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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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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http://well.hani.co.kr/?mid=media&category=102&page=4&document_srl=5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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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즉문즉설] <4> 임락경 목사
목사 없어도 살지만 농사꾼이 없으면 못 살아
암 대부분 고친다, 하지만 항암제 독으로 죽어
16일 저녁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대성당에서 펼쳐진 강원도 화천 시골교회 임락경 (65)목사의 즉문즉설 현장. ‘이 시대 무소유의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생명평화결사와 <한겨레>가 마련한 네번째 즉문즉설에서 임 목사는 이제는 망각의 저편으로 건너가 버린 19960~70년대 민요들의 가사를 한치의 오차 없이 기억해내 부르는가 하면 해탈 도인처럼 거침 없는 입담으로 200여 명의 청중들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고 청중들은 끊임 없는 박수로 화답했다.
임 목사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듣기 어려운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과 기인 류영모 선생에 대한 일화, 그가 평생 강원도 화천에서 유기농사를 짓고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면서 터득한 자연치유 비법에 대한 문답이 오갈 때는 청중들이 잠시도 그에게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세 시간 동안 임 목사의 즉문즉설 사회를 본 <야생초편지>의 저자 황대권 생명평화결사운영위원장은 “요즘은 다양한 스펙을 쌓은 이들은 외장메모리를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기 마련인데, 임 목사는 국졸 학력이 전부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평생 보고 들은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고, 몸에 익혀 그 자신이 대안 교육의 표본이 될 만하다”고 평했다.
이왕 가난해서 비싼 밥 못 먹을 바에야 내쪽에서…
-무소유를 철학이 있는가.
“예수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겨울을 나려면 연탄 3백 장과 쌀 한 가마를 준비하라고 했을 것이다. 권정생 선생도 하루 평균 7천 원 정도를 썼더라. 그가 인도나 중동에서 태어났다면 그것도 쓰지 않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집(중증장애인 등 30여명과 살아가는 시골교회)도 400평은 된다. 내가 손수 지었다. 하지만 돈은 많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집을 지어도 평당 200만 원 이상은 안 써보았다. 그렇게 큰집에 살고 있으면서 무소유를 얘기하겠는가. 유소유라면 모를까.”
-왜 평생 농부로 사는가.
“열살 때 100년을 살면 2만6500일을 살 텐데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교회 다니니 목사가 제일 훌륭해 보이고, 시골 사니 공무원이 우러러 뵈더라. 그런데 공무원은 없어도 살겠고, 목사가 없으면 더 잘 살겠더라. 그런데 농사꾼이 없으면 다 죽을 것 같더라. 그래서 평생 농사짓기로 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고민 안 해봤다. 농업은 내 땅이 있건 없건 할 수 있겠더라. 성경에 보니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데, 아벨이 고기를 잡아 바친 제사만 받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식성을 알았다. 그래서 짐승을 기를까도 생각했는데, 고기는 없어도 살지만 곡식이 없으면 못살겠더라. 그래서 축산이 아닌 농사를 택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는 말인가.
“내가 임가니 ‘임걱정’의 후손 아닌가. 임걱정이 백정이다. 이왕 가난해서 비싼 밥 못 먹을 바에야 내쪽에서 ‘비싼 밥 안 먹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돈 벌고 좋은 옷 입으려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무소유는 아니다. 유기농과 건강 강의를 하느라 전국을 다니니 기름값도 많이 쓴다. 한 달이면 기름값이 70만~80만원 들어간다. 그러나 내 이익을 위해 쓰지는 않는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평생 헌옷만 입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비상시에 1천~2천원 주고 옷을 사입은 적은 있지만 대부분 남이 입은 헌옷을 얻어 입고 살았다. 지금 입고 있는 것도 메이드인 미국이다. 1달러 주고 산 것이다. 정농회가 일본 유기농민인 애농회와 교류하며 서로 오가는데, 일본에 갈 때면 헌옷 헌 구두를 신고 가서 그곳에서 쓸만한 것들과 바꿔 입고 온다. 밥은 비빔밥 값 이상이 드는 밥은 사먹지 않았다. 어느날 해장국을 먹었는데, 8천 원이나 하더라. 그것이 내가 사먹은 가장 비싼 밥이었다. ”
나는 중학교도 안가고 교수 하고 있으니 내가 대안학교 표본
-5년 전 남한강 가로 귀농해 농사 짓고 있는데, 너무 살기 힘들어 울고 싶다.
