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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행4: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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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중국 만주에 있는 교포들은 극동 방송국의 설교를 열심히 듣는데,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설교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내용의 설교라고 합니다. 그들은 특히 물질적인 복을 강조하는 설교를 싫어하는데,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없는 그들에게 그러한 설교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복적인 설교가 인기 있는 한국 교회의 상황과는 참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성도들은 축복을 정신적인 축복이나 인격적인 축복, 특히 하나님과의 바르고 순수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축복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물질적인 풍요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새 세상의 물질주의에 빠져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하는 시대에 고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믿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성도에게 고난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문제는 고난을 당하되 어떻게 당하는가,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가 처음으로 핍박과 고난에 직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난이 오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교회는 놀랍게 성장해 갔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였으며, 사랑의 교제가 풍성했고, 부흥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 교회에 고난과 핍박이 덮쳐 왔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으며, 이 이적을 계기로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설교가 중단되고 베드로와 요한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1-3절) 교회의 복음 전파가 시작된 후 최초의 공개적인 핍박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핍박자들
사도들을 핍박한 자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왜 사도들을 핍박했을까요? 1절에 보면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귀족 계급으로서 제사장직을 독차지하면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구전을 경멸하고 오직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와 영혼 불멸, 부활 등 초자연적인 것들을 부인하는 종교적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중심적인 내용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계급이었던 사두개인들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임무에만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며, 이처럼 놀라운 이적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두개인들과 초대 교회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파가 붕괴되든지 교회가 짓밟히든지 양단간에 결판이 나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과연 전통과 권위, 그리고 권세를 가진 사두개파가 붕괴될까요, 아니면 이제 갓 싹트기 시작한 어린 교회가 짓밟히게 될까요?
공회 앞에 선 사도들
사도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둔 당국자들은 이튿날 이들을 재판하기 위해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5절) 관원은 제사장들과 관리들이었으며, 장로들은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이었고, 서기관들은 율법의 해석자요 백성의 선생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공회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공회는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쟁쟁한 공회원들이 각자 위엄을 차리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장 계급이었던 사두개인들은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아마도 바로 그 자리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신 주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로마 정부에 넘겨져 처형될까요? 과연 평범한 어부 출신인 사도들이 이러한 공회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공회는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6-7절) 종교와 성전에 관한 한 우리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데 너희들은 무슨 근거로 그러한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질문을 복음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을 때도 이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21:23). 대제사장들은 성전과 종교에 관한 한 자기들이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마땅히 그들이 해야 했으나 이권이 개입되어 있어서 하지 못한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질문을 하며 따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관심과 인기가 사도들에게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성전의 권위자요 책임자들이었던 그들은 소외를 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전과 종교에 관한 한 모든 권위는 자기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따지며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렇게 위압적인 공회 앞에 선 사도들은 아무 힘도 없는 초라한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며 특히 법정에 끌려갔을 때 무엇을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의 그 약속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
공회 앞에 서 있던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지혜롭고 담대하게 대답했는지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8-10절) 베드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름을 완전하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위급한 순간에도 사도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안전이나 변호가 아니라 주님의 명예와 영광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구원하는 유일한 이름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1,12).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이들은 예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메시야이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바로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는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어떤 사람들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지나친 독선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미국의 콜로라도 주에 큰 산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불은 산허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해서 정상을 향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의 윗부분에 있던 등산객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산의 윗부분에는 많은 집들이 있었는데, 거기 살고 있던 사람들도 역시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빨간 밧줄을 내려뜨린 헬리콥터 한 대가 나타나서 허둥대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살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빨간 줄을 따라 오시오. 이 길로 오셔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계곡을 가리켰습니다.
여러분은 이 멧시지를 독선이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에 하나의 살 길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에게 구원 얻을 만한 오직 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졌다는 것은 독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놀라고 난처해하는 공회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을 들은 공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한낱 갈릴리 어부 출신의 무식한 자들’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추상같은 권력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지혜롭고도 담대하게 변론을 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막강한 공회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든 증거가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40년 이상 걷지 못하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4절) 움직일 수 없이 명백한 증거 앞에서 그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을 보면서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반대자들과 비난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처럼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병자가 치유함을 입은 증거, 험악했던 사람이 변화된 증거, 기가 막힌 어려움이 해결된 증거 … 교회에는 이러한 증거가 많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증거가 많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전도할 때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강력한 증거들이 우리에게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 이처럼 지혜롭고 담대하게 대답을 했으며,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서 고침 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는 딜렘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과 그들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권위와 체면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잠시 퇴장시킨 가운데 회의를 속개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삽시간에 복음이 온 예루살렘에 퍼질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을 투옥시키거나 처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엄히 금하기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도들을 불러 들여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5-18절)
그러나 그들의 협박에 대하여 사도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19-20절) 사도들의 대답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로써 당시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으며, 종교에 있어서 전권을 가지고 있던 사두개인들은 이미 패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21절) 이후로도 이들의 핍박과 방해가 계속되지만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핍박하고 있던 교회에 의하여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수많은 방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더욱 능력 있게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능력 있는 교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들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그들을 심문하는 모습도 예수님을 심문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사도들을 심문하면서 산헤드린 공회는 마치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난감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했으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이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사도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성령을 충만하게 받기 위해서는 더욱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친히 우리 가운데 함께 계셔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며, 모든 고난과 반대와 핍박을 능력 있게 이기는 교회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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