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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4:2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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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들은 성령께서 사도들을 고용하시어 행하신 일들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한 사람들, 즉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해 나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대개 성령충만의 결과를 방언이나 신유 등 은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성령충만의 결과로 가장 먼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들고 있으며,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공동체
산헤드린 공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고 협박했으나 그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사람들임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공회는 사도들을 위협하면 모든 일이 쉽게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담대하게 그들의 위협을 거절했습니다. 사도들은 담대하게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큰 싸움을 치르고 엄청난 위협을 당했던 사도들은 격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가서 격려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석방되자마자 교회에 가서 이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외로움과 슬픔을 느낄 때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도움을 주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보고를 듣자마자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기도할 때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대주재
초대 교회가 기도하는 모습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좋은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했는데, 하나님을 ‘대주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최종적인 권세를 가진 절대 통치자, 도전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진 통치자에게 사용되던 용어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대주재’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협박했으나, 교회는 자신들이 산헤드린 공회보다 훨씬 높은 권세 아래 있음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24절) 하나님은 또한 이러한 핍박이 있을 것에 대하여 이미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신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25-26절) 초대교회 성도들은 권세자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했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7-28절) 그들의 핍박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웠으며, 자신들은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됨으로써 기도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히 채운 다음에 기도한다면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간구
초대 교회가 기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들은 큰 위협과 핍박에 직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을 보호해 주시라거나, 이 핍박으로부터 피할 수 있게 해주시라거나,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벌해 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위협을 하감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염두에 두기만 하신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염려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멋있는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29절) 지금 그들은 말씀 전하는 것 때문에 이러한 핍박을 받고 있는데, 이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핍박을 없애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았으며, 그 핍박 때문에 사명을 회피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더 이상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해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즉 복음이 능력 있게 전파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친히 함께 하시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해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려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구하는 성숙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늘 남편이, 또는 남이 변화되게 해주시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내가 변화되어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욱 귀합니다. 환경이 변화되게 해주시라고 기도하기 전에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들은 또 병을 낫게 하시고 이적이 일어나게 해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30절)
응답
제자들이 얼마 동안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하나님께서 곧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응답은 3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31상) 이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능력 있는 설교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 지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하) 5:12에 보면 그들의 세 번째 간구, 즉 예수이름으로 병이 낫게 해주시라는 기도도 응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5:12)
성령충만의 결과
성령충만의 결과 그들은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고, 이적이 많이 일어났으며,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혼이 구원받고 생각이 바로 서며, 말과 행실이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빠져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경제생활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돈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지 못했다면 그 신앙은 아직도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따르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원리는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초대 교회에 성령이 충만한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데, 2장에 이어서 두 번째로 성령충만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번 기록된 성령충만의 결과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오순절에 성령충만하게 되었을 때 사도들은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으며,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그리고 본문에 다시 성령충만한 결과로 복음을 담대히 전하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여기서 우리는 성령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경제생활이 놀랍게 변화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충만한 결과 물질을 서로 통용했으며(32), 필요에 따라 분배했고(35), 그 결과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34).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음
본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고”(32)입니다. 이것은 이기심과 욕심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그 결과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과 함께 나누어 쓰라고 그것을 나에게 맡기신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게 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하고 은혜충만한 사람의 가치관입니다.
19세기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은 자기들의 재산, 특히 유산을 선교를 위해서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 미국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온 세계로 파송되었고, 당시에 그들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우리나라에까지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교회에 바치거나 사회에 기탁합니다. 이러한 운동은 자기의 소유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도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나 아직 너무나 미미합니다.
오늘 우리도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데에 사용하도록, 복음을 위해, 형제를 위해 사용하도록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도, 은혜가 풍성한 성도는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깨닫고 순종함으로 참된 청지기의 본분을 다하게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소유에 대하여 이러한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공산주의
초대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공산주의입니다. 그러나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특히 그 동기와 원인에 대해서 고찰해 볼 때 우리는 양자 간의 차이를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기들의 이상을 위하여 폭력혁명을 사용했으며, 공산주의 사회의 지탱을 위해서 끔찍한 폭력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자기의 소유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들의 생활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33) 이러한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모든 성도들은 초대 교회처럼 이러한 생활을 해야만 할까요? 우리가 문자적으로 그러한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강제성은 없습니다. 당시의 성도들도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했으며, 사유재산을 부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기사를 읽고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강철보다 더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에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풍성하게 내주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유하기에 급급할 뿐 아니라 무정하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 흡족해 한다. 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았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욕망의 하나는 사려는 욕망이다. 당시에는 사랑으로 인해 각 사람의 소유가 곤궁한 사람을 위한 공동재산이 되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몰인정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같이 사는 것, 물, 공기, 하늘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조차 아까워서 꺼려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경제생활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의 경제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인식하고 우리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기로 결단하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교훈들은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하감하시고,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하시며, 오늘 우리 교회가 능력 있는 모습으로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주며,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010·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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