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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5: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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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명 목사 |
참고 : | 수원 열린교회 http://cafe.daum.net/jesusinto/HfEY/33 |
<팔복강해 1>
서론 : 복이 있나니
새 해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가 너무 식상합니다.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인사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가 쓰는 복 받으라는 축원의 말은 대개 건강과 재물과 성공에 대한 축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축원의 말은 성경적인 말은 아닙니다. 성경이 복에 대해서 말씀할 때에 그런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것들은 지극히 작은 분량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런 것들은 고작 1~2% 정도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사를 할 때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라고 축원하는 것은 1~2% 정도의 농도 밖에 안 되는 음료수를 마시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1~2%의 농도라고 하면 그게 소금물이나 술, 그 어떤 음료라도 제 맛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 많이 받으세요..”고 하는 인사를 하지만 그것이 가슴에 그다지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돈이나 건강, 성공이라고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여기서 크다는 것은 질적이고 가치적인 의미에서 크고 높고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1~2% 농도의 음료를 마시며 사는 것과 같이 무미건조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맹물인생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맹물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진정으로 복된 인생이 됩니다. 주님을 만나는 정도에 따라서 그 인생의 농도가 짙어지고 질적으로도 고품질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농도 짙은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기에 새 해를 맞이하여 8복을 설교하고자 합니다.
제가 8복 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했습니다. 하지만 시점을 정하지 못해서 미루고 미루었는데, 한 선생님을 만나서 요즘 청소년들의 의식구조에 대해서 듣고 설교의 필요성을 절감을 해서 새 해부터 8복 설교를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이렇습니다. 학생들에게 “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3가지만 적어보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첫째도 돈이요 둘째도 돈이요 셋째도 돈이다 가 한 30% 정도 되고, 첫째는 돈이고, 둘째는 건강이고, 셋째는 내가 성공하는 것이다가 30% 정도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0% 정도는 가족애, 자아성취, 신앙 등등을 꼽더라는 것입니다. 즉 요즘 청소년들의 최고의 가치는 돈이더라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돈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돈입니까? 돈만 많으면 뭐든지 될 것 같습니까? 하여튼 제 설교를 듣다보면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보다 소중하고 유용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서론에서 저는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팔복을 설교하신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가지는 진리로서의 권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Ⅰ. 예수님께서 팔복을 설교하신 이유(의도 또는 목적)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셨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훑어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을 세밀히 살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의도, 목적에 대해서 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여러분들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도 여러분들을 살펴봅니다.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살펴보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형편과 그의 갈망을 살펴봅니다. 과연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부모님의 등살에 못 이겨서, 목사님이나 선생님이 나오라고 채근하니까 할 수 없이 나와 앉아 있는지 등을 살핍니다. 그래서 갈망하는 자에게는 그 갈망을 채워주고자 하고,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졸거나 딴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절망적인 탄식을 하며 부르짖습니다.
자, 여러분!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유, 의도, 목적이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주고자 하는데 그들은 땅의 것을 얻기를 바라며 주님을 따라다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분석을 해 보신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요6:26). 그러면서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따나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12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묻습니다요6:67). 그러자 그때 베드로가 이런 이쁜 대답을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말입니다(요6:68).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썩는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영생하는 양식,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표적을 행한 것은 그들의 그런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들의 인생 문제의 원인이 되는 죄 문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영생, 천국 등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면 그것이 전부인 양 그것만 추구하고 그것만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기 위해서 팔복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왜 교회를 나왔습니까? 여러분은 왜 설교를 듣고 왜 기도를 하고, 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까?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까? 지금보다 좀더 향상된 생활을 원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마땅히 갈 데가 없고, 오라는 데가 없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 오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사람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까? 종교는 하나 가지고 있는 게 좋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기독교가 그래도 다른 종교보다 나은 종교이기 때문입니까?
