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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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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인섭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11.5.1 주일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마태복음 18:1-5)
2011년 5월 1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한인섭 형제
계절의 여왕이란 별칭이 아니어도 5월은 참 아름다운 달입니다. 그 중에서도 5월 1일은 최고의 날이지요. 오늘은 전세계 노동자의 축제일이고요,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8일은 어버이에게 감사하는 날이고, 10일에는 자비하신 석가모니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고, 15일에는 스승의 날입니다. 참으로 감사, 감사가 넘쳐나는 나날인데, 온 천지가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하고, 바람은 부드럽고 단 맛으로 감싸옵니다.
이 5월의 첫날을 맞아, 저는 어린이를 지극히 아끼고 나라를 걱정했던 한 할아버지를 이 자리에 불러오고 싶습니다. 무대는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마을(모곡)입니다. 우리 새길 공동체는, 잠시 일제하 산촌의 예배당과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가 되어 역사 속으로 동행했으면 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1933년입니다. 저는 일제하 독립운동사에 대한 재판자료를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십자가당사건>이란 게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유자훈이란 감리교 목사가 주동이 되어, 감리사 남천우 등과 함께, 십자가당이란 비밀결사를 만들었습니다.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계급제도를 철폐하고, 천부의 자유인권을 실현하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이 비밀결사체에 대해 일제는 이를 대뜸 기독교공산주의라 단죄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몰고 갔지만, 지금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독교 신앙에 의거하여 자유․평등․박애를 실현하자는 운동 정도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일제가 일차 주목한 것은 유자훈 목사의 심상치 않은 경력이었습니다. 유자훈 목사는 1920년대 초엔 러시아에 거주하면서 소련혁명도 지켜보았고, 그에 대해 일정한 공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혐의점은 그가 소련 및 해외의 독립운동가와 내통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대 후반 조선에 귀국하여 남감리교회의 춘천지부 홍천군을 담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당 사건에 연루된 일반인들은 모두 홍천군 모곡리의 인사들이었습니다. 유자훈 목사가 홍천에 부임하여 와서 일견 놀란 것은, 무지렁이 산골이라는 선입관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들이 글도 많이 깨쳤고, 영어도 잘 하고, 민족의식이 충만하고, 활동도 어느 곳 못지 않게 활발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특이한 상황은 일제의 경찰도 평소 “모곡학교를 중심으로 불온한 사상이 떠돈다는 것을 경계 주목”하여 왔던 터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강원도 홍천은 첩첩산골인데, 당시엔 가파른 고개를 넘어오든지, 아님 뗏목을 타고 접근해야 했던 오지 중의 오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산골이 어떻게 그렇게 지식과 의식이 충만한 기독교인들로 가득할 수 있었던가?
그 답은 오직 한 분, 한서 남궁억 선생님 때문입니다. 남궁억 하면 근대사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살짝 스쳐나간 이름입니다. 독립협회의 청년간부였고, 황성신문의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젊었을 적엔 조선 최초의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교육을 받았고, 고종의 영어통역관 역할도 했으며, 해외 방문도 하고 몇가지 벼슬도 한 개화의 선각자였습니다. 선생은 한일합병을 통분히 여기다 기독교로 입교합니다. 1910년대 초반에는 배화학당에서 여학생을 가르치면서, <가정교육> 책도 내고 <신편 언문체법>이란 한글 서도 교과서를 간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그는 1918년 강원도 홍천 모곡리로 낙향합니다. 그의 연세 56세 때입니다. 당시 56세면 지금의 70~80세 정도 될 것이니, 그가 낙향한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연령이지요. 그는 더 이상 경성의 생활이 의미없다고 여긴 듯 합니다. “왜장의 노복이 되어 울 수 없는 닭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산간유곡에 칩거”하여 무언가를 하자고 생각한 듯 합니다. (일제 신문조서에서).
