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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독으로부터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내쫓으셨다."(마가복음 1장 32절-39절)

들어가는 말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쉴 새 없는 활동 -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쫓으며, 참을성 없는 제자들에게 일일이 응답해 주고,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하며, 이 성전 저 성전에서 설교하시는 등 - 으로 가득 찬 성경 본문들 한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용한 구절들을 발견합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숨쉴 틈마저 없는 빡빡한 활동들 한 가운데서 우리는 매우 편안한 숨소리를 듣습니다. 이곳저곳 뛰어다니느라 정신없는 속에서도 우리는 고요한 정적의 순간을 발견합니다. 관여해야 될 일이 한두 군데가 아닌 삶의 중심에 물러서는 것에 관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함께 한 일들 뒤에 고독이 있습니다. 저는 활동들을 묘사하는 시끌법쩍한 말들 사이에 감추어진 채 거의 조용한 이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님의 사역의 비밀은 그분이 아침 일찍, 새벽 동이 트기 훨씬 전에, 기도하시러 가셨던 저 외딴 곳에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딴 곳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용기를 발견합니다.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이렇게 상기시키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그것은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장 30절).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요한복음 14장 10절). 바로 그 외딴 곳이야말로, 예수께서 성부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시는 곳이고, 그분의 사역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저는 우리 삶 속에 있는 이 외딴 곳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딘가 외딴 곳이 없이 우리 삶은 위험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 침묵이 없이 우리 말들이 그 의미를 상실해 버렸으며, 경청함이 없이 하는 말마다 더 이상 치유하지 못하며, 거리 유지가 없이 딱 달라붙어 있어서는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 외딴 곳이 없이 우리가 하는 활동들은 금새 공허한 몸짓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침묵과 말 사이, 물러남과 참여함 사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이, 고독과 공동체 사이의 조심스런 균형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탕을 이룹니다. 따라서 이런 균형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개인적인 관심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활동들로 가득 찬 우리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나서는 고독을 누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정신없이 바쁜 우리의 삶

우리의 특별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우리의 사회 구조 속에 아주 극적인 변화들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최소한 집을 짓거나, 책을 쓰거나, 기계를 발명하거나, 아니면 트로피를 받는 것을 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할 때만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스스로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행복이나 슬픔에 대하여 우리가 느끼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세상과 그 역사가 이렇게 형태를 갖추기까지 어떤 역할을 한 부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누군가를 위하여 뭔가 좋은 일, 곧 조언하고, 위로하고, 한두 귀신을 내어쫓으며, 심지어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까지 선포해야 할 소명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쓸모가 있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목표 지향적 사회에서 정신적·영성적 건강의 징후일 수 있을지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자존감(自尊感)을 무력화시켜서 없애 버리는 원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종종 우리 일의 결과를 우리 자존감의 표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성공을 이룰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성공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이 나라에서 연설을 주로 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러분을 소개하는 말도 길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여러분이 대학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취했던 모든 것을 열거할 책임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한 일의 결과에 따라 영향을 받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서서히 삶이란 누군가가 우리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하여 점수를 열거해 놓은 하나의 커다란 점수판이라는 잘못된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채점꾼들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빚어내는 대로 되어갑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총명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움이 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호감이 갑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를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성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취 - 우리가 활동한 결과 - 를 우리 자존감의 표준이 되도록 허락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정신적·영성적 준비를 갖추어 걸어갈 것이고, 그럴수록 우리가 지난날의 성공들에 힘입어 품게 된 기대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결코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는, 성공하면 할수록 불안도 더 커 가는 거의 악마적인 사슬이 있습니다. 이 어두운 힘이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자기 파멸(自己 破滅)로 내몰았습니다.

이 성공 지향적인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최상급의 말에 따라 더욱 더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높은 탑, 가장 빠른 달리기선수, 가장 키가 큰 사람, 가장 긴 다리 그리고 가장 우수한 학생을 자랑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우리는 정반대 되는 것들을 자랑합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작은 마을, 가장 좁은 거리, 가장 작은 말 그리고 가장 불편한 신발이 있어요.)

