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판매가 : 16,000원14,400원 (10.0%, 1,600↓)
별책부록 스터디 교재특별선물 김남준 목사 강연 MP3 CD당신도 예배를 견디고 있습니까?이제, 습관적 예배의 껍질을 깨고 감격의 예배로 나아오십시오.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예배자들을 위한 하나님을 만나는 벅찬 감격이 있는 참된 예배 회복 처방전예배의 감격은 거룩한 삶을 위한 샘물입니다.하나님을 만나려는 마음의 갈망, 선명한 진리의 외침, 충만한 성령의 은혜,이 세 가지를 통해 예배자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거기에 구원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으며,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습니다.당신의 예배, 그 만남이 있습 …[더보기▶]




1.예배, 신앙의 중심부

신앙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교회의 예배상황은 영적인 수준과 신앙생활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따라서 한 개인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는 그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공적인 예배의 중요성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공적인 예배에 함께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4-25)


3.유행처럼 번지는 태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예배가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고 선교도 없습니다.


4.하나님 부인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마치 행동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은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경배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5.하나님 모독

성도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해야 할 의무는 교회에 대한 것도 아니고 목회자를 향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목회자에게 인간적으로 죄송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안중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6.은혜받는 날

우리는 육신의 사소한 일들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행해야 할 예배 참석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쓰고 애쓸지라도 영혼은 핍절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너희가 많이 부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배에 참석해야 할 시간에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는 여러분이 있지 않아도 될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지정된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아니하면 여러분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비어있습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에 누룩처럼 번져 가는 예배에 대한 경박하고 의무감 없는 배교에 가까운 태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도대체 예배드려야 할 그 시간에 자신의 예배 의무를 버리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예배시간을 아끼고 바치면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일까요? 


8.하나님을 버림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행동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 마음을 감동시키면 그대 기도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연민의 정이 솟아나면 그때 전도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예배하라.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전도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것은 의무라는 것입니다. 


9.회복된 예배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할수록 여러분은 심각한 영적 손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릴 것이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이 무엇인지도 잊게 될 것입니다.
박약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의 삶을 마귀의 지배아래 갖다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령한 은혜의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10.마음을 다하는 예배인가?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차가운 예배의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만이며 신성모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 아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2-13)


11.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사건이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식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뵈옵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칩니다. 예배 속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진리를 붙들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거룩한 은혜를 받습니다.


12.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삽니다.

일주일을 살기 위하여 하루를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와 설교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고 거룩한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애타게 기도하십시오. 이러한 간구와 기도 없이 예배에 나와서 단지 은혜로운 설교를 듣기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13.예배, 하나님과의 만남

예배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문안인사도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함으로 그의 백성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도 확인 받게 됩니다.


14.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요4:24), 이 부분을 헬라어 성경은 ‘영과 진리 안에서’라고 읽습니다. 즉 예수님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15.성령 안에서 드려야 할 예배

정해진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나와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기대감은 무엇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에서 중심이 되어야 하는 사건은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입니다. 교훈과 감화와 교제는 그 결과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에 대하여 새로워진 헌신을 되찾는 것입니다.


16.죄에 대한 자각

무엇보다도 오늘날 예배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배를 통해 예배자들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배자들이 예배 가운데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도 하찮게 됩니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거기에는 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17.피 토하는 경고

왜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실제의 세상살이가 분리됨을 느낍니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이원론적인 삶에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의 단 일분이라도 그분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온 세상 단 한치의 땅이라도 그분의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 모든 어리석음은 모두 예배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친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의문(儀文)에 매여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18.하나님은 영이시라

하나님은 본질상 영(靈)이십니다. 예수님게서 새로운 예배방식에 대하여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시기 직전에 여인에게 상기시키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도 언제나 새롭게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요4:24)


19.침묵 이상의 예배

우리는 이미 참회 없이 드리는 예배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비할데 없는 죄인들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교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손수건이 필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예배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참회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이상한 일은 예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부재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반드시 침묵 이상의 어떤 사건을 동반해야 합니다. 침묵을 능가하는 신령한 영적인 권세가 하나님과 설교자, 설교자와 교인, 교인과 예배순서 사이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20.예배에 임하실 때

성령이 설교자를 붙잡아주시고 말씀 선포 가운데 함께 하시면 평범한 설교라도 수많은 사람의 심령을 찌를 수 있습니다. 비범한 말이 비범한 능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말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한 성령의 능력이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21.예배의 정서적 요소

세상에서 낙인찍힌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의 실패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가 예배를 통해 주어지는 축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22.정서를 새롭게 하심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교인들이 거기서 하나님과 만남을 경험하게 될 때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특별한 방식으로 예배한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 임재 앞에서 후회, 탄원, 열정, 두려움, 근심, 신비, 경외, 사랑, 아픔, 절망, 신뢰, 고난, 목마름 같은 정서를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23.설교학적인 간음

