가 있기를 빕니다.
6.
저는 이번 ‘희망의 복음 시리즈’를 통해 회개, 감사, 자족 그리고 믿음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혹시, 이번 시리즈를 통해 허황된 희망의 복음을 기대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근거가 없더라도 "잘 될 것이다. 걱정 말아라. 곧 해결될 것이다"라는 허황된 말을 듣고 싶어 했을지 모릅니다. 혹은,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과 계시를 받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전해 주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의 메시지를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야말로 계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켜야 할 때입니다. 이제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되찾아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할 때입니다.
회개, 감사, 자족 그리고 믿음?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이 네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말할 수 있고 또한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더 더욱 이 기본기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전한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환각적인 희망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음에 분명하지만, 이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도 남을만한 든든한 마음의 확신을 전해 주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터널에는 분명히 끝이 있습니다. 결국 밝은 날은 찾아 올 것입니다. 다만, 잠시 동안 어둠을 지날 때, 이 네 가지의 기본기를 잘 갖추고 그것을 의지하여 하루하루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둠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밝은 날이 왔을 때도 우리의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영성의 기본기가 충실해지는 은총이 이 대림절 기간 동안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주님,
더욱 주님을 우러릅니다.
더욱 주님을 사모합니다.
더욱 주님을 찾습니다.
저희에게 참된 믿음을 주소서.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저희 걸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저희 손이 떨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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