“실상사 귀농학교만 빼고 전국 귀농학교에 다 강연하고 있다. 지금까지 귀농학교 출신들만 1만5천 명 정도다. 그들에게 절대 부부끼리 같이 귀농하지말라고 부탁했다. 한 사람이라도 월급을 받아야 산다. 부모로부터 농지를 물려받고, 서울 농대를 나와 농사를 지어도 적자다. 도저히 채산을 맞출 수 없다. 부부 모두 귀농하는 것은 한 사람이 충분히 자리를 잡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채산은 안 맞지만 지금까지 유기농으로 농사 짓는 정농회 회원 5천 명 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없다. 그것으로 덕을 보면 된다. 시골에선 아이들 상급학교 보낼 생각 안 해야 한다. 나는 중학교도 안가고 상지대 교수까지 하고 있으니 내가 대안학교의 표본이다. 농사지어서 이익 볼 생각은 애시당초 말아야 한다. 나도 양봉을 하고, 된장, 고추장 팔아서 우리 식구들(시골교회집 30여명)과 살아간다.”
-괴산에 귀농해 4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논 4마지기에 쌀이 한 가마 좀 더 나왔다. 쌀겨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풀을 못 잡아서 농사를 망쳤다. 이러니 농약을 안치고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온 해는 내 평생 처음이다. 80살 먹은 노인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쌀 작황도 50% 이상 줄었다. 옛날에는 정치를 잘못하면 농사가 그렇게 된다고 못된 놈들이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정치를 잘 하시는데 이상한 일이다.(청중 웃음)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풀을 제때에 뽑아야 한다. 우리집 식구들이 우리집에 대한 소감을 쓰라고 했더니 김매기와 풀뽑기라고 하더라. 그런데 풀을 뽑으려면 이미 늦다. 김매기를 해야 한다. 풀이 나기 전에 호미로 긁어버려야 한다. 노인들을 농사를 지으면서 맨날 노는 것 같지만 논밭이 깨끗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풀이 나기 전에 긁어버리기 때문이다.”
병충해는 비료가 나오면서 생겨
-그렇게 농약을 전혀 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는 말인가.
“비료가 나오면서 병충해가 생겼다. 60년대 말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나 어릴 때는 비료가 없었다. 막 비료가 생길 때쯤인 70년대 초에 군대를 가버렸다. 제대하니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자는 정농회가 생겨서 함께했다. 그러니 비료농, 농약농을 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귀농한 사람들한테 처음 하는 얘기가 풀밭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벌레는 왜 모이냐. 풀이 있으면 모인다. 개구리는 왜 모이냐. 벌레가 있으면 모인다. 뱀이 무서워하는데 뱀이 왜 오겠는가. 개구리 잡아먹으러 온다. 그런데 풀을 뽑으려고 하면 이미 늦다. 나기 전에 긁어버리는게 제일 편하다.
나도 화천에서 처음 농사를 지을 때 처음 3년 간은 진딧물 때문에 제대로 수확을 못했다. 나중엔 온 마을 딱정벌레가 다 모이더라. 진딧물 먹으러 몰려온 것이다. 그 다음엔 사마귀가 모여들더라. 딱정벌레 먹으러 온 것이었다. 그러더니 벌레와 곤충이 사라졌다. 그렇게 7년이 걸렸다. 비료를 안 하면 농약 안 해도 된다. 흙살림에서 해가 없는 약품을 많이 연구하고 있지만 친환경적인 제초제는 나오기 어렵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풀을 긁어버리는게 상책이다.
