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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소망교회 김대철 목사님께서 자신의 목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라며 선물로 주신 책을 이제사 읽었다. 얇은 책이지만 그 내용 만큼은 묵직한 책 한권을 읽은 것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생명'을 잃은 교회는 화석이다. '생명'을 잃은 성도는 이미 그 곤고함으로 말미암아 말라버린 갈대와 같이 푸석푸석한 종교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생명력 넘치는 교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유용한 참고서가 될것같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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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의 원제는 [Church : Why Bother?]이다. 교회 때문에 번민하는 사람들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고 사회의 복지의식, 시민의식이 성숙해질수록 교회에 대한 요구와 염려는 더욱 강해진다. 목회자들의 비리, 조직화되는 교회의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 검정되지 않는 교인들의 생각들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질수록 안타까움의 소리도 강해진다. 신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이런 불만은 교회를 이동하는 정도가 극심해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의 고민 역시, 교회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고통하고 짐을 싸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물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잘 알려진 필립 얀시는 자신이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된 사연을 여러 논리와 함께 말해 주고 있다. 특히 자신이 은혜를 받은 러셀 스트리트 교회의 예를 자주 들면서 교회의 모습을 예시하고 있다.

책 전체는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왜 교회를 붙들고 번민하는가?"에서는 저자가 왜 교회를 떠났으며, 왜 교회로 돌아왔으며, 돌아온 교회에서 어떻게 적응하였고, 교회에서 의미를 찾게 된 과정이 어떠했는가를 고백적으로 말해 준다. 2장,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교회"에서는 일반적인 지역 교회와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교회들을 예로써 들고 있다. 1,2장이 일반 교인들의 입장에서 번민을 보여 주었다면, 3장, "벽을 넘어서"에서는 교회에 대한 사역자들의 번민을 말해주고 있다. 사역자들은 섬세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평정을 유지하는 자세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① 완벽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소원은 좋은 것인 동시에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유형의 교회 안에서, 위로는 하나님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옆으로는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예배 시간에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준비된 마음을 갖고, 동시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예배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상의 교회는 완벽해 질 수 없다. 우리에게 은혜로운 공동체를 주신 사실에 감사하고 주어진 섬김을 다할 때,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될 수 있다.

② 교회는 기구가 아니라 가족이다. 봉사를 외부를 향해 할 때는 기구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교회 자체는 항상 가족 공동체이다. 가족이라는 말은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사는 곳"이라는 헨리 나웬의 말대로 운명공동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에게 맞는 사람을 찾다보면 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갈등이 생길 때 맞는 사람 중심으로 모이면 분열이 생긴다. 가족이라는 사실을 늘 생각하고, 서로 맞지 않아도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가 가족임을 인식할 때, 먼저 공동체를 이루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서로의 갈등은 해결 될 수 있다.

③ 나는 사역자로서, 섬세한 마음과 평정을 유지하는 두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교회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은혜로운 공동체로 이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다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맡기신 것처럼, 많은 일을 해나가시기 보다 주어진 작은 일을 평화 가운데서 하신 것처럼, 내게 주어진 일을 판단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감사함으로 해야 하겠다. 섬세함을 가지는 동시에, 예수님처럼 기도와 묵상 시간을 가져서 영성의 샘을 파는 일이 중단되어서는 안 되겠다. 예수님의 여유를 갖기 위한 노력은 곧 겸손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④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 교회에서 실망해도 결국 은혜와 샘물이 터져 나올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고 형제애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교회다. 교회를 떠나는 일은 혼자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는 것같이 후회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부족한 우리를 모아서 교회를 이루셨는데, 이것은 모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원하신다. 천상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는 없지만, 천상의 곡을 연주할 특권을 부여받은 몸은 교회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비난하기 이전에, 내가 그 공동체에서 연주하는 한 연주자로서, 작곡자이신 하나님을 보고 함께 연주하는 동료 연주자를 보면서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감사함이 없이, 완전한 교회가 되지 못한다고 너무 심하게 비난할 때, 그 비난은 교회로 하여금 더 교회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와 감동이다. 러셀 스트리트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게 된 계기는 미시간 호수에서 가졌던 '세례식'때문이었다. 교회는 감동 자체가 되어야 한다. 감동이 있을 때, 다음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생명이 살아난다. 감동 없이 무엇을 하고자 하면, 교회는 기구가 아니기에 반드시 고갈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감격이 터져 나올 때, 교회는 사람들에게 번민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쉼과 희망의 실체가 된다.

