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도서출판 두란노
판매가 : 6,000원5,400원 (10.0%, 600↓)
불꽃 시리즈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킨 김남준 목사의 네 번째 책이다. 신앙과 신학, 현장과 이론, 신학교와 교회 사이에서 얻은 통찰로 목회자의 소명은 무엇이고 과연 그들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신학생 혹은 목회자로서 그 첫걸음을 시작하는 이들 이 신학 수업이나 목회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더욱 밀도 있는 준비를 하고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게 해준다. 참된 부흥, 그것은 잃어버린 세상과 회복되어야 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칠 수 없는 애원이다.'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어 버린 세상을 향한 복음의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결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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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시리이즈 2  /생명의 말씀사 /1996  

'그리스도인의 각성과 교회의 영적 부흥'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그 무엇을 정확하게 짚어 제시한 책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끝없는 지적 활동을 통해 얻어 모은 관념의 집적인 것처럼 이해되거나, 교회에 꼭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각 교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들을 유행처럼 실시합니다. 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이 새롭게 시도되면 잠시동안은 사람들을 사로잡지만, 프로그램의 약효가 떨어지면 이내 다시 밑도 끝도없는 허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이게 아닌데...'하고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을 다시 갈망합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교회가 하나님이 주셨던 영광스러운 복음의 능력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한사람 한사람이 말씀을 가지고 몸부림 치며 고뇌하기 보다는, 세속의 물결에 영향을 받으며 편한길을 따르다보니 오히려 세속에 끌려가면서 교회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세상이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가 세상의 눈치를 보고 있는 불행한 시대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불행한 시대에 어떻게 하면 다시 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과 생명을 받아 세상을 복음으로 고치는 본질적인 사명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논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막처럼 황량하고 푸석하고 메마른 것이 아닙니다. 숲이 우거지고 개울이 흐르고 새가 우는 윤기있고 촉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푸른 초장 쉴만한물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신앙의 연륜이 더해질수록 신앙이 향기나고 윤기있어지는것이 아니라, 완고해지고 독살스러워지고 배타적이 되어가는...정 반대의 현상이 생기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교회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떠나, 세상을 기웃거리며 세상 풍조가 그대로 교회안까지 흘러 들어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예전의 영광과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불꽃처럼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책에서 그 단초를 찾을수 있을것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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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부분을 옮겨 적었습니다.


1.탁월한 적응력

인간은 고장난 것들에 대하여 처음에는 불편해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탁월하게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뒤틀린 기독교 신앙과 망가진 신앙 공동체에 탁월하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불편을 못 느기며 살아가던 자신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그 이상의 탁월한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은 마땅히 그것을 누리며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전에 불편을 느끼지 못하던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며 그럭저럭 이어가던 교회 생활의 결함에 대해 깊이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각성과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논의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수의 것이든, 소수의 것이든 그들의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facts)’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처한 영적인 현실 속의 사실들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두가지 기준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성경말씀이고 또 하나는 객관적인 교회의 경험, 곧 역사입니다. 


2.유일한 대안

지금 우리 가운데는 경박한 낙관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단은 가치 있는 슬픔 보다는 가치가 적은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벼운 기쁨이 진지한 슬픔을 몰아내고, 값싼 낙관이 경건한 우려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세상 한 가운데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교회로부터 적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은 더 커다란 영향을 교회에 끼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앞에 무릎을 꿇고 배우는 대신 교회가 부패한 세상과의 타협을 배우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지적대로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허울만 좋을뿐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한 길로 매진하기 보다는 현실 적응과 타협의 수완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진정한 변화의 영향을 끼치는 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 자신이 무엇인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와 유사한 시대를 살았던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이러한 영적인 위기를 넘기고, 메마른 심령을 안고 살아가던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금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 보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백성들로 회복되었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3.참된 부흥