그러나 성공적인 활동에 관해서만 열심히 강조하다보니, 그 속에서 우리 대부분이 고질적이고 낮은 자존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가 환영을 깨고 우리가 세상이 믿고 있는 것만큼 똑똑하거나 착하거나 호감이 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라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주변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이따금 누군가가 친숙하게 다가가 "모두가 나를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일 내가 그들이 내가 지금 느끼는 속내를 알게 된다면…" 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 끈질긴 자기 회의(自己 懷疑)는 우리의 경쟁 사회 속에서 투쟁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깊은 우울증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이 발견될까 마음을 좀먹어 들어가는 두려움은 공동체와 창조적인 나눔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이 세상의 판단에 팔아 버렸을 때, 우리는 꼭 불안하게 됩니다. 그것은 확인과 찬양이 점점 더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지속적인 자기 거절 때문에 마음이 쳐져서 침울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립될 것 같은 심각한 위험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정과 사랑이 상호적인 취약성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활동들이 내적 자유보다 두려움의 표현이 될 때, 우리는 쉽게 자기가 창조한 환영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고독을 누리는 우리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독 속에서만 이러한 내적 자유가 자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하여, 곧, 자신이 지닌 모든 능력이 자신에게 부여되었고, 자신이 한 모든 말이 자신의 성부로부터 왔으며, 자신이 한 모든 일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의 일이었다는 인식 안에서 자라시기 위하여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외딴 곳에서 예수께서는 실패도 받아들이실 만큼 자유로워지셨습니다.

외딴 곳이 없는 생활, 곧, 골방이 없는 생활은 파멸로 치닫기 쉽습니다. 우리가 자기 동일시(自己 同一視)의 유일한 수단으로 우리가 활동한 결과들에 집착한다면, 소유적이고 방어적인 사람이 되어, 동료 인간을 삶의 은사를 나눌 친구로 보기보다 거리를 유지해야 할 적으로 보기 쉽습니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소유욕에 가득 찬 우리의 환영을 서서히 깰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자기(self) 한가운데서 우리는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존재라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말을 배우기 전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베풀기 전부터 우리를 치유하셨으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며,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존재가 소유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우리가 노력의 결과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곳도 바로 이 고독 속에서입니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이 지켜져야 할 소유물이 아니라, 나누어져야 할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던지는 치유의 말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이 더 위대한 사랑의 일부라는 사실과, 우리가 초래하는 새 삶이 집착해야 할 소유가 아니라 받아들여져야 할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곳도 바로 그곳에서입니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치가 우리의 유용성과 꼭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도(道) 이야기에 나오는 오래된 나무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목수와 그 도제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한 목수와 그의 도제가 큰 숲을 지나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키가 크고, 거대하고, 옹이투성이이며, 늙고, 아름다운 참나무 앞을 지나갈 때, 목수가 자기 도제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무가 왜 이렇게 엄청 크고, 엄청 거대하며, 엄청 옹이져 있고, 엄청 늙고 아름다운지 아느냐?" 그 도제는 자기 스승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뇨…왜?"

그 목수는 말했습니다. "음, 그건 쓸모가 없기 때문이지. 만일 저 나무가 쓸모가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잘려져서 식탁이나 의자로 만들어졌겠지. 그런데 그것이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저렇게 엄청 크고 엄청 아름답게 자라서 네가 그 그늘에 앉아 쉴 수 있게 된 거란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유용성에 정신이 팔리지 않은 채 자유롭게 늙어갈 수 있고,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봉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의존을 상실할 정도로 - 세상이 의미하는 게 아버지든지, 어머니든지, 자녀들이든지, 경력이든지, 성공이든지, 보상이든지 간에 - 우리는 전혀 방어함이 없이 한껏 나눌 수 있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우리가 세상을 진지하게, 그러나 너무 진지하지는 않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웃을 수 있었던 교황 요한의 심성을 어느 정도 채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추기경(?)이 그에게 "교황이시여, 바티칸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제 생각엔 그들 중에 절반 정도."

신앙 공동체로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나, 결과가 없다고 파멸되지는 않습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우리는 상호간에 지속적으로 상기하는 것은 우리가 약자들의 교제를 형성하며, 우리 존재의 외딴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두려워 말아라. 네가 받아들여졌다." 하시는 그분께 숨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발견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가까운 여러 고을에서 하신 말씀은 성부와의 친밀함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위로와 단죄의 말씀이었고, 희망과 경고의 말씀이었으며, 일치와 구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셨기에 이런 도전이 되는 말씀들을 과감히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영광되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헛것이다. 나를 영광되게 하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8장 54절). 몇 년 뒤 예수께서는 바로 이 말씀들 때문에 거절과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딴 곳에서 그분에게 말씀하셨던 분이 그분을 들어올리셔서 희망과 새 삶의 표징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활동들과 관심사들 한가운데서 외딴 곳을 창조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의 성공과 실패는 여러분에 대한 영향력을 서서히 잃어갈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이 세상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그 환영에 대한 동정적 이해와 함께 표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여러분의 진지한 참여가 진솔한 미소와 함께 표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이 여러분 자신의 필요보다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촉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때가 되면 여러분은 돌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되, 잠시동안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는 것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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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돌봄과 함께