책의 내용을 장 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칭을 책에 있는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에, '나'는 '필립 얀시'를 가리킨다.

제1장

"빌, 여기 크고 오랜 된 배가 있다네. 이 배는 낡아서 삐걱거리며, 상하좌우로 심하게 요동친다네. 그래서 자네는 이따금씩 이 배를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하지. 그러나 이 배는 자기가 갈 길로 간다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네. 자네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일세."(J. E. Powers)

교회는 흉악한 바깥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든든한 성벽과 같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모험과 같았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교회는 죄 많은 바깥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외적인 규칙이라는 육중한 담장을 세웠고, 어느 면에서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저자가 이런 시절에는 근본주의의 엄격성이 적어도 자신을 더 큰 위험에서 지켜주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어떤 규칙들은 대단히 전횡적이고 그릇된 것이었음을 나는 결국 깨닫게 되었다. 외적인 행위에 근거를 둔 종교는 얼마 가지 못한다. 내가 한동안 교회를 떠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남부의 근본주의의 영토에서 나올 때, 불행하게도 나는 위선의 껍질뿐 아니라 신앙이라는 몸통까지 내던졌다.

오랫동안 내 신앙을 압살한 것은 저주의 불벼락만 외쳐대는 엄격한 교회, 겸손의 허리도 믿음의 신비도 없는 무서운 교회였다. 그 후로 나의 삶은 어떻게든 다시 믿음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 어떻게든 다시 교회로 돌아가려는 분투로 채워졌다. "왜 교회를 붙들고 번민하는가?" "기독교인에게 교회는 진정 필요한 것인가?" 젊은 시절 나로 교회를 등지게 한 첫째 장벽은 교인들의 위선이었다. 그 다음은 문화적인 문제였다. "예배가 무서워서,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천편일률의 순서와 반복, 법석이는 회중, 주보, 광고, 별 의미 없이 앉고 일어서는 이 모든 과정들을 참아낼 수 없었다. C. S. Lewis의 말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했으나 교회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교회 밖으로 겉돌던 20대 청춘의 나야말로 얼마나 예배를 그리워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 교회에 대한 태도를 바꿨는가? 교회는 내가 다른 방식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었던 나의 어떤 요구를 채워주었다. 잠시 교회를 떠나 있을 때면 고통받는 쪽은 언제나 나다. 내가 교회를 끝내는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공동체'에 있었다. 공동체라는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 기독교이다.

나는 어떻게 교회 회의론자에서 옹호자로, 예배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변했는가? 나의 보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가면 위를 보고, 주위를 보고, 밖을 보고, 안을 보았다.

"위를 보고"

예전의 나는 꽤 똑똑한 체하는 소비자의 태도로 교회를 대했다. "어디 내 마음에 드는 즐거운 예배인가 보자."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일러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극장의 일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중들의 마음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오늘 내가 예배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질문하며 교회 문을 나서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나의 예배로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이제 나는 예배에 임하면 위를 본다. 강대상 너머 하나님을 향해 나의 시건을 고정시킨다. 시선의 변화이다. 가장 중요한 관객은 회중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교회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혹은 약한 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혹은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혹은 교제를 장려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성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예배의 핵심에 분명한 강조점을 둔다. 이스라엘은 예배의 형식에만 몰두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핵심은 놓쳤다(시 50:9-10). 가톨릭 교회는 성찬 예식 혹은 미사가 예배의 중심이며 그들 자신은 예배를 돕고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나는 음악이나 예배순서 등의 부가적 장식물에는 이제 마음 쓰지 않는다. 예배의 목적, 곧 하나님과의 만남을 제쳐두고 부수적인 장식물에 정신을 빼앗겨 무엇보다 중요한 말씀을 놓쳤으므로.

