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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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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명 목사 |
참고 : | http://cafe.daum.net/jesusinto/HfEY/39 |
<팔복강해 7>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5:8-
오늘의 본문을 저는 지난주에 아주 여러 번 암송을 했습니다. 묵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많은 축복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 축복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할 때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8복의 말씀 중에서 오늘은 여섯 번째인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의혹이 풀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을 사람도 없고, 변화되지 못할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까지 해결이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이 청결할 때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청결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면서 설교를 경청하다가 하나님을 보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설교는 첫째,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마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둘째는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그 마음을 어떻게 청결히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Ⅰ.‘마음’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자주 충돌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는 행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늘 마음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중심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주님이 정말 관심 있게 보는 것은 속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나 어떤 교리에 대해서 지적으로 알고 동의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적으로 이해를 하고 동의를 한다고 해도 마음속의 감동이나 신뢰, 변화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마음을 중요시 여기고 강조할까요?
마음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해부학적으로 연구하거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할 때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믿는 것도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어려운 것 아닙니까? 마음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기 때문에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대해서 알고자 하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인간의 마음은 인간됨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음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식물은 말 할 것도 없고 짐승에게도 마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애완견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는 줄 압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애완견을 사람처럼 생각을 해서 호적에 올리고 싶고, 보험도 들어주고 싶고, 죽으면 장례식도 치러주고, 무덤이나 납골당에 모시고, 기일이 되면 추모예배도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애완견 애호가는 입사면접을 보면서 가족 사항을 묻는데 엄마 아빠와 나, 동생, 그리고 강아지 이렇게 다섯 식구라고 했고, 그것 때문에 떨어졌답니다. 그래서 불합격 취소 소송을 하려고 한답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가는 사람들은 사실 잘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송을 거는데 지지서명을 하거나 변호를 하거나 불합격이 부당하니 합격시키라고 판결하는 판사까지 이런 사람들은 다 묶어놓고 돌봐줘야 합니다(돌봐준다는 것은 정신과적인 치료를 해줘야 한다는 식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를 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둔 곳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곳이 마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좋아지는 것은 마음이 회복되는 것이고,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마음이 성숙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상태는 마음의 상태와 동일한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변함없이 해도 마음이 변해 있으면 그것은 외식이고 형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눈여겨보시는 것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중심입니다. 사람은 몸이 있고 그 안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성경은 인격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또 성경은 마음을 인격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영혼과 동일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영혼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마음은 보통 지정의로 말합니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합하여 인격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 마음이란 인간 존재의 특성과 중심, 인격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어떤 부분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말, 표정이나 행동 등은 다 마음이라고 하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마음을 속인 말이나 행동, 표정 등을 우리는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분별해 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확하게 분별해 내십니다. 주님은 마음속을 감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행위보다는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은 모든 문제의 진원지(震源地)입니다.
마15:19에서 주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말씀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차별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문제는 환경에서 찾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그 사람이 어떤 환경 속에 있었는가를 따집니다. 아이가 못된 짓을 하면 이 아이가 자란 환경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던가요? 어느 정도는 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주님이 진단하신 것처럼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마음이 모든 문제의 진원지(震源地)가 되는 것입니까? 렘17: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한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부패 타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패와 타락은 에덴의 아담이 범죄 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출생할 때에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1차적인 원인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2차적인 원인이 환경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는 부분적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개선, 마음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청결한 마음은 개선이 된 상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Ⅱ.‘청결한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청결한 마음은 어떤 마음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저는 성경이 이에 대해 두세 가지 정도를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첫째, 단(單) 마음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단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의 가닥이 한 마음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뿐이었습니다.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들어와 유혹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자기를 높이고 주장하는 마음,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 온갖 욕망과 사욕이 들어와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한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돈에 대한 것, 세상의 욕망에 대한 것 등등을 생각하느라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저는 가끔씩 기도하는 중에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마음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 이런 마음의 상태가 청결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늘 하나님을 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서 아버지로, 왕으로, 주인으로 자리 잡고 계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우리의 중심 속에 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복되게 하신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마음을 갖도록 하십시오. 나눠지고 찢어지고 갈라지고 흩어진 마음을 하나님께 모아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집중력! 이것이 단 마음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 믿음이 있다는 것 등등 다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위선(僞善)이 없는 마음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타락한 마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위선입니다. 거짓된 것입니다. 감추고 속이고, 위장하고, 변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하고, 착하지 않으면서 착한 척 하고, 의롭지 않으면서 의로운 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위선이 의외로 우리에게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청결한 마음이란 진실한 마음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마음입니다. 솔직한 마음입니다. 담백한 마음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위장(僞裝)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애교스러운 위장도 있습니다. 