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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고전15: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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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 참고 :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
자신의 가능성을 부활시키십시오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
전 세계에는 유명한 무덤들이 많습니다. 그 무덤들은 유명인들이 매장되어서 유명하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된 것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왜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습니까?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 영생을 얻고 또한 이 땅에서 살면서도 후반전이 강한 역전인생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감격적인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신 사실에 깊이 감격하며 말합니다. 본문 뒤쪽의 51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성도들은 죽어도 주님이 재림할 때 순식간에 영생을 가진 존재로 부활됩니다. 이 부활은 완전한 육신을 가진 존재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망을 조롱합니다. 본문 뒤의 55-56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은 율법 아래서 사는 죄인에게만 영향력이 있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성도는 이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성도도 죽습니다. 그래도 사망이 성도를 정복한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반드시 부활하기에 결국은 성도가 사망을 정복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뒤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그런 감사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의 삶 >
오늘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성탄절보다 더 중요한 날입니다. 성탄절은 주님이 ‘승리하러 오신 날’이고 부활절은 주님이 ‘승리를 이루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본문은 부활에 관한 몇 가지 위대한 진리를 말해줍니다. 첫째,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12절). 둘째, 죽은 자의 부활은 틀림없이 있다는 것입니다(13절). 셋째, 부활이 없다면 믿음은 헛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14절). 넷째, 예수님의 부활로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17절). 다섯째,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성도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18-19절).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고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믿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하십시오. 믿음은 윤리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 주님 안에서 부활의 삶을 체험하고 장래에 영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주어져도 그 말씀이 생활의 변화는 일으켜도 생명의 변화는 일으키지 못합니다. 생명의 변화가 나타나려면 기본적으로 살아계신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율법적인 사람인 줄 오해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깊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이 언제 생겼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생겼습니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도 한때는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최후의 만찬 때 야고보도 그 현장에 있었는데 주님이 죽음을 상징하는 잔을 권하자 그 잔을 걷어차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는 주님의 일에 큰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 엄청난 능력을 사용해서 세상을 무력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데 죽겠다는 말씀만 하고 잔을 받아 마시라고 하니까 너무 울화가 치밀어 그 잔을 걷어차고 나간 것입니다.
그런 야고보가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야고보에게 잔을 권하자 그때 야고보는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개만도 못한 저를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그때부터 야고보는 최고의 전도자가 되어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 감독으로 30년간 지내다가 야고보서를 쓰고 순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그때부터 위대한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런 만남을 사모하십시오.
2. 십자가의 부담을 지십시오
부활은 ‘부활절 달걀’이나 ‘부활절 칸타타’를 통해 경험되기보다는 십자가를 선택하는 모험을 통해서 경험됩니다. 십자가는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삶의 쉼표’로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만드셨습니다. 그런 역사가 있음을 믿고 십자가의 부담을 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기적은 장난이 되고 부활은 우화가 되고 재림은 헛된 망상이 됩니다. 그만큼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옛날 성도들은 십자가 모양만 봐도 경건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힘들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위로를 얻었고, 무서우면 십자가 모양을 손으로 그리며 무서움을 쫓아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치기 놀이>로 십자가 모양의 나무 조각을 때렸다고 엄마에게 무섭게 혼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옛날 성도들은 십자가를 중시했습니다. 성경 복음서를 보면 십자가와 관련된 말씀이 가장 자세하게 많이 나옵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중심이고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각 교회마다 십자가를 세웁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삶이 요새 많이 퇴색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모태신앙이 “못해 신앙!”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부모의 눈물의 기도로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언제 그런 깊은 만남의 체험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십자가의 질 때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는 거룩한 부담을 지는 것입니다. 요새 부담이 되서 큰 교회 간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고 승리도 없고 축복도 없습니다. 집은 기초를 닦아야 올릴 수 있고 열매는 씨를 뿌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축복의 기초를 닦고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축복을 원하면 ‘부담 없는 삶’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을 때 부담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세상의 사교단체는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지만 사실상 그곳에도 부담이 있습니다. 어느 단체에 가든지 그곳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려면 부담을 져야 합니다. 친구관계도 부담을 지려고 해야 그 관계가 잘 유지됩니다. 전화도 받을 생각만 하고 전화할 생각은 안 하면 그 관계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부담을 지지 않고 좋은 열매를 딸 수는 없습니다.
