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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님의 [오늘하루]를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최용우

 

1.누구든지 덤벼라 1

 

페르시아, 아랍, 터키, 그리스 네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누가 그들에게 돈을 주었어요.
페르시아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 돈으로 안구르를 사자"
그러자 아랍 친구가 "아니야 나는 이납을 사고 싶어"
곁에 있는 터키 친구는 "우리는 이 돈으로 우줌을 사야 해"
그리스 친구가 소리질렀습니다. "시끄러워. 이걸로 이스타필을 살 거야"
이렇게 네 친구가 서로 다투었는데, 그들이 다툰 것은, 넷이 모두 '포도주'를 자기나라 말로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몰라서 그래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숨지면서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들이 지금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서들 저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은 사건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꿰뚫어본 처사였어요. 그렇습니다. 특별히 심사가 고약하거나 악해서 못된 짓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그래서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못할 짓을 하는 게 사람입니다.

 

3.무지(無知)는 차라리 고맙습니다

 

뭘 모르니까 좋은 일도 못하지만 나쁜 짓도 못하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보다 고약한 것은 착각입니다. 착각은 확신을 낳고 확신은 만행을 저지릅니다. 인류 역사상 끔찍한 학살극을 저지른 주인공들은 모두가 확신에 찬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계하여 가까이 하지 말 인물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확신에 차서 자기 생각이나 주장에 손톱만큼도 의심을 품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에 반하여, 인류가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모시는 이들은 자기 생각이나 뜻을 관철코자 남을 무찌르는 일 따위는 엄두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노자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한결같은 마음을 품지 않고 백성들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는다" 하였고, 예수도 마지막에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는 당대의 이른바 불의한 세력에 자기 몸을 내어주셨지요.

 

4.누구든지 덤벼라!

 

이제부터 나는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든, '투쟁'이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사건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을 것은 물론이요, 소극적으로 지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상사람 다 비웃어도 나는 그러겠습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을 인생, 이 아무개 그 사람 안 싸우려고 하다가 망한 사람이라는 이름 하나 얻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
"누구든지 덤벼라. 절대로 당신과 사우지 않겠다! 당신은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5. 간디와 히틀러

 

마더 테레사 말하기를 "내 안에 간디와 히틀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간디와 히틀러는 동시대를 살다 간 거물이지요. 두 사람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참으로 컸습니다. 영향력의 크기로만 본다면 막상막하라 하겠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한 사람은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인도를 해방시킨 성자요, 다른 한 사람은 폭력으로 나치즘을 선양하려다가 조국과 자신을 파멸로 이끈 전범이지요. 한 사람은 적들한테서조차 존경을 받아냈고, 다른 한 사람은 측근들한테서조차 불신을 당했습니다. 1940년대 지구를 누군가 한눈으로 내려다보았다면 "하늘은 어찌하여 간디와 히틀러를 함께 냈는가!" 하고 탄식했을지 모르겠습니다.

 

6.히틀러와 간디

 

간디는 선의 극단으로 걸어간 사람이었고, 히틀러는 악의 꼭지에 선 사람이었지요. 간디한테서는 선의 강물이 흘러나와 땅을 적셨고, 히틀러한테서는 악의 화염이 솟아올라 하늘을 태웠습니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그렇게 다른 길을 가게 만들었을까요? 사물을 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틀러에게는 죽여 없앨 사람과 살아남을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되었지만 간디에게는 그런 구별이 불가능했습니다.
나와 남,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을 '다른 뿌리를 가진 둘'로 보는 관점에서 히틀러의 악이 나왔다면 나와 남,빛과 어둠, 선과 악을 '다른 얼굴을 가진 하나'로 보는 관점에서 간디의 선이 나왔다고 하겠습니다.

 

7.어느 전쟁터라도 좋으니 가보십시오

 

양쪽 군대가 틀림없이 '정의'라는 깃발을 내걸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 전쟁이, 이쪽 정의로운 군대와 저쪽 정의로운 군대의 충돌이거든요. A나라와 B나라가 싸웁니다. A한테는 A가 좋은 나라요 B는 나쁜 나라지요. 반대로 B한테는 B가 좋은나라요 A는 나쁜 나라입니다. 그러니 결국 좋은 나라와 좋은 나라, 나쁜 나라와 나쁜 나라가 싸우는 게 전쟁 아닙니까?
그런데요, 한번만 더 생각해 봅시다. 정말 '좋은 나라'라면, 그 나라가 과연 나쁜 나라하고 맞붙어 싸울까요? 그래서 나쁜 나라가 대포를 쏘아대면 미사일을 쏘고, 나쁜 나라가 원자탄을 쓰면 수소탄을 쓰고, 정말 그럴까요? 그런데도 그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까?

 

8.빛과 어두움의 싸움

 

빛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둠이란 본디 없는 거에요. 빛이 무슨 이유로 차단될 때 그걸 어둠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어둠의 존재'가 아니라 '빛의 부재'입니다.
어둠을 경험 할 수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무슨 수로 경험합니까? 여기 사방이 밀폐된 방이 있습니다. 밝은 대낮이지만 방안에는 캄캄한 어둠입니다. 만약 방에 구멍을 뚫는다면 안에 가득한 어둠의 기둥이 구멍을 통해 밖으로 관통하여 어둠기둥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 구멍을 뚫으면 반대로 빛이 어둠 속으로 빛 기둥을 만들어 관통을 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싸울 수 있습니까? 있지도 않은 것과 무슨 수로 싸워서 이긴단 말입니까?

 

9.경쟁이라는 우상

 

보십시오. 요즘 어느 자리에서든지 누가 '경쟁'이라는 내뱉으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곧장 그 '방법론'으로 뛰어들지 않습니까? '경쟁'의 방법론에서는 가지각색의 다른 얘기를 하지만, 경쟁 그 자체에는 사람들이 거부는 관두고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치스 독일에서 누가 "하일 히틀러!"하면 일제히 손으로 하늘을 찌르며 "하일 히틀러!"를 복창했듯이. 요즘에는 누가 "경쟁력!" 하면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 쪽으로 그냥 내달리지요?
실제로 '경쟁'이라는 이름의 우상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뭐 크게 걱정할 건 없어요. 지금은 저렇게 대단해 보여도 다음 세대에 가면 맥없이 무너질 우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10.무한 경쟁이라?

 

대통령 김영삼씨가 '우루과이 라운드'를 당하면서 "바야흐로 세계는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을 때 저는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더군요.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적절히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쟁도 그냥 경쟁이 아니라 무한경쟁이라니!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그 무렵 어느 재벌 총수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일등 아니면 죽는다고, 일등만이 살아남는다고 열변을 토할 때 저는 단단히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일등 한 놈만 살아남는 그런 세상이라면, 나는 이 지구에서 뛰어내리겠다. 그런 세상이라면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저는 지구에서 뛰어내리지 않았고 여태껏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등만 살아남는 세상을 제가 용납했기 때문이 아니라, 본디 그런 세상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1.예수 혁명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인간의 타락과 범죄를 벌하지 않는다? 벌하는 건 관두고 나무라지도 않는다? 나무라는 건 관두고 과거를 따져 묻지도 않는다? 과거를 따지는 건 관두고 돌아와 준 게 고맙다는 듯, 신이 나서 잔치를 벌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하느님이라고? 어떻게 감히 하느님이 그럴 수 있어?"
참으로 딱하고 어이없는 일은 예수가 이 땅에 왔다 가신 지 2천 년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가 일러 준 새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세의 하느님, 잘하는 놈 상 주고 못하는 놈 벌주는 낡은 하느님에 갇혀서 괜한 번민과 고뇌로 괴로워 하는 사람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일류의 절반이 아니라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쯤이나 인류는 성취된 예수 혁명을 축하할 수 있을까요? 