"주위를 보고"

왜 나는 갑자기 주일 아침을 고대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유쾌한 다양성 때문이다. 이 교회에서 나는 위뿐 아니라 주위 또한 보는 법을 배웠다. 나는 나와 현격하게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예배했다. 외형적으로야 우리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이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었다.

사람들은 우선 이질집단의 갈등이 해결된 후에야 공동체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캇 펙에 따르면, 지도자들이 공동체로 사는 방식부터 먼저 결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하나씩 갈등을 풀어갈 때, 평화는 좀 더 자연스럽게 온다고 한다. 공동체가 먼저다. 우리를 갈라놓는 갈등과 문제는 나중이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일치를 추구하되 획일이 아니며, 다양성을 추구하되 분열이 아닌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나는 교회를 찾을 때면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본다. 위로 보고 주위를 본다. 나는 흑인들이나 오순절 교회의 분방한 예배에서, 노인들의 깊은 신앙에서, 날마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며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들의 노고에서 배운다. 나는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회중을 애써 찾는다.

"밖을 보고"

갈등이란 나를 먼저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타인을 섬기려는 마음이 분주하면 나 자신은 그만큼 덜 생각하게 된다. 복음전도자 루이스 팔라우(Luis Palau)는 흙의 비유를 들어 교회의 본질을 포착했다. 그에 따르면, 교회란 거름과 같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이웃에 악취를 풍긴다. 그러나 땅에 골고루 뿌리면 세상을 비록하게 한다. 나는 교회를 찾을 때면, 밖을 볼 줄 아는 교회를 찾는다. 밖을 바라보고 그쪽으로 손 내미는 행동이 교회의 성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나는 믿는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사랑, 그것이 믿음의 역설이다.

"안을 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이, 아무 조건 없이 온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아돌프스라는 흑인 청년이 있다. 그는 월남전 참전 용사였고, 분노와 광기가 심해서 시설에 수용되기도 했고 약을 먹고 교회에 와야만 교회가 조용해진다. 그는 몇몇 교회를 쫓겨 다녔다. 그는 "주여, 다음 주에 이 교회 흰둥이 목사들의 집을 모두 불살라 버리소서."라는 공중 기도를 했다. 그는 차비가 없을 때는 20리 길을 두 시간을 걸어서 교회에 올 정도로 교회를 찾는다. 교회를 이 청년을 사랑과 은혜로 섬겨 주었고, 그는 자신이 광기가 생겨날 때마다 교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자제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아내가지 얻었다. 정식 교우로 등록했다. 은혜란 이와 같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오는 것. 교회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기회를 한 번 더 줬다. 주고 또 주며 길이 참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린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다시 아돌프스에게 베풀었으며, 이 다함없는 은혜로 나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며 나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지 보았다. 이제 나는 이와 같이 은혜가 넘치는 교회를 찾는다.

"호숫가의 새로운 표상"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폴 트루니에) 대다수의 교회가 예배보다는 즐거움을, 다양성보다는 획일을, 포용보다는 배타를, 은혜보다는 율법을 내세운다. 가시적인 교회에 대한 실망보다 더 내 믿음에 장애가 되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점차 씨족주의와 패거리 의식으로 분열해 가는 세상, 한편으로는 우리를 주시하는 세상 앞에서 그들과 다른 형태의, 대안적 사회를 실현할 책임이 있다. 나는 러셀 스트리트 교회가 미시건 호수에서 침례식을 행할 때의 감격을 생각하면서, 세상과 다른, 새로운 공동체의 감동적인 모델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호숫가에서 세례식을 거행하며 감격하고 찬송하는 모습은 옆에서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되며, 그들의 행복과 다른 것이 교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호숫가에서 세례를 주고 받는 교회의 모습은 세상과 모순이 되었지만, 그날 이후로 교인들은 공동체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사회에 봉사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해 나갔다. 자원봉사, 법률상담, 미혼모의 낙태 문제 돕기, 노인을 위한 주택 단지 건립 등. 이 모든 것은 호숫가 백사장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를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처음 받은 은혜가 그렇듯 값없이, 조건없이 주고자 한다. 내가 배운 교회는 실로 세상의 방식과는 현격하게 다른 새로운 표상이 될 수 있으며,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에서는 세상과 모순된다. 이만하면 교회를 향한 우리의 번민이야 가치 있는 일 아닌가!

