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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상당산성 등산

제52회 가족등산은 김경배 목사님가족과 함게 청주 상당산 일주를 했습니다.

종목 : 사적  제212호 
명칭 : 상당산성(上黨山城)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180,830㎡ 
지정일 : 1970.10.01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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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상당산성 가는 차 안 -지름길을 놔두고 먼 길로 돌아갔다. 아는길도 물어 가라는 옛 말도 있는데 모르는 길도 아는척 한 누구 누구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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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상당산성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오늘은 저기를 한바큅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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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태왕사신기 촬영지라고??? 연개소문. 대조영도 이곳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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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산성 정문 앞 광장...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고... 목숨을 잃었을지...그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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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지나가는 분에게 부탁하여 단체사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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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매월당 김시습 시비 - 김시습(金時習조선문인 1435(세종17)-1493(성종24) 충청 홍산
조선시대 초기 매월당 김시습은 청주 상당산성을 다녀가면서 유산성(遊山城)이라는 아름다운 시 한수를 남겼는데 시의 내용이 주인공의 명성만큼이나 아름답고 서정적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현대에 이르러 청주문인협회에서 이를 기념하는 시비를 세웠다. 청주대 김갑기 교수님이 번역한 유산성(遊山城)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遊山城 (유산성)

新晴風景凉 꽃다운 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肥蕨雨添香 들꽃마다 벌이와 꽃술 따물었고 살진 고사리 비 갠 뒤라 더욱 향긋해
望遠山河壯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登高意氣昻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明日是南方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내일이면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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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공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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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공남문 - 남문은 산성의 정문이다. 수 차례의 붕괴와 개축을 거쳐 1978년 복원되었으나 지금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인지 알 수 없다. 이 문에는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쌓는 옹성(甕城)이 없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치성(雉城)을 설치하고 문의 안쪽에 바로 옹벽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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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산성 안에는 이렇게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은 연못 주변에 음식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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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동장대  - 장대는 산 정사이나 전망이 좋은 곳에 ㅟ치하여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이 산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 2곳이 있다 .

동장대는 남장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의 남동쪽에 치우쳐있다. 지형상 고도가 낮아 장대지로 적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안과 성밖이 조망되고, 동문과 남문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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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동장대 복원 비석 -이곳에서 병사들이 훈련을 했다... 그런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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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땅이 질어서 징징대던 건이가 결국 아빠의 손을 잡고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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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동문인 진동문 - 예쁜척 하는 좋은이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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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반대로 진동문 위에서 좋은이가 아빠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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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신발안에 훍이 들어간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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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성벽을 보니 굉장히 정교한 모자이크 같습니다. 