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도서출판 두란노
판매가 : 6,500원5,850원 (10.0%, 650↓)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합니까? 이 글은 신앙과 신학, 현장과 이론, 신학교와 교회 사이에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서믹고자 애쓰는 가운데 얻은 통찰들입니다. 또한 그들 중 많은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추구 속에서 진실임을 확신하게 된 것들입니다. 이 글을 정독함으로써 신학 수업이나 목회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마땅히 지불해야 할 시간적인 낭비들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더보기▶]



표지를 클릭하면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사실 수 있습니다.

'신학의 문을 두드리는 그대에게'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두란노 - 김남준 시리이즈 네번째 책이다.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김남준 목사님의 책을 시리이즈 순서대로 계속 소개하고 있는 중이다.
독서일기의 목적이 책을 소개하는데 있는 것은아니지만, 책 중에서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들은 꼭 뒤늦게라도 소개하고픈 마음이 든다. 그 중에 한분인 김남준 목사님의 책은 서점에 나오자 마자 사서 읽는데, 이참에 그분의 모든 책들을 다시한번 책꽂이에서 빼 읽으며 순서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 책은 사람에 관한 책이다.
모든 문제가 사람에서 비롯되는데, 한국 기독교회의 모든 문제 또한 사람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부름을 숙명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목회의 길이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의 과정을 밟는데 이 세상에 신학만큼 독특한 학문도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목회에로의 부름을 받고 독특한 신학의 과정을 밟으면서도 방황하고 때로는 타락하기도 한다.
목회자라는 신분은  분명 세상 다른 신분과 다르다. 세상은 목회자에게 높은 도덕성, 또는 평범한 자신들과는 다른 세상을 읽는 어떤 안목을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기대에 못미치는 생각과 도덕성으로 우리를 실망시킬때가 많다.

이 책은 진정한 신학함이 무엇이며, 그것이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것을 통하여 교회가 요구하는 기대치에 어떻게 부응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을 담은 책이다.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그들의 소명이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육체적으로, 지성적으로,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소상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혹 목회에 소명이 있는 사람은 먼저 이 책을 읽어 보고, 그 갈 길을 선택하는 것도 늦지 않을것 같다.

-----------

1. 천국에 들린 방송

어느날 천국에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낭랑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천국에 계신 성도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모든 성도들은 한분도 빠짐없이 지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천국 전망대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벨. 이게 무슨소리입니까? 왜 우리들을 전망대로 모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모세가 걸어가면서 아벨에게 물었습니다.
"글쎄 무슨 일일까. 이런 일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왜 모이라고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겠는데...이보게 바울 자네는 알아?"
"글쎄요..." 바울도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들이 많은 성도들과 함께 전망대에 도달했을 때, 마침 천사의 방송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기립하여 박수를 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 아래를 내려다보십시오"
 박수를 치면서 지상을 내려다 보고 있을 때, 거기에는 한 사람의 신학생이 회개하고 있는 장면이 클로즈업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사 후보생이 회개하면 천국에서는모든 성도들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한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2. 신학의 독특성

 이세상에서 신학만큼 독특한 학문은 없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이 믿음으로 시작 하는 학문이며,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하되 이성만으로 하나님이 탐구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사상을 거부하며, 그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회와 잃어버린 세상을 더 잘 섬길 것을 열망하며,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탐구하는 학문이다.


3. 역사와 사람

 사람들은 방법을 찾아 나서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방법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시어 역사를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전환은 결코 우연을 통해서 이루어지거나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를 어떻게 움직이실지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준비하시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준비되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람을 만들어 내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인스턴트 식품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4. 준비된 사역자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그분 곁에 있다 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체취와 기운이 베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숨기려고 하는 것은 소명받지 않은 세속적인 사역자가 하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한 시대를 깨워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는 일꾼이 될 때까지 세례 요한은 그토록 긴 기간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준비되는 일에 바쳤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때가 이르매 외롭고 쓰라린 광야의 훈련을 통해 준비된 그의 심령 위에 불붙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역사의 한 마당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조국교회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준비 되기를...


5. 안식년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 사역은 일생 도안 한 순간도 멈출 수 없고, 멈춰서도 안되는 소명입니다. 오늘날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
 목회자나 신학교 선생들이 여러 해 사역하고 난 후에 자신을 돌아보고 재충전하거나,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치 안식년이 성경의 요구나 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곡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구약의 안식년에서그런 신학적인 개념만을 따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에서 직원들에게 안식년을 줍니까?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찰들에게도 안식년을 줍니까? 그런 식의 아전인수격인 성경 해석을 통하여 안식년을 마련하여 쉬는것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낯선 것입니다.