제2장

러셀 교회는 가난한 자들이나 노숙자들 혹은 괴짜들을 내치지 않는 도심지 뒷골목 교회이다. 하나님은 일사불란하게 통제되는 곳에도 계시지만, 러셀 교회처럼 소동과 혼란을 떠안으며 가까스로 유지되는 곳에도 계신다. 유진 피터슨이 본 대로, 교회란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생각하신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다. 성전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몸이라고 했다. 나도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바울처럼 여러 가지 이미지를 떠 올려 본다.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여러 교회를 순례했고,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는 여전히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적인 교회를 추구하며 보낸 시간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교회는 이상적인 모형을 추구하지만, 어느 교회도 그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상적인 모형이 필요하다. 적어도 그 모형이 우리의 지향점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교회의 유형 예 : "하나님의 열두 단계 모임"

이 교회는 사무처도, 급료를 받는 직원도 없이 매주 엄청난 수의 헌신적인 회원들을 불러들인다. 이들은 금주회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회원들 상호간의 근본적인 관계, 곧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에 바탕할 때에야 모임이 유지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용서와 힘을 구하겠다'는 열두 단계를 한 음성으로 외친다. 술을 끊지 못하는 친구는 술의 유혹이 너무 강하다고 느껴지면 새벽 4시에라도 익명의 금주회 회원을 부른다. 친구가 부를 때마다 금주회의 다른 친구는 와서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도와 준다. 벼랑 끝에 있는 알콜 중독자들을 서로가 붙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친구는 지역 교회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장점을 그 모임에서 얻게 되었다. 지역교회에는 없는 사랑이 여기에는 있다.

교회의 유형 예 : "하나님의 운전면허시험관리관"

사람은 자기와 닮은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운전면허시험관리단에 가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나는 유년 시절에 마음 좋고 넓고 아저씨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교회 생활을 했다. 내 유년의 교회가 이와 같은 사람들을 한 데 불러모았다는 사실은 나의 기쁨이다. "…세상의 갑남을녀가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이다…."(존 하워드 요더)

교회의 유형 예 : "하나님의 응급실"

교회를 응급실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밤늦도록 열려 있고, 찾아가기도 쉬우며, 예기치 않은 응급상황으로 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돌봐주는 곳. 육신이든 영혼이든 크고 작은 상처로 신음하는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교회가 있다. 교회역사를 보면 교회는 수치와 슬픔을 느끼게 하는 과오를 남겼지만,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상처를 싸매 왔다고 할 수 있다. 교회란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들고 오는 곳이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 목발이 필요한 자들에게 목발이 되어 주신다.

교회의 유형 예 : "하나님의 고가철도"

고가철도를 타고 가다보면 큰 교회도 보이지만, 가난하고 피폐한 지역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작고 초라한 예배당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는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다. 크므로 겸손한 자들이 와서 높임 받는 곳, 작으므로 높은 자들이 낮고 낮아져야 들어올 수 있는 곳. 교회는 실로 이와 같다.