우리는 참된 신앙 부흥과 그렇지 못한 거짓된 부흥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직업적인 부흥사나 전도자들이 인간적인 방법과 최면적인 기술을 가지고 사람들을 종교적인 흥분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참된 부흥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흥은 인간이 쌓아 올린 교회의 성장과 혼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바쁘게 기능하며 어떤 일들의 결과가 나타날 때, 그것을 우리는 흔히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노력에 의한 성장이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낸 참된 신앙 부흥의 맥락에서 보는 참된 부흥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참된 부흥은 반드시 커다란 영적 각성을 동반합니다. 이 각성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부흥의 심도도 깊어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태도와 세상을 향한 태도에 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젠에 문제로 삼지 않았던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깊이 각성하게 되고,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심히 애통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들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실재로서 느끼며 삶이 그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일들을 이루는 도구가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위대한 각성이 있기 전에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깊이 부흥을 체험함으로 그 시대의 물결을 거스리고 그 세대의 정신에 항거할 수 있는 내면 세계를 가진 설교자들이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부흥

부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살아 계신 증거를 혁혁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논쟁하는 자들에게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 바람을 보내셔서 그들 눈앞에서 거목들을 꺾어버리시고 바위를 날려 보내시고 푹풍으로 들판을 휘몰아 지나가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의 실재를 두려움 속에서 체험하고 경외심 속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그런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5.교회와 세상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과 입씨름 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믿는 바가 옳다는 사실을 변증하고 세상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답이 교회에도 있다는 사실을 변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 일은 필요하고 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교회는 세상을 설득하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여주는 신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묵은땅을 기경하라
 
'묵은 땅'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때는 소출을 내놓음으로 주인에게 기쁨을 주었던 땅. 그러나 지금은 잡초가 식물을 대신하고 가시와 엉겅퀴가 열매를 대신하게 된 황폐한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읽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8퍼센트도 안되는 신자로 로마 제국을 무릎 꿇게 했던 기독교였지만 지금은 현대인에게 소외되는 이데올로기처럼 되어 버린 종교. 한때는 흑암의 세력의 빗장을 부수며 싸워 승리하던 교회였으나 지금은 세상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교회. 한때는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의 대명사처럼 영광스럽게 불리워지던 그리스도인. 그러나 지금은 나약한 실리주의자로 즐겨 불리워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읽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묵은 땅'은 처음부터 이토록 황폐화된 묵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은, 지금은 비록 아스라이 잊혀져 가고 있지만 한때는 "풍성한 열매를 소출로 내놓음으로써 주인을 기쁘게 했던 과거가 있는 땅"입니다. 그 황폐한 땅을 갈아 엎어서 밭을 일구라는 말씀입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비를 내리실 때 다시 한번 풍성한 열매로 주인을 기쁘게 하는 영광스러운 땅으로 변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격동하는 시대의 정신과 역사 앞에서 교회는 왜 이처럼 가난하고 힘없으며, 세속 안에 있지만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일까요?


7.영국을 구원한 복음

18세기 영국은 세계 다른 나라보다 앞서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따라서 그 후 다른 여러 나라들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경험하게 될 절망적인 상황들을 사회적으로 먼저 겪게 되었습니다. 물질 숭배, 관료의 부패, 향락산업의 번창, 인신 매매, 임명 경시 풍조, 사회의 도덕적 수준 저하 등이 당시 영국을 대변해 주는 사회현상이었습니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비참한 절망적인 나라였으며, 그 당시 훌륭한 정치가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임을 자처했지만 실상은 전혀 믿지 않는 상태였고 패역하고 부도덕한 그 시대의 생활을 깊이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의 잠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영국의 교회를 새롭게 깨우셨습니다. 웨슬레를 중심으로 한 신앙 부흥은 사회의 변혁까지 동반한 철저한 신앙운동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철저한 이성주의자이며 합리주의자인 렉키 까지도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영국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절망의 늪에서 구해 냈다."고 솔직히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사회 갱신을 위한 캠패인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각성하자 수많은 영혼들이 그 각성의 물결에 떠밀려 회개에 이르게 되었고, 그들이 진정으로 회심하자 나라 구석구석에까지 변화가 이르렀던 것입니다.