-농사 지어서 어떻게 먹고살 수 있겠는가.
=농사 지어서 채산 맞추기 어렵다. 농사 많이 짓는 것보다 소 두 마리 키우는 게 낫다. 송아지 한 마리 낳으면 600만 원 번다. 여물 끓여서 소 키워서 잡아먹으면 그 소고기를 아토피환자, 암환자가 먹어도 괜찮더라. 돼지 기르면 한 마리당 40만 원은 번다. 그렇게 두 마리 기르면 80만 원 된다. 소 돼지를 길러서 먹고살면 된다.
공동체라는 인식도 안 가졌지만 공동체 맞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 선생이 설립한 광주 동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임 목사께서 그곳에서 10대 때부터 15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어떤 곳이었는가.
“동광원에서는 공동체란 얘기를 하지 않는다. 공동체란 인식도 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가 맞기는 맞다.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공동체다. 가족들끼리만 어울려 사는 것은 공동체라고 볼 수 없다. 동광원에서 고아원 할 때 보모나 주방에서 일하던 분들도 자기 자식들을 고아들 사이에 넣어 한치의 차별 없이 키웠다. 정인세 원장도 자기 아들 딸들을 고아들 사이에 넣어 키웠다.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누룽지 하나라도 더 주고 싶었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즘은 고아원 원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는데도 원장 아들은 유학까지 간다는 얘기도 있지만, 동광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가 그곳에 있는 아이들도 멀리 어머니가 보이면 피하곤 했다. 자기가 어머니를 아는 체하면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볼래야 볼 수 없는 고아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고 그렇게 배려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있건 없건 똑같이 지내고, 누구나 통장을 따로 갖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동광원을 소개할 자격이 없다. 못 있고 환속했으니 말이다.
아침 진지는 진시에, 술은 술시에, 잠은 자시에
-어떤 분으로부터 삶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
“그곳 여름수련회 때는 늘 류영모 선생이 와서 강의했다. 이현필 선생은 누구든 제자로 만들어 동광원 안에서 살게 했고, 류영모 선생은 어떻게든 자신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살게 했다. 나는 제자를 기를 자격이 없다며 나를 따르지 말고 혼자 잘 살아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류영모 선생의 영향을 더 받은 것 같다.”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은?
“내가 군에 제대하고 난 뒤 류영모 선생이 전주에 있는 절 하나를 사두었다. 그곳에 절 현판을 떼고 류선생님이 진달래란 시를 따 진달래란 현판을 내걸었다. 류영모 선생님은 동광원 수련회 강연이 끝나면 전주에 와 주무시곤 했다. 류 선생님이 사주신 곳에 기거하게 되니 자연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류영모 선생은 밤 10시만 되면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고 잤다. 그리고 새벽 2시면 어김 없이 일어났다. 낮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평생 낮잠을 한 번도 주무신 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2층에서 떨어져서 일어나보니 병원이더라’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낮잠을 자고 그 외엔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류 선생님은 두 시간 자면 생명에 지장이 없고, 네 시간 자면 건강에 지장이 없다고 했다. 나도 평생 이를 실천해왔다. 평생 일만 하는 사람이 낮에 책볼 시간이 있겠는가. 2시에 일어나면 뭘 하겠는가. 국졸인 내가 이만큼 된 것도 새벽 두 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침 진지는 진시에 들고, 술은 술시에 먹고, 잠은 자시에 자는 게 좋다.”
잘못된 집터 살면 환자…집터 제대로 되도 음식 잘못 먹으면 병
-암을 예방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잘못된 집터에 살면 환자가 생긴다. 하지만 집터가 제대로 앉았어도 병이 생기는 것은 음식 때문이다. 그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하는데 특정한 이름을 대면 음식회사에서 소송을 건다. 어떤 나라에선 돈 많은 쪽에만 유리하게 판결한다더라. 우리나라는 그럴 리가 없는데 (청중 웃음). 암 사망률이 32%라지만 대부분이 암은 고친다. 그런데 항암제 독으로 죽는다. 감기걸린 사람이 감기는 고치지만 감기약 후유증으로 죽는 꼴이다. 항암제를 해독시키는 게 중요하다.”
