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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계신 하나님

출애굽기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367 추천 수 0 2011.05.20 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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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17:1-7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9월 14일자 국민일보에 22살 인 개척교회 목사님의 아들이 미국 예일대 음악대학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한 기사가 실렸습니다(박주현. 22) 기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개척 교회 목사 자녀이기 때문에 피아노를 치고 싶어도 돈이 없어 꿈을 이룰 수 없었는데 이웃들의 도움으로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여 예원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는 것입니다. 등록금과 레슨비를 감당할 수 없어 진로를 모색하던 중 국비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국립대학에서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유학길에 올라 문화와 기후의 차이, 특히 신앙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꿈의 사람 요셉을 떠올리며 레슨 통역과 뮤지컬 및 피아노 반주로 생활비를 벌면서도 항상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전액 장학금으로 예일대 음악대학원에 들어갔고 "앞으로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헌신하고 싶다"고 다짐했다는 기사입니다. “영혼을 울리는 음악가로, 특히 장애인학교를 설립해 어려운 학생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겠다”고 소망을 밝혔습니다. 이런 간증을 들으면 우리는 신앙 생활하는 맛을 느끼고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신나는 일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처절한 고통과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같은 날 국민일보에 실린 어느 목사님(박광보)의 간증입니다. 키 163㎝에 몸무게 48㎏의 연약한 체구로 목회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목회는커녕 생활도 제대로 못할 것이라는 핀잔을 했다고 합니다. 시흥에 개척을 하였는데 일년 만에 30명의 성도가 모여 감사하며 목회했답니다. 그런데 일곱 살짜리 큰아들이 뺑소니차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졌답니다. 성도들은 '목사가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며 하나 둘 떠나버렸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흥시로부터 불법 건물이라고 교회가 철거당했답니다. 몇 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아들과 팔순 노모를 끌어안고 폭삭 주저앉은 교회 터에서 그는 절규했답니다. 아들은 10여년의 기도와 치료에도 소용없이 영영 깨어나지 못했답니다. 다시 교회를 시작했는데 IMF 외환위기가 불어 닥쳤답니다. '건설사가 부도나면 교회도 분해된다.'며 80여명의 성도들은 밀물처럼 교회를 빠져나갔답니다. 목사님는 성도들이 떠나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파 예배당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날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세상을 떠났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신이 나는 것이 아니라 회의가 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질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성경에도 보십시오. 그렇게도 성령충만하여 검소하고 청결하게 살던 세례요한이 참수형을 당합니다. 초대 교회가 막 출발하려는 초기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에 의하여 참수형을 당합니다. 선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그 악한 헤롯을 부와 명예, 권력을 누렸습니다. 네로의 박해 속에서 순결한 신앙인들이 화형을 당하고 사자들에게 찢김을 당합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재산과 자녀를 잃고 자신의 질병에 걸렸습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나 우리 가족들이 처하면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돌아가신 것입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르비딤에 왔습니다. 그런데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모세를 원망하고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7절에 보십시오. 마실 물이 없는 곳에 “하나님은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결론은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은 계신다는 것입니다. 풍년이 든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흉년이 든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영광의 현장 뿐 아니라 고난의 현장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데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질병이 있는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성공한 곳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실패한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신광야에서 계속해서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200만여 명이 단체로 행동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한 번 텐트를 치고 머물다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부대가 이동하려면 미리 시나리오를 써서 연습하고 출발합니다. 우리가 집을 이사하려고 해도 날짜를 잡고 계획을 세워 이사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되는대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일기예보도 듣고 계획을 세워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신광야를 떠날 때 특징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떠날 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1절에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둘째는 “노정대로 행하여”입니다. 그들이 임의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시하는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하나님의 노정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물이 있는 오아시스가 나타나야 합니다. 쉼과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축복과 성공이 기다려야 합니다. 창창 대로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실 물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풀 한 포기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70-90%가 물이고 혈액의 83%, 근육질엔 75%, 뇌조직에도 75%, 골격의 22%도 물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몸에 물이 1-2%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고 5%정도 부족하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12%정도 부족하게 되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은 하루 계절에 관계없이 8∼10잔(200cc잔 기준) 정도를 마셔야 몸이 제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 생명에 있어 공기 다음으로 두 번째 필수품인 물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노정대로 순종하였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7절 보세요. 