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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5: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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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최후 승리는 여러분의 것 (고린도후서 5장 18-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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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살펴보면 2인자가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2인자는 대단한 권력을 누리는 것 같지만 1인자가 외면하는 순간 바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나락에 떨어진 2인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방 지역에 살면서도 장장 80년 동안 죽을 때까지 2인자로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요셉에게 있었던 탁월한 용서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가 총리에 올랐을 때 제일 먼저 누구에게 원수를 갚고 싶었겠습니까? 자신을 모함해 몇 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한 보디발의 아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가 보디발의 아내에게 벌을 내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를 판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그런 용서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항상 그와 함께 하셨고 고난 중에도 평안과 지혜와 창조성이 넘쳤습니다. 그처럼 축복을 원하면 용서를 실천하고 큰 축복을 원하면 큰 용서를 실천하십시오.
미워하면 영혼이 속박되지만 용서하면 영혼이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습관 중에서 제일 위대한 습관은 용서하는 습관입니다. 용서의 신학적 의미는 ‘그냥 가도록 놔주는 것’입니다. 기막힌 일을 당했어도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믿고 원수를 그냥 가도록 놔주십시오.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원수보다도 더 못한 사람이 됩니다.
용서는 항상 감정을 넘어서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에는 전혀 감정의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복수할 권한도 주지 않았고, 잘 복수할 수 있는 판단력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자신도 잘못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원수를 용서하십시오.
성경은 용서해준 사람들이 복 받는 일화로 가득 찬 ‘용서행전’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용서하십시오! 행동하는 믿음이 어려운 이유는 인생은 ‘복수하는 작업’이 아니라 ‘용서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는 ‘한풀이 종교’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문제를 푸는 ‘용서풀이 종교’입니다.
< 화목하게 하십시오 >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통해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역사를 이뤄야 합니다(18절). 그리고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19절). 그리고 이웃과의 화목의 원천은 하나님과의 화목이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20절).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21절). 결국 진정으로 용서의 능력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용서의 능력을 체험할 때 사람은 가장 건강하고 성공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용인정신병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병원 원목은 수요일에 두 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12시에 드리는 직원예배는 조용히 드렸고 1시에 드리는 환자들 예배는 박수도 쳐가며 뜨겁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환자들이 예배드릴 때는 박수치고 몸을 들썩이며 뜨겁게 예배드려도 곧 우울해질 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원목은 ‘감정을 푸는 것’으로 뜨거워지지 말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뜨거워져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때 한 청년과 대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정신이 멀쩡한 것 같아서 “어떻게 병원에 오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가 슬쩍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대개 보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이곳에 와요.” 의미심장한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너무 깨끗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면 마음의 병에 걸리기도 쉽습니다. 사람은 항상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죄도 짓고 욕도 먹고 실수도 합니다. 그때 그 상황을 잘 소화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완벽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살면서 어떻게 칭찬만 받고 살겠습니까? 어떻게 죄 없이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이 시간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기로 작정하십시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상당히 많은 원한은 오해에서 비롯될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의 상황을 알고 보면 그가 그렇게 행동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처럼 그 사람 나름대로 이해될 만한 부분도 있음을 인정하고 지금 그를 용서하십시오. 지나치게 깨끗하고 완벽한 모습을 가지려고 하거나 상대방의 완벽한 삶을 요구하면 자신의 마음부터 병듭니다. 그래서 은혜와 용서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때 병원에서 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강제로 입원되었다가 상태가 좋아져서 총무과 작업조로 일하는 자매였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소녀처럼 순수했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그녀로부터 병에 걸린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원인은 ‘대화부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경찰계통에 있었는데 너무 엄해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녀간에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오해와 스스로 만든 상상 속에서 남을 판단하며 살다가 자신이 병들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용서와 화목이 중요합니다.