주님은 이런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찾는 사람 때문에 고민을 하십니다. 이들을 다 흩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어서 고민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을 통해 말씀을 전합니다. 주님이 진짜 여러분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것을 이번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왜 주님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진지하게 자신을 살피면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팔복 설교를 들으십시오. 주님이 정작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진짜 복 된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Ⅱ.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현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돈, 건강, 가족 등인데, 이런 것들을 다 합쳐도 복이라고 하는 것의 1~2% 정도 밖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을 논할 때에는 그런 것들을 아예 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복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은 너무 차이가 심하게 났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교회가 돈, 건강, 가족 등의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신령한 복에 대해서만 말을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그런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면(저는 매우 그런 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어렵다.”(요6:60)고 말한 것처럼 어렵게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것은 의미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믿고 따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반응은 나는 그런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어른들에게만 있는지 알았더니 아이들도 똑 같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에 겨울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몇몇 고등부 학생들에게 수련회를 가자고 해보니까 첫째, 학교에서 안 보내줄 것 같아서 못 간다. 둘째, 학원 등록해서 못 간다. 셋째, 관심 없다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이런 대답이 나온 것은 이들이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은 어렵고, 그다지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고, 그다지 관심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이유와 진정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면 귀를 닫거나, 듣고 나서 너무 어렵다, 내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등의 이유를 대면서 떠나갈 사람들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제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나도 가고 싶고, 믿고 싶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지만 상황이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항변에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 그게 너의 가치관이다. 네가 진정 가치 있게 여기고 있다면 너는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네가 나보다 그런 것들을, 내가 주는 것보다 세상이 주는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여튼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매여 있고, 떠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그 중요도는 1~2% 밖에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진정한 복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복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자를 연구해 보면 복이라는 말은 제사를 잘 지내서 하늘로부터 받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복에 대한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합니다. 주님 당시에도 복이라고 하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말은 외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번영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말을 사용하시면서 그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복이란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이 복을 수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복의 수여를 결정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역대상29:12에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복의 수여자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뜻에 의해 복을 수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고 당신의 주권으로 복을 수여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영속적인 지복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한마디로 완전한 복입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첫째는 내용과 질에 있어서 최상이라는 말이며, 둘째는 그 복을 향유하는 시간에 있어서도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복은 다윗이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한대로 완전한 복이요, 그 완전한 복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빨 빠진 그릇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그릇을 주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꿈처럼 달콤하게 누리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거품 같고, 이슬 같고, 바람 같고 허망한 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복,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복(벧전1:4),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누리는 자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고, 천 년 만 년을 찬양해도 그 찬양이 그치지 않을 그런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복을 추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셋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곧 천국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보면 주님은 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에 대해 말씀합니다(마5:3, 10). 천국은 지복의 시공간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복=천국이라는 말의 의미를 100%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은 받고 싶지만 천국은 그다지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천국에 대해 가르쳐 주고, 그 천국을 보여주고, 그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열고, 그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천국이란 주님이 긍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속적인 지복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말씀은 바로 그런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천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一聲(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마4:17). 그리고 그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주님 자신이 이 땅에 임하신 것을 천국이 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마4:17). 그리고 귀신을 내어 쫓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하는 것이라고 비난할 때에 예수님은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28).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오심으로 우리에게 임한 것이며, 그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시고, 그 예수님이 있는 곳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즉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그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천국이 임한 것이요, 그가 천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은 곧 예수님의 통치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속하고, 천국의 은총들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복이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게 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받는 구원과 영생과 천국이 복입니다. 왜 이것이 복중에서도 영속적인 지복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Ⅲ.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리로서의 권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를 보신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아서”(마5:1), “입을 열어 가르침”(마5:2)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末尾(말미)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7:21). 그렇다면 이런 말씀들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산에 올라가 앉아서”란 말씀을 살펴봅시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모세가 산에 올라갔던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세가 왜 산에 올라갔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갔고, 거기서 하늘에서 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모세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것은 말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모세와는 다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는 메신저요, 예수님은 앉아서(이것은 지극한 권위를 상징합니다. 법복을 입고 판사가 법정의 좌석에 앉을 때 피의자와 검사, 변호사, 참관석에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섭니다. 이것은 판사가 법의 권위, 국가의 권위, 신탁의 권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입니다.
자, 다음은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주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이 광경은 장엄한 광경입니다. 제자들은 멋도 모르고 산에 올라갔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저 은혜롭게 들었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입을 열어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가르쳐”라는 낱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기보다 가르치셨습니다. 선포와 가르침은 다릅니다. 선포는 일방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은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선포는 왕의 권위를 갖는 것이지만 가르침은 따뜻함과 자상함과 친절함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하늘의 권세와 위엄을 가지셨지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가르쳐 알게 하고, 믿고 따르도록 자상하고 친절하게 타이르고 설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의 자상함과 친절함과 사랑을 또한 깨닫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권위를 가지고 하신 말씀, 그러나 자상하고 친절하게 가르치시는 이 말씀을 믿고 따르는가 여부가 천국에 들어가게 하거나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주님이 여기서 하신 팔복의 말씀을 포함한 산상수훈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성도가 반드시 구비해야 할 자질과 자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8가지의 복은 8가지의 자질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복이요, 그 복의 실체는 천국이므로 이 8가지의 자질을 구비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팔복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온유가 없고 긍휼이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치 못하고, 화평을 구하지 않으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만 하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여덟 가지 자질을 구비함으로써 내 믿음이 온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말씀을 믿습니까? 네, 이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 천국 가는 믿음입니까? 개떡 같은 믿음으로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수능 점수가 턱없이 모자라도 모집인원이 미달이면 서울대 같은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점이 모자라면 절대 졸업은 못합니다. 믿음은 입학시험이 아니라 졸업시험입니다. 즉 믿는다는 고백과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과 인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입니다. 쭉정이 창고가 아니라 알곡 창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8복에 대한 설교,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질을 꼭 구비해야겠다는 결단으로 설교를 듣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천국을 꼭 확보하겠다는 각오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다음 주를 기대합시다. 할렐루야!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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