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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의 의미

사도행전 권진관 형제............... 조회 수 2109 추천 수 0 2011.07.08 12: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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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1-13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2011년 6월 12일 성령강림절주일예배 말씀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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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성령강림의 의미

(사도행전 2:1-13)

2011년 6월 12일 성령강림절주일예배 말씀증거

권진관 형제

 

첫 오순절을 기념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때 세찬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무엇인가가 그 안에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이 무엇이 성령의 기운이었고 이러한 성령강림의 날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들은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즉, 예수가 죽음의 세력을 이겼다는 것이고, 결국 사랑의 힘이 폭력의 힘을 이겼다는 것은 증거하는 일을 교회가 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음을 증언하는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12세기의 수도승이자 신비가인 요아킴 피오레의 말을 인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아킴에 의하면, 성부의 시대는 구약의 시대로, 율법의 지배하에 있었고, 성자의 시대는 신약의 시대로서 성직자들의 지도력 아래에서 분배된 은혜로 산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의 모습은 성자의 교회라고 보여집니다. 오늘의 제도교회들은 성직자들의 지도 하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요아킴 피오레는 성령의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직접적인 현존을 경험하여 평등한 “친구의 나라”가 나타난다고 예언했습니다. 성령의 교회와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친구로서 주체자가 되어 자유하는 교회와 나라를 형성해 준다고 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보면 성령주의는 간혹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교회사에서 몬타니스트들, 환상주의자들이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주의자들은 성령주의를 두려워했습니다. 극단적인 성령주의자들이 일으키는 폐해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일부 교회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이것으로 폐해를 일이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저는 오늘 성령강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성령은 공간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첫 성령강림절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그 공간에 성령이 가득찼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입니다마는 거룩한 생명의 영을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루아흐(ruah)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루아흐의 자음들을 다르게 발음하면, 레와흐가 되는데, 레와흐(rewah)는 공간적인 넓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분명 히브리어에서는 영과 공간을 같은 어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아흐는 바람과 같아서 공간 속에서 일어나며, 우리를 넓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공간, 거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인 의미를 중요시합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권력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권력적인 위계질서가 있는 곳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거리를 두지 않고 밀착되어 버리면, 권력과 한통속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거기에는 예언자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비판의 거리가 없습니다. 거리는 비판과 합리적인 거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대화를 위해서는 거리보다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대화를 위한 사회적 공간을 말할 때 우리는 광장, 혹은 마당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광장, 마당도 공간을 말합니다. 그리스의 민주정치의 산실이었던 폴리스라는 것도 대화의 공간을 의미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이러한 거리와 공간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 공동체를 대화의 공간, 평등한 친구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원동력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혹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도 있을 겁니다. 거리를 둔다면 관계가 소원해 지는 것인데, 그것을 성령이 원하시는 것인가고 도전할 것입니다. 사실, 부부간에는, 부모자식간에는, 그리고 연인끼리는 거리가 없어야 하고, 아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나자신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이에 계신 분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리와 공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확실히 사랑의 하느님이므로 사랑은 항상 함께 함, 가까움을 의미하므로 성령은 가까운 관계를 만드시는 분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가까움을 조성하지만 폐쇄적인 공간을 만드시는 아니라는 것이 오늘 저의 메시지입니다. 가까움을 빙자하여, 일방적인 권력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소통과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까움 속에서도 소통을 위한, 성령이 들어올 수 있는, 영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사랑, 맹목적인 관계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성인이 되고 주체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분이며,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첫 오순절 사건은 순수한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의 사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유대인들이지만, 각각 다른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서로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날에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서로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소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첫 오순절에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다름 가운데에서도 교회는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우리는 각양각지에서 서로 따로 살다가 우리 교회로 모였습니다. 