저 많은 돌을 어디에서 가져와 어떻게 저리 맞출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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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전화받는 아빠의 모습 좋은이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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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건이와 아빠는 끝까지 손을 잡고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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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동암문 -일종의 비상구 같은 곳인데, 안에서 밖으로 탈출할때도 사용하고, 혹 밖에서 안으로 적이 들어올 경우 적을 막기 위해 주변에 흙을 많이 쌓아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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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멀리 청주공항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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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여기가 상당산성에서 가장 높은 정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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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내려가는 길에는 로프가 있어서 암벽등반 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 아이들이 무척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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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자, 다음은 준이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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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멀리 서문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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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잘 보존된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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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서문인 미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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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서문 내려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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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미호문 처마 너머로 청주 시내가 보입니다. 하늘이 흐려서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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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새로 보수한 부분은 표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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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나무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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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청주 박물관 길에서 올라오는 입구에 아이스크림과 엿을 파는 가판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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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엿드세요 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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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다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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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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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배경 좋네요. 한장 찍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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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드디어 한바퀴를 돌고 마지막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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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오! 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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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칵 들기도 무거워 보이는 병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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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오! 칼잡이의 무시무시한 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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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데굴데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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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몰라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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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상당산성 등산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남문로에 위치한 청주제일교회...에 간 이유는 차를 주차시기기 위하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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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망선루(望仙樓)

망선루는 현재 옛 청남학교의 자리인 청주시 남문로 1가 청주제일교회 내에 있다가 중앙공원 내로 복원되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서 깊은 문화재이다. 망선루에 대해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지하다시피 원래 고려 때 세워진 관아의 건물로, 청주 客館의 동쪽에 위치한 누각이며 옛 이름은 聚景樓였다. 옆에 맑은 연못이 있고 사방이 훤히 트였다고 하니 이러한 곳에 세워진 2층 누각은 주변의 정취가 수려하게 보였으리라 상상이 되며, 그렇기에 聚景樓란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짐작이 간다. 14세기 후반,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난 갔다가 홍건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이 곳 청주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1361년(공민왕 10년) 청주에서 文科와 監試를 치루고 방(榜)을 이 취경루에 내 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후 조선시대 1461년 목사 李伯常이 중수했을 때 이 지역 출신 세도가인 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 望仙樓라 하였으며, 그후 李暹(이섬)이 중수하였고 다시 牧使 李修得이 보수한 바 있는 2층 누각이었다. 