6. 불꽃처럼 과로한 사람들

 중요한 것은 건강 자체가 아닙니다. 건강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있고, 우리의 몸은 복음 사역을 위하여 있고, 우리의 복음사역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평생 건강을 보존 하느냐, 해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보존이며 해침이냐입니다.
 애써 유지한 건강이 단지 그사람의 목숨을 연장시키는 일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살았으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을 해혀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피할 수 없는 섬김 때문이었다면 그는 죽었으나, 단지 살아만 있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7. 순결한 종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음란하다 할지라도 부름받은 여러분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맑은 영과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순결을 가르치고 그들로 세속에 더렵혀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구별되이 세워준다면 세상은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8. 한 책을 사랑하라

 오늘날과 같이 날마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로 가득 차는 세상 한가운데서 '한 책'에 미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습득해야 할 정보가 홍수처럼 많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영적으로 깊이 침체되어 있던 시대에는 이러한 생각들을 세상 사람들만 한것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하였습니다.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공통된 특징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전적인 신앙고백이 실제의 삶의 실천을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9. 무디냐 문디냐

 어느날 드와이트 무디가 설교할 때 설교를 모두 들은 교인 하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한시간 설교하시는 동안 문법이 스물네번 틀리셨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님. 저는 한번 설교에 스물네번 틀리는 문법을 가지고 오늘 많은 사람들을 구원 게 하였습니다. 당신은 틀리지 않는 문법을 지고 얼마나 많은 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계십니까?"


10. 공부할 땐 공부하라

 신학교 시절에 공부를 등한히 하고 기도원 다닌다고, 교회 봉사한다고, 선교 활동한다고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막상 목회를 시작하고 목회가 틀이 잡히기 시작하여 이제 목회자가 전심으로 그 교회를 붙들고 씨름해야 될 시간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공부하러 다닌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립니다.
공 부할 때는 다른 일에 매달리고 목회를 하여야할 때는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왜 우리는 그렇게 뒤집어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부지런한 독서

  부지런한 독서와 진지한 학문의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민족의 갈 길과 조국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한 통찰을 더하여 줍니다. 그리고 제한된 짧은 인생을 어떻게 오류 없이 가장 효과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세상살이에 있어서나 우리 인생에 귀한 시간들을 낭비하는 일은 언제나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지식이 없음으로 많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12. 두 종류의 지도자

 우리는 그 지도자가 어떤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곧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 사람 주위에서 그와 함께 섬기고 있는 동역자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형의 지도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배형 지도자는 자신의 주위에 똘마니 같은 사람들을 두고 보스처럼 군림하며, 군자형 지도자는 자신의 주위에 하나님께 매인 사명자들을 두며 공통의 사명을 완수해 갑니다. 소인배형 지도자는 자신이 지도자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과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자기 밑에 종속되어 있어야지만 안정감을 느끼고 그들 위에 군림해야지만 만족하는, 결코 훌륭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따금 군자형 자도자들을 교계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자신에게 매이고 아부하는 사람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이, 사역을 미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나 동역자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지도자로 하고 있는 공동체는 개성도 다르고 성향도 같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어 갑니다. 그들은 생각이 크고 마음이 넓습니다.


13. 예의바른 사람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예의가 몸에 밴 절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의는 상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습관입니다. 뛰어나고 고매한 인격은 나중이고, 먼저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예절 바른 태도는 적어도 불신자들에게 그를 신뢰할 수 없는 빌미를 주지는 않습니다.
 커다란 은사는 단번에 주어질 수 있습니다. 큰 능력도 때로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손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은 오랫동안의 자기 성찰과 부단한 반성, 끊임없는 자기 부인,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거룩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모함을 통해 서서히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14. 노처녀의 임신과 목사님

 어느 교회에서 커다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인중의 한 처녀가 만삭이 되었는데 그 아이가 목사님의 아이라고 교회 앞에서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자녀도 없고 상처한 지 얼마 안 된 독신이었던 그 목사님은 사실이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목사님이 해명하기 위하여 단상에 섰을 때에는 이미 모든 교인들이 목사님의 부정을 믿어버린 후였습니다. 목사님은 무참하게 강대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드디어 그 처녀는 아이를 출산하였고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파면을 당하고 노회에서는 면직까지 당했습니다. 교회는 목사님을 퇴직금도 없이 내쫓았고, 그 처녀의 집안에서는 아이까지 목사님의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그 후 목사님은 강원도에 있는 어느 탄광으로 들어가 5년이라는 긴 세월을 눈물로 기도하며 광부로 품을 팔아 어린아이를 양육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5년이 되던 어느 해 부흥회를 통하여 그 처녀가 회개하고 자기의 아이가 사실은 목사님의 아니가 아니라 교회 내의 어느 집사의 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온 교회 앞에 눈물로 자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당회를 소집하여 교인들의 대표로 이루어진 사죄단을 만들어서 목사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분을 자신의 교회의 목자로 모셨습니다. 그분은 그 교회에서 평생 동안 성자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전날의 치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목회를 하였다고 합니다.