8.복음은 일회용?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원받을 때에만 필요한 일회용품의 교리로만 이해합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만 필요하고 구원 받고 나서는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그 위에 교회를 두시려고 했던 복음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이 살아갑니다. 
일반적으로 조국 교회에서 복음서가 바르게 설교되지 않고 있습니다. 설교되어도 본문은 복음이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많은 기독교 교리중 일부가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포함할 수 있는 전포괄적인 것이며 모든 기독교교리가 이 안에 머물러야 할 진리의 터입니다.


9.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라

오늘날의 가장 비극적인 정경은 교회와 개인의 신앙이 복음을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한 신앙을 잃어갈 때 교회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을 잃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사고 속에는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과 소원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동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강단에서는 윤리적인 설교가 선포의 주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신자들의 삶은 점점 비윤리적이 되어가고 교회 자체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대신 비윤리적인 집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 왔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회와 신자의 타락은 윤리적인 설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삶이 복음에 뿌리 박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떠남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신자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 복음이 되지 않고 있을 때, 이것은 곧 존재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복음에로 회복되는 것이 없이는 결코 이같은 악순환을 끊을 수 없고 교회의 영광스러움도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10. 잃어버린 설교 제목들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복음에 머무르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과 단절된 해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값싼 회개'를 통한 그릇된 구원의 안전, 존재의 변화와 동떨어진 '심리학적인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 등은 모두 복음서와 단절된 서신서 이해의 오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그것이 없이는 결코 기독교가 될 수 없는 보편적인 속성이 되는 진리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의 터 위에 그의 교회를 두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부활, 심판, 회개,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의 사랑, 종말, 그리스도의 재림,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지체들, 지옥, 천국..."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진리들의 공통된 특징은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설교 제목들이라는 사실입니다.


11.화석화된 교회.

  교회가 '생명'을 상실해 가는 기독교의 화석화 현상에 직면하면서 조국교회의 반은은 크게 세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생명이 있는체 가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항상 수많은 행사들을 주최하고 여러 가지 내용의 현수막을 교회 밖에 내걸기를 좋아합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붐비고 기관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나 그러나 생명의 증거들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행사를 즐기지만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 없을뿐더러 인격이 변화되며 세상에 대해 능력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워가는 전투적인 모습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12. 말씀, 기도, 성령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기도는 교회로 하여금 나른한 잠과 부패한 무지에서 깨어 영광스러움을 갖게하는 필수 불가결한 하나님의 방편이었으며 부흥, 곧 교회로 하여금 끊임없는 생명의 불길에 타오르도록 한 원리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날까지 어느 시대의 교회건, 어느 교파에 속한 교회건, 어느 지역의 교회건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13.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려면

  교회가 아니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는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참다운 생명이 사라져 가고 영원을 향한 열망을 잃어버린 냉담한 교회가 갑자기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모임들과 구별되는 기관임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교회는 본래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던 영광스러운 특권들을 어두운 땅에서 모든 족속이 볼 수 있게 밝히 드러냄으로써 구원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교회가 복음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능력있게 하신 방편인 말씀과 성령과 기도가 교회를 움직이는 인도의 원천이 되게 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14.참된 신앙부흥

  우리는 먼저 참된 신앙부흥과 거짓된 부흥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주 교회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직업적인 부흥회나 세속적인 방식의 집회를 보아왔습니다. 참된 부흥은 반드시 커다란 영적 체험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인 흥분 상태나 황홀경 같은 것을 경험하는 것을 가지고 참된 부흥의 징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참된 부흥은 반드시 커다란 '영적인 각성'을 동반합니다. 이 각성의 깊이가 깊을수록 부흥의 심도도 깊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참된 부흥이 심도를 더하면 더할수록 그것은 더욱 본질적이고 깊이 있는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만족이나 자기 불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척도에 의하여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측정해 보고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에 대해 반성해야 합니다. 지나간 교회의 역사를 살피는 일이 요긴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없이는 참된 영적 각성이 일어날 여지는 그만큼 줄어듭니다.  