그 때 그들의 생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여서 하나님이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순종하고 나아가면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1-6)” 이것이 보편적 일반법칙입니다. 그러나 개별 법칙은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기계적 하나님, 법칙에 구속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순종하고 나갈지라도 훈련을 위해 기갈을 주십니다.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대강 5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죄, 자신의 잘못,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징계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아간의 범죄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고 죽음같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둘째는 자연적인 고난입니다. 늙으면 자연적으로 기력이 쇠하고 질병이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눈이 쇠하여 성경을 잘 볼 수 없습니다. 귀가 어두워 남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것같은 고난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았던 죽은 나사로 같은 경우입니다.
다섯째로 사명 때문에 스스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스데반이나 예레미야, 에스겔, 모세, 다니엘과 같은 경우입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살려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을 자처한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은 훈련을 위한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시키기 위한 고난입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를 만들기 위한 고난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순종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기근(흉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창12:10). 아니 하나님의 명령이 순종하여 부모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면 그 앞에 창창 대로의 길이 열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바로 아들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왜 하나님 우리이게 이런 불행이 닥쳐옵니까?”라고 불평합니다. 말씀대로 살았는데 왜 부도나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실패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회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잘 믿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기까지는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25년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후손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는 43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배를 저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항해이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항해이니 당연히 순풍이 불어야 합니다. 그런데 광풍이 부는 것입니다. 미친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물이 배에 들어 닥쳤습니다. 침몰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다를 말씀 한 마디로 바다를 잔잔케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연 질서를 다스리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시고 마게도니아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빌립보 감옥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곳에서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받습니다. 간수와 그 가정 식구가 구원받는 기적을 체험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다 마실 물이 없는 곳을 만났을 때도 그곳에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길 원하십니다. 모세가 그래서 그곳 이름을 어떻게 지어 줍니까?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난 그 곳 이름을 '맛사', '시험함'이라는 이름으로 지어 줍니다. '므리바', 즉 '다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므리바 혹은 "주님께서 과연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시험했다고 해서 맛사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물이 없는 곳에서 불평하지 말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물이 없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합니다.모세에게 물을 마시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다툴 정도로 심각하게 요구합니다. 이들은 모세를 단지 원망만 하던 과거의 정도(14:12, 13;15:24;16:2, 3)를 넘어 이제는 모세의 지도력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모세에게 직접 물을 달라고 항의합니다. 여기서 '다투다'라는 말은 극에 달한 불평과 불만으로 나타나는 '싸움'과 '투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다툼이 어느 정도입니까? 4절의 모세의 기도를 보십시오. 모세에게 돌질할 정도입니다. 이 말을 법률적 용어입니다. 모세를 피고로 세운 것입니다. 모세를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다고 약속해 놓고 자녀와 가축과 모두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민족 공동체의 공적(公敵)이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적인 특징은 불평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단 한 번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후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감사와 찬양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은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다. 마술사(출8:16-19), 이드로(출18:1-27)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물로 인하여 불평합니다. 마라의 쓴물로, 므리바 물이 없음으로 불평합니다. 식량으로 인하여 불평합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자 불평합니다. 진로 장애에 대하여 불평합니다. 애굽 군대가 추격하자 불평합니다. 정탐꾼보고를 듣고 불평합니다. 에돔길에서 불평합니다. 지도력에 대하여 불평합니다. 고라 사건을 통하여 모세를 반역합니다. 미리암은 남성 중심의 지도력에 대하여 불평합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다베라에서는 이유 없는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광야에서 삶의 특징은 불평과 원망입니다. 죽을 때까지 불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백성들에게 본질을 분명하게 밝히며 설득합니다(2).