12.줄여야 산다

 

비만과 전쟁하는 시절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체중을 조금만 줄여도 얼마나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를, 비만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바야흐로 인류는 풍요가 축복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임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습고 반가운 일이올시다.

 

13.작은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요? 좋습니다. 그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자유지요.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데 대하여 시비를 따질 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네요. "작은 것이라는 게 과연 있는가? 있으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작은 것'은 없어요. 무엇을 보고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같은 물건이 보는 사람에 따라서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고, 크지 않을 수도 있고 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자기 눈에 작게 보이는 어떤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발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올시다.
그래도, 작은 것은 있습니다. 어디에 있나요? 작은 것은 물건에 있지 않고 그것을 작다고 말하는 사람한테 있습니다.

 

14.정초에 품는 내 낙관의 이유

 

정보를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사유 할 수 없는 시절이 되었다는 사실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뒤가 지저분하게 켕기는 구석이 많은 사람은 대통령도 장관도 할 수 없는 시절이 되었어요. 권력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권력이나 재물을 많이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러러보거나 부러움을 사는 시절도 이제 끝났습니다. 어찌, 지금까지보다 더 밝고 명랑한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음모와 공작과 폭력이 어지럽게 얽혀 돌아가는 '어둠의 세월'이 지속될 수 있겠어요? 그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방 누가 뭐래도 가슴 설레는 낙관으로 내 육순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15. 사람 하나 없어서

 

지식인들이 상화하택(上火下澤)이라는 넉 자로 올 한해를 정리했다는 소식입니다. 불 아래 연못이 있으니 물은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뭔가 시끄럽기만 하고 도무지 되는 일이 없어 가만히 보니까 서로 서로 등을 지고는 네 탓이라고, 너 때문이라고, 삿대질만 하더라는 얘기지요.
글쎄, 그 낯선 문자를 골라낸 지식인들 본인께서는 온통 시끄럽기만 하고 아무 결과도 없는 연못 위의 불길에 과연 책임이 없는지 모를 일이나, 오늘 이 땅에 그 한 사람 예수의 추종자를 자처하며 살아가는 나의 부끄러움과 곤혹스러움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정말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16.평화가 길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평화는 싫고 전쟁이 좋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있어도 정신이 이상해진 극소수 사람이나 그렇게 대답하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인류는 거의 날마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전쟁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일까? 디팩 초프라는 '평화가 길이다'라는 책에서 '인류가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이 '반전운동'입니다. 그러나 '반'운동으로는, 그 뒤에 무엇이 붙든지 간에 그것이 반대하는 바를 이기지 못합니다. 무엇에 대한 반대는 무엇이 먼저 있은 뒤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이기는 힘은 '반전(反戰)'에 있지 않고 '비전(非戰)'에 있습니다.

 

17.종교와 배타(排他)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안식일 대신 '기독교'를 넣어도 말이 된다고 나는 믿습니다. 기독교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기독교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간혹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인 양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있는데,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른 종교를 배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오직 그 분 뿐인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 외에 하나님과 같은 다른 무엇이 따로 있다면 그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상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무엇에 대하여 배타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종교인의 길

 

종(宗)이 꼭대기 또는 바닥이라는 뜻이니 꼭대기 가르침 또는 바닥 가르침이 종교(宗敎)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가장 높은 자리 또는 가장 낮은 자리로 올라가든지 내려가는 것이 종교인의 길이라 하겠습니다.
산행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넓어집니다. 바야흐로 산꼭대기에 서면 온 천하가 품에 들어와 안기지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기슭에 서면 저쪽 등성이 너머도 보이지 않고 이쪽 언덕 너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눈에(품에) 들어오는 세계가 좁은 거예요. 종교인이란, 복잡하고 천박한 앎에서 단순하고 드높은 앎으로 옮겨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본 사람이 아니라면 일컬어 종교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행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단순하고 드높은 가르침으로 신자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틀에 박힌 가르침으로 신자들을 기슭에 붙잡아드려는 자들이 자칭 지도자로 행세하는 모습만 보이니, 이 또한 나의 좁은 시야 탓일까요?

 

19.파도 그래프

 

날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오르내리는 '주식시세 그래프'를 보며 아직까지 저는 가슴이 죄거나 맥박이 빨라져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거야 저에게 주식이 한 장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BBK가 무슨 주가 조작을 했다느니 뉴욕 증권시장이 어떻게 됐다느니 하는 소리가 도무지 현실감 있게 들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가 변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울었다 웃었다 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솔직히 그이들을 생각하면 부럽다거나 안됐다기보다 미안한 생각이 먼저 듭니다. 왜냐하면 파도가 있어서 바다가 살고 능선이 있어서 산이 살 듯이, 주가의 변동을 좇아 일희일비하는 이들이 있어서 시방 이 자본주의 세상이 살아있는 것이고 덕분에 저 같은 '구경꾼'도 살아 있는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20. 행복한 눈물?

 

어떤 사람이 <행복한 눈물>이라는 그림을 100억원인가 얼마에 샀다고 해서 요즘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글쎄요. 저로서는 그만한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습니다만, 종이에 동그라미를 한참 그리며 계산해봤더니, 일년에 1000만원씩 1000년을 모으면 <행복한 눈물>을 걸어두고 감상할 자격을 얻겠더군요.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은 말 그대로 언감생심, '장자'에 나오는 뱁새처럼 어찌 감히 붕(鵬)의 비상(飛翔)을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겠습니까?
허, 그것 참! 모르긴 하겠거니와 그림을 그린 화가 아무개 씨도 자기 그림이 그 값으로 팔렸다는 말을 저승에서 들었다면 혹시 놀라 뒤로 자빠지지나 않았을까요?

 

21.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

 

하느님 나라에 문은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문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한테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으시겠죠.
분명히 해둡시다.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 옛날 예수님에게 하늘나라 들어가는 법을 물었다가, 있는 재산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에 발길을 돌렸던 부자 청년이 그랬듯이! 