15.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자립심이 강하고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을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에 한해서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 없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자각 없이도 그들은 입고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은 삶에 있어서 극히 피상적인 일부분입니다.
  자립심 강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태도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근원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비록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혼자 힘으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내면 세계로부터 간곡한 탄원으로 교회의 도움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세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인생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교회의 책임입니다. 


16. 교회의 소명

  교회는 이세상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치유하고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사회에 미담(美談)을 만드는 일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귀하지 않거나 가치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교회는 그 이상의 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 백성답게 양육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로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의 이상(理想)은 이 땅의 모든 육체들로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여호와의 다스림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17. 참된 영적 각성이란

 교회의 영적 각성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교회가 자기들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어느 날 불현듯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의 시대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실 때에 나타났던 위대한 은총의 표징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그분의 통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각성은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은과 금을 의지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사실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아무 것도 없음을, 스스로 부요 하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가난한 자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8. 은과 금을 탐하는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진액을 모두 쏟기까지 수고하다가 마지막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썩어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의 존립과 자기의 이름을 세상에 내기 위해 헌신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 사이의 구별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애통하는 중보의 사명을 다하는 대신에 사교를 위한 장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거룩한 슬픔은 세속적인 즐거움에 의하여 축출되고, 경건한 고민은 균형 잡힌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경박한 낙관에 의하여 구축(驅逐)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급기야 세상을 향하여 선포할 케리그마를 잃어버리고, 설교단은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 정신교육 차원의 훈화를 위하여 자기의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만이 이 세상 속에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 진리를 파수하는 것은 이제 편협한 종파주의자들의 교조주의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교회조차 시대의 정신을 따라가고 계시의 기초가 되는 성경 진리에 대한 상대적 회의 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모두 세상과 은과 금의 소유를 다툰 결과입니다.


19. 베드로와 요한은

 베드로와 요한은 한번 설교로 삼천명을 회개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며, 회심한 성도들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박한 기도로 시간들을 때우며 가난한 영적인 삶을 이어가는 일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기도 속에 주어진 거룩한 약속들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약속을 부여받은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 교회가 되게 하는데 공범자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문과 잡지를 읽고 텔레비젼을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앞 현판에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쓰여져 있지만, 어두움이 깔리면 거대한 교회당엔 적막이 깃들고 굳게 잠긴 대문 앞에 경비원들의 호루라기 소리만이 애끓는 기도 소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20. 흉내 내는 부흥

  오늘 날 이 땅에 요청되고 있는 절박한 것은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찬 교회와 인생 문제를 근원적으로 고칠 수 있는 방안을 소유하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하나에 매여 그 정신으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일들은 참된 영적 각성과 부흥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부흥이 아닌, 인간에 의하여 조작된 부흥으로 이 모든 사태들을 개선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흥은 각성한 사람들의 기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묘한 수단과 방법과 조작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흥을 흉내 내는 일은 부흥 없이 살아가는 것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참된 부흥을 흉내내지 맙시다. 


21.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잠자는 그리스도인 들의 참된 영적 각성과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위하여 잠자는 다수를 깨우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춤추던 시대에 흐느껴 울고, 노래하던 시대에 통곡하였던 선지자들과 같이 거룩한 하나님에 대하여 불경하는 세상과 복음을 청종치 아니하는 교만한 이 도시 속에서 우리는 그래도 조국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어두운 세상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으로 가득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탄원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분 앞에 나아가는 참된 각성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때입니다.
  오로지 그 부흥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그 모든 인생의 소망을 두게 했던 참된 부흥과 위대한 영적 각성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겸손히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선조들의 교회에 베푸셨던 그런 참된 부흥을 주시도록 매달리며 기도합시다.


22. 아침의 개벽을 기다리며

  조국 교회에 참된 부흥을 주시지 아니 하신다면 우리들이 기도하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을 수 없게끔 간구합시다. 그러한 목마름과 부르짖음으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거절하며 마침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아오지 탄광으로부터 마라도 앞까지 뒤덮게 되도록 하나님께 탄원합시다.
  위대한 부흥이 있기 전에 역사의 어둠은 더욱 짙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새 아침의 개벽을 기다리며 흐느끼는 기도로 그 밤을 지샜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흥의 새벽 빛이 황폐한 교회의 뜨락에 찬란하게 비춰오기 전에는 항상 그 어두운 역사의 한밤중을 기도로 밝혀 온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로 그 소수일지도 모릅니다.