-신장암이 생겨 콩팥 하나는 잘라냈고, 나머지 하나에도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병원에선 신장 투석을 하라고 한다. 누군가는 싸리나무차를 끓여 마셔서 좋아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아지겠는가.
=의사가 아니라서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신장만 가지고도 두 시간은 얘기해야 한다. 신장은 자극성 있는 음식을 오줌으로 걸러낸다. 두 번째로 피를 정화 시킨다. 세 번째로 해독하고 지방을 내보낸다. 그리고 연골을 만든다. 자극성 있는 음식을 먹지 말고, 먹더라도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우리집(시골교회 공동체)에 오줌이 줄줄 흐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물이 든 큰 패트병 두 개를 주면서 다 마셔라고 했다. 그랬더니 오늘 오줌 다섯 번밖에 안봤다고 했다. 그것은 정상이다. 물 많이 마시면 좋아진다. 이뇨제로 옥수수수염이나 패랭이꽃이 좋다고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문어가 제일 빠르다. 짜고 매운 자극성 있는 음식은 좋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은 죽염은 괜찮다고 하는데, 아니다. 짜게 먹으면 안된다.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책상에서만 글 쓰면 틀린 것이 많아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란 책을 보면 나이 든 분들이 1960~70년대 한두 번씩 들었지만 다 잊어버렸던 노래들이 임 목사님 기억을 통해 다 살아났다. 어느 기록보관서에 있는 것을 활용한 것이 아닌가. 심지어 어떤 노래들은 12절까지 있는 것을 다 외우고 있던데, 어떻게 가능한가. 민요를 한 번 불러봐라.
“우리나라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한평생 몸 바쳐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그 이름 빛내오리다….(이승만 찬가), 태백산 정기를 받아 일제의 강압을 이겨내고, 그 이름 찬란하다. 이 박사를 보필하신 애국지사네…(이기붕 찬가)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들이 있었다. 이기붕이 죽고 나서는 ‘열흘 붉은 꽃이 없고, 권력 좆아 인심 못 얻고 백성의 원한 샀네. 어이하여 황천객이 되었나…제 명대로 못 죽고 자결을 하니, 권력보다 무서운 게 천심인 줄 몰랐더냐’. 이런 노래도 있었다. 이런 것은 적어놓으면 큰 일 나는 수가 있었다. 70년대 독재 시절 무섭지 않았느냐. 그래서 모두 외운 것이다.
그 시절 동요도 다 외우고, 문제를 지적했는데, 내가 지적한 것들은 대부분 교과서에서 뺐더라.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고 일어나 몰래 와서 먹지요’라고 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토끼는 물 먹으면 죽는다. 물 묻은 풀만 먹어도 죽는다. 그런데 산토끼가 옹달샘 물을 먹는다는 말이냐. 또 <강바람 산바람>에서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데요’라고 했는데, 여름에 누가 나무를 하나. 여름엔 나무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수풀이 우거져 들어갈 수도 없다. 나무 한 번도 못해보고 그늘에 앉아서 가사를 썼기 때문에 윤석중 선생이 지은 동요는 현실에 맞지 않은 것이 많다.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책상에 앉아서만 글을 쓰면 틀린 것이 많다.
-임 목사님의 소유는 겉이 아니고 속에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스펙을 쌓는다며 온갖 것을 치장하지만 그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나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임 목사님은 삶의 경험을 모두 손수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몸 안에 두고, 외부는 무소유인 것이 특이하다.
“잘못 판단했다.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줄 아는가. 강의를 가서 듣는 사람들에게 다음에 만날 때 해장국 한 그릇 사주겠느냐고 물으면 다 사주겠다고 한다. 나는 내 주머니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다른 사람 주머니에 그렇게 많이 저축해놓고 있다. 남의 주머니에 저축 해놓으니 얼마나 편한가.”