(예수와 그 제자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보고서, 그들인 줄 알고, 여러 성읍에서 길을 따라 그 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 곳에 이르렀다. 에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아뢰었다. "여기는 빈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흩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이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알아보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

들어가는 말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돌봄의 손을 뻗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외딴 곳에서 그분의 돌봄은 강해지셨고 성숙해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분은 자신의 동료 인간들과 치유적인 차원에서 아주 밀접해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돌보셨습니다. 실용주의자인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것은 분명해. 그분은 굶주린 이들을 먹이셨고, 눈 먼 사람들을 보게 하셨고, 귀머거리들을 듣게 하셨으며, 절름발이들을 걷게 하셨고, 죽은 이들을 살리셨어. 그분은 실제로 돌봄을 베푸셨어."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주목할 만한 일들에 놀라다 보니, 잊어버리는 게 있습니다. 곧 예수께서 군중 속에 있던 낯선 이로부터 몇 덩이 빵과 물고기를 받으셨기에 많은 이에게 음식을 제공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 나인의 소년 이야기에서 그의 홀어머니가 겪고 있는 슬픔을 느끼셨기에 소년을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실 수 있었다는 사실; 마음이 찢어질 듯 눈물과 한숨으로 번민하셨기에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아니 보고싶어 하는 것은, 치료와 변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않는 것은, 아니 보고싶어 하지 않는 것은 돌보는 것, 고통에 참여하는 것, 고난 속에서 연대하는 것, 깨어짐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더욱이, 돌봄이 없는 치료는 냉정한 마음으로 던져주는 선물만큼이나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나는 모든 치료의 밑바탕과 선결 조건으로서 돌봄에 대해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강조점이 치료에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전문가가 되고자 합니다; 곧 아픈 이들을 고치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고, 흩어진 이들을 조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유혹은 우리가 우리의 전문 지식을 진짜 중요한 것에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결국엔 돌봄 없는 치료가 이롭기보다는 훨씬 더 해롭다는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봄이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자문해 봅시다. 그리고 나서 돌봄이 어떻게 공동체의 밑바탕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봅시다.

돌봄

돌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돌봄이라는 말이 매우 모호한 말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출발해 보겠습니다. 어떤 이가 "내가 그를 돌볼 거야!"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다정다감한 자비의 표명이라기보다는 곧 닥칠 듯한 공격의 선언이라고 보기가 더 쉽습니다. 이러한 모호성 외에도, 돌봄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됩니다. "커피 드실래요, 녹차 드실래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I don't care). "집에 있을 거니, 영화보러 갈 거니?" "아무래도 상관없어"(I don't care). "걸어갈래, 차 타고 갈래?" "아무래도 상관없어"(I don't care). 삶 속에서 선택해야 될 순간에 나타나는 이런 무관심의 표현은 이제 상투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돌보지 않는 것이 돌보는 것보다 더 수용적이고, 돌봄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삶의 양식이 돌봄에 연연하는 삶의 양식보다 더 매력적인 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정한 돌봄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돌봄은 무관심을 배제합니다. 그것은 냉담의 반대입니다. "돌봄"(care)이라는 말은 어원상 고트 말 "카라"(kara)에서 왔는데, 그것은 비탄이라는 뜻입니다. 돌봄의 기초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애도하다, 슬픔을 표현하다, 함께 울부짖다. 나는 돌봄이라는 말의 배경이 이런 줄 알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돌봄을 약자를 향한 강자의 태도로, 힘없는 이를 향한 힘있는 이의 태도로, 못 가진 자를 향한 가진 자의 태도로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기 전에 그 아픔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최고를 의미하는지 정직하게 자문해 볼 때,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들입니다. 곧 조언이나 해결책이나 치료를 베푸는 대신에, 오히려 상냥하고 다정다감한 손으로 우리의 아픔을 나누고 우리의 상처를 만져주는 일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절망과 혼돈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 조용히 있어 줄 수 있고, 슬픔과 사별의 시간에 우리와 함께 머물러 줄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것과 치료하지 못하는 것과 치유하지 못하는 것을 참아주면서 우리의 무력함의 현실을 우리와 함께 직면해 줄 수 있는 친구, 그가 바로 돌보는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아내나 남편, 아이나 부모를 잃은 친구와 함께 있어주도록 부름 받았던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말하고, 행하고, 제안할 수 있습니까? 그런 때마다 번번이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울지 마세요; 당신이 사랑했던 분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까요." "슬퍼하지 마세요. 아직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여 우리의 무력함을 정말로 경험하고서,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잖아요."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고통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라도 괜히 바쁜 척하지 않으며, 오히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죽음에 직면하여 기꺼이 서 있을 수 있습니까?