23.하나님의 실재

 부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살아 계신 증거를 혁혁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에 대하여 논쟁하는 자들에게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 바람을 보내셔서 그들 눈앞에서 거목들을 꺾고 바위를 날려 보내고 폭풍으로 들판을 휘몰아 지나가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의 실재를 두려움 속에서 체험하고 경외심 속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의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그의 살아 계신 증거가 그들의 눈앞에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살아 계신 증거를 교회를 통하여 드러내십니다


24. 교회의 권세

 오늘날 우리는 배교에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럽이나 여러 나라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국교회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전폭적인 헌신이 없이 복음 전파도 없는 사교적인 클럽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현실 적응과 타협에 능tnr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속하게 신앙을 져버리며,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조그마한 둥주리에 쭈그리고 앉아 편안한 환경과 안락을 벗삼아 비대해진 회원들의 수에 만족하며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한 설교자는 언제나 사람들을 위로하기 보다는 죄를 느끼게 만들었고, 죄에 대하여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힘을 체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세있는 설교자들이 자기의 청중들에게 행한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교회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25.진정한 권위

  사도행전에서 부흥을 경험한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능력있는 설교를 통해 하루에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심하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교회에 모여 함께 교제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단지 사도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두려워 하였습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자기들끼리 말씀을 배우고 교제하고 기도하는 교회를 두려워 하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고관대작들이 출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입김이나 경제적인 부요함 때문이었습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적인능력이 교회 안에 깃들었기에 사람들은 그 교회를 바라보며 부인할 수 없는 두려움을 인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적 권세입니


26. 자복한 사람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 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 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행19:17-18). 에베소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죄를 낱낱이 자복 하며 고하도록 만들어 주었을 때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부흥을 맞이한 에베소 교회는 그 고을에서 영적인 권위가 있는 신적 기관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각성을 통하여 영적인 세계의 실재를 보게 되었고, 자신들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세계를 이길 수 있는 영적인 권세가 오직 교회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그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앞에 나아와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았지만 자복 하였고 자신들이 행한 일을 토설하였습니다. 예전에 전혀 자신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예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흥은 이처럼 교회의 잃어버린 권세가 회복되도록 만듭니다. 교회가 이러한 영적인 권세를 회복하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사람의 방법이 교회의 영적인 권세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라졌던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함께하심으로 교회는 영적인 권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27.설교자의 영적인 권위

 최초의 청교도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낙스가 설교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기회주의 적인 태도를 취하며 가톨릭과 개혁 신앙 사이를 오가던 메리 여왕 앞에서 그는 설교하였습니다. 여왕은 자주 얼굴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깊은 두려움에 질려서 부축을 받으며 예배가 끝난 교회당을 걸어 나오곤 하였습니다. 여왕은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이 설교자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자신도 설교자인 낙스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어 했는지를 하소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반 시간 가량 온화하게 본문을 해설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해설이 끝나고 그 내용을 적용하는 부분에 들어가면서 설교는 거룩한 열정에 불탔고 설교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청중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그 설교를 들으며 두려움으로 온 몸을 덜덜 떨었습니다.
 그때 닉스의 외모는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으며, 그의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교회에 들어와, 다른 교우들의 부축을 받으며 강단에 올라갔고, 거기서 그는 넘어지지 않도록 강단 한쪽에 몸을 기댄 채 설교를 시작하여야 했습니다.
 회중에게 온몸이 떨리는 두려움을 안겨 준 것은 결코 그의 외모나 고함 지르는 설교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깃든 신적인 권위였습니다.