서로 역사가 다르고 경험이 다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대화하고 소통하며, 친교를 나누고, 그리고 봉사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민주주의적인 공간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정치권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직장, 단체, 그리고 개인들의 집안에서도 모두 적용되어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일방적인 의사소통이 있는 직장, 단체, 그리고 집안에 화목함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위해 대화를 하게 하고 친교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대화와 친교를 통해서 생명의 지혜로 이끌어 줍니다. 지혜란 집단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집단적인 지성이라는 것을 가져오는 은총의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 2장을 보면, 초대교회가 얼마나 훌륭한 대화 공동체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평등한 대화와 친교 속에서 지혜가 형성됩니다. 고압적이고 위계적인 질서 속에서는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거기에는 지도자의 명령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도자의 지혜가 곧 공동체의 지혜로 둔갑해 버립니다. 그러나 평등한 대화와 친교의 공동체 안에서는 집단적인 지혜가 형성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직전에 예수를 배신하여 횡사한 가롯 유다를 대신할 12번째의 제자를 제비뽑기로 뽑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도 하나의 집단적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뽑는 것이 아니라, 제비를 뽑아 뽑는 것이므로 어떤 인간적인 생각이 개입되지 않고, 완전히 우연의 세계,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에게 맡겨지도록 만들었던 것은 집단적인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무 분란이 생기지 않게 된 것 입니다. 안 뽑힌 사람에게 아무런 수치심을 주지 않게 되고, 뽑힌 사람은 뽑혔다고 스스로 뽐내거나 자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연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로 돌리는 지혜가 돋보입니다. 최근에 총회장 선거가 돈 선거로 변질되어 이것을 막는 방법은 제비뽑기라는 의견이 올라왔는데도 이것이 통과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 교회는 아직도 이러한 지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돈과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선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민주주의적인 의사소통 속에서만 진정한 지혜가 나온다고 확신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물론 저의 주장을 강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저의 진심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과의 의견 교류와 대화 속에서 나온 결론이 항상 최상인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통 속에서 “뜻밖의” 지혜가 도출되어 나오는 법칙을 우리는 경험 속에서 압니다. 집단의 의사 소통 속에서 지혜가 은총으로 “뜻밖에” “거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의 개혁도 이러한 성령의 의사소통의 원칙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희망하게 하고, 꿈을 꾸게 합니다. 대화와 친교의 공간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꿈을 꾸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다음부분에서 사도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나이든 사람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대화가 일어나고, 친교가 일어나며, 소통이 일어나면, 지혜에 이르게 되며, 또한, 함께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교회공동체는 꿈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비록 서로 다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같은 방향에 시선을 모으는 것이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를 보면 이렇게 함께 희망을 품는 것이 좀 떨어졌습니다. 다시 살아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더 가야 할 것입니다.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다보면, 공동의 꿈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은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와 친교의 마당, 즉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 때 오시는 것이며, 우리가 희망을 품을 때 불어오시는 생명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은 주격이시지만 동시에 목적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이 목적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목적격이고 수동적이므로,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성령을 받을 만한 자세와 태세를 갖추게 될 때, 우리 안에 오시며, 그러나 우리를 주도하시지는 않고 다만 감동을 주어, 우리가 진정한 주체자가 되도록 인도하시는 겸손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체가 되고 능동자가 됩니다. 성령은 객체가 되고, 피동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성령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어떤 신비주의적인 초자연적인 힘, 예를 들어, 방언이나 치유를 일으키는 그러한 좁은 의미의 초자연적인 힘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가도록 하는 모든 생각과 지혜와 능력의 총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종합적으로 보면, 성령은 사랑을 하게 하므로 구원의 능력입니다.그리고 지혜와 꿈을 창조해 주므로 보혜사이며, 지혜자입니다.그리고 세상의 영, 육의 길을 따르지 않게 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영이므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른 생각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아주 잘 간파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 선생은 육의 길과 영의 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은 8장 6절의 말씀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zoe kai eirene).” 사도 바울은 성령과 생각을 연결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은 프로네마(phronema)라는 말인데, 이것은 실천적 지혜라는 말인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그는 그 이후 7절에서 육신에 속한 삶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 없습니다.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 육신에 속한 생각, 이 두 가지의 대비에서 바울의 사상의 집약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에서 생각이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합니다. 성령은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움직이는 세상의 생각에 대비되는 생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동료들의 “친구”로 만들어 주며, 평등한 대화공동체를 형성시켜 주시며, 우리에게 이 세상의 지배적인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살도록 하는 모든 생각과 사상을 대변하시며, 그러한 생각을 창조해 내도록 소통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기도: 성령 하느님, 저희들에게 오셔서 저희들을 감동하게 하셔서 당신의 뜻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을 맞이하는 데에 합당한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오니 저희들과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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