한서 선생은 참 시가를 잘 지었습니다. 시조도 잘 짓고, 노래말 작사도 즐겨 했습니다. 선생은 낙향하면서 <기러기 노래>라는 시를 하나 남겼습니다. 미국의 음악가 포스터의 <기러기> 곡조에 붙인 가사입니다. “달 밝은 가을 밤에 기러기들이...” 하는 노래 잘 아시죠. 그 곡에 아래 가사를 대입하여 아래 <기러기 노래>를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기러기 노래
1.원산 석양 넘어가고 찬이슬 올 때
구름사이 호젓한 길 짝을 잃고 멀리 가
벽공에 높이 한 소리 처량
저 포수의 뭇 총대는 너를 둘러 겨냥해
2.산남 산북 네 집 어디 그 정처 없나
명사십리 강변인가 청초 우근 호수인가
너 종일 훨훨 애써서 찾되
내 눈앞에 태산준령 희미한 길 만리라
3.곳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 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는 양춘이요 고생 후는 낙이라
4.만리장천 먼 지방에 뭇 고난 지나
난일화풍 편한 곳에 기쁜 생활 끝없다
여기서 먹고 저기서 자며
여러 동무 같이 앉아 갈대 속에 집 좋다. (1918년)
모곡 산골로 떠날 때의 심정은 이러했던 것입니다. 짝도 잃은 채, 포수들의 총대를 피해 갈 곳 없는데, 앞에는 태산준령이 가로막았습니다. 가는 곳 모곡리도 조상의 선영이 있다하나, 아무 아는 사람도 없는 그 곳에 “희미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의 힘이 그를 북돋웁니다. “하늘 위에 한 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다는 믿음 하에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고요. 자기의 신세는 “곳간없이 나는 새” 같지만, 그 외진 산골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꿈을 갖고 보리울 마을에 정착한 것입니다.
당시 보리울마을에는 학교도 없고 교회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면 단위에 한명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낙향과 함께 그는 사택에서 학동을 불러모아 교육을 시작합니다. 이듬해 열칸짜리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는 감리교 명예전도사의 자격으로 <모곡예배당>에서 한글, 영어, 한문, 수학을 가르치면서,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스스로 작사한 찬송가와 다른 노래들을 학동들과 함께 부릅니다. 1922년에는 <모곡학교>를 세워 스스로 교장이 되어 산골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1933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 1000명 이상이 이 학교를 나왔고, 선생은 그를 포함하여 4명이었습니다.
선생이 교장이자 교사로 활동할 때는 그의 연세 60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잊은 채 아동들과 완전히 함께 노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언제나 호주머니에 하모니커를 넣어두고 유쾌히 노는 마당이면, 아동과 청소년과 함께 흰수염 휘날리면서 하모니커를 불어 흥취를 돋구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빌리자면, 그는 “어린이들과 같이 되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 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늘 노래와 함께 했습니다. 그의 음악실력은 “작곡은 할 수 없지만 악보를 보면 창가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작사한 노랫말은 100곡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보리울마을에서 어린이와 함께 놀면서 지은 것입니다. 노래가 쉽고도, 경쾌하고, 그 가운데 애국심과 신앙심이 부드럽게 녹아있어, 부르는 가운데 저절로 신앙심과 애국심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작사는 모두 순한글로 되어 있어, 한글의 보급에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는 무궁화를 심어 보급했고, <무궁화동산>이란 창가도 만들었습니다. 일제의 신문조서를 보면, 선생은 “모곡학교에 무궁화나무의 묘포를 만들어 1만본이 넘는 무궁화 묘목을 조선 각지에 배포하여 민족사상을 환기”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거의 수십만그루의 무궁화를 재배하여 각처에 배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무궁화일까요?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답합니다.
문 : <무궁화동산> <무궁화 삼천리> 이런 창가는 그대가 가르쳤는가.
답 : 그렇다.
문 : <무궁화동산>이라는 창가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답 : 무궁화는 조선민족을 대표한 꽃이고, 꽃 자체가 꽃 중에서 가장 고운 것처럼 조선민족도 번창하라는 것을 노래 부른 것이다.
문 : <무궁화 삼천리> 노래는 어떤가.
답 : 그 노래도 무궁화동산과 마찬가지다. 무궁화동산은 무궁화만을 찬미한 것이지만, <무궁화 삼천리>는 조선민족과 조선의 산야를 찬미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한 노래이다.
문 : <무궁화> 시는 무엇을 나타냈는가.