 

22. 검정 괴물

 

문제입니다. 아래 '보기'의 단어들 가운데, 얼마 전 태안 앞바다를 검게 물들이며 갯벌과 어민들을 질식시켰던 검정 괴물과 연결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기-정치, 경제, 문화, 사회, 법률, 예술, 종교.
무슨 그런 문제가 다 있느냐고요? 우롱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십니까?
'경제'는 원래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따라서 괴물이 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기도 하는 물건이지요.
"갯벌을 죽이고 어부들의 숨통을 죄는 괴물은 기름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탐욕이다." "시급히 살려야 할 것은 경제가 아니라 사람이다."
이와 같은 하늘의 신음 섞인 경고를, 시방 저는 떨리는 가슴으로 듣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3.정치인들을 위한 기도

 

"주님, 우리에게 정치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그들에게 자기가 속한 정당을 넘어 더 넓은 세계를 볼 눈과 지혜를 주시며 아울러 전체 인류를 위해 선한 일을 할 용기도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십시오."
마음을 모아서 이 나라 정치인들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저들도 우리의 피붙이들이요 나름대로 선한 의지로 살아가려는 착한 사람들임을 잊지 맙시다. 또한 우리도 저들과 하나 다를 바 없이 옹졸하고 무지하고 고집스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고백합시다. 희망을 남에게서 찾으려 하지말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나갑시다.

 

24.금융강국?

 

웬 사람이 동전 한 개를 가볍게 던집니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더니 구르면서 차츰 커집니다. 키도 커지고 두께도 두꺼워집니다. 구르는 동전과 같은 방향으로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어느새 동전과 사람들 키가 비슷해졌는데 사람들은 더 커지지 않고 동전은 자꾸만 커지니까 자연스럽게 동전이 사람들을 데리고 앞서가는 모양으로 되었습니다. 드디어 동전은 63빌딩만큼 커졌습니다. 이젠 동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입니다. 동전이 조금만 방향을 틀면 사람들은 동전에 깔려 납작해질 것이고, 저러다가 동전이 옆으로 쓰러지는 날에는 고층빌딩이 무너지고 사람은 흔적도 없어지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것입니다.
어저께 텔레비전에서 본 '금융 강국' 대한민국을 선전하는 공익광고 방송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솔직하고 담대한가? 드디어 맘몬(Mammon)이 제 정체를 조금도 감추지 않고 대한민국 공영방송 텔레비전 화면에 스스로 현양(顯揚) 하시는구나! 마침내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바야흐로 맘몬의 대란이 노골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태어난 이 세상인데, 돈 밑에 깔려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25.먹는 음식

 

이런 말 들어보셨지요? "네가 먹는 음식이 바로 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주로 먹느냐가 그 사람의 인품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짐승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초식동물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성질이 둔하고 유순합니다. 반면에 육식동물은 덩치가 작아도 성질이 난폭하고 앙칼지지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겠습니까?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 음식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해가 진 뒤에 음식을 먹지 않는 전통이 있다던데, 다이어트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매우 좋은 습관임이 분명합니다.

 

26.무지개 원리?

 

어느 집에 갔다가 그 집 대학생이 선물로 받은, 차 아무개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대강 내용을 살펴보니, 소문대로 많은 독자들이 사서 읽었겠다 싶더군요. 온갖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들을 다 모아서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합리적으로 격려하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한편으로, 이 책이 안내하는 건강과 행복한 삶(세계)이라는 게 성경의 전도서가 말하는 '헛되고 헛된 것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면서 그것을 '감사 감사 감사' 하고 있는 나(ego)가 바로 이 세상을 고통과 어둠으로 몰아가는 말썽꾸러기 장본인 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는 성찰경계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지개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바라보며 감상할 물건이지 가까이 가서 손으로 잡을 물건은 아니에요. 그랬다가는 인생 종치는 겁니다.

 

27.우리만이라도

 

어떤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같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생각이 같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요?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아무개 그 사람 가짜라고 엉터리라고 말해버리면, 말한 사람이야 언론의 자유를 누린 것일는지 모르겠으나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요행히 성자거나 백치가 아닌 담에야, 기분 참 더러워지는 거지요.
폭력은 총칼이나 주먹으로만 표출되는 게 아니에요. 제 말은, 그런 세상이니 우리 모두 입 다물고 벙어리로 살자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만이라도 누가 나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내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에게 실망하거나 그를 비판하는 일을,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말아보자는 겁니다.

 

28.진돗개 기질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길에서 두 남자가 만났습니다.
"여, 오랜만일세. 그동안 많이 달라졌구먼?"
"글세, 누, 누구신지?"
"자네 그새 살이 많이 빠졌군. 다이어트를 열심히 했나봐?"
"아니, 난 다이어트 한 적 없어요."
"뭘 그래? 내 눈은 못 속인다구. 자네 좀 심한 뚱보였잖아?"
"아니오. 난 뚱보였던 적이 없소. 아무래도 사람을 잘 못 본 것 같소."
"무슨 소리? 자네 김재덕 아닌가?"
"난 김재덕이 아니라 박수동이오"
"그래? 아니 어떻게 이름에다 성까지 바꿨나?"
자, 이쯤 되면 박수동씨는 두 손 들고 "맞아요 나 김재덕이요! 나 살빼고 이름 바꿨어요. 젠장! 말이 통해야지" 라고 항복하는 게 어떨까요?
한 번 먹은 마음, 한 번 머리에 입력된 정보를 여간해서는 바꾸려 하지 않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인가 봅니다.

 

29.용왕의 심부름

 

강에는 물고기만 사는 게 아닙니다. 강에는 용왕님이 사십니다. 이른바 서구 문명이라는 괴물이 이 나라를 삼키기 전에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용왕님을 잘 모시고 살았습니다. 물길을 함부로 막거나 끊거나 그런 '배우지 못한 놈의 짓'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치산치수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물의 흐름을 막지 않는 바탕 위에서 둑을 쌓거나 보를 먹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물 자체를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원'으로만 보고 함부로 물길을 막았다가 틀었다가 아예 물의 숨통을 끊어버리기까지 하는 막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용왕님은 아직 죽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도 물의 은혜를 모르고서 함부로 날뛰며 물을 업신여기고 물에 대하여 깡패처럼 구니까, 드디어 늙은 몸을 일으켜 비상수단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과 그 부하들을 심부름꾼으로 보내 한반도 대운하를 파겠다고 하십니다. "이래도 정신을 못 차리겠느냐? 이래도 너희가 내 은혜를 망각하고 물을 함부로 쓰고 버리겠느냐?" 이제라도 우리가 물의 은혜를 깨닫고 용왕님께 저지른 온갖 무례를 사죄하고 정신을 차린다면, 용왕님의 심부름꾼들은 적당한 수고비를 받고 물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용왕님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은 그들을 미워하거나 적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여전히 용왕님께 무례를 범하고 물의 은혜를 망각하며 죽음의 길을 내달리고 있을 테니까요.

 

30.제행무상

 

저는 어렸을 적에, 절에는 가도 좋지만 천주교에는 절대 가지 말라는 목사님 말씀을 듣고 천주교라는 데가 가면 안 되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은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어렸을 때 가졌던 천주교에 대한 제 생각을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제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천주교에 대한 생각(사실은 제 생각이라기보다 어느 목사님의 생각이었지요)을 버렸기에, 두 교회가 한 교회라는 진실을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존재라서, 자기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거부하고 굳게 잡아 한 자리에 모셔두는 능력이 있나 봅니다. 늙어가면서 자기 생각에 스스로 갇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것이 겁나서 사납게 공격하는 모습을 연출하지는 말자고, 자신에게 자주 타이르곤 합니다.