또한 적절한 부담은 축복의 열매도 맺게 하지만 영혼을 튼튼하게도 만듭니다. 오뚝이가 넘어져도 왜 쉽게 다시 일어섭니까? 오뚝이 밑의 바닥짐 때문입니다. 요트가 거센 풍랑으로 전복되어도 왜 금방 원상으로 회복됩니까? 요트 밑의 무거운 바닥짐 때문입니다. 그처럼 적절한 부담은 힘들 때 영혼을 일으키는 인생의 바닥짐입니다.
결국 부담이 없는 것은 겉으로만 좋아 보이지 실제로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부담이 없는 관계는 깊게 되지 못해서 역경을 만나면 금방 그 관계가 깨집니다. 부담이 없으니 얼마나 헤어지기도 쉽습니까? 그래서 깊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살면서 ‘부담을 주려는 마음’은 가지지 말되 ‘부담을 지려는 마음’은 가지십시오. 적절한 부담을 져야 우정과 사랑을 얻듯이 신앙생활에서도 십자가의 부담을 져야 하나님의 은총을 얻습니다.
3. 넘치는 희망을 가지십시오
왜 사람들이 죽음을 무서워합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서 이름을 남겨도 죽고 끝나면 죽은 본인에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고 실질적인 유익도 없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면 오히려 악인이 더 수지맞게 됩니다. 죽고 끝난다면 많은 것을 남긴 사람은 죽으면 끝이기에 가진 것을 다 뺏긴 셈이 됩니다. 그러나 나쁜 일로 사회에 빚만 남긴 사람은 죽으면 끝이기에 그 빚을 다 탕감 받는 셈이 됩니다. 결국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가장 불의하고 불합리한 생각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면 악인은 좋겠지만 선인의 선행은 어디서 보상받습니까? 그래서 죽으면 끝이 아니어야 합니다.
실제로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날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날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가장 기쁜 날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고생하며 흘렸던 피와 땀과 눈물을 넘치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은 꼭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처럼 죽고 끝이 아니라면 성도에게는 무한한 희망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상상을 초월하는 찬란한 삶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죽는 상태에서도 넘치는 희망을 얘기한다면 현재 산 상태에서는 더욱 넘치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 희망이 있으면 어떤 힘든 상황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가끔 먼저 천국에 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해서 섭섭하지만 영적으로 깊이 교제하다가 앞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러므로 항상 넘치는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내일의 꿈과 비전과 희망을 가진 자가 현재의 재산을 가진 자보다 더 부자입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인생의 성패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나가면 그 앞에는 찬란한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 자신의 가능성을 부활시키십시오 >
저는 학생 때 키가 작은 것에 대해서 큰 콤플렉스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전투적이었고 동시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대중 앞에 잘 서지 못했습니다. 또한 마음에 드는 사람과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결혼도 잘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어둔 생각을 떨치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강하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더 여성들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생각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한 생각이 더 커지면서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때 키에 대한 콤플렉스도 상당히 없어졌습니다. 또한 그때 사람들에게 억지로 강하게 보일 이유도 없어졌고 몸만 축나는 것 같아서 운동도 그쳤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성품이 온유해졌습니다. 그때부터 호감을 보이는 여성도 생겨났고 결혼도 기대 이상으로 잘하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주님 안에서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부활시키십시오.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마십시오. 내 운명은 남들이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결정합니다. 남들이 아무리 부정적인 딱지를 붙여도 스스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도 우리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저지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항상 복된 내일을 꿈꾸며 사십시오.
역대상 4장에는 ‘야베스의 기도’로 유명한 야베스가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고통, 문제, 슬픔‘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의 어머니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를 낳을 때 지극히 비참한 심정을 가졌기에 그런 자신의 심정을 투사해서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이름을 붙여서 그의 앞날을 비참하게 만듭니까?
그 이름이 야베스에게 얼마나 비참한 영향을 주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면 이렇게 인사했을 것입니다. “야베스(문제아)야! 잘 있었니?” 또한 그가 올 때마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야베스(문제아)가 온다.” 어릴 때부터 사람을 만나면 죄도 없이 문제아란 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자신도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비참해진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잘못된 딱지를 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며 살던 어느 날, 야베스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 체험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생각했습니다. “비록 어머니가 내게 문제아란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분명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찬란한 계획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고 부르셨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는다. 계속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복에 복을 더해주시고 저의 지경을 넓혀주소서.”