병원에서는 하루에 약간씩 산책시간을 줍니다. 그때 산책하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힘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치유해주소서.”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 용서를 받고, 용서를 배우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 중에 상당수는 곧 병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체험하면 이 세상에 있는 마음이 병든 자의 3분의 2는 당장 치유될 것이다.” 그처럼 치유는 예수 안에서 용서를 배울 때 온전히 성취됩니다. 지금 마음속에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결국 자신을 위한 길입니다. 용서할 때 건강한 몸과 마음을 되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 패배로 끝나지 않는 인생 >
또 한 가지 마음이 강건하게 되려면 성도의 최종승리를 믿으십시오. 성도의 인생은 패배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마지막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지만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거기까지는 패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를 통해 죄인이 의인이 되고 최종 승리가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상황이 최종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상태에서 상황을 끝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만 잃지 않으면 실패와 아픔 후에는 반드시 최종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어려움에 지나치게 몰입되지 마십시오. 또한 그렇게 정체된 상태로 있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지도 마십시오. 성도는 이미 승리로 규정된 싸움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가끔 승리한 경기를 나중에 재방송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고 있어도 즐겁고 편하게 그 경기를 봅니다. 이미 경기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더 많이 지고 있으면 더 신납니다. 왜냐하면 더욱 극적인 역전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성도들도 이미 승리로 규정된 싸움을 하는 것이기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예수님은 로마 군사들의 채찍을 맞았습니다. 그들의 조롱도 받고 엄청난 피도 흘렸습니다. 몸도 아팠지만 마음의 상처도 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그 싸움이 승리로 규정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고 수많은 천사들을 불러 자신을 구원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금요일은 좋은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 금요일에 원수들은 신나게 잔치를 벌이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부활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일새벽에 예수님은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게 되셨습니다.
살면서 힘든 금요일이 와도 곧 승리의 주일이 오게 됨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패배 상태에서 상황을 끝내지 않습니다. 패배 후에는 반드시 또 다른 승리를 계획하고 계시고 마침내 모든 것이 좋게 된 상태에서 상황을 끝내십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면 아직 상황이 진행형임을 깨닫고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상황에서 멋지게 우리의 축복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성도의 삶은 패배 상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왜 요셉이 연이은 연속적인 시련 중에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시련이 끝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련 중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그는 애굽 총리가 되고 그를 괴롭혔던 형제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일찍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에게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쁜 상황이 끝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마침내 꿈과 비전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요셉처럼 믿었던 사람의 배반을 당하고 다윗처럼 이유 없이 죽음의 위협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상황은 끝이 아닙니다. 믿음만 잃지 않으면 하나님은 대적이 아닌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웃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시 23:5). 그것은 언젠가 우리를 배반하고 괴롭히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축복된 높은 자리에 올라선 모습을 보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멋진 역전인생입니까? 그런 역전 인생을 꿈꾸십시오.
금년 필리핀에 1호 태풍이 왔을 때 정윤교 선교사님의 천막 예배 처소가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바로 다음날 로밍폰을 통해 저에게 전달된 문자 메시지의 첫 글귀는 이랬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저도 지치는군요.” 그렇게 폐허가 된 예배처소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가 선교사님에게 불현 듯 예배당 건축의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00평 크기의 1층으로 된 벽돌 예배당 공간을 설계하고 3700만원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몇 성도를 통해 현재까지 1500만원을 주셨습니다. 100만원도 없었던 선교사님에게 태풍이 1500만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몇몇 온라인 새벽기도 성도들도 선교사님 사역지원에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지금 선교사님이 열심히 벽돌을 찍어가며 원주민 성도들과 함께 외벽을 올리고 있습니다. 태풍으로 예배처소가 망가졌을 때 처음에는 사단이 신나서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교사님이 웃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부족한 것도 채워질 줄 믿습니다. 다만 선교사님이 너무 기대하지 않도록 어제 선교사님과 통화할 때는 특별한 지원약속은 하지 않고 그저 조심스럽게 원론적인 얘기만 드렸습니다. “선교사님! 저희도 계속 기도할게요.” 여러분들도 원주민촌에 아담한 예배당 하나가 건축되는데 차질이 없도록 같이 기도해주십시오.