 

31.침묵

 

아주 오래된 연못입니다.
사람들 발길 끊어진 고궁 안뜰 한구석, 이끼 덮인 바위로 둘러싸인 연못입니다.
늦은 봄날, 그 물에 개구리 한 마리 뛰어들어 무거운 정적을 깨뜨립니다.
툼 -벙!
그러고는 이내 사방이 고요합니다.
고요함에서 왔다가 고요함으로 돌아간 뜬금 없는 소리 하나!
그 소리 하나가 무겁고 깊은 정적이 거기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는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32.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참 자유

 

"꿈에 살인을 했다는 이유로 심판받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지은 허물과 죄 때문에 심판받는 영혼은 없다. 다만,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육신을 벗을 수 없듯이, 그 누구도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살인을 했으면 그에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비록 꿈속에서라도 이것이 꿈이라는 진실을 확연하게 깨친 사람은 무엇에도 걸리지 않고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참 자유를 누린다."

 

33.나보다 큰 내 몸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무언가를 먹어야 합니다. 안 먹고는 살 수 없도록 되어 있거든요. 먹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중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일도 그렇지만,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음식 먹는 일을 제대로 정신 차려서 하는 것 같지 않더군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함부로 생각 없이 먹거나, 자기한테 맞는 음식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남들이 맛있게 먹으니까 덩달아서 먹는 경우가 자주 있더라는 얘기올시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전6:19) 그분은 '여러분'이 성령의 집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러분의 몸'이 성령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한테 제 몸이 있는 게 아니라 제 몸이 저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먹고 자고 일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든 일에 저보다 제 몸의 뜻을 받들어 그대로 따른다면, 그것이 바로 순천자존(順天者存)의 길(道) 아니겠습니까?

 

34.환장할 진실

 

잠깐 서울 나들이를 했어요. 전철을 탔는데, 맞은 편 좌석에 일곱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더군요. 한 사람 한 사람 실례 안 될 정도로 살펴보았어요. 어쩌면 그렇게 저마다 다른 얼굴인지, 새삼 놀랐습니다.
그런데요, 모두가 독특하게 다르면서 한 가지 어쩔 수 없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 게 보이더군요. 어쩔 수 없는 공통점이라는 게 뭐냐 하면, 저마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저런 모양으로 저금 저 자리에 앉아 있도록 한 그 무엇을(누구를) 공통으로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예쁜 아가씨의 고운 손가락만이 밝은 달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똥치는 막대기도 얼마든지 밝은 달을 가리킬 수 있는 거예요. 더군다나 깜짝 놀랄 소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가 어쩔 수 없이, 한 분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환장할 진실입니다.

 

35.빛으로 말미암아

 

눈이 없으면 물론 사물을 볼 수 없겠지만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겁니다. 빛이 없으면 눈도 없는 것이고, 그 눈으로 볼 대상도 없는 거예요. 눈이 빛을 밝게 해주는 게 아니라 빛이 눈을 밝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려면 빛도 눈도 있어야 하지만, 눈보다 빛이 먼저라는 얘기올시다.
빛을 의식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빛은 자기 체體를 따로 가지지 않고 모든 체를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은 하느님과 말씀과 빛을 동격으로 보지요.

 

36.덧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거울 앞에 서서 보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거기에 비친 우리 모습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던져졌을 때 거기서 보아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상황에 반응하는 우리입니다.
영지와 난초는 깊은 산에 나거니와 향을 맡아줄 사람이 없다하여 향기를 아니 뿜지 않는다고,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 닥치는 모든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며 살아보렵니다. 되거나 말거나! 

 

37. 해탈의 길

 

사람들이 목숨 걸고 빙벽 오르기 같은 위태로운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그 일을 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럴 겁니다. 아차 하면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판인데 무슨 여유가 있어서 어제 겪은 억울한 일을 되씹거나 내일 겪게 될는지 모르는 일을 당겨다가 걱정하거나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온 신경을 손끝 발끝에 집중하여 발걸음 하나 옮기는 데 말 그대로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쏟겠지요. 바로 그 순간의 고요함이야말로 해탈의 적멸궁(寂滅宮)이라 하겠습니다.
만약에 누가 밥 먹을 때 밥 먹는 데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쏟아 부어서 엉뚱한 곳을 헤매는 일이 없고, 밭갈 때 밭 가는데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쏟아 부어서 있지도 않은 일을 쓸데없이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영원한 오늘'을 사는 지인(至人)일 것입니다.

 

38.그냥 사람

 

세상은 흔히 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봅니다만, 나는 그 옷을 입은 사람과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보고자 합니다. 옷보다 옷 입은 사람이 먼저고 일보다 일하는 사람이 나중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잘 되지를 않는군요. 아마도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보다 그가 입은 옷을 보고 사람보다 그가 하는 일을 보아왔기에, 그 버릇이 바위처럼 굳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버릇이 잘못임을 알았으니 고쳐 나갈 일만 남았고, 결국 고쳐질 것입니다.
이렇게 제 눈 고치고 나면 언제고 모든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 보이는 그냥 사람으로 돌아가 있겠지요. 그 날을 보지 못하고 이 목숨 끊어진다 하여도 물론 상관없습니다.

 

39.지복의 순간

 

간혹, 한 송이 이름 모를 들꽃이나 붉게 물든 황혼의 바다 앞에서 또는 저문 하늘 날아가는 까마귀 떼를 올려다보며, 말과 생각이 말끔 비워지고 텅 빈 공간 같은 것이 아련하게 느껴지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지복至福의 순간입니다.
그럴 때엔 하아, 감탄하는 소리 말고 다른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아니, 필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없을수록 좋습니다.
예쁘기도 해라! 저 꽃 이름이 뭐지? 와, 까마귀다!
이렇게 뭐라고 말을 하는 순간, 지복은 기다렸다는 듯이 깨어지고 맙니다.

 

40.마음에 드는 일과 안 드는 일

 

여러분은 마음에 드는 일과 안 드는 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습니까? 마음에 드는 일보다 안 드는 일이 많다면, 그만큼 힘들게 산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너는 어떠냐고 누가 묻는다면, 마음에 안 드는 일보다 드는 일이 더 많다고, 많아도 아주 많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드는 일보다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마음에 드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반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소한 것이라도 영락없이, 그것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입고 있는 속옷은 몸에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손가락에 가시 하나 박히면 온통 신경이 그리로 쏠리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41.이순의 길목에서

 

마음이 몸을 따르는 것은 소가 우차(牛車)를 따르는 것과 같아서 말이 안되고, 몸이 마음을 따라야 하는 건데, 마음을 거스르며 살아온 세월이 하도 오래 되어서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를 않는 겁니다. 가만 보니, 제가 지금 딱 그 지경에 처해 있군요.
마음은 이쪽인데 몸이 자꾸만 저쪽으로 가는 거에요. 사도 바울로께서도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도다"(로마서7:19)고 고백하셨지요. 충분히 공감됩니다.
공자님이 지천명과 종심소욕 사이에서 이순(耳順)을 연습하신 것에 마음을 모아봅니다. 이순이라! 귀가 부드럽다? 귀가 착하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 때문에 화가 나거나 이성을 잃어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진짜 이순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42. 상가에 갔다가

 

상가에 갔다가 시신 염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가운을 입은 두 전문가가 숙련된 정성으로 시신을 닦은 다음, 수의를 입히더군요.
사람이 세상에 와서 제 손으로 못 입는 옷이 두 벌 있는데, 하나는 태어날 때 입는 배내옷이고 다른 하나는 죽을 때 입는 수의입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 입는 옷과 맨 나중 입는 옷은 누군가 남이 입혀 주어야 하는 거예요. 뭐 혼자 잘난 줄 알고 으스대지만, 누군가의 손길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그게 인생이지요.