글·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목사 없어도 살지만 농사꾼이 없으면 못 살아
암 대부분 고친다, 하지만 항암제 독으로 죽어
16일 저녁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대성당에서 펼쳐진 강원도 화천 시골교회 임락경 (65)목사의 즉문즉설 현장. ‘이 시대 무소유의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생명평화결사와 <한겨레>가 마련한 네번째 즉문즉설에서 임 목사는 이제는 망각의 저편으로 건너가 버린 19960~70년대 민요들의 가사를 한치의 오차 없이 기억해내 부르는가 하면 해탈 도인처럼 거침 없는 입담으로 200여 명의 청중들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고 청중들은 끊임 없는 박수로 화답했다.
임 목사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듣기 어려운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과 기인 류영모 선생에 대한 일화, 그가 평생 강원도 화천에서 유기농사를 짓고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면서 터득한 자연치유 비법에 대한 문답이 오갈 때는 청중들이 잠시도 그에게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세 시간 동안 임 목사의 즉문즉설 사회를 본 <야생초편지>의 저자 황대권 생명평화결사운영위원장은 “요즘은 다양한 스펙을 쌓은 이들은 외장메모리를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기 마련인데, 임 목사는 국졸 학력이 전부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평생 보고 들은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고, 몸에 익혀 그 자신이 대안 교육의 표본이 될 만하다”고 평했다.
이왕 가난해서 비싼 밥 못 먹을 바에야 내쪽에서…
-무소유를 철학이 있는가.
“예수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겨울을 나려면 연탄 3백 장과 쌀 한 가마를 준비하라고 했을 것이다. 권정생 선생도 하루 평균 7천 원 정도를 썼더라. 그가 인도나 중동에서 태어났다면 그것도 쓰지 않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집(중증장애인 등 30여명과 살아가는 시골교회)도 400평은 된다. 내가 손수 지었다. 하지만 돈은 많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집을 지어도 평당 200만 원 이상은 안 써보았다. 그렇게 큰집에 살고 있으면서 무소유를 얘기하겠는가. 유소유라면 모를까.”
-왜 평생 농부로 사는가.
“열살 때 100년을 살면 2만6500일을 살 텐데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교회 다니니 목사가 제일 훌륭해 보이고, 시골 사니 공무원이 우러러 뵈더라. 그런데 공무원은 없어도 살겠고, 목사가 없으면 더 잘 살겠더라. 그런데 농사꾼이 없으면 다 죽을 것 같더라. 그래서 평생 농사짓기로 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고민 안 해봤다. 농업은 내 땅이 있건 없건 할 수 있겠더라. 성경에 보니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데, 아벨이 고기를 잡아 바친 제사만 받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식성을 알았다. 그래서 짐승을 기를까도 생각했는데, 고기는 없어도 살지만 곡식이 없으면 못살겠더라. 그래서 축산이 아닌 농사를 택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는 말인가.
“내가 임가니 ‘임걱정’의 후손 아닌가. 임걱정이 백정이다. 이왕 가난해서 비싼 밥 못 먹을 바에야 내쪽에서 ‘비싼 밥 안 먹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돈 벌고 좋은 옷 입으려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무소유는 아니다. 유기농과 건강 강의를 하느라 전국을 다니니 기름값도 많이 쓴다. 한 달이면 기름값이 70만~80만원 들어간다. 그러나 내 이익을 위해 쓰지는 않는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평생 헌옷만 입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비상시에 1천~2천원 주고 옷을 사입은 적은 있지만 대부분 남이 입은 헌옷을 얻어 입고 살았다. 지금 입고 있는 것도 메이드인 미국이다. 1달러 주고 산 것이다. 정농회가 일본 유기농민인 애농회와 교류하며 서로 오가는데, 일본에 갈 때면 헌옷 헌 구두를 신고 가서 그곳에서 쓸만한 것들과 바꿔 입고 온다. 밥은 비빔밥 값 이상이 드는 밥은 사먹지 않았다. 어느날 해장국을 먹었는데, 8천 원이나 하더라. 그것이 내가 사먹은 가장 비싼 밥이었다. ”
나는 중학교도 안가고 교수 하고 있으니 내가 대안학교 표본
-5년 전 남한강 가로 귀농해 농사 짓고 있는데, 너무 살기 힘들어 울고 싶다.
