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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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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명 목사 |
참고 : | http://cafe.daum.net/jesusinto/HfEY/37 |
<팔복강해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5:6-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 복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을 것입니다. 복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찾아오는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때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추구할 때 찾아오는 결과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의를 추구하며 살 때 배부를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라는 열매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복이라고 하는 결과보다는 그 복을 가져올 삶, 우리들이 추구하여할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봅시다.
오늘 설교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Ⅰ.“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을 말씀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의’는 세상 사람들이 말씀하는 소위 도덕적인 의는 아닙니다. 착하게 사느냐의 문제, 어떤 법이나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거나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의(국가를 위해 싸우거나 노동자들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을 세상은 의사 또는 열사 등으로 부릅니다), 정치적 억압과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싸우는 식의 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 못지않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구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을 때에, 세상의 불의와 싸울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꼭 선봉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장서서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의로운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어떤 자인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또는 더 깊은 관계에 대한 갈망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의롭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의롭고 존귀한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인간은 그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고 사랑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시험과 유혹으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반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버렸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적의(敵意)를 품고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진노(震怒)하십니다. 사람은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은 복 대신 저주와 심판과 사망과 형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에덴동산 어딘가에 숨어버린 아담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죄인들을 찾아오십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늘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셨습니다. 싫어해도 보내고, 핍박해도 보내고, 죽여도 보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십니다. 전도자들을 보내시고,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십니다. 선교사들을 세계에 보내십니다.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저 북극과 남극에도 보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학교로, 직장으로, 거리로, 집집으로 보내십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내미시는 사랑의 손길이요 구원의 손길입니다.
이 주님의 손길은 수없이 외면을 당했습니다. 주님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손을 뿌리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손을 잘라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얼마나 외면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매주 또는 매일 주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러나 거의 매번 거절을 당합니다. 제가 목청을 높여 설교하는 시간은 주님의 가슴이 되어 여러분을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손을 잡고 사망에서 빠져나옵니다. 불신앙과 불의한 삶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졸고 듣지 아니하며 귀를 막고 거절을 합니다. 안타까워서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몸부림을 치지만 그런 저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을 부인하며 원망하고 있을 때에
나에게 오셔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셨네.
거절할 수 없어, 외면할 수 없어 주님의 그 손을 잡았었네.
주님의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갈망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구하기 위해 애통하며 회개하고, 자복하고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배부를 것입니다. 즉 칭의의 은총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오사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 주님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내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져주신 주님을 내 영혼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 주님의 흘리신 보혈로 나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기를 구하며 회개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입혀주시는 의로 옷 입고, 주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배부르고 모든 갈증을 해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성화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과 칭의를 받은 자는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비록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 죄의 습성이 남아 있고, 죄의 오염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 사도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으나 마치 큰 벽처럼 막아서는 장애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20, 21)고 고백합니다. 그 죄는 인격을 오염시켜 버렸고, 오염된 인격은 선을 행하기보다 죄를 행하는 일에 더 익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하면 이 죄로 오염된 인격, 자아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를 꺾어 놓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또 실패합니다. 바울은 결국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정말 뼈저리게 경험을 하였고, 그 경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정말 저는 주님 뜻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죄는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울었습니다. 흰 머리카락을 염색하면 잠시 까만 머리로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흰 머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또 회개를 해도 다시 또 죄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주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내가 이렇게 밖에는 주님을 섬길 수 없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비열한 죄인이란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런 죄인이 변화를 받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울고 또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정말 저는 곤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죄로 철저히 오염된 사람이었습니다. 칼빈 선생이 말한 대로 나는 전적으로 부패했고,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아니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내 힘과 방법으로는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비열한 죄인,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 주님께 매달려서 살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 매달려 살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고 섬기고자 힘쓸 때에 주님은 저를 변화시켜 주셨고, 주님을 조금씩 닮아가게 하셨습니다. 나는 힘이 없지만 주님의 능력이 나를 붙드시고, 나는 나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지만 주님의 성령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시고, 나는 나를 새롭게 할 힘이 없지만 주님의 성령이 말씀으로 나를 감화하고 감동하여 주님의 생각과 뜻에 젖어들게 하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고, 이전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렇게 새로운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큰 복입니다. 