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끄는 자신과 다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피고로 세우는 믿음 없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합니다. 똑같이 원망과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해결 방법을 물었습니다. 감정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돌로 칠 듯 달려드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기갈을 만나면 불평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불평 그만 운동(No Complaints Campaign)' 이끄는 보웬 목사님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하루 평균 15∼30차례 불만을 터뜨리거나 남을 비난한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의 뿌리에는 불평이 있다'고 말합니다.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해 불평을 멈춰야 한다"고 합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새로운 습관이 사람의 몸에 배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21일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에게 보랏빛 팔찌를 팔에 끼우게 하고 21일 동안 불평이나 비난, 험담 등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하였답니다. 만약 한번이라고 불평을 하면 팔찌를 다른 팔에 바꾸어 끼게 하였답니다.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21일은 새로운 습관이 몸이 배는 데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참여자들에겐 자신의 '맹세'를 항상 잊지 않도록 고무 재질의 보랏빛 팔찌를 지급했다고 합니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입에서 불평이나 비난이 나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팔찌를 다른 팔목에 끼게 하였답니다. 21일 연속으로 같은 팔목에 보랏빛 팔찌가 머물면 인증서를 주는 의식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보웬 목사에 따르면 이를 극복하고 팔찌를 제거하는 데는 보통 4∼10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루 15-30 차례 불평하는 입술로 기도를 해 보십시오.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에게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답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대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안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소망의 대상이 아니라 시험의 대상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담임교사가 머리가 너무 나빠서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니 집에서 가르쳐 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치며 약해지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11 살이된 에디슨은 기차 한 모퉁이에서 신문팔이를 하면서 실험을 하다가 기차 내에 불을 일으켜 차장에게 따귀를 맞고 한쪽 귀의 청력을 잃기도 했지만 어려운 처지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2천 여종 이상의 발명품을 내서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늘 기도하고 감사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는데 전구를 발명하고 완성할 때까지 무려 12만번이나 기도하고 1만번이나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번 실패하면 3시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길갈이 다가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들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이 그 기갈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끓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3. 하나님은 물이 없는 곳에서 반석의 샘물을 통해 영원한 생수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기도하니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5절을 보십시오. 첫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확실한 증거를 위해서입니다. 둘째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합니다. 능력의 지팡입니다. 셋째 호렙산의 반석 위 거기, 네 앞에 하나님이 서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고석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넷째, 그 때 그 반석을 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러며 반석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갈으로 아우성 치는 백성의 소리를 들으며 반석을 치자 물이 쏟아져 나와 모든 백성의 기갈이 해소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시78:15)”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시78:20)”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시105:41)” 풍성하게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상징적이고 모형적인 하나님의 기도 응답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반석 위에 서계시고 모세가 지팡이로 치면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기갈을 해소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모세의 지팡이 앞에 서야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서 계신 것입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는 반석을 치기 전에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이 먼저 지팡이로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반석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이 반석이 무엇이겠습니까?모세는 신명기 32장 4절에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31절에는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므리바의 사건을 회상하는 시편의 글들에서도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반석”이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시 78:15, 20, 35, 95:1).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하나님을 치신 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고로서 모세가 치는 지팡이에 맞았습니다. 장로들이 증인입니다. 하나님은 기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로 목을 축여주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어리석은 쟁변을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백성들은 우리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고전 10: 1-4절을 보십시오. 반석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을 모형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소송의 현장에서 억울하게 찢기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저주를 받아 사람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 구원 사역을 이루신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사 53:4, 5;요 19:1-3, 17-9).

