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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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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명 목사 |
참고 : | http://cafe.daum.net/jesusinto/HfEY/36 |
팔복강해 4>
온유한 자의 복
-마5:5-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의 복이며, 이는 매우 시사성이 있는 주제입니다. 바로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점령하고 정복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 주제 역시 세상의 가르침과는 상반된 가르침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 약삭빠른 자, 힘 있는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세상의 가르침이 잘 맞아 들어갑니다. 돈(자금력)이 있는 자가 부동산을 차지합니다. 떴다방 식의 약삭빠른 자들이 이 나라의 부동산을 다 사들입니다.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이 이 땅을 다 차지합니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은 있던 것도 다 빼앗기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이 진정한 소유자입니까? 그들이 진정한 지배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차지하는 것은 잠시 잠깐의 지배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언제나 결론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이 이 땅의 부동산 취득과 관련지어서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온유함이 부동산 잡기의 한 방법처럼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온유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땅을 정복하고 지배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 이는 영원한 소유와 실효적인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3년의 생애를 사시는 동안 아무 부동산이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에 남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돌아가신 후에도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셋방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온 땅의 주인이십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영원한 주인으로서 영원한 지배권을 행사하십니다. 이렇게 온유함으로 얻는 기업은 영원한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실효적인 지배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어떤 영향력과 영예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의 강포한 권력은 당대로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징기스칸의 제국도, 나폴레옹의 제국도, 일본 천황의 제국도 그랬고, 춘추전국시대의 영웅호걸들도, 요즘 역사드라마의 주인공들인 주몽이나 연개소문 등의 영웅들도 찰나의 빛을 뿌리고 사라지는 유성들과 같은 역사 속의 전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향력은 지금도 변함없이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아니 갈수록 주님의 영향력은 더욱 광범위하고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도 이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바울이나 어거스틴, 루터나 칼빈 등의 영적인 거성들은 영적 영향력을 지금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그 학문으로 아주 오래도록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탁월한 정신을 소유했던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그에게는 영원한 영예가 되고, 영원한 면류관이 됩니다. 이렇게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고, 영향력을 통해 영원한 영예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진정한 승리, 종말론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강포한 바로와 온유한 모세의 대결에서 결국 모세가 승리를 했습니다. 강포한 사울과 온유한 다윗의 대결에서 다윗이 결국 승리했고, 강포한 유대인들과 온유한 스데반의 대결에서 스데반이 결국 승리했습니다. 이런 승리는 진정한 승리이자 종말론적인 승리입니다. 즉 사람들이 승리를 인정하는 그런 승리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승리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승리,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로 인정해 주시는 종말론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한 자가 얻는 땅의 기업은 이렇게 땅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영향력으로 인한 실효적인 지배와 영예, 진정한 승리이자 종말론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라야 정말 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을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복을 얻기 위해 온유한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미 그런 복을 얻은 자는 그 복을 누리는 마음으로 온유함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온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낮아짐과 겸손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성경이 평하는 모세는 본래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보통 높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배운 애급의 문무(文武)는 아주 권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얻게 된 영적 권위는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낮아졌습니다. 그는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헛된 것은 버렸고, 신령하고 탁월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기에 스스로 높이거나 자랑하거나 군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낮아졌고, 겸손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낮아짐과 겸손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한결같았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고, 그리하여 그는 바로를 이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력하게 이끌었습니다. 낮아짐이 그를 진정으로 높은 자가 되게 했고, 겸손으로 강포를 꺾었습니다. 그의 낮아짐과 겸손은 모든 반대자들을 감화시켰고, 굴복시켰습니다. 여기서 감화와 굴복이 함께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감화 없는 굴복은 다시 고개를 들고 대적하지만 감화된 굴복은 영원히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볼 때 낮아짐이나 겸손은 약한 자의 비굴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강하고, 모든 것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이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인정할 때 낮아짐과 겸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내가 자랑하거나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스스로를 높이고 자랑하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면 하나님은 그 주셨던 것들을 모두 회수하십니다. 그러면 그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고 인정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오직 주님의 이름과 그 나라를 위해서 그것을 아름답게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 주신 것을 영원히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원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인정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 주신 것을 낮아지고 겸손한 모습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깁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가졌다가 일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고, 유성처럼 반짝 스치고 지나가는 인생이 아니라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그런 영예를 가지고 사는 자가 됩시다.