 

43.꼴 보기 싫은 사람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사람, 곁에 올까봐 겁나는 사람, 저런 인간은 어떻게 좀 됐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사람 혹시 있나요?
반대로,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 그 곁에 마냥 머물고 싶은 사람, 저런 사람은 죽지 않고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사람 있습니까?
있으면 잘 됐네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이 왼쪽에 있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사람이 오른쪽에 있고 가운데 내가 있습니다. 이 셋의 공분모가 무엇일까요?
예. '사람'입니다. 왼쪽에 있는 것도 사람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도 사람이고, 중간에 있는 것도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 지금 세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래서 생각도 다르고 하는 짓도 다르지만, 알고 보면 같은 '사람'인 거예요.

 

44.오늘 하루

 

세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화제는 얼마나 자주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가에 대해섭니다.
갑이 은근히 뽐내는 투로 말합니다."난 사흘에 한번은 꼭일세"
을이 부러운 눈치를 보이며 말합니다."난 보름에 한 번쯤 될까 말까."
병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합니다. '난 석달에 한번이라네."
갑과 을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습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좋은가?"
병이 대답하기를 "오늘이 바로 그 날이거든!"

 

45.용서의 도(道)

 

붙잡으면 붙잡히고 놓으면 놓여납니다. 이는 아무도 어길 수 없는 하늘의 도리올시다. 바로 여기에 용서의 도가 있지요. 그러기에, 용서는 용서받는 쪽에도 자유를 주지만 그보다 먼저 용서하는 쪽에 자유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혹시 누구에게 용서받을 일이 있나요? 망설이지 말고 지금 곧 용서를 구하십시오. 단, 상대가 용서를 해주면 더 고마울 데가 없겠지만 용서를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각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게 진짜로 용서를 비는 거예요. 용서해 달라면서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한다면 그건 진정으로 용서를 비는 게 아닙니다.

 

46.가능성의 존재

 

나무를 수천 조각으로 잘게 쪼개어도 그 속에서 새 열매를 찾아내지는 못하겠지만, 성장의 조건(따스한 햇살, 비, 흙의 자양분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면 나무는 마침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사람들은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자기 의지를 실천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는 품성들(용기, 의지력,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 명료한 사고 등)을 계발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실천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나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열매처럼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47. 눈이 아니라 배로 살기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는다"-노자 도덕경
눈을 위하지 않고 배를 위한다? 무슨 말인가? 어렵게 궁리할 것 없습니다. '눈'은 나와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감각(feeling)의 대명사입니다. 눈이 있어서 바깥세상과 나 사이에 관계가 맺어지는 거예요. '배'는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있게 하는 나의 중심(heart)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눈을 위하지 않고 배를 위한다"는 말은 "감각에 따라 살지 않고 중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는 뜻이 됩니다.
노자의 이 말을 기독교식으로 바꾸면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산다"가 되겠지요.

 

48.모든 것이 그 완성의 꼭짓점에 있다

 

모든 것이 그 완성의 꼭짓점에 있다(Everything is at its peak of perfection). 이는 사람이 자기 나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에 있어서 특별히 그러하다. 지난날 고대 그리스의 일곱 현인들을 만나는 것보다 오늘 현인 하나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갚진 일이다. 장차 모든 사람을 얻는 것보다 오늘 한 사람을 얻는 것이 훨씬 더 긴요한 일이다.

 

49.목구멍에 가시

 

어제 저녁 메기매운탕을 먹다가 목구멍에 뼈가 걸린 겁니다.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지요. 순간, 큰일났다 싶었어요. 저녁 먹고 나면 곧 집회가 있고 설교를 해야 하는데, 이 목구멍의 가시를 어쩐다? 참 난감해지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우선 목구멍에 걸린 뼈에게 하소연을 했지요.
"미안하다. 내가 또 덤벙거리며 생선 가시를 삼켰구나. 잘못했다. 제발 더 이상 말썽 일으키지 말고 가시를 넘겨다오. 여긴 병원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다. 목사가 목구멍에 가시가 걸려 설교를 못하게 됐다면, 뭐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망신이냐! 잘못은 내가 했다만 수습은 아무래도 네가 해줘야겠다. 부탁한다." 이렇게 말하는데 절로 "부탁합니다"로 말투가 바뀌는 거에요. "목구멍님, 제발 한번만 봐 주십시오. 다음부터는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지금은 제 사정이 딱하게 됐으니 그냥 어떻게 좀 넘겨주십시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녁식사를 마치고 무사히 설교까지 마쳤지요. 그런데, 왜 이 얘길 하느냐고요? 글쎄올시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요

 

50.우기청호(雨奇晴好)

 

하루 날 잡아 소풍가기로 의논하면서 그 날 일기가 맑기를 바라는 거예요. 토요일에 소풍을 가자고? 좋아, 그러자. 그런데 이왕이면 그날 바람도 좀 불고 비도 구질구질 내리고 그랬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게, 기대하고 희망했던 대로 날씨가 쾌청하면 신나는 거지요, 뭐. 괜히 고마운 마음도 막 우러나고. 그런데요, 기대하고 바랐던 것과 정 반대로 비도 내리고 바람도 사납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신이 나고 고마운 마음이 막 우러나나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생이 원래 그런거지, 그렇게 형편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사람이지,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건이나 사람이나 그런 것들에 의하여 갈팡질팡 오르락 내리락 그러면서 사는 게, 그게 정말 사람으로 사는 걸까요? 

 

51.가르치려고 하지 마! 1

 

권정생 선생이 저에게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해준 말입니다. 선생이 타계하기 한 달쯤 전이었어요. 앞에 무슨 말을 하고 나서 결론으로 한 말도 아니고 뒤에 다른 말을 하기 위한 서론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당신 좁은 방에 옆구리를 마주대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말 그대로 뜬금없이, 불쑥, 내뱉듯이, 한마디 하는 거예요.
"가르치려고 하지 마!"
그런데 그 말이 제 가슴을 예리한 비수처럼 찌르며 들어오더니 그대로 박혀버렸지요. 사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앞에 한 말도 잊어먹고 뒤에 한 말도 잊어먹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52.가르치려고 하지 마! 2

 

무위당 선생이 어느 날, 노자이야기를 하시다가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노자의 스승은 자연이었네. 예수님도 자연한테서 배우셨고. 사람에게 자연보다 높은 스승은 없지. 왜 그런 줄 아나? 자연은 말씀이야, 자연은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시거든. 도무지 가르치는 바가 없으신 거라. 그러니 최고의 스승이시지."
"이 같잖은 놈아! 네가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고 한단 말이냐? 네가 할 일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죽어라 하고 배우는 것, 그저 뭐든지 배우려고 애쓰는 그것뿐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라."
요즘 제가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경고성 화두입니다. "가르치려고 하지 마!" 

