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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빛으로 밝아진다(Light Becomes Brighter Only by Light)
요한일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257 추천 수 0 2011.06.29 16:59:48성경본문 : | 요일1: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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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9.4.19 (김 영봉 목사)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설교
"빛은 빛으로 밝아진다"(Light Becomes Brighter Only by Light)
요한일서 I John 1:5-10
1.
지난 40일 동안의 사순절 그리고 지난주의 부활 주일 예배는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40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혹은 사순절 마지막 날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서, 혹은 목회자에게 안수 기도를 받으면서, 혹은 세례 갱신례를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분들이 많습니다. 지난 부활 주일 예배는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오후 4시 30분에 모였던 청소년 세례 및 견신례 예배는 특별했습니다. 열 두 명의 청소년이 세례를 받았고, 열 여덟 명의 청소년이 자신이 어릴 적에 받은 유아 세례를 확인하고 다시 헌신하는 견신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침례’와 ‘세례’를 병행했습니다. 자신과 가족이 원하는 방식에 따라 세례와 침례와 견신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식을 집례 하는 저나 그 예배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경외심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잠시 그 예배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시겠습니다.
(동영상)
지난주일,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맥클린과 매나싸스를 오가며 다섯 번의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와 성찬과 세례를 집례 해야 했습니다. 다 끝내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탈진감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런 것은 전혀 없었고, 그 대신 가슴 벅찬 감사와 보람과 의미가 마음에 가득 채워졌습니다. 저의 몸과 영혼이 burn out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burning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교우들 모두에게도 같은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2.
이번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내오면서 교우들께서 겪은 영적 체험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교우께서는 사순절 마지막 날, 기도하는 중에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보았습니다. 피에 젖은 몸과 손을 보여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안겨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몸에 묻어있는 피 때문에 안기기가 주저되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눈을 꼭 감고 그 품에 안겼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피로 자신에게도 얼룩이 생길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분의 품에 안긴 다음 마음의 눈을 떠 보니, 자신이 눈보다 더 깨끗하게 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교우는 이민 온 지 만 4년이 되어 가는데, 그동안 새로운 직업을 위해 준비하시다가 지난주부터 드디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제게 보낸 메일에서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 와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 '십일조' 이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큰 축복인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었습니다." 이 교우님은 일 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과 훈련이 있으며, 일터가 있어서 땀 흘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새삼 경험한 것입니다. 한국에 사는 동안에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은혜와 축복임을 깨달았고,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감사요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내면서 이렇게 신비롭고 놀라운 체험을 하신 분들도 있겠고, 특별하진 않지만 영적으로 큰 진보를 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무덤덤하게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느 교우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기도하면서 뭔가 특별한 체험을 주시기를 구했는데, 아무 것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다른 사람은 쉽게도 받는 은혜가 왜 저만 피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에 공감하실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교우들께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제외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이미 하나님께 전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여러분에게 미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때때로 우리를 답답하게 만듭니다.
시인 고은 선생이 어느 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어찌 보면 고은 선생의 말이 진실입니다. 모습도 소리도 없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모습도 소리도 없는 하나님이기에 우리를 만지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바람으로 비유하면, 토네이도처럼 임하기도 하시고, 미풍처럼 임하기도 하십니다. 비나 눈으로 비유하자면, 소나기처럼 내리기도 하고, 이슬비처럼 내리기도 하며, 때로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서야 발견하는 싸락눈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저는 영성 수양회에서 교우들이 겪은 특별한 영적 체험 이야기를 설교에서 몇 번 나누었습니다. 수양회에 참여한 교우들 가운데는 그 같은 특별한 체험이 없었던 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헛걸음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분들이 그곳에서 드린 기도와 다른 사람들과 가졌던 영적 사귐은 본인이 느끼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도록 만들어 주었음에 분명합니다. 다만, 바람의 종류가 달랐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내는 동안 특별한 영적 체험이 없었다 하여 헛수고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임할 것입니다.
3.
왜 하나님은 나만을 피해 다니실까? 다들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 왜 나만 늘 예외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며 제 경험 이야기 하나를 나누려 합니다.