우리 하나님께서 인류의 어리석은 쟁변을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는 길입니다.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머리를 치고, 손을 치고, 발을 치고, 등을 치고, 뺨을 치고, 온 몸을 쳤습니다. 피와 물을 다 쏟았습니다. 그 피와 물이 생수가 되어 인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조롱합니다. 네가 하나님이면 십자가에 내려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가 당해야 고초와 억울함, 수모, 고통, 죽음을 다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피고가 되어 구약의 율법의 요구인 사망의 값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해 버렸습니다. 반석에서 쏟아지는 생수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했듯이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기갈 가운데 우리의 고통을 다 체휼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기갈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로 오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넘치는 생수를 주십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엡3:10).
모든 것을 억울하게 잃었다고 하나님이 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의 주인으로 무덤 한 평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충성하고 순종하였는데 왜 이런 고난이 다가왔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순종하셨는데 십자가에서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왜 나에게 해를 끼치고 불이익을 주는 저런 악당들을 제거시켜 주시지 않느냐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침뱉음을 당하고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왜 이렇게 잘해 준 사람이 배신할 수 있느냐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나의 억울함을 갚아 주시기 않느냐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로부터 인신매매를 당하였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한결같이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 십자가 현장에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구속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억울함과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하시고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기갈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듯이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가는 사람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반석은 지팡이로 맞았습니다. 그래서 깨졌습니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맞아서 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수를 얻게 된 것이지요! 이스라엘에게 주신 반석의 생수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받으신 예수님이나 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영원한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시 59:1, 고전 10:4, 요 7;37).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를 자진해서 지신 것입니다. 호렙산의 "하나님께서 반석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고 하신 사건은 곧 하나님 자신께서 맞으시고 생명의 피를 흘려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공급해 주시겠다는 그러한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샘물'로 기록되고 있다(시 114:8). 바위에서 쏟아져 나온 이 훌륭한 물은 '꿀'과 '기름'으로 불렸다(신 32:13). 왜냐하면 그 물로 백성들의 갈증이 두 배로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물이 나왔으니 그 물은 그들에게 꿀과 기름 같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도 우리를 먹이시기 위하여 물샘을 여실 수 있다. 곧 하나님은 '광야에 물들일'(사 43:20) 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사 43:19)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도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성령의 은혜와 위로는 '생수의 강'(요 7:38,39; 4:14)에 비유된다. 이것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은 그가 율법 아래서 나셨기 때문이다. 이 반석 즉 이 열려진 샘에서 나오는 물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지 못할 것이며 영혼의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감각적인 쾌락이 웅덩이의 물과 같다면 영적인 기쁨은 지극히 순수하고 깨끗하며 새롭게 솟아나는 반석의 물과 같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기쁨의 강물인 것이다.