답 : 사람은 꽃밭 같은 데에 여러 가지 꽃을 심고 있는데 그런 꽃은 빨리 지거나 또는 마르거나 하지만 무궁화는 뿌리가 강하고 꽃은 2.3개월 동안 피어 있어서 조선민족을 대표하고 있으니 조선민족도 이 무궁화처럼 영구히 번창하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실로 당당한 답변이고, 무궁화에 대한 관점을 이렇게 상세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도 달리 없습니다. 조선 각지의 무궁화 심고 퍼뜨리는 것은 이 보리울에서 남궁 선생이 시작한 것입니다. 무궁화 묘목을 전파하는 게 경찰의 주목을 끌게 되자, 다른 묘목더미에 섞어 무궁화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학교의 경비 보충을 구실 삼아, 무궁화를 해마다 수십만주씩 길러 전국의 학교와 사회단체에 팔기도 하고 기증도 하였습니다. 묘포작업은 학생들이 실업시간을 이용해서 김매고 거름주게 하면서 학생들의 무궁화에 대한 애착심을 심어주었습니다. 모곡학교는 이렇듯 전국적으로 알려진 무궁화동산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의 눈높이에서 학생들의 흥미를 돋구기 위해 힘썼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웅변과 합창을 넣었고, 조선역사도 <조선 이야기>로 하여 옛날 이야기 하듯이 전달하여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기 위해 힘썼습니다. 조선의 지리를 가르치기 위해 <조선지리가>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조선땅을 무궁화로 덮은 <무궁화 자수본>을 만들어 자수를 하는 가운데, 무궁화 사랑과 애국심이 저절로 스며들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놀이, 모두 아시죠? 어릴 적 멋도 모르고 놀았던 이 놀이가 실은 남궁억 선생의 아이디어에 힘입은 것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놀이방식 자체는 일본에서 건너온 것 같은데, 거기에 말을 바꾸어 “무궁화꽃”으로 한 것입니다.) 놀 때마다 “무궁화꽃”을 상기시키고, 또 “적”이 어디까지 쳐들어왔는지를 늘 경계하는 자세를 몸에 배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놀이 가운데 애국심이 스며들어오게 하는 이 <무궁화꽃이...>를 보면, 선생의 교육방식과 노는 수준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가지 않습니까?
남궁억 선생은 참으로 눈물많은 선생이었습니다. 그가 지은 <우승가(무궁화동산)>의 가사를 보면,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소생하는 이천만”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눈물은 민족 소생의 밑거름이라는 거지요. 일제의 신문조서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모곡예배당에서 선생은 “조선민족처럼 비참한 사람은 전 세계에 없다. 이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면 심신의 전율을 느낀다. 어떤 방법으로 이를 구원할 것인가, 전도가 암담하다고 역설하면서 비분의 눈물을 흘려 참여한 사람들에게 많은 충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문 : (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 소화 8년(1933년) 4월 5일에 그대는 모곡교회 예배당으로 가서 일한병합에 대하여 대단히 분개하여 말하고 울었다는데 그런가.
답 : 확실한 기억은 없는데 나는 예배당 뿐 아니라, 모곡학교에서 친구들이 왔을 때라든지, 일한합병에 대하여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눈물이 난다. 그러므로 묻는 바와 같은 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생은 참으로 인격자였습니다. 만민평등에 대해 사상으로서 뿐 아니라 실천으로도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는 “이세상에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한가지로 인류가 된 이상에는 다 한 동포이다.” 그래서 하인들에게도 “제게 유익할만한 일은 다 가르쳐줌이 옳다”고 하면서 위생법이나, 재봉법도 가르치고, “여가를 얻을 수 있거든 우리 언문과 쉬운 한문과 산술도 가르쳐라”고 했습니다. 그는 순한글 궁서체의 대가입니다. 최현배 선생의 <우리 말본>과 <중등 우리말본> 책의 제자도 선생이 쓴 것입니다. “순 한글”로 책을 쓰고 가르친 것은 한문을 모르는 이라도 한눈에 명백히 이해하여 실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언제나 경칭을 썼고, 학생들에게도 경칭을 썼다고 합니다. 다음 부부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1930년대에, 칠순 노인 부부끼리 찍은 사진인데, 남편이 부인의 팔목을 잡고 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남궁억 선생의 일화는 제가 처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십수년 전, 박창원 형제께서 우리 교회에서 남궁억 선생에 대한 감동적인 한 예화를 전해주신 적이 있어, 그 말씀이 하도 좋아 내내 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남궁억 선생이 연희전문 졸업식에 축사를 부탁받았습니다. 때는 2월 초순이었습니다. 홍천 보리울에서 서울의 연희전문까지 걸어서 120Km가 넘는데, 이 길을 사흘 내내 걸어서 갔습니다. 차를 타고 가자는 제자의 권유에 “우리 손으로 만들면 그 때나 타세” 하면서 이 긴 거리를 걸어서, 연희전문의 졸업식에 선 것입니다. 선생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우리 집에서 여러분을 보려고 널미재라는 높은 고개를 넘을 때 무릎이 묻히는 눈길을 걸어오면서 앞서간 사람의 발자욱만 따라 왔습니다. 개울길에 들어서니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길이 아닌 곳으로 발자욱이 났으므로 나는 그 자욱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 아는 산길이기 때문에 원래의 길을 찾아서 생눈을 뚫고 발자욱을 내어 내 뒤에 오는 사람은 내 자욱을 따라오도록 하였습니다.