예쁘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거나 날씬하게 보이려고 보정속옷을 입는다거나, 키가 커 보이려고 키 높이 구두를 신는다든지 하는 것은 애교스러운 위장입니다. 그러나 좀 민망한 위장도 있습니다. 성형을 한다든지, 사진을 찍되 조작에 가깝도록 과다하게 손질을 하는 것입니다. S대학교에서는 학생회장 선거를 하는데, 그런 사진으로 전단을 만들어서 뿌린 후보는 다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고 싶은데 사람들이 사진을 다 수정을 하고, 얼굴을 뜯어고치고 해서 본바탕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본바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죄가 있으면 있는 대로, 믿음이 없으면 없는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시고, 그런 부족한 모습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덮어주고 가려주고, 고쳐주고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도 진실한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람을 신뢰합니다. 자꾸 속이고, 잘 보이려고 위장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잘 보이려고 꾸미고 덧붙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자신의 진심은 말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사람들이 정말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모습으로 나아가 은혜를 구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정화(淨化)된 마음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부패된 마음입니다. 더러운 마음입니다. 악하고 거짓됩니다. 욕망으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물이 흐리면 깊은 물 속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기를 바라십니다. 정화된 상태가 가난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화되는 과정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죄와 더러움과 악함을 애통하며 쏟아낼 때 우리의 마음은 정화가 되어집니다. 가난한 마음은 자신의 더러움을 보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더러움을 토해내는 것이 애통함입니다. 이 애통함은 자신이 정화되고자 하는 갈망,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더 깊고 진정한 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반드시 성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화되고 정화된 마음에 하나님이 자신을 비취시므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물결이 흔들리고 혼탁할 때에는 속도 들여다 볼 수 없고, 그 물은 주변의 경치를 담아서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정화되고, 흔들림이 멈춰지면 속도 들여다보이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가 물에 비취어서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음의 정화는 애통할 때에 오지만 애통함만으로는 정화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애통에서 더 나아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혈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정함을 씻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를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의지하여 더욱 우리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채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씻어내는 것만으로는 정화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안에 오셔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닮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은 우리에게 정화를 가져옵니다. 성령의 충만은 정화를 더욱 심화시켜 가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으십시오.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정화시켜 나가시고, 정화된 마음을 유지시켜 가실 수 있도록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청결한 마음이란 나눠지고 분열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된 마음입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위장되고 감춰지고 변장된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죄와 더러움을 발견해내어 보혈의 피로 씻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의 마음으로 입혀진 정화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을 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Ⅲ. 하나님을 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싶었습니다. 전에 온유의 복을 설교할 때에는 땅을 차지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린 후에 온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로 했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를 강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여튼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금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이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본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으로 오셨을 때에는 볼 수 있었지만 승천 이후 우리는 그 주님마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나의 구주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인식의 방법이 청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여튼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믿음이 막연하고 희미한 사람은 그 인식의 정도가 막연하고 희미한 것입니다. 믿음이 깊고 확신에 이른 사람들은 그 인식이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인식(認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식이란 [사물을 깨달아 아는 일] 또는 [사물의 의의를 바르게 이해하고 판별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즉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알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느끼고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식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그분의 존재를 느끼고, 그분이 내 삶 속에, 지금 내가 있는 장소에, 내 마음 속과 내 곁에 와 계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내 안에, 내 삶 속에, 내가 살고 있는 공간 속에 임하여 계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늘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느끼고, 그 임재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인식의 깊이와 질이 더 커지고 높아집니다.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째,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의 부모님이 계신다는 것이 위안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분들의 실제적은 도움과 간섭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오셔서 함께 하시고(내주), 내 삶을 간섭하고 다스리십니다(동행). 이런 내주와 동행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내 삶 속에 깊숙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삶에 은혜와 복과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있는 사람들의 믿음은 더 큰 확신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막 자랑합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벧전1:8절에 보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이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만지고 들음으로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보지 않고 믿고 말 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은 주님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눈으로 본 사람보다도 더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으로 주님을 본 사람들보다 보지 않고 주님을 믿었으나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12제자처럼 주님을 직접 보고 만난 제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12제자 못지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네 그것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음이 불결하면서 주님의 손과 발을 만지는 사람보다 더 주님을 잘 알게 되고 깊이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보고 안 보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것이 복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청결을 사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셋째,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육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고, 육성을 듣는 것도 지극히 부분적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영으로 인식하는 것도 제아무리 깊은 임재를 경험하고 은혜와 능력을 많이 경험할지라도 지극히 부분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육신을 갖고 주님을 보는 것이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보는 것”(고전13:9)이며,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13:12).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나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온전히 알리라”고 합니다(고전13:12).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인식하고 살아계신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서 주님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고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치 못한 자는 주님을 인식치도 못하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도 없고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며 주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고 온전히 아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집중되고, 진실하고, 정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영으로 인식하고, 그 주님을 경험하며 살다가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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