15. 고난의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교만해지고, 글을 쓸 때는 자기의 분수를 잊기 쉽지만 사역의 현장에 돌덩어리처럼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면 저절로 겸비하여져서 자신이 진흙 바닥에 구르고 있는 것 같은 비참함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긴 과정을 통해서 늘 깨어지기 쉬운 얇은 유리 그릇 같은 저의 성품을 강하게 하시고, 상처받은 사람들과의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허물과 심각한 인격적 결함을 보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연단 받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6.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고결한 인격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 없어도 언제나 그분들 앞에 서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결같이 성경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있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도 인격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금은 비록 모나고 부족하여도 끊임없이 깎여 나갈 것이며 다듬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손색이 없는 인격자로 나타날 것입니다.


17.기도 없으면

 신학의 지식은 기도의 눈물에 잠겨 있을 때만 안전합니다. 심지어 성경을 아는  지식도 기도의 눈물에 잠기지 아니하면 사도 바울이 경고한 그 경고에서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더을 세우나니"(고전8:1) 


18.급조되지 않는 인격

 늘 울어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격이고 고난과 쓰라린 연단을 받으면서도 쉽사리 다듬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된 성품입니다.
 지식은 집중적으로 노력하여 단 시일 내에 축적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건강도 열심히 노력을 해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신앙 인격은 그렇게 속성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와 같은 신학교 시절을 인격이 갖추어지는 훌륭한 기간으로 삼으십시오. 때를 놓치면 그렇게 훈련받을 수 있는 때가 또다시 쉽게 오지 않습니다.


19. 삶은 설교의 주석

 설교자의 삶은 강단에서의 설교에 대한 주석입니다. 비록 강단에서의 말이 어눌하여도 삶이 훌륭한 설교자는 실천에 있어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쓰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여전히 필요한 감화를 끼칩니다. 삶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는 비록 그의 말이 화려하지 않아도 설교의 색깔이 빛 바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설교를 빛나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피를 바른 설교
 
 설교는 하나님을 만난 한 설교자의 뼛속에서 우러나와 형체를 갖추고, 심장을 관통하여 피를 바르며, 살을 찢고 흘러나옴으로 그 진액이 묻고, 흐느낌과 함께 토해져 나옴으로 눈물에 적셔진 하나님의 음성이다.


21. 신학함의 신앙화

 단지 학문의 자랑을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신학적인 간음입니다. 그런식으로 신학을 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보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학공부를 통하여 경험하는 영혼의 메마름과 더 깊은 무지와 편견,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실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사역에 들어간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학문에 있어서 실용적인 특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신학 함의 신앙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 자체를 배우는 것과 함께 어떻게 신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신학 함인가에 대하여 좋은 선생님을 통해 훌륭히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22.잠자는 다수가 될 것인가

 여러분은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마십시오. 잠자는 다수로서가 아니라 깨어있는 소수로 살아가기 위하여 언제나 세상과 교계의 풍조를 성경의 시각으로 점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오늘날은 냉담한 것이 마치 지성적인 신앙의 자랑스러운 표지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어줍쟎은 신학생들의 잘못 신학하는 태도가 교회에서 생명의 씨를 말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식이라는 관념의 주사 바늘로 신앙의 생명력을 무력케 하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특권인 양 뽐내는 시대입니다.


23. 주님의 누명을

 신학교에서 섬기던 어느 날 책상 머리 맡에 놓여 있는 어느 신학생의 성경 책갈피를 넘기던 중 그가 적어 놓은 한 글귀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나는 세상이라는 법정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내 평생 다하도록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누명을 벗겨 드리고야 말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24. 성령의 권능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여 갸륵하고 감동적인 일들을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회복하는 일 없이는 결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씀 사역은 처절한 영적 전쟁의 한 복판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5. 순진하면 마귀의 밥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목회사역을 영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싸움에 관한 긴박한 위기 의식이 사라지는 곳에 언제나 나태와 안일이 깃들이며 도덕적인 타락은 바로 그것들의 둥우리에서 깨어나는 새끼 새와 같습니다.
 이제는 영적인 전쟁에 대한 원색적인 설교들이 사라지고 현대인의 지성을 거스르지 아니하는 알량한 도덕적인 설교들이 강단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의 풍토는 바로 목회자 자신이 말씀사역에 있어서 영적이 도전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 더 큰 원인이 있습니다.


26. 천박한 말장난

 제자훈련이 성공하면 ‘균형 잡힌 제자’들이 만들어지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의 부흥을 경험하면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용사’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바로 성령의 능력이 만들어낸 차이입니다.
 사실 항간에 풍미하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얄팍한 지성주의의 천박한 말장난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고 영혼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이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거룩의 빛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유일한 소망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구원을 주시는 구분 앞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늘어놓은 말의 유희에 불과한 것입니다.


27. 피 끓는 외침

 하나님의 성령 없이 단 한사람이라도 회심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풀 포기 하나 벌레 한 마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어떻게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마귀의 손에서 탈취할 수 있을 것이며, 마른 뼈와 같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한 교회를 생명의 전당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목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방법이 성공하면 얻는 것은 형식적인 신자의 증가일 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게 성령의 능력을 믿지 못하거나 절박하게 갈망하지 않는 쓸모 없는 목회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8. 때를 기다리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보다 자기를 통하여 더 널리 알려지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여호와의 영광을 인하여 기뻐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