그런데 일제 시대 성안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성벽과 그 안에 있던 여러 건물이 헐리고 대신 일본식 건물이 들어섰다. 1921년, 현 도청 서문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도로 확장공사와 일본 경찰서내 일본인의 검도와 유도를 연마하는 武德殿 신축으로 역사적인 망선루가 헐리게 되었다. 그 당시 망선루는 청주 여자공립 보통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 역사적인 건물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당시 청주 청년회 회장이요, 교회 장로인 김태희는 우리 문화 유산인 망선루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그냥 그대로 헐리어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목격하고 이 건물을 옮겨 민족문화 유산을 잘 보존함과 동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방안을 세웠다. 그는 金種元·金正賢·李鎬宰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교회 청년들은 망선루를 살리기로 결심하였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대금은 유지들이 조달하고 이전 작업은 청년회가 책임을 지며 그 건물은 제일교회구내에 복원하여 학교 건물로서 활용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전 장소와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일단 인수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망선루의 철거가 임박하였기 때문이었다. 청주 청년회에서는 이 민족문화의 유산을 보전하기 위하여 뜻이 있는 시내 청년들과 일반 유지들에게 모금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고적 보존을 명분으로 하여 충청북도경찰국으로부터 수의 계약으로 2천 원에 망선루를 인수하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철거하였다. 헐린 건물에서 나온 목재며 기와들을 모아 옆 골목 공터에 쌓아 두었다. 일단 인수는 맡았으나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간이나 복원사업이 추진되지 못한 체, 자재들은 공터에 방치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 보관된 일부 목재는 인근 사람들에 의해 땔감으로 이용되어 망실되기도 하고 남아 있는 목재도 그 기둥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김태희 회장은 청년회원들과 함께 복원 문제에 대해서 청주읍교회와 본격적으로 협의에 나섰다. 그 내용은 방 한 칸은 청년회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청남학교 교실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청주읍교회로부터 동의를 얻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교회는 민족문화 보존과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고, 또한 청년회의 회원 가운데 그 교회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당시 김태희 회장은 청남학교 학감이라는 직분을 맡고 있었고, 때마침 청남학교는 청신여학교를 합병하여 교실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선교부 및 교회와의 교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침내 교회로부터 동의를 얻고, 장소가 물색되었다. 교회 내 청남학교 운동장 북편에 있는 복숭아 밭이 부지로 선정되었으며, 그곳에 망선루를 복원하여 그 건물을 학교 교실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거액의 복원건축비를 마련하는 재정적인 문제이었다. 총 공사비 1천 7백만 원 정도의 거액을 어떻게 충당하느냐 하는 것이다. 청주 청년회(회장 김태희 장로)에서는 망선루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간이나 방치하여 두니 일부 기둥이 썩기 시작함으로 교회에 의뢰하였습니다. 그 합의 사항은 방 한 칸은 청년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청신여학교가 통합되어 교실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청남학교에서 사용토록 교회와 합의하였습니다. 건축비는 소열도 선교사 및 함(태영)목사와 상의하여 총 이전 건축비 일천칠백만 원 중 칠 백만 원은 소열도 목사가 부담하기로 하고, 5백만 원은 모금으로 충당하며, 나머지 부족액은 함 목사님이 서울에 가서 모금하여 오도록 합의하였습니다. 함 목사님은 서울서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넘어져 부상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망선루 이전 공사할 때에 재목을 운반하는데 마차를 연결시키고 소 두 마리가 끌도록 하였는데, 재목을 운반하는 데에만도 수일이 걸렸습니다. 라고 그 당시의 기억을 생생히 증언하였다. 이 증언에 의하면, 소열도 선교사와 합의하여 총 공사비 1천 7백 만원 중 7백 만원은 선교부에서 부담하기로 하고, 5백 만원은 모금하여 충당하고 나머지는 함태영 목사가 서울에 가서 모금 해 오도록 하였다. 이 당시 봉급 생활자 한달 급여가 10원에서 20원이었는데 청년회원들은 1인당 150원씩 내어 모금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그 열의가 대단하였으며, 이 민족문화보존 운동에 교인·학생·시민들이 열렬히 후원하고 참여하여 마침내 1923년 복원 공사가 추진되었다. 이 당시 벌였던 망선루 복원을 통한 민족 문화 보존 운동은 청주의 민간단체가 처음으로 벌인 중요한 시민운동이며, 나라 잃은 민중이 벌인 자발적이고도 합법적인 애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전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회청년, 청남학교 학생, 교인들이 자재를 학교 구내로 옮겨 날랐다. 운반거리는 약 700∼800m인데, 기와, 석가래, 기둥, 자갈, 큰 돌 등을 마차에 실어 나르기도 하고 또는 손수 운반하기도 하면서 보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마차를 연결하여 목재를 그득 싣고 소 두 마리로 끌도록 하였는데, 목재를 운반하는 데만도 수일이 걸렸다고 한다. 복원 건축은 도목수인 덕촌교회 임호연의 주관 하에 경상도 사람 최목수 등이 맡아 수고를 하였다. 그러나 건축 자재가 그 때 그때 공급이 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철거되어 방치 된지 2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많은 자재들이 없어졌고 남아 있는 기둥도 일부가 부식되어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총 공사를 책임지고 진두 지휘하던 김태희 장로는 시내 '仁川木材商'에 의뢰하여 신의주에서 목재를 주문하여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금도 부족하고 그 자재도 그렇게 여의치 못하였다. 그래서 원 자재의 썩은 부분은 잘라 내고 새로 가져온 목재를 잇대어서 기둥으로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재 망선루 기둥이 대체로 많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복원 공사가 진행될 때 청남학교 학생들은 방과후에 노력 봉사활동에 나섰다. 민족 문화 보존이라는 차원과 자신들이 사용할 교실을 짓는 일에 손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이 교실 신축공사에 직접 참여하였다. 복숭아나무를 베어 내고 동서 길이로 망선루를 세웠다. 주춧돌 세울 장소를 목수가 치수를 재어 표시하자 인부들이 안에 들어가 넓이 1m, 길이 1.5m 정도로 파 놓았다. 그러면 하교하는 학생들이 달려들어 여기에 굵은 돌과 잔돌을 갖다 부어 넣었다. 그리고 비계나무틀을 차려 놓고 큰돌에 밧줄을 걸어서 비계목에 달아 놓은 도르래에 걸고, 그 줄에 여러 갈래의 잔줄을 붙여 놓는다. 우리 학생들이 잔줄을 잡으며 사방으로 고루 퍼져 서 있으면, 선소리 매기는 사람이 들어서서 다지는 큰돌의  방향을 잡으며 선소리를 매긴다. 선소리꾼이 "어이어 젖차 -하! "하면, 잔줄을 사방에서 잡은 우리들은 "지게미호"하고 줄을 잡아당긴다. 그러면 큰 돌은 공중으로 따라 올라 갔다가 줄을 일제히 놓는 바람에 그 돌은 곧 바로 아래 구덩이 안으로 내려 떨어지면서 깔아 논 돌을 다져 준다. 이렇게 다져서 잔돌이 밑으로 들어가면 또 돌을 넣고 다지는데, 일정한 한도에 다다르도록 다져 놓는다. 무려 20여 개 구덩이를 여러 날에 걸쳐 오후부터 저녁 9시까지 다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기와 옮길 때 손 다친 학생, 구덩이를 다지는데 손바닥이 부르튼 학생들이 많았다. 