저의 50년 인생을 되돌아 볼 때, 가장 어두웠던 시절은 대학교 3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신학대학에 진학하려 했는데, 아버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반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에서의 첫 해는 매우 청교도적인 열심으로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해 매우 열심이었고, 대학 문화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하며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가겠다는 헌신의 태도 역시 시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저의 믿음은 약해졌고, 소명감도 희미해졌습니다. 그에 비례하여 제 스스로 세웠던 기준이 하나 둘씩 허물어지고, 스스로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규정한 것에 하나씩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타락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인들이 잘 넘어서지 못하는 ‘제한선’(bottom line)이 있습니다. 아무리 망가져도 웬만해서는 넘어가지 못하는 마지노선이 있는데, 저도 그 선 안에 있었습니다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약해지면서 저의 삶에 깃든 것은 어둠이었습니다. 어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생기는 것이 어둠입니다. 저의 믿음과 소명감이 점차 흐려지면서 어둠이 점점 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았던 저는 어둠을 조금씩 경험하면서 어둠 속에 사는 맛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 머물게 되면 자연 어둠의 일, 즉 죄를 탐하게 됩니다. 죄 즉 어둠을 탐하고 즐길수록 제 어둠은 더욱 진해지고 깊어졌습니다. 그것이 대학 3학년 여름까지 저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시기에 저는 어설픈 솜씨로 기타를 쳐 가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제 심정을 담은 노랫말을 쓰고 어설픈 곡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아, 여기까지 공개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에 저의 어둠을 담은 노래 가사가 하나 있어서 소개합니다. 30년 전에 쓴 것이니까, 유치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가사의 제목은 유치찬란합니다. ‘야생마.’
구름이 호수에 내려앉을 때
너는 천년의 꿈을 꾸었노라
넓고 푸른 들판에 너의 꿈은 푸르렀고
드넓은 하늘에 너의 갈기 휘날렸네
달려라 뛰어라 날아라
달려라 뛰어라 날아라
영겁을 뛰어 넘어 순간을 이루고
너의 발굽 치달아 무한을 초월하라
달려라 뛰어라 날아라
달려라 뛰어라 날아라
제목은 유치찬란하지만, 그 제목과 이 노랫말에 담긴 저의 심정은 절실하고도 절박했습니다. 어둠을 떨치고 마음껏 하늘로 비상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은 그러한데, 저는 어둠 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갈증은 깊어만 갔고, 답답함은 저를 질식시킬 정도인데, 그것에서 벗어날 길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
그러던 중, 여름 방학이 되었고, 중고등부 여름 수양회에서 교사로 봉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늘 바닷가로 수양회를 갔는데, 그 전 해에 어느 바닷가에서 어느 교회 수양회 팀이 물 사고를 만나는 바람에, 그 해에는 산에 있는 어느 기도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 어둠을 붙들고 얍복강의 야곱처럼 씨름해 보겠다고 결심하고 참가했습니다.
3박 4일의 수양회 기간 동안, 저는 낮에는 교사로 봉사하고, 아이들이 잠을 자는 밤에는 홀로 예배실 강단 십자가 밑에서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새벽이 되면 잠시 눈 붙이고는 또 하루 일정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저는 사흘 밤 동안 목청이 쉬도록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불덩이가 내리던가 전기에 감전되던가 아니면 환상이나 음성이라도 듣기를 원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간증하던 그런 식의 체험이 나에게도 주어지기를 기대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저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수양회를 끝내고 내려오는 저의 마음은 참 착찹했습니다. 일종의 실망감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 혼자 남아 될 때까지 기도해 볼까?"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다음을 기약하고 하산했습니다. 그 때의 제 마음은 ‘헛걸음’을 했으며 ‘헛수고’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헛걸음이 아니었고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안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산을 다녀 온 후, 저는 제게서 어둠이 걷히고 있었음을 느꼈고, 즐기던 어둠의 일들에 물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질식시킬 것 같던 영적 속박에서 풀려 있고 영적 체증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게서 어둠이 걷히고 있다면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제가 어둠의 일에 물리고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는 말은 제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옮겨져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영적 속박에서 해방되고 영적 체증이 뚫렸다는 말은 성령께서 저를 해방시켰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 이후로 저는 서서히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고, 소명감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대학 4학년 때 결국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기로 진로를 정한 것은 바로 사흘 동안의 영적 씨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저의 영성이 이 때 완전해지고 그 영성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아닙니다. 늘 그렇듯, 저의 영성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의 우여곡절(ups and downs)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육신 안에 살고 이 세상 안에 살고 있는 한, 우리의 영성이 자동적으로 늘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때로는 영적으로 나른해지는 변화를 겪습니다. 저도 그 이후 지금까지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다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많은 기도와 헌신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아무런 체험이 없다고 실망하는 분들께서는 그 실망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뭔가 나 자신도 부정하지 못할 특별한 체험이 오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의 터치를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의 간구에 응답하셨고, 또한 앞으로도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미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어둠 안에 있던 우리에게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일서 1장 5절이 말하듯, "하나님은 빛이시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은 빛으로 나오는 것이며, 그분과 사귀며 살아가는 것은 밝은 태양 아래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비치는 순간 어둠은 물러납니다. 빛 가운데 살면서 빛의 일을 행하면 우리에게 비친 하나님의 빛은 더욱 밝아집니다.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을 귀 담아 들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저는 어둠 가운데 살아 보았습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어둠이 제 삶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 어둠의 경험을 통해 어둠의 원리를 조금 터득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약해지면 우리의 삶에는 어둠이 득세합니다. 어둠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 어둠이 짙어지면, 우리는 어둠의 일을 탐하게 됩니다.