냉담하게 설교하는 것은 설교학적인 간음입니다. 그것은 단지 말일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먼저 감동과 감화를 받는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만약 설교자와 교인 사이에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느끼지도 못하는 내용을 설교해야 하고 교인들은 무관심하게 예배가 끝날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24.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생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생활이 지속될 때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오히려 심령이 더욱 굳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룩한 은혜의 감화도 없이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실천을 강요받고 행하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우리의 영적 삶 속에서 회복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5.설교의 권위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지만 이제는 예배드리는 시간에 설교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설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은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26.깊은 산속 옹달샘

깊은 산속 옹달샘에 아주 맑은 샘물이 있다고 합시다. 그 샘물의 순수함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 전해질 때까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떤 그릇으로 어떻게 그 물을 떠서 운반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비록 그 샘물이 한없이 맑고 정결하다 할지라도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불결한 그릇에 그 물을 퍼서 담는다면 그 물은 옹달샘에 있을 때의 정결함을 상실한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진리 그 자체입니다. 모든 설교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설교가 혼잡하지 않으며 순결한 말씀으로 성경과 동질의 권위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증거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식으로 성경의 진리가 다루어져야 합니다.


27.순수한 말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말씀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 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위하여 전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은 위협받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어려움도 가중되었습니다.


28.진리의 회복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예배 위기는 단지 성직자의 화려한 복식이나 아름다운 실내 장식, 열정적인 찬양팀의 운영이나 전문적인 성가대의 운영이나 예배 순서의 현대적인 변화 등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회복 없이는 예배가 회복된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예배 속에서 정직한 복음 선포와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는 설교 회복을 통해서만  예배는 비로소 예배답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속에서 순수한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9.어리석은 열심

무엇이든 뜨거워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신앙생활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머리가 혼탁한 사람의 열심은 신앙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는 열심히거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에 해로운 뜨거움이기 쉽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나 연단된 꿋꿋함, 성숙한 경건 같은 것을 그런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진주를 돼지우리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깨닫는 것 없는 신앙생활은 목양을 받는 교회생활이 아니라 사육 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30.열납되는 예배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 뒤에는 언제나 예배정신에 부합하게 산 사람들의 삶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의 예배도 받으십니다. 바로 자신의 예배 행위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한 사실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상한 심령을 가진 채 회개하는 사람의 예배입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눈에 보이는 제물보다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하게 기억됩니다.


31.동물과 같은 나의 삶1

어느 날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가 윗필드의 생애를 읽으면서 커다란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초인적인 수고 속에서 복음을 전했던 순회설교자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 같은 격심한 수고에 자신을 바치면서도 그는 매일 밤, 열다섯 가지 항목의 점검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설교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관리의 태도를 확인하며 “나는 거의 동물처럼 살아가고 있구나.”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2.윗필드의 <삶의 점검표>

첫째: 개인 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 놓은 기도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 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거나 행동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에 심사 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서 순수하였고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서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번째: 윌리엄 로의 규칙에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 하였는가?
열네번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열다섯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33.임재의 예배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감격이 있는 예배에는 항상 스스로 죄인이라고 셍각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였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왜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인지를 경험하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예배중에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34.예배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예배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목소리에 순종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되도록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시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계십니까? 마음을 바쳐 예배한다고 할지라도 예배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예배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신을 상실한 것입니다.


35.봄비를 기다리며

봄에 내리는 단비는 얼마나 복된 비입니까? 이 비가 없으면 봄이 되어도 새싹이 돋아날 수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물이 오를 수 없고 그 가지들은 아름다운 잎새를 피어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된 봄비가 모든 나무에게 꼭 같은 일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그 내리는 단비로 말미암아 싹이 나고 푸른빛을 더해 가지만 죽은 나무는 그 비로 인해 더욱 속이 썩어들어 갑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이 있는 예배 속에서 더욱 즐거움과 성장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등진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리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질수록 오히려 괴로워하고 반발할 것입니다.


36.예배시간에 잡니까?

오늘날은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 심각한 신성모독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때로는 힘들고 피곤하면 졸 수도 있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너무나 피곤하면 예배 중에 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한번이나 두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같은 시간에 되풀이되고 있다면 이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고 영혼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자신을 오래도록 방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37.벽 앞에 서서 드린 예배

여러분은 예배시간에 졸음이 엄습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토요일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의 일부입니다. 언젠가 제가 설교하던 한 현장에서는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교인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우측 벽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고는 벽 앞에 선 채로 예배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그렇게라도 이기면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38.권세를 준 이가 누구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도전적으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20:2)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백성들이 감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런 질문으로 예수님의 설교에 도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그들은 예수님의 그 같은 설교사역을 통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치는 권세의 기원을 물었습니다.


39.긍휼로 살아온 인생이기에

"하나님, 저는 지난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는 것처럼 살았던 세월도 없지 않지만 주님, 제 생애에서 주님을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큰 사건이 없었습니다. 제가 변함없이 주님만을 사랑하며 여기까지 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님과의 만남을 제외하고는 제 인생에 진정 기쁘고 복된 날이 없었습니다. 제 마음 밑바닥에 있는 유일한 소원을 기억하소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고 싶습니다. 비천한 인생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허락하소서."


40.가정 같은 교회?