“실상사 귀농학교만 빼고 전국 귀농학교에 다 강연하고 있다. 지금까지 귀농학교 출신들만 1만5천 명 정도다. 그들에게 절대 부부끼리 같이 귀농하지말라고 부탁했다. 한 사람이라도 월급을 받아야 산다. 부모로부터 농지를 물려받고, 서울 농대를 나와 농사를 지어도 적자다. 도저히 채산을 맞출 수 없다. 부부 모두 귀농하는 것은 한 사람이 충분히 자리를 잡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채산은 안 맞지만 지금까지 유기농으로 농사 짓는 정농회 회원 5천 명 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없다. 그것으로 덕을 보면 된다. 시골에선 아이들 상급학교 보낼 생각 안 해야 한다. 나는 중학교도 안가고 상지대 교수까지 하고 있으니 내가 대안학교의 표본이다. 농사지어서 이익 볼 생각은 애시당초 말아야 한다. 나도 양봉을 하고, 된장, 고추장 팔아서 우리 식구들(시골교회집 30여명)과 살아간다.”
-괴산에 귀농해 4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논 4마지기에 쌀이 한 가마 좀 더 나왔다. 쌀겨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풀을 못 잡아서 농사를 망쳤다. 이러니 농약을 안치고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온 해는 내 평생 처음이다. 80살 먹은 노인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쌀 작황도 50% 이상 줄었다. 옛날에는 정치를 잘못하면 농사가 그렇게 된다고 못된 놈들이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정치를 잘 하시는데 이상한 일이다.(청중 웃음)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풀을 제때에 뽑아야 한다. 우리집 식구들이 우리집에 대한 소감을 쓰라고 했더니 김매기와 풀뽑기라고 하더라. 그런데 풀을 뽑으려면 이미 늦다. 김매기를 해야 한다. 풀이 나기 전에 호미로 긁어버려야 한다. 노인들을 농사를 지으면서 맨날 노는 것 같지만 논밭이 깨끗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풀이 나기 전에 긁어버리기 때문이다.”
병충해는 비료가 나오면서 생겨
-그렇게 농약을 전혀 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는 말인가.
“비료가 나오면서 병충해가 생겼다. 60년대 말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나 어릴 때는 비료가 없었다. 막 비료가 생길 때쯤인 70년대 초에 군대를 가버렸다. 제대하니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자는 정농회가 생겨서 함께했다. 그러니 비료농, 농약농을 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귀농한 사람들한테 처음 하는 얘기가 풀밭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벌레는 왜 모이냐. 풀이 있으면 모인다. 개구리는 왜 모이냐. 벌레가 있으면 모인다. 뱀이 무서워하는데 뱀이 왜 오겠는가. 개구리 잡아먹으러 온다. 그런데 풀을 뽑으려고 하면 이미 늦다. 나기 전에 긁어버리는게 제일 편하다.
나도 화천에서 처음 농사를 지을 때 처음 3년 간은 진딧물 때문에 제대로 수확을 못했다. 나중엔 온 마을 딱정벌레가 다 모이더라. 진딧물 먹으러 몰려온 것이다. 그 다음엔 사마귀가 모여들더라. 딱정벌레 먹으러 온 것이었다. 그러더니 벌레와 곤충이 사라졌다. 그렇게 7년이 걸렸다. 비료를 안 하면 농약 안 해도 된다. 흙살림에서 해가 없는 약품을 많이 연구하고 있지만 친환경적인 제초제는 나오기 어렵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풀을 긁어버리는게 상책이다.
-농사 지어서 어떻게 먹고살 수 있겠는가.