즉 후일 바울은 물을 '신령한 음료'로, 반석을 '신령한 반석'으로 해석함으로써(고전 10:4) 당시 사막의 갈증으로 인해 목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 산 반석의 물이 생수가 되었듯이, 오늘날 사막과 같은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숱한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교훈했던 것이다(요 4:14;7:37;계 22:7;사 55:1). 특히 반석을 통해 흘러 나온 물의 양을 가리켜 시편 기자는 '강'(*, 나하르)이라고 표현했는데(시 105:41), 이때 이 '강'과 같은 단어이다(창 2:10). 한편 '반석을 쳐서'는 더 있는데, 곧 민 20:2-13에 나오는 사건이다.

120여 년 전의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1888년 영국에서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기독교 여성인 <카타리나 부-스>, 그는 구세군의 창설자 부-스의 부인이요 또한 구세군의 어머니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구세군의 출발은 처음부터 이런 구제사업으로 시작된 교단이었습니다. 지금도 크리스마스 자선남비를 그들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제의 일에 앞장 선 카타리나에게 불치의 암이 걸렸습니다. 그 암이 악화되어 그녀는 활동을 중지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게되었습니다. 집 난로 가의 의자에 기대어 누어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토록 성숙한 신앙인 부-스 여사의 마음에 표징과 기적을 보고픈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쓴 편지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가장 알 수 없는 섭리는 사탄이 나에게 휘두르는 가장 위험한 무기의 하나인데 불이 더 뜨겁게 되거나 어두움이 더 침침하게 되었을 때 이 때 사탄은 귓속말로 ”왜 이럴까?라는 원망의 말을 넣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 사탄의 이 왜? 라는 유혹, 그 속삭임 앞에서 요동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가면서 가장 어둑컴컴한 골고다를, 조용히 또 확실하게 걸어 갈 수 있는 신앙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 불평의 방식: 물?→ 불편→ 불만→ 불평→ 폭력.
(2) 믿음의 방식: 물?→ 불편→ 자족→ 간구→ 감격 (빌립보 4:13).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었고 내 나라는 병사로는 10만, 백성은 어린애와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부정적인 나를 극복하고 참된 나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열어 보지 않은 선물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 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두 친구가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심하게 불평을 합니다. "3주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내게 2억원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야,너 참 수지 맞았다. 2억원이면 어디냐." 친구가 다시 말합니다. "2주 전에는 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내게 3억원을 유산으로 남겨주셨어." 다른 친구가 부러워서 말합니다. "아이고,5억원을 벌었구나. 얼마나 좋으냐." 친구가 계속 말합니다. "지난 주에는 고모님이 돌아가셔서 10억원을 남겨주셨다네." "그럼 15억원이 됐네. 부럽다." 그런데 이 친구는 15억원을 받고도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불만이 가득하냐?" 그러자 15억원 유산을 받은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아무도 안 돌아가셨잖아."

하나님이 모든 동물의 창조를 끝냈을 때 새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 새들에게는 튼튼한 다리 대신에 무거운 날개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날개는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날기 위한 것입니다. 날개는 새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날개는 불평의 조건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인 것입니다. 창조의 섭리를 깨달은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그러자 다른 새들도 날기 시작했습니다. 날개를 사용한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입니다.

신앙은 성도의 날개와 같습니다. 짐이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날개로 땅을 걸으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고 영적 세계로 날아올라갈 때 강도,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타조는 날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날개가 퇴보되었고 사막을 헤매는 새가 된 것입니다.신앙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활짝 펴고 날 때 홍해와 여리고 성을 넘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신앙의 날개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곤충이 무엇일까 쇼펜하우어는 `불독개미'라고 말한다. 불독개미는 머리와 꼬리가 서로 싸우느라 한 순간도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이 곤충은 몸을 갈라놓아도 머리와 꼬리의 싸움이 계속된다 꼬리는 머리를 휘감고 머리는꼬리를 문다 몸이 둘로 나뉜 상태에서도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결국 몸과 꼬리는 서로의 공격을 받아 곧 죽고 만다 불독개미와 같은 인생을 사는 불행한사람이 있다 이들은 가족과 이웃을 모두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 심지어 자신에 대한증오의 표시로 몸을 학대한다 이들의 인생은 온통 `불평' `저주' `절망'으로 가득차있다 `불독개미 인생'을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의미한 싸움을 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갈 뿐이다

장미의 불평

화단 구석에 장미가 한 송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불평이 많았는지 눈만 뜨면
불평을 털어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장미는 밤이면 춥고 어두워서 못 있겠으니
거실로 옮겨 달라고 주인을 졸랐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화분에 옮겨서 거실에 두었습니다.
얼마 후 장미는 또다시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여기는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창가로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창가에 옮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미는
창가에는 고양이가 지나다녀서 싫다며
화병에 넣어 방안으로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다시 장미를 화병에 옮겨 방안에 두었습니다.

며칠 뒤 장미는 또 다시 주인에게
바깥 화단으로 옮겨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뿌리가 잘린 장미는 시들어버렸고
주인은 장미를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신론자들-세상과 우주 외에 어떤 다른 존재 즉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인정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살면서 하루에 불평을 터뜨리거나 남을 비난하는 말은 얼마나 할까요?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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