 

53.나쁜 놈은 없다

 

세상에 '나쁜 놈'으로 불리는 사람은 있어도 나쁜 놈은 없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요, 세상에 누구를 '나쁜 놈'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나쁜 놈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를 '나쁜 놈'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도 나쁜 놈이 아니에요. 제 눈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나쁜 짓을 하는 자식들도 있고 병든 자식들도 있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나쁜 놈은 아닌 거예요. 

 

54. 제가 무슨 일로 불편했다면 

 

사람들이 제 말을 듣고 거절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는 기색이 보일 때 화가 나고 속이 상한다면, 사람들이 저한테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속에 숨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저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제 혼자서 제 마음대로 설정해 놓은 기대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그러는 것이지요. 세상에 모든 사람이 자기한테 동의해 주기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만큼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무슨 일로 불편했다면, 그 원인은 오로지 저한테 있었던 거예요. 아, 이제야 그것을 조금 알겠습니다.

 

55.깨어있는 사람

 

사람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그 '행위'는 두 종류로 나뉜다고 봅니다. 하나는 깨어 있어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 가운데 하는 행위요, 다른 하나는 잠들어 있어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가운데 하는 행위지요.
깨어있는 사람은 죄를 짓지 못한다(죄를 지을 수 있는데 짓지 않는 게 아니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이제 그 뜻을 조금 알겠습니다. 태양이 어둠을 뿜어내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뜻일 테니까요.

 

56.강이냐 문명이냐

 

기독교 성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강은 아마도 요단강일 거예요. 요단강은 모세가 에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을 이끌고 40년간 광야를 방랑한 끝에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숨져간 바로 그곳에 흐르던 강이에요.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옛날 종살이하던 선조들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을 터득한 새로운 후손들의 출현을 뜻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욕심에 끌려 살지 않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요단강을 건너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만든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포기하여,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말미암은 착취와 멸시로 썩어 악취를 풍기며 말라가는 저 강물을 살려내기로 결단하고 그 결단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좀 더 잘 살아보려다가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모두가 죽는 파멸의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57.망고처럼 노란 눈(雪)

 

아프리카 적도 마을의 한 아이가 "추운 나라에는 눈이 하늘에서 내리는데 망고처럼 노란색이다" 라고 잘못 배워서 그렇게 자랐다고 합시다. 그 아이가 청년이 되어 한국에 왔다가 하늘에서 흰눈이 내리는 것을 난생 처음 보았어요. 그것이 눈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비로소 자기가 여태 눈이 노란색인 줄 잘 못 알고 있었음을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뭔가를 잘 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하고 흥미로운 일입니까? 하지만 만약 그 아프리카 청년이 어렸을 때 알았던 지식을 무슨 대단한 진리인양 목숨 걸고 지키기로 마음먹었다면, 자기 어깨로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이건 눈이 아니야, 망고처럼 노란색이 아니니까!" 라고 단호하게 말하겠지요? 

 

58.이놈의 버르장머리

 

저에게 고약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저한테 그런 버릇이 있음을 처음 일깨워준 사람은 제 아내인데, 물론 저는 그럴 리 없다고 부인했지요. 자기가 그러고 있는 줄 알면 그 순간부터 '버릇'은 힘을 잃게됩니다. 버릇은 자기가 그러고 있는 줄 모르는 데서 그 힘이 나오거든요.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거듭 거듭 지적을 받은 뒤 이제 비로소 시인하게 된 저의 '고약한 버릇'이란, 누가 뭐라고 할 때 그게 아니라고 부정부터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복숭아 먹겠어요?" 하면 복숭아를 먹을까 말까 생각도 하지 않고서, "아니, 안 먹어" 하며 손사래를 치는 거예요. 아내가 지치지 않고 지적해준 덕분에, 만사지탄은 있지만, 이제라도 저에게 그런 고약한 버릇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이놈의 버르장머리, 내 어떻게든 뿌리뽑고 말 것입니다.

 

59.화를 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먹은 음식이 체하여 거북할 땐 토하는 게 상책입니다. 속에서 부글거리는 화는 체한 음식과 같지요. 누구의 언행이 맘에 들지 않아서 소화가 안되는 겁니다. 저는 술만 마시면 영락없이 토해서, 실은 그게 싫어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제 속이 알코올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음식 체하는 데도 종류가 있어서, 음식 자체가 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멀쩡한 음식을 내가 잘못 먹을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것도 그래요. 상대방이 그릇되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거든요.
아무튼, 소화제를 먹어도 계속 거북하면 토하는 게 상책이듯이, 화도 참을 만큼 참으며 다스려보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오르면 밖으로 토해내는 게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사람들이 음식 토할 때에는 장소를 가려 아무도 없는 후미진 곳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토하면서, 화는 왜 아무데서나 마구 내는 것일까요?
가끔 밖에서 무슨 일로 화가 나가지고는 집에 와서 화풀이를 하며 "내가 당신한테 화를 풀지 않으면 어디에다 풀어?" 하는 사람을 보는데, 정말 딱하고 민망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집안에서 화가 났더라도 밖에 나가서 풀 일인데 오히려 엉뚱한 데서 먹고 체한 음식을 집에 와서 안방에 토하다니, 세상에 그런 못난이가 어디 있습니까?

 

60.돌아서서 참회하는 후레자식들

 

제 눈에는, 극소수의 깨친 이들을 제외하면, 오늘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영락없는 후레자식들입니다. 50평 아파트에서 살다가 80평 아파트로 옮기기 위해 고향의 마지막 남은 어머니 집터마저 팔겠다고 우기는 어이없는 후레자식들입니다.
다만, 자기가 후레자식임을 깨닫고 돌아서서 참회하는 후레자식들이 있고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망나니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직 모르는 후레자식들이 있을 뿐이지요.

 

61.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그렇게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일꾼이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일군임을 알고 그렇게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믿는 대로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아무나 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곧 하나님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일꾼일수록 그렇습니다. 어느 바이올리니스트가 자기 바이올린을 아무한테나 내어주겠습니까? 

 

62. 이상한 평가

 

오늘 새벽, 좋은 소식 하나 들었어요. 제 속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일을 참 잘 해 왔다고, 만사에 조금도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았다고, 물론 잘못한 일도 많고 실수한 일도 많지만 그 모든 '잘못들'과 '실수들'조차도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아주 완벽하게 잘 해냈다고.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이 '이상한 평가'를 의심하거나 거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기야 의심하든 거부하든 네 맘이지만 그래봤자 너만 손해니 알아서 하라고 그러시더군요.
저는 저에 대한 그분의 '이상한 평가'를 의심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빙그레 웃는데, 그분이 한마디 더 하셨어요.
"너만 그런 게 아니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저들이 믿거나 말거나!" 