돌보는 친구는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서로에게 다가가 함께 있어 주는 일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고통이나, 질병이나, 아니 죽음보다도 더 중요한 게 그것입니다. 비록 삶의 문제에 어떤 대답도 주지 않지만, 아주 정직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삶의 상황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저자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지 주목해 볼 만합니다. 키엘케고르, 사르트르, 카뮈, 해머스쾰트, 머튼 등은 - 그들 중에 누구도 - 해결책을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들의 작품을 읽고 우리 자신의 탐구를 추구할 새 힘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고난에 아주 깊이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치유의 말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돌보는 것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에게 다가가 같이 있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경험으로부터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은, 여러분을 돕는 이들은 여러분에게 다가와 같이 있어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들을 때, 여러분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그들은 말할 때, 여러분에게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질문을 할 때, 아시겠지만, 그 질문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현존은 치유의 현존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여러분의 입장에서 수용해 주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대하고 여러분 자신의 소명을 신뢰하도록 격려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능한 한 빨리 그것들을 변화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봄이 없는 치료는 우리를 지배자나 통제자나 조작자로 만들어 버리고,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길을 막아 버립니다. 돌봄이 없는 치료는 우리를 재빠른 변화에 정신이 팔려, 참을성도 없고, 서로의 짐도 기꺼이 나누어지지 못하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치료는 종종 해방적이라기보다는 방어적인 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치료를 거부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개인에 따라 진정한 치료를 감지하지 못할 때 도움을 거부하기도 하고, 나아가서 억압받는 소수들은 후원조차 뿌리쳐 버리기도 합니다. 또 고통을 겪는 나라들은 심중에 진정 돌볼 뜻이 없는 손으로부터 선물을 받음으로써 자존심마저 상실하느니 차라리 의약품이나 음식물을 거절해 버리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공동체와 돌봄

이것은 우리에게 긴급한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돌봄 공동체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돌봄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덮으려거나 닳고닳은 말로 이리저리 둘러대면서 교묘히 빠져나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치유와 새 삶의 토대로서 나누려 애쓰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돌봄 속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을 수 없다는 것, 돌봄은 전문가에게 위임시킬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아무도 돌봄으로부터 핑게를 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우리 같은 사회에서, 우리는 전문가라면 사죽을 못쓰는 경향이 강하게 있습니다. 누군가가 안 좋아 보일 때, 우리는 재빨리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까운 데 의사가 어디 있을까?" 누군가가 혼돈스러워할 때, 우리는 그에게 상담가를 찾아가 보라고 쉽게 조언을 해줍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죽어갈 때, 우리는 재빨리 성직자를 부릅니다. 누군가가 기도를 원할 때마저도 우리는 주변에 교역자가 있는지 없는지 살피느라 부산을 떱니다.

그것도 2세기 전 1787년 미국 헌법에 대하여 심의를 하던 동안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토의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통 종잡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벤자민 프랭클린이 기도로 개회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전당대회 대표단이 그 제의를 거절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기도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목사를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S. E. Morrison, The Oxford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New York, 1965, pp. 307-308을 보라.)