28. 조국 교회와 부흥

 많은 말과 풍성한 어휘들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논쟁과 글들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해 보려고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참된 종교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수고를 높이 삽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동시에 교회가 이와 같은 학문과 변증만으로는 충분히 그 신앙을 파수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이 도시 안에 충족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숙한 결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책망케 하고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안에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29. 폭풍. 바람.비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 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 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 하여 세력을 얻으니라.(사도행전19:17-20)"
 역사는 달라도 부흥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에베소에 거하는 그들은 편만한 교회의 영적 권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복음을 단지 지식으로만 알던 사람들이 그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있는 역사가 교회와 세상을 함께 쓸고 지나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이렇게 세상과 교회를 본질적으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사모하여야 할 때입니다. 고통하는 세상과 무능한 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대안은 폭풍과 같은 부흥입니다. 바람과 같은 각성입니다. 그리고 소낙비처럼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정으로 교회의 이런 능력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 세상가운데 교회는 결코 권세있는 존재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이상은 이세상에 선한 목적을 위해서 모인 단체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고 맴버십을 나누어 갖는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가 더 커다란 권세를 사모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0. 아는 것의 중요성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행19:17)
 그렇습니다. '알고' 바로 이 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은 그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알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부흥에 있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다시 말해서 정직한 말씀의 제시가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이 선행되고 나서야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순전하지 못한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순수한 부흥의 역사가 방해를 받습니다. 복음 진리를 바로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부흥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사모하여야 할 일입니다.


31.지금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지식에 잠겨서 사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기쁘고 복된 것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부흥이 없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며 사는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다스림 없이 살아가는 대다수의 냉담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이해합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진리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유를 영혼과 삶 속에 온전히 누리게 되기까지 그것을 위해서 쉼 없이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 일의 완성이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 모든 일을 능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3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두 가지 기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곧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고 살아가는 교역자들과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평범한 회중들의 생활 기준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인 침체 속에 있을 때, 언제나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유행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이같은 이분법적인 논리를 인정해 주는 신앙의 구조 안에서 인일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처럼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어려운 삶의 목표나 수준 높은 영적인 삶을 촉구받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빠져 나갑니다. "아,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저것은 목사나 전도사들이 살아가야 할 수준이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종처럼 설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며, 그의 은혜를 힘입어 살기 원하는 모든 과정들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의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도자의 그늘 아래서 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서 자신을 제외하며 살아가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33. 참된 개혁

 참된 개혁은 변화된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변화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는 그러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신앙을 기초로 세상의 변혁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현실을 변혁시키고 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본질적으로 고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만물보다 더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기 때문에, 부패한 역사의 물결을 거스려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34.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 지도자들을 통하여 온 백성들이 함께 깨어나고 함께 여호와를 경외하는 교회,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지체의식을 가지고 교회와 민족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하든지 나만 잘 믿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초보적인 신앙의 단계에서 갖게 되는 견해입니다.
결국 신앙은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피할 수 없이 공동체적입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각성하고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처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교회와 역사를 전망하였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애끓는 탄원으로 중보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지체의식 때문이었습니다.


35.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갈망하는 것과 함께 그 좋으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추구하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들의 그런 냉담한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도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진실된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마음이 정도에 있어서 충분치 않거나 방향에 있어서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 됩니다.


36. 절박함이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 가운데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개인의 신앙의 상태를 깊이 직시하고 그 영적인 곤궁함을 인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더 깊은 영적 삶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그분과 더 온전히 교제하며 그 성품을 본받아 더욱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갈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지금 곧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신앙적인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부흥을 사모합니까?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그분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교회가 되기를 사모하는 갈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모함이 없다면 그러한 우리의 형편 자체가 이미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필요로 하는 상황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37.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특별히 사랑하는 것 하나에 지배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쉽게 나뉘어지는 마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마음은 이 세상에서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쉽게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나누어져서 하나님 한 분만을 갈망하지 아니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앙적인 분위기를 가진 집단이 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추구로 충만해지는 것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 영적인 무기력에 지배당하게 될 때 우리는 대부분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해 물리적인 환경이나 개인적인 처지에서 그 원인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무기력은 대체로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대신에 다른 것들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8. 영적 무감각

 우리는 현실에 입각해서 성경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구석구석에 번져가고 있는 이 냉담함과, 하나님을 알되 그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를 목마르게 그리워하며 그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는 그 모든 삶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안일과 나태의 깊은 수렁 속에서 각성할 줄 모르는 이 모든 영적인 무감각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 모여 예배와 헌금을 드리고 정해진 틀 속에서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과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헌신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칭 헌신되었다고 생각하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편견과 무감각이 부흥의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해야 합니다. 


