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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혜 수필집 제1권 <내가 졸고 있을 때>를 화장실에서 읽다.
어느날 생활계획표를 분단위로 쪼개가며 작성해서 제대로 한번 살아보겠다고 대단한 결심을 한적이 있었다. 물론 하루도 못갔지만 ^^ 그 계획표 속에서 가장 아깝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화장실 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책을 한 권 둔다고 계획을 세웠었는데, 다른 계획은 다 실행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화장실에 책을 한권 두는 일은 잘 지켜지고 있다.
기일혜님은 나와 같은 '장성'이 고향이고 그의 글 가운데 장성과 내가 어렸을때 뛰어 놀았던 황룡강변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남의 얘기 같지 않은 것이다.
기일혜님의 글은 참 따뜻하다.  일상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군더더기나 혹 글을 쓰는 사람들이 쉽게 글에 화장을 하는데 그런 글화장기 없이 맨 얼굴 같은 그런글이다.
다음호 들꽃편지에 실으려고 한 편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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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만원 들인 전도

현희 엄마. 그녀는 내가 15~6년 전 사당동 조그만 한옥에서 살때 앞집에서 사글세를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지대가 낮아서 겨울에도 연탄아궁이에 물이 고여서 현희네는 석유난로를 방에다 들여놓고 밥도 하고 국도 끓였다.
가난하나 고결한 품성이 있는 그녀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놀고 있는 남편이 뭘 좀 시작해 보겠다고 하니 어디서 돈을 좀 빌렸으면 한다고. 하도 간곡히 부탁하기에 인천에 사는 친구를 통해서 150만원을 4부로 빌려다 주었다.
그뒤 이자를 한번 가져오더니 감감소식이었다. 내가 대신해서 이자를 보내면서 몇 달을 기다렸으나 가끔 골목에서 마주치는 그녀의 얼굴은 심각했으며 나를 피하는듯 했다.
그때 돈 이자 6만원을 대납하기엔 내 형편이 너무 힘이 들어서 하루는 현희 엄마를 불렀다. 남편의 사업은 잘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 돈 한 달 만에 날려버렸다고 했다. 내가 할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자니,
"그래서 어떻게든 그 돈을 갚아보려고, 어떻게든 욱이 엄마가 얻어준 그 둔을 갚으려고... 내 눈 한쪽이라도 팔아서 갚아볼려고 병원에 가서 알아보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앞에는 눈알이 빠진 현희 엄마의 끔찍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눈알은 바로 내가 뺀것이었다. 안돼!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 돈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사람 목숨 하나 살려야지... 무슨 말인들 못할까.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순간적으로 이런 얘기를 만들어서 들려 주었다.
"잘사는 내 언니가 있는데 현희 엄마 얘길 했더니, 그럼 원금, 그 동안 이자 합쳐서 넉넉하게 2백만원 보내 줄테니 걱정말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앞으로는 그 돈 절대 갚지도 말래요. 처녀 때 내가 고생하면서 친정 돌봤다고. 그러니 현희 엄마, 나보다 더 잘 살아도 갚지 말아요. 아니지, 현희 엄마는 오늘 그 빚 갚았어요. 몇배로 갚았어요. 현희 엄마가 한쪽 눈을 팔아서라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그 마음은 어디 2백만원만 되겠어요. 그 마음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숭고한 것이지요."
"세상에 욱이 엄마같은 사람이 어디있어요?"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어요. 내게 고마워 마세요. 이런 얘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살아계신 에수님이 하신 것이니 고마워하려면 예수님께 하세요. 그분께 고마워하는 건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가서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해서 또 현희 엄마 같은 사람에게 나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거예요."
그러자 그녀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욱이 엄마가 지금까지 내게 잘해 줬지요.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먹을 것도 많이 주었지요. 그렇게 잘해주셔도 난 오산까지 다니면서 무당을 섬겼다니까요."
"그 정도 잘해가지곤 현희 엄마의 마음을 잡을 순 없었나보죠."
"그러나 오늘 나는 욱이 엄마를 다시 보았어요. 꼭 욱이 엄마의 목숨 얼마를 덜어내서 날 주는 것 같아요. 내가 욱이 엄마라고 해도 그렇게는 못해요. 앞으로 잘 살면 그 돈 갚으라고 하지요. 욱이 엄마는 사람도 아니어요. 그런 욱이 엄마의 부탁을- 목숨을 잘라주면서 하는 부탁을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나를 살려주셨는데... 다음 주 부터 교회 나갈게요. 나가서 욱이 엄마 위해 기도 할게요."
그렇게 해서 그녀를 자유롭게 살려 보내놓고, 이제는 내가 죽을 차례였다. 나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녀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 큰 짐을 떠맡았지만 생각할수록 그 돈 갚을 일이 두려워서 몇 달을 두고 울면서 지냈다. 언니에게 이런 얘길 다 할 수도 없고... 그때부터 잔기침을 하면서 결핵 초기 증상이 서서히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몇 달을 두고 눈물 속에서 보내던 어느날 나는 울다가 울다가 비몽사몽간에  전화 다이얼을 장항 언니에게로 돌리고는 통곡을 했다. 그때의 내 고통을 따뜻이 이해해줄 사람은 언니밖에 없었다. 내 통곡소리를 들은 언니는 그 다음날로 즉시 2박만 원을 보냈다. 절대로 다시 갚지 말라고 하시면서.
현희 엄마는 지금 구역장님이시고, 둘째따님은 전도사님인데 전도사님한테 시집을 갔고, 큰따님은 남서울교회에서 교사를 하다가 장로님 댁으로 시집을 잘 갔고, 셋째 따님도 예수 믿고, 남편과 아들은 새벽기도까지 다니면서 뜨거웠으나 지금은 좀 미지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미지근함마저도 더 큰 믿음으로 나갈 밑거름으로 나는알고 있다.
현희 엄마는 지금 광명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사는데 올 여름초, 몇 년 만에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그 동안 결핵늑막염을 앓았으나 많이 회복 되었고, 척추뼈가 약해서 가끔 쑤신단다. 의사 선생님은 뼈를 너무 써버려서 도저히 고칠 가망이 없다고.
그 몸을 가지고 봉제공장에 다니시면서 서서 하는 일만 하신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벌어서 나 먹으라고 비싼 '스쿠알렌'을 한 상자 사오셨다. 난 그것을 눈물겨워서 못 먹고 나보다 더 약하신 어느 집사님께 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