보통 외부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매우 의미있을 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해 버리는 우리 모습이 때때로 돌봄의 표징이라기보다는 고통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표징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우리는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은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또다시 놓쳐 버리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위대한, 하지만 종종 알려지지 않은, 은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돌볼 수 있고, 자비를 베풀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 있어 줄 수 있고, 경청해 줄 수 있고, 들어 줄 수 있고, 받아줄 수 있는 은사입니다. 그러한 은사를 자유자재로 선용할 수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빵을 받아들고 감사해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들은 그것을 현금으로 바꾸지 않고도 많은 이를 먹일 수 있습니다. 뭔 말을 해야 할 지는 모르나 자신들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서, 자신들의 동료와 침묵을 지키며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이들은, 죽어가는 마음에 새 생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손을 맞잡고,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한숨 섞인 번민을 토해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무력하게 만드는 울타리들을 헤치고 나아가 새로운 친교, 곧 깨어진 이들의 친교가 탄생되었음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그 위대한 돌봄의 은사를 그렇게 깊숙히 감추고만 사는 걸까요? 어찌하여 우리는 구걸하는 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동전만 땡그랑 던져주고 마는 걸까요? 어찌하여 우리는 식당에서 외롭게 홀로 앉아 먹고 있는 이와 합석하지 못한 채 잘 아는 사람이 없나 주변만 살피는 걸까요? 어찌하여 우리는 단지 잘 지냈냐고 말하거나, 단지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거나 전화기를 붙드는 것을 좀처럼 하지 못하는 걸까요? 미소 한 번 짓기가 왜 그리 힘들고, 위로의 말 한 마디 던지기가 왜 그리 어려운 걸까요? 선생님에게 감사를, 학생에게 칭찬을, 요리하고 청소하고 정원을 돌보는 뭇 남성들과 여성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가 왜 그리도 어려운 걸까요? 우린은 왜 더 중요한 무언가를 하러 가거나 더 중요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늘 서로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는 걸까요?

아마도 단지 우리 스스로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져 버리고 상호간의 취약성 속으로 함께 들어오지 않는 것일 겁니다. 아마도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신의 견해나 생각이나 확신으로 가득 차 있기에, 우리에게는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고 그 또는 그녀에게 배울 수 있도록 비워 둘만한 공간이 전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선에 대하여 물어보려고 선 스승을 찾아온 대학 교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인이라는 선 스승이 그에게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는 자기 방문객의 찻잔을 가득 채우더니, 멈추지 않고 연거푸 계속 따르기만 했습니다. 교수는 잔이 넘쳐흐르는 걸 바라보다가, 급기야는 참을 수가 없었던지 소리를 냅다 질었습니다: "아, 차가 넘치고 있잖아요! 더 이상 따르시면 안 됩니다!" 난인이 말했습니다: "이 찻잔처럼, 당신도 당신 자신의 견해와 사색으로 꽉 차 있군요. 당신이 먼저 당신의 찻잔을 비우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선을 가르칠 수 있겠소?"

돌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잔을 비우고, 다른 이가 우리에게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와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많은 장벽들을 집어 치우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담대히 돌볼 때, 그 때 우리는 인간적인 것은 아무 것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온갖 증오와 사랑, 잔인과 자비, 두려움과 기쁨을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담대히 돌볼 때,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다른 이들이 살인을 저지를 때 우리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이들이 고문을 할 때, 우리도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생명을 바칠 때, 우리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살인을 하는 병사, 못살게 구는 위정자, 삶이 끝없는 것마냥 놀아대는 젊은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놀이를 멈춰버린 노인과 같이 있을 수 있음을 경험합니다.

우리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힘있는 이가 아니라 힘없는 이를 위하여, 다름이 아니라 같음을 위하여, 고통의 제거보다는 나눔을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돌보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께서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을 때, 그분은 그것들을 군중들에게 되돌려 주셨고, 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했습니다. 선물은 받는 것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음식은 굶주린 이들과 형제애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치유는 자비로부터, 치료는 돌봄으로부터 초래되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울부짖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내 것 내 것 하며 움켜쥐지 않고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정신이 팔리긴 하나 아파하는 이들의 그 처절한 필요를 공감할 수 없는 한, 우리의 도움은 우리 마음과 두 손 사이 그 어딘가에서 왔다리 갔다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돌볼 수 있는 마음속으로 내려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독 안에서, 우리 마음은 그 많은 보호 장치들을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고, 인간적인 것은 그 어느 것도 그것에 낯설지 않을 만큼 폭넓고 심도 깊게 자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와 실패 때문만이 아니라 동료 인간들의 고통 때문에도, 상하고 부서지고 통회하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수고의 울타리 저 너머에 이르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공포로 가득 찬 소심함 속에서, 우리 자신들이 먹을 음식이 충분히 쟁여 있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우리는 미소를 지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오천 명이 넘는 이들을 먹이고도 여전히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나 남아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고독으로부터 생겨난 우리의 돌봄은 완전한 기쁨의 날이 곧 임박할 것이라는 우리의 신실한 기대의 한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