< 고난은 올라가는 길 >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갈 때 가끔 실망스런 일을 당해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자기 연민을 떨쳐버리십시오. 슬픔의 옷을 벗으십시오. 원통한 한숨을 내보내십시오. 현재 상황이 어려우면 아직 그 상황이 끝이 아니고 여전히 하나님은 최후승리를 위해 그 상황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살다 보면 누군가 내 곁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켜보던 사단도 신나서 “이제 끝났다!”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만 잃지 않으면 고난은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올라가는 길’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결국 최후승리는 원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입니다.
물론 의지하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실패로 그 상황을 종료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지막 인생 페이지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는 어려움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인생 페이지를 한 페이지씩 써나가다 보면 곧 놀라운 역전인생의 때는 찾아옵니다. 그때는 이런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더 축복받고 번성하길 원합니다. 그런 번성의 비전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받으십시오. 누군가로부터 배반당하고 상처 받아도 그 비극적인 페이지에 몰입되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떠났다면 여러분의 축복여정에 그들이 필요하지 않기에 하나님이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좋은 사람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미국에 27년을 함께 산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제가 지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그 날로 끝났습니다. 그는 처참하게 찢어졌습니다. 엄청난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도 한때 성공적인 가장이었습니다. 좋은 직장도 다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20년도 더 늙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래 재미있고 유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배신 때문에 깊은 슬픔과 침체에서 한 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점차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새로운 축복비전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젊은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가 담임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인생에 지금처럼 행복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조차 선의 재료로 활용하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앞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내게도 과연 축복의 길이 열릴까?”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사는 길도 많고 축복의 길도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최후에 웃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될 것입니다.
< 최후승리는 여러분의 것 >
지금의 삶은 금요일의 삶일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제 곧 주일의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꿈과 비전을 잃지 마십시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그 어려운 상황이 최종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패배 상황에서 모든 상황을 끝내지 않습니다.
이제 승리의 기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물론 성도의 최후 승리가 바로 이뤄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오히려 승리 직전에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마귀가 최고의 공격펀치를 날릴 때입니다. 그러나 그 마귀의 공격은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인 마귀의 손길보다 우리의 후원자인 하나님의 손길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힘입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최후 승리를 확신하십시오. 모든 것이 좋지 않아도 먼저 모든 것이 좋다고 고백하십시오. 지금 건강하지 않아도 곧 건강이 회복될 것을 믿으십시오. 지금 자녀들의 모습이 시원찮아도 나중에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믿으십시오. 현재의 모습으로 자신을 그리지 말고 앞으로 되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리십시오. 그리고 항상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내 미래는 밝다! 나는 반드시 축복 받는다! 내 자녀에게 반드시 복된 길이 펼쳐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너무 부족하고 허물이 커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하고 수천 번 실수하고 실패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자로 우뚝 서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어깨를 펴십시오. 고개를 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부족한 저도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게 하소서! 지금 나이가 이전보다 더 들었어도 저의 꿈과 비전은 더욱 새로워지게 하소서!”
성도는 시작보다 끝이 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의 나머지(the rest of my life)’는 ‘내 인생의 최고치(the best of my life)’가 될 것을 믿으십시오. 이미 성도는 승리로 규정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때에 진짜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아직 상황이 종료된 것이 아님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제 패배감, 낙심, 절망, 자기 연민 등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쳐 버리십시오. 지금은 금요일의 삶이라도 주일의 삶은 곧 다가올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절망적이라도 현재의 비극적인 페이지에 자신을 몰입시키지 마십시오. 계속 믿음으로 나가면 승리와 회복의 새로운 장이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간혹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때도 믿음만 잃지 않으면 하나님은 욥처럼 그 잃은 것을 2배로 되찾게 하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안에서 최후 승리는 여러분의 것임을 믿고 전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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