변변치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여러분만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면에 하나 있을까말까 한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국보급 존재입니다. 그러면, 교문을 나서는 여러분들이 옮겨야 할 발길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목자없이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구하려고 내 고장인 농촌으로 가지 않으시렵니까? 강자를 도와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해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주고 같이 강한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산 속의 눈길을 걸을 때 생눈을 뚫고 원 길을 찾아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르는 사람도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니 본래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증거를 같이 준비하면서, 아무래도 그 보리울마을에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홍천의 어딜까 하고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이런! 벌써 <한서 남궁억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무궁화동산도 있고요. 블로거에 좋은 사진을 많이 올려두신 현재호 목사님에게 연락을 해보니, <모곡예배당>도 복원되었고, 선생의 호를 따서 <한서교회>가 세워져 선생의 뜻을 이어오고 있음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기념관을 방문하여 모자란 지식도 채우고, 그의 뜻을 조용히 이어오는 아름다움 속에, 사람이 죽어 다시 산다는, 부활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남궁억 선생이 모곡마을을 내려왔을 때가 56세였고, 일본 경찰에 끌려갔을 때가 71세였습니다. 60대에 정년퇴직하고 은거하려고 하는 어른들에게는, 한서 선생의 예는 인생 이모작이란 말이 실감납니다.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고요. 나라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나무의 밑거름이나 되었으면 하는 유언도 훌륭하고, 수목장의 선구자이기도 하구나... 참으로 많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길어졌는데, 처음에 언급한 십자가당사건은 어떻게 처리되었나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십자가당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 검찰, 예심, 재판기록이 소상히 남아 있습니다. 보리울마을 사람들 수십명이 문초를 받고, 취조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건의 실상이란 별 볼 일 없습니다. 목사들과 몇몇 뜻있는 젊은이들의 당시의 절망을 타개하려는 몸부림이었던 게지요. 그런데 안 그래도 눈에 거슬렸던 남궁억 선생의 영향력을 말살시키려는 음모가 더해지면서, 모두 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수사와 공판기록을 보면, 70대의 노선생의 꿋꿋한 지조가 실감나게 살아납니다. 선생은 9개월의 옥살이 끝에 보석으로 재판을 받아 징역 10월, 집행유예 3년의 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만들고 키웠던 모곡학교는 일제에 빼앗겨 관립학교로 바뀌었고, 학교에 있던 무궁화 묘포는 완전히 뽑혀버렸습니다.
선생은 재판 후 잠시 서울에서 간병을 한 후, 모곡으로 돌아왔습니다. 경기도 가평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사륜교(가마)를 보내 모셔오도록 했는데, 선생은 “나라를 빼앗겨 고생하는 백성이 무슨 가마며 양반과 상놈이 무슨 말이냐! 하루 5리를 가더라도 걸어가겠다”고 하면서 강을 따라 걸어올라와 그 근처 집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나룻배를 타고 모곡동산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입니다. 1922년 가을, 선생은 한 생각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은 마태복음 9장 37~38절을 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으로 묵상하고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棄物)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받으시고
젊어서 가졌던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 하일지라도 변절하지 마시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그런 다음 그는 노랫말을 하나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입니다. 우리의 삼천리반도를 “하나님이 주신 동산”으로 알고, “삼천리 강산 위해서 일하러 가세” 하고 노래합니다. 무슨 일을 하러? 여러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겠지요.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번져 일제하에서 가장 애창하는 곡이 되었고, 1928년 합동찬송가에 수록되었습니다. 선생이 옥고를 치루고 돌아온 후 이 노래는 1937년 선생이 지은 모든 노래와 함께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 이 노래는 우리의 찬송가에 수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여, 오늘의 응답찬송은, 두말할 것 없이, 이 580장으로 하겠습니다. (다만, 요즘 찬송가가 아니라, 당시의 찬송가 가사를 보면서 말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놀라운 은총의 하나님, 나이 56세에 시작하여 70대 중반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구어낸 이 역사가 놀랍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서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어린이와 같이 되어” 남궁억 선생이 일구어낸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를 통하여 거듭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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