‘어둠의 일’에 대해 바울은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여 이렇게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 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갈 5:19-20). 이 같은 어둠의 일에 빠지면 빠질수록 우리를 덮고 있는 어둠은 더 깊어집니다. 어둠이 어둠을 더 짙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어둠의 일들을 탐합니다.
다행히,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둠 안에서 끝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한 편으로는 어둠의 일을 탐하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에 물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그렇게 지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상 빛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 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본성이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둠의 일에 깊이 빠져 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참된 구원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어둠을 청산할 수 있는 방법은 참된 빛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시골에 살면서 진한 어둠을 경험해 보아서 압니다. 어둠 안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어둠을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새벽이 되어 태양이 떠오르면 손에 잡힐 듯 진했던 어둠은 종적을 감추어 버립니다. 이것처럼 우리 내면의 어둠, 우리 인생의 어둠, 이 세상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길은 참된 빛이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얼마를 살아 보니 빛의 원리를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다 보면, 어둠의 일에 대한 관심도 사라지고 그 재미도 점점 시들해지고, 반대로 그 동안 관심 밖에 있던 ‘빛의 일’들에 관심이 생기고 열심이 생깁니다. ‘빛의 일’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하고 강하게 하는 모든 경건과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선행을 가리킵니다. 기도와 예배와 찬양과 말씀 묵상과 영적 교제와 사랑의 봉사가 빛의 일입니다. 사랑, 용서, 관용, 절제, 희생, 겸손, 인내, 친절, 배려 같은 것들이 빛의 일입니다.
어둠에 살 때는 이 모든 것이 괜한 일처럼 보였고 손해 보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빛 가운데 나오고 그 빛 안에서 살다 보면 이러한 일들이 좋아지고 그런 일을 할 때 행복과 기쁨을 맛봅니다. 그렇게 빛 가운데 살며 빛의 일을 도모하면 처음에 우리에게 비치던 하나님의 빛이 점점 밝아집니다. 빛이 빛을 더 강하게 합니다. 빛이 밝아지는 그만큼 우리는 더욱 더 빛의 일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어둠이 득세하고, 어둠의 일을 탐하며 살고 있습니까? 필경,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건 아닌데!"라는 영적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끝내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의 한 조각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그 어둠을 걷어낼 길은 하나님의 빛으로 나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친 그 찬란한 빛을 구하십시오. 빛 가운데 나오십시오.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하나님께 활짝 열어놓고 그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어둠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 기도하는데 아직 빛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십니까? 잠잠히 머물러 주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정오의 태양빛 같지는 않지만, 동이 틀 때처럼 어둠이 얇아져 가고 조금씩 조금씩 물체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에게 비치고 있습니다.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덧 여러분에게 비친 빛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환히 빛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둠의 일을 내려놓고 여러분에게 비친 빛이 더 강해지도록 더욱 빛의 일을 힘쓰십시다.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며 예배하고 교제하는 일에 힘쓰십시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십시다. 그 모든 빛의 일들이 우리에게 비친 빛을 밝힐 것입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의 찬란한 빛 가운데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십니다. 그 빛이 줄어들지 않도록 더욱 빛 가운데 거하며 빛의 일에 힘쓰십시다. 때로 그 빛이 약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놀라지 말고 그 빛이 다시 밝아지도록 영적 생활에 더욱 힘쓰십시다. 그리고 그 빛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빛의 삶을 전하는 일에도 마음을 쓰십시다. 어둠 가운데 죽어가도 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 "빛이 있어라!" 명령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빛을 우리의 인생 안에 비추게 하려고 당신의 모든 것을 태워 없애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고 참된 빛으로 인도하시고 빛의 일에 힘쓰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빛으로 불러내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희에게 빛을 비추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이 빛 가운데 살며 빛의 일에 힘써 빛으로 살아가며 이웃에게 빛을 발산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희를 빛 가운데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로 하여금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의 일을 사모하게 하소서.
빛 가운데 살며 빛의 일에 힘써
우리의 빛이 더욱 밝아지게 하시고
그 빛을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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