 

63. 예수의 두 얼굴

 

낡은 앨범을 펼쳐놓고 내 어렸을 적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중학생 시절, 구겨진 학생 모자를 쓰고 먼 산을 바라보며 처마 아래 서 있는 옆얼굴이군요. 그 사진은 그때 저렇게 박힌 뒤로 지금까지 퇴색은 되었지만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거예요. 사진은 그럴 수가 없어요. 살아있는 실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얼굴과 사진 속의 내 얼굴은 어떻게 다를까요? 모양이야 다르게 보이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이 아무개의 얼굴을 순간포착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른 얼굴이 아닙니다.
그림자는 실물을 가리킵니다. 그림자를 밟지 않고서는 누구도 실물에 닿을 수 없지요. 그러나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에 눈길이 머물러 있는 한 실물을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그동안 너희와 함께 있은 지 오랜데 어찌하여 내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64.지구별 종합병원

 

이 세상이 건강한 사람들만 사는 곳은 분명 아닙니다. 어쩌면 이곳은 우주의 종합병원인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태어나는 생명들마다 병든 몸으로 태어나니까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은 그가 이곳 지구별 종합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병들었다는 게 뭘까요? 본디 하나님이 지어주신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잃어버린 것 아닙니까? 따라서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은 본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되찾는 것이겠지요.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 데,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도 남도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하지 마라. 다만, 본디의 너로 돌아가기를 힘쓰고, 남들도 그럴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도와라.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바퀴가 구르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늘의 별들이 운행을 멈추지 않거늘, 네가 어디로 들어가 숨으며 무슨 수로 일을 그만둘 것이냐?"
아,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제 입이 절로 "아멘!" 하더군요.

 

65.사랑이란

 

사랑은 누구에게 강요당하지도 않거니와 누구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대가 누구에게 무엇을, 그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강요한다면 그대는 아직 그를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66.빛이신 하느님

 

아무도 육안으로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빛은 너무 작고 너무 빨라서 사람 눈에 포착되지를 않습니다. 투명체가 아니라서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우리로 말미암아 생긴 어둠 때문에 빛이 있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실체가 도무지 경험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들 하나님을 가리켜 빛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내가 지금 무엇을 본다는 것은 내가 지금 빛 속에 있다는 얘깁니다. 내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 '나'와 '어디'와 '무엇'이 하나인 빛 속에 있어서 가능한 거예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빛에서 나와 빛 가운데 있다가 빛으로 돌아가는 빛의 가면들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빛의 존재를 먼저 의식하고 몸과 마음과 듯을 그리로 모으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 저의 일과이기를 오늘도 빌어봅니다.

 

67.어리석은 바보짓은 이제 그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여, 하느님이 그대를 내 앞에 세우신 뜻은 그대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것인데, 들여다보고 고칠 데 있으면 고치고 닦을 데 있으면 닦으라는 것인데, 그런데 얼마나 어리석은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볼 생각도 아니하고 도리어 거울 향해 시비를 걸고 있는 나여! 그러다가 돌을 던지기도 하고 돌아서기까지 하는 나여! 어리석은 바보짓은 이제 그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여, 이제부터는 그대를 보는 대신 그대 보는 나를 보리라. 그대를 판단하는 나를 판단하고 그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거울로 된 이 세상 떠나는 날, 맨얼굴로 나를 만나 끌어안으리라. 바라건대, 이 몸이 죽기 전에 그날이 오기를! 

 

68.투명한 안경처럼

 

한때, 안경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안경의 생명은 그 맑고 투명함에 있지요. 저 자신은 없는 듯 있으면서 사물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는 데 안경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겁니다. 안경에 때가 묻어서 사물과 눈동자 사이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되면 그만큼 가치는 떨어지지요.
어떻게 하면 나도 안경처럼 맑고 투명하여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는 안경을 닦다가 깜짝 놀랐어요. 안경을 안경이 닦는 게 아니라 내가 닦고 있는 거예요!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안경이 안경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고 그래서 주인인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안경을 닦고 있더란 말입니다.
아하! 안경이 안경을 닦는 게 아니라 내가 안경을 닦는구나.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닦는 게 아니라 내 주인이 나를 닦는 거로구나! 그동안 스스로 아무리 애를 써도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선명해졌습니다. 

 

69. 예수의 급진주의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아마도 이 말씀은 현대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으면서 가장 낯선 예수의 가르침 일 것입니다. 그분이 다녀가신 지 2천년이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럴진대, 당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급진적이며 혁명적이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 뜻을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예요.
선생의 가르침이 너무 어렵다면서 많은 제자가 예수를 떠났다는 기록이 있던데, 과연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70. 결국

 

사람들은 자주 이성을 잃고 억지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저런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하여라.
네가 성공하면, 가짜 친구들과 진짜 적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이 너를 속일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여라.
네가 수년씩 걸려 세운 건물을 누군가 하룻밤에 무너뜨릴 것이다.
그래도 세워라.
네가 안정을 찾아 행복을 누리면 사람들이 시새울 것이다.
그래도 행복하여라.
네가 오늘 한 선행을 사람들은 내일 아침에 잊을 것이다.
그래도 선행하라.
네가 너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어도, 세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너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어라.
너도 알게 되려니와 결국,
모든 것이 너와 하느님 사이의 일이지, 너와 그들 사이의 일은 아닌 것이다.

 

71.알아서 하라

 

내가 누구에게 못된 짓을 했으면 사실은 그를 지으신 하느님께 못된 짓을 한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누구에게 선행을 했으면 그것은 곧 하느님께 선행을 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거울처럼 당신이 받으신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분이신지라, 내가 누구에게 한 짓은, 하느님에 의하여, 그대로 나에게 한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고요? 그러니 무슨 짓을 하든 알아서 하라는 거겠지요, 뭐

 

72.오직 기도가 있을 따름

 

우리에게는 하나도 기도, 둘도 기도, 셋도 기도, 오직 기도가 있을 따름입니다.

 

73.천당 지옥은 정말 있는가?

 

일본 무사 하나가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의 답을 얻을까 하여 선사를 찾아갔다.
"무슨 일로 오셨소?"
"스님, 말씀해 주십시오. 천당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
"흥!" 선사가 농담 반 조롱 반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어떻게 감히 자네 같은 무식쟁이 건달이 그런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더란 말인가? 되지 못한 질문으로 내 시간을 빼앗지 말게."
순간, 무사는 얼어붙었다. 세상에 누구도 일본 사무라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나? 남의 아까운 시간 축내지 말고 어서 꺼지란 말이야!"
무사는 화가 폭발했다. 번개처럼 칼을 뽑아 선사의 머리를 겨누었다. 그런데, 칼이 선사의 머리에 닿으려는 찰라, 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옥문이 열렸군."
다시, 무사는 얼어붙었다. 자기의 분노가 공격받는 상대와 함께 자기에게도 지옥문을 활짝 여는 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선사는 그것을 분명히 가르쳐주고자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있지 않는가?
심호흡을 하면서 무사는 천천히 칼을 거두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깊숙이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선사가 웃으며 말했다.
"천당문이 열렸군." 

 

74.억!