=농사 지어서 채산 맞추기 어렵다. 농사 많이 짓는 것보다 소 두 마리 키우는 게 낫다. 송아지 한 마리 낳으면 600만 원 번다. 여물 끓여서 소 키워서 잡아먹으면 그 소고기를 아토피환자, 암환자가 먹어도 괜찮더라. 돼지 기르면 한 마리당 40만 원은 번다. 그렇게 두 마리 기르면 80만 원 된다. 소 돼지를 길러서 먹고살면 된다.
공동체라는 인식도 안 가졌지만 공동체 맞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 선생이 설립한 광주 동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임 목사께서 그곳에서 10대 때부터 15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어떤 곳이었는가.
“동광원에서는 공동체란 얘기를 하지 않는다. 공동체란 인식도 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가 맞기는 맞다.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공동체다. 가족들끼리만 어울려 사는 것은 공동체라고 볼 수 없다. 동광원에서 고아원 할 때 보모나 주방에서 일하던 분들도 자기 자식들을 고아들 사이에 넣어 한치의 차별 없이 키웠다. 정인세 원장도 자기 아들 딸들을 고아들 사이에 넣어 키웠다.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누룽지 하나라도 더 주고 싶었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즘은 고아원 원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는데도 원장 아들은 유학까지 간다는 얘기도 있지만, 동광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가 그곳에 있는 아이들도 멀리 어머니가 보이면 피하곤 했다. 자기가 어머니를 아는 체하면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볼래야 볼 수 없는 고아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고 그렇게 배려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있건 없건 똑같이 지내고, 누구나 통장을 따로 갖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동광원을 소개할 자격이 없다. 못 있고 환속했으니 말이다.
아침 진지는 진시에, 술은 술시에, 잠은 자시에
-어떤 분으로부터 삶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
“그곳 여름수련회 때는 늘 류영모 선생이 와서 강의했다. 이현필 선생은 누구든 제자로 만들어 동광원 안에서 살게 했고, 류영모 선생은 어떻게든 자신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살게 했다. 나는 제자를 기를 자격이 없다며 나를 따르지 말고 혼자 잘 살아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류영모 선생의 영향을 더 받은 것 같다.”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은?
“내가 군에 제대하고 난 뒤 류영모 선생이 전주에 있는 절 하나를 사두었다. 그곳에 절 현판을 떼고 류선생님이 진달래란 시를 따 진달래란 현판을 내걸었다. 류영모 선생님은 동광원 수련회 강연이 끝나면 전주에 와 주무시곤 했다. 류 선생님이 사주신 곳에 기거하게 되니 자연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류영모 선생은 밤 10시만 되면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고 잤다. 그리고 새벽 2시면 어김 없이 일어났다. 낮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평생 낮잠을 한 번도 주무신 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2층에서 떨어져서 일어나보니 병원이더라’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낮잠을 자고 그 외엔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류 선생님은 두 시간 자면 생명에 지장이 없고, 네 시간 자면 건강에 지장이 없다고 했다. 나도 평생 이를 실천해왔다. 평생 일만 하는 사람이 낮에 책볼 시간이 있겠는가. 2시에 일어나면 뭘 하겠는가. 국졸인 내가 이만큼 된 것도 새벽 두 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침 진지는 진시에 들고, 술은 술시에 먹고, 잠은 자시에 자는 게 좋다.”
잘못된 집터 살면 환자…집터 제대로 되도 음식 잘못 먹으면 병
-암을 예방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잘못된 집터에 살면 환자가 생긴다. 하지만 집터가 제대로 앉았어도 병이 생기는 것은 음식 때문이다. 그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하는데 특정한 이름을 대면 음식회사에서 소송을 건다. 어떤 나라에선 돈 많은 쪽에만 유리하게 판결한다더라. 우리나라는 그럴 리가 없는데 (청중 웃음). 암 사망률이 32%라지만 대부분이 암은 고친다. 그런데 항암제 독으로 죽는다. 감기걸린 사람이 감기는 고치지만 감기약 후유증으로 죽는 꼴이다. 항암제를 해독시키는 게 중요하다.”