고 한 것을 보면 이 공사는 단순히 공사 인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수고와 땀방울이 초석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침내 1923년 상량식이 이루어졌다. 그때에 金泰熙, 李東鉉, 李明求, 鄭圭澤, 金喆煥, 朴敬學, 金 澤 및 청년회원 및 다수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복원된 망선루는 길이 64자, 폭 28자,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에 약 50여평 면적을 차지한 2층 건물이다. 이 망선루는 본래 위층 아래층이 툭 트인 2층 누각이었으나 이 건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학교 교실로 사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1, 2층의 사면 공간을 벽돌로 막고 창문을 내었다. 그리고 목재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만들었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는 조선식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내부 구조는 2층 양옥집과 별다름이 없게 되었다. 마침내 1924년 전교가 이 망선루로 이사하여 온전한 학교 건물(청남학교)로 사용하였다. 아래층 중앙에 교무실을 두고 양쪽 동서로 교실을 배치하였으며,  2층에 3개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곳으로 모든 시설을 옮김으로서 학교 면모를 일신하였다. 다만 청년회의실은 아래 층 북편으로 별도로 입구를 내어 사용하였다. 이곳은 당시 유일한 청주 남녀 공학의 사립 초등학교로서,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이리하여 청남학교는 민족의식 고양과 사회계몽을 도모함으로써 일제기 근대 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주지역의 계몽과 구국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 청남학교와 망선루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내었다. 남녀 졸업생들 가운데에는 후일 목사나 장로가 되어 한국 기독교에 많은 공을 쌓은 인사들이 나왔음은 물론, 교사와 교장으로서 교육계에서, 의약계에서, 군수 및 공무원으로서 공직에서, 적십자 등 각종 사회단체에서, 육상선수 야구선수 등 체육계에서, 그리고 財界와 實業界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면서, 초등학교시절 몸에 익힌 기독교 정신과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국가와 사회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그후 많은 교육기관이 이곳을 이용하였으니 이 건물은 충북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청남학교는 물론 청신여학교, 청주성경학원,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 상당유치원 등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한때 YMCA회관, YWCA회관으로도 이용되었으며, 각종 집회와 강연 장소로 활용되는 등, 실로 이곳은 충북 교육·문화의 요람지였다. 망선루는 노후로 붕괴 위험이 있어 원래의 자리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9년 10월 이 건물을 해체하여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출처- http://blog.empas.com/aswater1/3672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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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 선교사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1856-1919)은 1856년 9월 17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장하여 J. V. 로간(Logan, Mrs. J. V.)의 부인이 되었으며, 남편은 켄터키 센트럴대학 학장으로 재직한바 있다. 이 때 그는 같은 대학에서 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를 육성하였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힘을 썼다. 1908년 남편과 사별한 뒤 한국에 협력선교사로 자원하여 1909년 3월 5일 53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 무렵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규선교사(Regular Members)로 임명되어 보수(報酬)와 재정 지원을 받고 활동하였다. 1884년 9월 20일 내한한 알렌(Allen)부터 1962년 9월 12일 내한한 포(Poe)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386명의 선교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로간 선교사의 경우 해외선교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활동한 한국 최초의 자비량(Affiliated Members)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주일학교, 성경학교, 주일학교 교사반, 여성 전도반, 여성지도자반 등을 육성하면서 충북지역의 선교와 여성교육에 커다란 공을 세운 여성 선교사였다. 자기 집에서도 매주 15시간 씩 여러 성경 공부 반을 인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5-60여명에 이른다. 이 무렵 그가 살던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있는 집(1911년 건립)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로 지정되어 “로위(Lowe)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그는 한국말도 잘 구사하고 충북과 청주를 사랑했으며, 언제나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준비된 자애로운 어머니”로 밀러(Miller)의 부인 도티(Doty)여사와 함께 청주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며, 여성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병으로 1919년 12월 7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 양화진 제2묘역(가-6)에 안장되었다. 한편 1921년 6월 청주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청주시 남문로 1가 154번지(청주제일교회)에 화강석으로 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m 규격의 기념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충북기독교100년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첫째, 충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기념비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둘째, 한문을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 봉승(奉承) 진출갈력(盡忠竭力) 등 한문 용어까지도 한글로 기록하여,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가 앞장서 우리글과 말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기독교와 한글운동-민족운동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귀중한 사료이다. 셋째, 이 비석은 여전도회 중심으로 건립되고 여성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192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남·여석을 구분했던 휘장을 제거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이 한글 기념비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기독교 역사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장로교 선교사를 천주교 신부(神父)로 잘못 소개한 사례도 있었다. 비문 첫 줄의 “아메리가나신부인” 부분을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간행된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책에서 “아메리카 나 신부”로 해석하여 미국의 나씨 성을 가진 신부의 선교비로 전해진 사실이 있다. 