그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아마 천사장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가브리엘아! 저 야베스를 봐라! 그에게 수많은 역경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실패자, 문제아, 루저(loser)’란 이름을 붙였는데도 지금 저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라. 저가 나를 간절히 바라보며 자신에게 위대한 미래가 펼쳐질 것을 믿고 기도하지 않느냐? 그가 지금 어머니가 붙인 딱지를 벗어버리고 내 약속을 믿고 있지 않느냐? 내가 어찌 저런 믿음의 자녀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겠느냐?”
그 하나님의 기쁨에 찬 음성을 듣고 가브리엘을 비롯한 수많은 천사들이 즉시 야베스의 축복을 위해 동분서주 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야베스가 자신에게 붙여진 잘못된 딱지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기도하자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이제 자신에게 붙여진 잘못된 딱지와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야베스처럼 고백하십시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가겠다. 내게도 축복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 음성을 들려주시려고 오늘 나에게 이 말씀을 듣게 하셨다. 분명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찬란한 계획이 있다.”
아무리 현재의 처지가 어려워도 사람들이 붙인 딱지로 자신을 규정하지 마십시오. 심지어는 부모가 붙인 딱지에도 연연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붙인 최종적인 축복과 약속의 딱지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려주신 복된 이미지로 자신을 계속 그리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너는 내 자녀다. 너를 향한 찬란한 계획이 있다. 누구도 너를 해치지 못한다.”
과거에 잘못된 선택으로 큰 실패를 경험했어도 상관없습니다. 과거의 삶이 자신의 전체 인생을 규정할 수 없고 내일의 찬란한 축복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실패를 경험했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 얼마든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운명은 사람들이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여러분 안에 찬란한 축복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믿고 야베스처럼 잘못된 딱지를 벗고 축복의 길로 과감히 나서십시오.
< 큰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
더 나아가서 이제 잘못된 딱지를 벗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의 지경을 넓혀주소서! 저도 큰일을 하게 하소서! 제가 한때 주님을 모르고 실패했지만 이제는 주님만 바라보고 찬란한 미래를 얻게 하소서! 그래서 예수 믿고 인물이 되어 선교와 구제의 큰손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현재 모습만 보고 길이 없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눈에는 길이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눈에는 길이 방사선처럼 많습니다.
곤충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땡벌(bumblebee)은 도저히 날 수 없다고 합니다. 몸집에 비해서 너무 날개가 작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자들이 공기역학적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땡벌이 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자연법칙에 따르면 땡벌은 땅에서만 기어 다니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곤충학자들, 공기역학자들, 물리학자들이 다 날 수 없다고 딱지를 붙였지만 땡벌은 지금도 잘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왜 땡벌이 그렇게 잘 날 수 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땡벌을 날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에 의해 제한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남들이 나쁜 딱지를 붙여도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살면 얼마든지 높은 창공에서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이제 자연법칙에만 매여 살지 말고 자연법칙을 넘어선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사십시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자연적인 법칙을 넘어설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가능성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남들이 붙여 놓은 딱지와 부정적인 이미지에 갇혀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가능성도 제한됩니다. 자신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잘못된 딱지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축복의 딱지를 붙이십시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힘입어 자신의 가능성을 부활시키고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과거의 실패는 나를 제한할 수 없다. 내 앞에는 찬란한 새로운 세계가 있다. 나는 놀랍고 두렵고 경이로운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나는 그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리라.”
세상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집사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세요. 그저 편안히 살다가 가세요. 당신은 더 이상 날지 못해요.” 그런 인간 전문가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세상을 오래 경험하다 보면 자신도 조심 전문가가 되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 지금까지도 못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겠어?” 그러나 다른 전문가는 다 되어도 조심 전문가는 되지 마십시오.
이제 내일 저는 제 28차 미국 기독교선교연맹 한인총회에 참석하려고 미국 뉴저지로 떠납니다. 이번 총회 기간 중에는 내년 제주도에서 열릴 제 29차 총회 프레젠테이션을 합니다. 이번 총회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내년 총회 준비가 보통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방에서 부정적인 정보들이 많이 들려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서 내년 총회에서 많은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을 기쁘게 섬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살다 보면 좋은 비전을 세우고 나갈 때 수많은 부정적인 의견이 들려오면서 우리의 비전을 흔들고 우리를 주저앉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내게는 하나님이 달아주신 강한 독수리 날개가 있다! 나는 이 비전을 이룰 수 있다! 이 비전을 이루도록 나는 운명 지워졌다!” 그처럼 좋은 뜻을 품고 거룩한 큰손의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야베스처럼 복된 삶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번에 부활절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자신의 가능성을 부활시키고 교회의 가능성도 부활시키십시오. 그리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붙잡고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일어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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