-신장암이 생겨 콩팥 하나는 잘라냈고, 나머지 하나에도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병원에선 신장 투석을 하라고 한다. 누군가는 싸리나무차를 끓여 마셔서 좋아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아지겠는가.
=의사가 아니라서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신장만 가지고도 두 시간은 얘기해야 한다. 신장은 자극성 있는 음식을 오줌으로 걸러낸다. 두 번째로 피를 정화 시킨다. 세 번째로 해독하고 지방을 내보낸다. 그리고 연골을 만든다. 자극성 있는 음식을 먹지 말고, 먹더라도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우리집(시골교회 공동체)에 오줌이 줄줄 흐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물이 든 큰 패트병 두 개를 주면서 다 마셔라고 했다. 그랬더니 오늘 오줌 다섯 번밖에 안봤다고 했다. 그것은 정상이다. 물 많이 마시면 좋아진다. 이뇨제로 옥수수수염이나 패랭이꽃이 좋다고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문어가 제일 빠르다. 짜고 매운 자극성 있는 음식은 좋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은 죽염은 괜찮다고 하는데, 아니다. 짜게 먹으면 안된다.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책상에서만 글 쓰면 틀린 것이 많아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란 책을 보면 나이 든 분들이 1960~70년대 한두 번씩 들었지만 다 잊어버렸던 노래들이 임 목사님 기억을 통해 다 살아났다. 어느 기록보관서에 있는 것을 활용한 것이 아닌가. 심지어 어떤 노래들은 12절까지 있는 것을 다 외우고 있던데, 어떻게 가능한가. 민요를 한 번 불러봐라.
“우리나라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한평생 몸 바쳐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그 이름 빛내오리다….(이승만 찬가), 태백산 정기를 받아 일제의 강압을 이겨내고, 그 이름 찬란하다. 이 박사를 보필하신 애국지사네…(이기붕 찬가)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들이 있었다. 이기붕이 죽고 나서는 ‘열흘 붉은 꽃이 없고, 권력 좆아 인심 못 얻고 백성의 원한 샀네. 어이하여 황천객이 되었나…제 명대로 못 죽고 자결을 하니, 권력보다 무서운 게 천심인 줄 몰랐더냐’. 이런 노래도 있었다. 이런 것은 적어놓으면 큰 일 나는 수가 있었다. 70년대 독재 시절 무섭지 않았느냐. 그래서 모두 외운 것이다.
그 시절 동요도 다 외우고, 문제를 지적했는데, 내가 지적한 것들은 대부분 교과서에서 뺐더라.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고 일어나 몰래 와서 먹지요’라고 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토끼는 물 먹으면 죽는다. 물 묻은 풀만 먹어도 죽는다. 그런데 산토끼가 옹달샘 물을 먹는다는 말이냐. 또 <강바람 산바람>에서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데요’라고 했는데, 여름에 누가 나무를 하나. 여름엔 나무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수풀이 우거져 들어갈 수도 없다. 나무 한 번도 못해보고 그늘에 앉아서 가사를 썼기 때문에 윤석중 선생이 지은 동요는 현실에 맞지 않은 것이 많다.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책상에 앉아서만 글을 쓰면 틀린 것이 많다.
-임 목사님의 소유는 겉이 아니고 속에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스펙을 쌓는다며 온갖 것을 치장하지만 그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나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임 목사님은 삶의 경험을 모두 손수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몸 안에 두고, 외부는 무소유인 것이 특이하다.
“잘못 판단했다.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줄 아는가. 강의를 가서 듣는 사람들에게 다음에 만날 때 해장국 한 그릇 사주겠느냐고 물으면 다 사주겠다고 한다. 나는 내 주머니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다른 사람 주머니에 그렇게 많이 저축해놓고 있다. 남의 주머니에 저축 해놓으니 얼마나 편한가.”
글·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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