Ⅱ.자신에게는 엄격하나 타인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것을 온유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늘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시비를 거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율법의 전문가로 자처하고, 자기들보다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우월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선생 노릇을 하고, 그들이 인기 있는 선생으로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나타나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니까 그들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하여튼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경건과 가르침을 모든 이들이 따를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엄격한 율법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무시하고 비판하고 적대시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관용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극히 거룩하고 존귀하였으나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비록 자신에 비해 거룩하지 못하고, 죄와 허물이 많으며, 지극히 천박스럽고 불경스럽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들에 대해서 관용하였습니다. 정죄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책망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차근차근 가르치셨습니다. 꾸짖지 아니하시고 교훈하셨으며, 때리지 아니하고 싸매셨으며, 아프게 하지 않고 위로하셨습니다. 들춰내지 아니하고 덮어주고, 심판하지 아니하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비열한 죄인일지라도 끝까지 사랑하고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을 대신하여 당신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으로 사시면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자신에게는 비록 엄격할지라도 다른 이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 관용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냉대할만한 사람이지만 따뜻하게 대하고, 비난할만한 사람이지만 감싸주고, 때릴만한 사람이지만 덮어주고,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고쳐내고, 살려내고 회복시키고 온전케 만들어주는 것이 온유입니다. 이렇게 온유의 목적은 사람을 건지고 살리고 고치고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이를 위해 사는 자가 사람도 얻고 하나님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땅과 영예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고치고 회복시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온유하심이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임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주님이 그렇게 온유함을 본받아 사는 자가 복이 있고, 그가 땅을 차지할 것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온유합시다. 그리하여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회복시켜 주는 자가 됩시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가질 수 있는 영향력임을 알고 이 영향력을 확대해 감으로 이 땅을 차지합시다.
Ⅲ.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악과 대항하되 선으로 이기려는 것이 온유입니다.
세상은 선과 악의 대결이 늘 있습니다(물론 악과 악의 대결도 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이런 대결은 있었고, 예수님 이후에도 이런 대결은 역시 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 대결구도 속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하신 예수님은 그 대결의 방법이 달랐습니다. 주님은 비록 악과 대결을 하셨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늘 선하셨다는 것입니다. 악이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식이 아니라 비록 악과 대결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은 언제나 선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원칙이었고, 주님은 한번도 그 원칙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모든 이들, 세상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기 원하는 모든 이들, 세상 속에서 멸망당하는 이들을 살리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이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처럼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바로 온유한 것입니다. 악인에게까지 선을 베푸는 것, 원수에게까지 선을 베푸는 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이런 온유를 요구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온유를 실천하려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데,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성취해야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악을 선으로 이기면서, 악인을 감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할 이유는 그렇게 할 때 악인들이 감화를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님을 못 박는 자들을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이 배신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은 배신자로 하여금 돌아올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선으로 악을 이길 이유와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이기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한 번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작은 손해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 번 그렇게 해야 한다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손해가 커지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정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가 없으면 몇 번 이기다가 쓰러집니다. 그 에너지가 없으면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에 감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받는 루트를 알고 끊임없이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나를 선대하셨습니다. 내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선을 베푸셨습니다. 내 죄 값을 내게서 받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아들이 대납토록 했습니다. 이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악한 자를 선대할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의 손을 들어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주 예수께서 선으로 악을 이기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예수님의 승리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사도와 제자들이 악인들의 핍박 속에 피 흘리며 죽어갈 때 악인들은 승리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계시록 성경을 보십시오.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목 베임을 당한 이들이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계7:14).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또 그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천 년 동안 왕 노릇합니다(계20:4).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지극히 명예롭고 권세 있는 모습입니다. 누가 그렇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다윗은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악한 사울의 핍박에 악으로 대항하지 아니하고 선으로 대항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축복하셔서 사울에게서 나라를 빼앗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다윗은 이 경험을 가지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내가 선으로 악을 이기고자 하면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욕이 변하여 영화가 되게 하십니다. 이를 확신하십시오. 주님이 힘 주셔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이 말씀은 우리들이 잠깐 머물러 섰다가 내놓아야 하는 몇 평의 땅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땅을 차지하고, 영원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영원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와 영원한 승리, 종말론적인 승리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화와 면류관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하다는 것은 낮아짐과 겸손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는 것이며, 자신에게는 엄격하나 타인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것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유한 자로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은 그렇게 살므로서 영혼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자를 그 악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상과 면류관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아 주님의 온유하심과 같이 온유하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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