39. 부흥의 장애물

 참된 부흥을 갈망하는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냉담한 모든 사람들, 영적인 상황에 대하여 무관심한 많은 사람들, 일상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그 이상의 영적 삶의 진전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더 이상의 사모함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영적인 부흥을 추구하는데 방해물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감각한 사람들의 갈망이 없는 삶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조차 너무나 일반적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기가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늘 전능하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인하여 애통하기보다는 그럭저럭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을 가지고, 더욱 완전한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갈망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별난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제일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각성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적인 현 상황을 직시하고 근거 없는 마음의 부요함과 현실에 안주하려는 태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르지 못한지를 깨닫게 하고, 자신의 영혼의 곤궁함과 교회의 영적인 가난함에 눈뜨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40.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모든 종교적인 모임은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언제나 그분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기도회나 예배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지체들에게 짐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앞에 전혀 기도에 힘쓸 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사람이 그 기도시간에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들이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하여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믿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아무런 갈망하는 마음이 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그 사람이 예배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는 틀림없이 예배가 끝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그 교회의 예배 전체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일에 방해가 됩니다.  


41.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 삶의 모습

 얼마 전에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별로 없고 노인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냉담하였습니다. 설교 내용에 대하여 반감을 갖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모두 기도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시작되었는데도 모인 무리들은 고요하고 교회당 안에는 을씨년스러운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그 누구의 기도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기도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러도 도무지 기도의 영이 느껴지지 않는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 수길 수 없도록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가장 잘 표출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기도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배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는 대부분의 모임 가운데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과 교제해야겠다는 단호하고도 끈질긴 마음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교회와 집 사이를 오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삶의 모습입니다.


42. 감추어진 실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현실을 정확한 영적인 안목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이 자신들의 것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이 이처럼 임박한 미래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19:42)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누군가에 의하여 보지 못하도록 감추어버림을 당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영적인 각성이 필요한 교회일수록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무지하게 마련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신앙에 대하여 염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비성경적인 신앙 속에서 살았는지 우리는 감탄할 따름입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속이는 영들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는 무감각 위에 깨닫지 못하게 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이 무지를 더합니다. 그 가운데 교회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43. 시대를 거스르는 영적 분별력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됩니다. 그는 자기의 삶이 놓여 있는 자리가 가지고 있는 사조와 생각과 사상, 습관 같은 것들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의 흐름이 옳은 것이건 옳지 않은 것이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소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일반적인 사고를 거스리며 살아가는 것은 대단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시대를 거스려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하거나 인식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자신의 이상만을 가지고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성은 바로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던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새롭게 깨달음으로써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그 시대에 유행하지 않는 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평가는 그 교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만족과 불만족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대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계3:17) 교회가 늘 각성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44. 깨어있는 길

 교회가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자신의 거룩한 정체성을 속된 도시 속에서 지켜 가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받는 영향과 비교될 수 없으리 만치 커다란 영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마르지 아니하는 진리의 근원이며 다함이 없는 신앙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세상이 끼치는 영향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재해석하고 여과함으로써 필요한 것들만을 취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 교회로 하여금 성경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할 염려가 있는 것들을 버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19세기말 합리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의 성경해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눈이 멀었습니다. 성경이 명백히 말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모두 부인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의 대속적 의미, 부활 같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는 모두 신화취급을 당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당시 합리주의라고 하는 세상의 풍조가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성경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해석했다기보다는 합리주의라는 풍조 때문에 명백히 보이던 성경이 가리워져 보이지 않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불확신과 오해는 뒤틀린 기독교 신앙을 낳았고 비 복음 적인 설교가 강단에서 유행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는 강단과 함께 온 회중들을 소경이 되도록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남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