결국 한글에 띄어쓰기를 하지 아니하여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를 사실과 다르게 천주교 신부로 오인한 사연의 한 토막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하지만 정확하게 전해져야 한다. 문장의 작성에 띄어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로간 선교사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며 충북지역 여성교육에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외롭게 묻혔다. 앞으로 그의 위대한 선교정신과 삶을 뒤돌아보며 기억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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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청주제일교회는 1904년에 청주읍 교회로 세워졌다. 1900년 말부터 북장로회의 민노아 목사는 장로교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충청도(忠淸道)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보조자 김흥경(金興京)조사와 함께 청주지역을 돌며 전도하여 김원배(金源培), 방흥근(方興根), 이영균(李英均), 김재호(金在皓), 이범준(李範俊) 등과 같은 유망한 청년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 중심으로 1904년 남문밖에 여섯 개의 방을 가진 커다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김흥경의 처소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전도한 이들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열었다. 교회가 정치·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층에게 새로운 가치와 활동의 공간을 제공하였으므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교회에 나왔고, 사회의 변화와 구국을 갈망하던 젊은 청년들도 열심히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교회 설립 1년 만에 교인이 50여명을 넘을 정도로 부흥하였다. 교인의 증가로 이 초가집으로는 더 감당할 수가 없어 1905년에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지를 매입할 만한 자금이 문제였다. 마침 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인 김원배가 임종 유언으로 교회에 기부금 100원을 헌납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온 교인들이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새로운 교회부지를 매입하고, 거기에 교회를 크게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곳이 현재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남문로 1 가 154번지 일대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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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청주제일교회

 이곳은 본래 청주 영장(營將)의 관사와 죄인들을 가두는 옥사가 있었던 장소로 조선 후기 천주교 대 박해 때에 많은 교인들이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순교의 피눈물을 흘리던 역사적인 곳이다. 그러므로 청주읍교회는 개신교회로서,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이 고문당하고 순교 당한 바로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데에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당시 동학운동(1894∼95) 때 관군 편을 들어 공을 세운 보부상 조합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그 땅을 사들인 것이다. 1천 5백 평되는 넓은 대지를 확보한 교회는 1백 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방흥근의 집에서 모이던 청남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여학교인 청신학교(淸信學校)도 설립하였다. 후에 소민병원(蘇民病院)으로 발전하는 시약소(施藥所)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당유치원과 청주남녀 성경학원도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이곳 청주읍교회에는 구국의 정열을 가진 애국청년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또한 이 교회 출신들이 일제시대 민족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일제치하의 탄압가운데에서 구국 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나마 모일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청주읍교회는 전도·교육·사회운동, 그리고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청주읍교회(淸州邑敎會)는 1909년 평양 남문 밖 교회에서 이사온 장로 박정찬(朴禎燦)을 장로로 위임하여 당회를 조직하므로 충북 최초의 자립교회가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민노아 선교사였다. 같은 해 청주 기독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초대 회장인 김태희(金泰熙)씨가 본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청년 운동을 일으켰다. 청주읍교회는 1910년 박정찬 장로가 신학교를 졸업하자 민노아 선교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청빙하여 첫 한국인 목사로서 청주읍교회 제1대 목사가 되었다. 그 후 이원민(李元敏), 황준국(黃濬國), 최영택(崔榮澤), 함태영(咸台永) 등이 이어서 시무 하였고, 이동순(李東舜), 최영택(崔榮澤), 곽경한(郭京漢), 김정현(金正賢), 김종원(金鐘元), 김태희(金泰熙), 최원진(崔元珍), 이호재(李鎬宰), 서상필(徐相珌) 등이 장로로 봉사하면서 교회가 크게 발전되었다. 청주읍교회가 성장하여 천주교인의 순교 터를 매입 대지를 확장하고 1909년에는 신도수가 200명을 상회하고 당회가 조직되었고, 1910년에는 초대 박정찬 목사가 부임하여 다음해 교회당을 신축하였으며, 1913년에 200석 규모의 함석지붕 목조 단층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그 후 25년 간 8대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탄압과 간섭은 날로 극심하여 교회는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였다. 1938년 구연직(具然直) 목사가 취임한 후 활기를 찾고 다음해 1939년 비상한 각오로 교회당 신축을 착공하여 1940년 벽돌 2층의 아름다운 교회당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공사 도중에 일제 당국의 간섭과 방해로 종탑을 설계보다 9척이나 낮추어 시공했고 종(鐘)도 강제로 빼앗아 갔으며 교인 3명이 부여 신궁 공사장에 강제로 징발되었다. 영남(英南) 구연직(具然直) 목사는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목회에 전심 전력을 기울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한 일제의 동화정책으로 수탈과 억압이 막바지에 이르던 시절 영남은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가지가지의 수모와 시련을 겪어 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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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남문시장 안에 있는 유명한 곱창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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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오..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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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마지막에 밥까지 몪아서 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