 

내 눈이 보는 게 아니다. 내가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내 귀가 듣는 게 아니다. 내가 내 귀로 듣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사는 게 아니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다.
마지막 줄에 '나'가 둘 등장합니다. 이 두 나는, 내 귀와 내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듯이, 불이(不二)입니다. 아울러, 내 귀가 곧 나는 아니듯이, 비일(非一)이지요. 둘이면서 하나요, 둘도 아니면서 하나도 아닌, 이상한 두 나가 바로 저올시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다"
구분하기 좋게, 이 문장의 먼저 나를 '나'로 표기하고 나중 나는 [나]로 표기합시다. 저한테서 '나'와 [나]가 조화를 이루면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것이고 반대로 불화를 이루면 더 이상 나쁠 수 없겠지요. 인생의 선과 악이 여기에서 비롯되니까요. [나]가 '나'를 거스르는 자리에 아담이 있고, [나]가 '나'를 따르는 곳에 예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아, 모두 헛된 말이올시다.
여기까지 이 글을 써 온 것이 저의 '나'입니까? [나]입니까?
"내가 나로 사는 것이다."
이 말을 거듭 자세히 살펴보니, 처음부터 [나]는 없고 오직 '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억! 

 

75.그리스도인을 벗고 싶은 그리스도인

 

여기에 누가 청자 항아리를 상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게 무엇이오!"하고 묻습니다.
행인 A가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대답합니다.
"청자 항아리군! 꽤 오래된 골동품이야. 값도 제법 나가겠는걸?"
행인 B가 항아리 마개를 열어 속을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보고 하더니 "술이 담겨져 있는 청자 항아리요."
바울이 바로 행인 B입니다. 그는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말하는 행인 A와 달랐어요. 바울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보지 않고 그 깊은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 거룩한 집이다."
행인 C가 항아리 안팎을 조사하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건 청자항아리에 담긴 술이오"
예수님이 바로 행인 C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을 모신 집으로 보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사람이라는 집에 살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보셨습니다. "주님, 제 몸으로 당신 듯을 이루소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 무슨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76.선택과 버릇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는 스승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유혹이라니, 무엇이 유혹일까요? 굳어진 버릇을 되풀이하여 더욱 굳어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갈 길이 먼 우리에게 가장 고약한 유혹이라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면, 자기가 지금 가야할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 것입니다. 버릇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잠들어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와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깨어 있으면 알 것이고, 알면 유혹에 넘어갈 리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77.생일이란?

 

생(生)이란 문자에는 '난다'는 뜻과 함께 '낳는다'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일은 내가 태어난 날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낳은 날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입이 하나밖에 없는지라 이 두 의미를 동시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순서를 정해서 한 의미를 먼저 말하고 다른 의미를 나중에 말해야 하는데, 어느 쪽을 먼저 말해야 할까요? 어머니가 (아이를) 낳은 날? 아니면 (어머니한테서)내가 태어난 날?
오래 생각할 것 없어요. 먼저는 어머니가 아이를 낳은 날이고, 아이가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날은 그 나중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생일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생일에 누구를 축하하지요? 생일에 그 날 태어난 사람을 축하해주는 것은 자연스럽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날에 산고를 겪으며 그를 낳아준 어머니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치하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78.북 치고 장구치는 하느님

 

엊그제 어느 교회 예배당 헌당식을 보고 왔어요. 우리가 이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친다고, 그렇게들 말하더군요. 순서도 그렇게 진행되었지요. 저는 혼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저 사람들이 성전을 지어서 하느님께 드리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굳이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저들을 통해 예배당을 지으시고, 저들에게 주시려고, 시방 저들을 통해 그것을 받으시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 홀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신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전능하신 하느님이라 해도 북 없이 장구 없이 어떻게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유능한 어머니라도 뱃속에 없는 아이를 어떻게 낳을 수 있겠어요? 

 

79.가장 좋은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산수 시간에 둘 더하기 둘이 얼마냐고 물으면 당신은 넷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 답은 존재한다. 맞는 답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둘 더하기 둘이 일곱이라고 한다면 그 답은 틀렸다. 따라서 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틀린 답을 청산하는가? 아주 간단하다. 고치면 된다. 우리가 그것을 고치는 순간 틀린 답은 저절로 사라진다. 오류가 있는 곳에 진실을 들여놓으면 오류는 스스로 사라진다.
당신은 인생의 제반 문제들을, 그것들을 공격하거나 좀더 깊이 연구함으로써 없앨 수 없다. 그 대신, 문제들을 빚어낸 당신 생각의 잘못을 고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일단 문제들의 뿌리를 잘라버리면, 그것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당신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80.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

 

우리에게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여기 말고 다른 때 다른 곳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마찬가지에요. 구원도 그렇고 깨달음도 물론 그렇습니다.
장자는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藏天下於天下)'고 했지요. 세속에 묻혀있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나라가 묻혀 있는 세속이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갈비뼈가 어떻게 가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지금 여기 있을 수밖에 없는 몸을 두고서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와 저기와 거기를 헤매고 다니는 제 마음입니다.

 

81.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누구의 설명을 듣고서 알 수 있는 무엇이 아닐세.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을 설명하는 대신에 구원받는 길을 직접 걸어가셨지. 정말 구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나? 구원  받아보시게. 그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네. 

 

82.먹어봐야 아는 국 맛

 

먹어봐야 아는 게 국 맛이고 겪어봐야 아는 게 사람이지요. 아무리 자세하게 일러 주어도, 누구를 소개하는 '말'만 듣고서 그 사람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겪어도 그냥 거죽으로만 근사하게 겪어 가지고는 아직 멀었어요. 말 그대로 밑바닥 똥창까지, 잘난 구석 못난 구석 모두 겪어본 다음에야 비로소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분에 관한 복음서의 설명을 아무리 자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해도, 그것으로 "내가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과 예수를 아는 것은, 한 여인을 중매쟁이가 건네준 사진으로 아는 것과 결혼해 살면서 아는 것만큼이나 다를 거예요. 

 

83 인생은 여인숙

 

당신이 시인하든 부인하든, 당신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압니다. 이 말이 당신에게 거친 무례로 들릴 수도 있음을. 그래도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유일 무이한 작품입니다. 당신 몸에는(마음에도 물론) 그분이 직접 일으키시거나 적어도 일어나도록 허락하시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딸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 일을 당신이 환영하든 배척하든, 그분이 몸소 일어나게 하셨거나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그리 하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그렇게 보여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서8:28)고 말하는 거예요.
당신이 인정하든 부정하든, 이는 어쩔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84. 안분신무욕(安分身無慾)

 

귀처럼 소리를 듣거나 입처럼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눈한테 아쉬움일 수도 있고 다행일수도 있듯이,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수치일 수도 있고 위안일수도 있습니다.
그게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다는 게, 평소 남들이 하는 일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날 일이기도 하겠지만, 자기와 남을 굳이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그게 뭐 부끄러울 것도 없고 화날 일도 아닐 것입니다.
옛말에 안분신무욕(安分身無慾)이라, 분수를 지키면 그 몸에 욕됨이 없다고 했거니와,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85. 용서한다는 것

주님은 우리에게 남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지 남에게 용서를 받으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지만 남에게 용서받는 일은 내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니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용서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을 용서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일, 그뿐입니다.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