“여러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재미있는 교회 프로그램, 심지어 친구, 친척,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예배 중에 회심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회 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랍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41.목사의 직무

여러분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직무에 둘러 쌓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심방, 교육, 구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설교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42.돈지갑의 회심

회심하지 못한자의 대표적인 욕망은 물질에 대한 탐심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이 집요하게 게속 될 때 그것은 인격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 섬기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의 자유란 있을 수 없습니다. 헌금생활을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돈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들의 그 회심을 믿을 수가 없다.”


43.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모여 살아도 기쁨이 있는 교회, 많이 배우지 못한 교인들이 모였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교회,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행복해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그렇게 복음이 있는 교회는 언제나 넘치는 헌신이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금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로 풍성한 연보로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행한 물질의 섬김은 풍성하고도 넘칠 정도의 헌신 이었습니다.


44.정당한 헌금

하나님의 교회는 놀음을 하거나 뇌물을 받거나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투기를 해서 모은 돈을 헌금으로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거나 헌금을 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소득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므로 그가 십일조를 바쳐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45.인생의 일부를 드리는 헌금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진리의 말씀대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살아온 성도들이 벌어온 돈을 가장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그 돈은 깨끗한 것이요, 그들의 땀이며 눈물이며 자신들의 인생 자체를 깎아서 벌어들인 물질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질 때, 그들의 인생 일부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순서가 예배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 순간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6.은혜로 산다는 고백

헌금 정신 중 하나는 우리가 사는 것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는 것이 물질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히 인색한 헌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삶에서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풍성한 헌금 생활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47.내 모든 것의 소유 삼으소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반드시 한가지 욕망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주고싶어하는 것입니다.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고 마다하여도 바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넘치는 기쁨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48.불꽃 같은 기쁨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여러분의 달란트입니다. 그런 기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 될 때 그 기회를 지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넘치도록 도우십시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모릅니다.


49.세 가지 원리

우리는 바울이 칭찬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에 대한 세 가지 실천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로 헌금의 액수에서는 힘대로 혹은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하고
셋째로는 자신을 먼저 드린 헌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0.찬양은 부흥의 수단인가?

요즈음은 찬양을 통해서 무엇인가 인간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과도히 동원하고 심리적인 기법을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찬양은 언제나 찬양할 이유가 있는 찬양자에 의해서 불려지는 것입니다.
올바른 순서는 이것입니다. 예배에서 찬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품을 회상하고, 성품에서 비롯된 우리를 위한 구원과 은혜를 다시 느끼는 가운데 드려져야 하며 그것을 통해 또다시 예배에서 우리를 만나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가운데 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51.찬양은 노래다

만약 우리 삶 속에 찬송이라는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건조해지겠습니까? 예배 속에 찬양이 없었다면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우울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배속에 찬송을 두심으로 우리의 예배가 고백과 함께 축제적인 성격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기쁨입니다. 예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깨닫고 참회하게 됩니다. 삶을 돌이키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립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관계를 경험하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52.우리가 예배 시간을 아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예배에서 참된 자유는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찬양에서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가 그런 파격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해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아무리 노래해도 찬송의 가락이 우리의 마음에 마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 찬양을 마치고 설교를 듣고 주일오전예배를 마치니까 별이 총총하더라는 간증이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53.가사를 외우는 유익

만약에 우리가 예배찬송의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완벽하게 가사와 곡조를 외우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자유로워지겠습니까? 반주자들은 악보 없이 외워서 반주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감고 가사를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 찬송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맞는 정황마다 즉각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찬송이 암기된 가사를 타고 신앙고백처럼 흘러나올 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찬송을 암송해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도 우리 신앙에 얼마나 유익을 주는지 모릅니다.


54.회개를 잊은 시대

요즘 우리는 너무나 부요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해야겠다는 갈망을 갖기보다는 종교적인 행위나 습관적인 교회출석으로 이러한 결함들을 보상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영혼은 공허함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기 전에 하나님을 기뻐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55.하나님을 향한 갈망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의 모든 종교생활도 결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뵈옵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없이 교회생활을 계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언저리를 맴돌고 은혜에 대하여 말하게 하지만 그 은혜를 맛보게 하고 그 풍성함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상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상한 마음은 통회에 이르는 마음입니다.


56.주일성수

현실적으로 교인들에게 주일을 지킬 의무만을 강조함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하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의무감이 아니라 영적 유익을 실제로 경험하며 예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정하신 날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보람 있어서 그날에 다른 일,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57.예배 회복과 주일

저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교회의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는 데 쏟는 정성과 노력을 오히려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데 바친다면 주일이 훨씬 더 거룩해지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받은 바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설교의 갱신에 분투한다면 적어도 주일 낮에 모인 인파를 주일저녁예배에 거의 다시 못만나는 교회는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58죽은 예배 빛 바랜 주일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형식적이고 차갑고 은혜 없는 메마른 예배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예배를 통해 참회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일주일을 살다가 오니까 거룩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교회 바깥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신약의 성도들과 종교개혁기에 어둠에서 깨어난 성도들이 누렸던 은혜생활로 돌아가고, 청교도들이 드렸던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주일은 다시금 즉시 거룩하게 준수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 김남준


m_978897046533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