내게는 주님의 은혜로 거룩함을 덧입은 것이 복이고, 성결함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이 복이고, 주님을 조금이나마 닮게 된 것이 복이고, 주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된 것이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입니다(행26:29). 저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이 자신이 죄로 오염된 인격을 가진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으로 인해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신을 직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씻김 받기를 구하고,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새로워지기를 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매달려 살므로 주님의 은혜를 입어 주님을 닮는 것을 갈망하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갈망이 너무 커서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거룩함을 입기를 힘쓰고, 부르짖고 몸부림치는 기도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복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셋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를 갈망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찌 죄와의 싸움뿐이겠습니까? 죄와의 싸움만 하고 산다면 이것은 반쪽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랬습니다. 개인적인 영적 삶으로는 죄와 싸우면서, 공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살펴보십시오.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모든 뛰어난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그 나라 그 의를 구하기 위해서 배고프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나라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품고 계신 뜻,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알고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서 갖고 계신 뜻, 꿈, 비전,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우리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착한 행실을 갖는 것과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가는 것은 이 두 가지를 통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을 갖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주님은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전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그 일꾼이 되어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진정 복 있는 자입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날에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닫혀져 있습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전하려고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할 선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 거룩하게 사는 것과 세상을 향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선이 그들의 시선을 끕니다. 그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입니다. 그들의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이 우리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 자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주는 기적의 떡을 먹고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다 줘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에 목마른 사람, 이 일을 더 잘하고 더 많이 하기를 열망하는 삶,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세계는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화 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를 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Ⅱ.“주리고 목마른”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의 의미를 저는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절실한 궁핍의식(need)입니다. 절실하다는 것은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실한 것이 아닙니다. 성화되어도 되고 성화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위해 일을 하게 되면 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간절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성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 절실한 궁핍의식입니다.
이런 궁핍의식이 심해지면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구원 받기 이전 구원에 대한 갈망으로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라 고행을 하고 또 하면서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어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상고하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에서 복음의 빛을 보고 구원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터와 같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이 구원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갈등과 방황이 없이 구원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갈등과 방황은 큰 축복입니다.
바울은 성화의 갈망이 깊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내재하는 죄의 세력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그 갈망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구하였고, 결국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갈6:14).
성화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아파하고 우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재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통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네, 바로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 때문에,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복음을 들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증상이 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고통이 있습니까? 성화되지 못한 자신의 약함 때문에 아파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고통을 감수합니까? 그런 것이 없다면 기도하십시오. 그 갈망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둘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일시적인, 감정적인 궁핍의식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의지적인 궁핍의식입니다. 시42:1에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슴의 갈급함은 물을 찾기 위해 온 들과 산을 헤매는 그런 갈급합니다. 몇 걸음 찾아다니다가 포기하는 그런 갈급함이 아니라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최후에 쓰러져 죽어가면서까지 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그런 갈급함입니다. 이런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고, 반드시 성화를 이루어가며, 반드시 주님의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쓰임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섬기면서 일시적으로는 은혜를 받지만 그 은혜를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일시적으로 성화를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이내 포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일시적 열심히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으려다가 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다가 마는 사람입니다. 복을 잡았다가 놓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속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고 권면합니다. 저도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 시작한 것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또 일어서도, 또 도전하고, 또 몸부림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진정 복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마5:6). 정말 할 말이 많은 그런 주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친히 여러분에게 설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구원받지 못한 자는 구원을 갈망하십시오. 반드시 주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화를 갈망하십시오. 성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자는 신령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자 하는 갈망 속에서 헌신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사 위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 당신을 주님과 주의 형제들과 모든 이들이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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