교회의 유형 예 : "하나님의 가족"

성서의 역사 접근법은 가족이다. 기구란 지위와 서열에 근간을 두고 모인다. 가족 내에서 지위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아이는 태어나는 것 그 자체로 가족의 권리를 얻는다. "가족이란, 단순히 싫고 좋고를 떠나, 무관심과 경쟁은 물론 증오조차 공존하는 한 세계에서 어떻게 사랑이 존재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곳이다."(John Updike) 강한 자들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는 것이 건강한 가족이다. 가족이란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간 기구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가족으로 편입되어, 그 결과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나와 같지 않은 이상한 사람들의 동물원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불가항력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 이상한 동물원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끈이 우리를 묶기 때문에 그렇다. 이와 같은 공동체는 아무래도 다른 인간 기구보다는 가족과 유사하다. 헨리 나웬은 공동체를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사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나웬의 이 정의는 명절날 모여 앉은 식구들에게도, 주일날 모여드는 회중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의 유형 예 : "하나님의 복지관"

교회는 하나님의 복지관이다. 눈먼 자를 치유하고, 갇힌 자를 풀어주며, 주린 자를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러니까 예수께서 애초에 당부하신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이 땅에 세워진 하나의 기구이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보고는 곧잘 실망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 가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고린도전서가 있다. 우상숭배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험담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의 비유를 충족시켜 줄 교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그 비유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희망이 있다. 우리 인간들이란 하나님께 끝없는 고통을 안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따뜻한 관계를 나누신다. 그렇다면 나 역시 내 주변의 교회에 대해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제3장

밖의 시선으로 교회를 들여다 볼 때는 사실 비판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일단 교회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헌신하게 되자,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교회의 모범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되었다. 이상과 현실의 습관적인 괴를 나 또한 개인적으로 체험했다. 사역에는 아무리 헌신적인 일꾼들이라도 주저앉힐 고통과 개인적인 희생이 따른다.

그렇다면 사역자들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나의 발을 보면 연약한 살로 되어 있지만 마찰을 겪은 후 굳은 살로 바뀐다. 이처럼 우리는 섬세한 마음과 무딘 마음을 갖고 있다. 먼저 섬세한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해,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먹는다는 뜻이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가장 잘 보살피는 사람이다. 눈물을 먹고 타이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과연 유익한가? 나의 고통에 눈물짓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그것보다 큰 위로가 있을까? 섬세함이란 유익하다. 고통에 여리고 섬세한 마음은 우리를 깊게 하는 자원이, 예기치 않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 눈물이 또한 우리를 깊게 할 수 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라고 깊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시리라.

그런데, 사역자들에게는 섬세함이 어떤 때는 스트레스와 번민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 가장 큰 장점인 예민함이 이제는 가장 큰 적이 된다. 자신을 깊고 풍성하게 했던 고통이 이제는 걸을 수조차 없게 하는 위험 요소가 된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에게는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몸 바칠 수 있는가?

1. 나는 사람 자체를 염려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고통에 더 노심초사하지 않는가? "남의 삶에 참견하는 대신 네 삶에, 네 건강에, 네 온점함에 정성을 쏟으라. 그것이 너 자신과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타인을 돌볼 수 있도록 너를 돌보라. 남을 돕겠다고 피를 흘리되 죽을 정도로 흘리는 마음이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예수님은 간청하는 사람은 모두 치유해 주되, 만나는 사람을 모두 치유해 주지는 않았다. 그분은 인간이 스스로의 고통을 끌어안을 권리를 인정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인간 자유의 존엄성에 대한 놀라운 믿음만이, 실로 끝간데 없는 금도만이 이 태도를 가능케 한다. 예수님은 결코 당신 생애에 온 세상을 회개시키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준비 안 된 사람들까지 모두 치유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 나웬은 사역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두 가지 태도는 죄의식과 구원열망이라고 결론지었다. "죄의식의 문제는 그것이 일을 통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죄의식은 어떤 봉사행위로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뿌리가 깊습니다. 한편, 죄와 가난과 착취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 또한 마찬가지로 해로울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불철주야 일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그들의 임기 중에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경우를 당합니다. 사역의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만 기대를 걸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존중심을 급속도로 상실합니다.…우리의 죄의식이 사라졌다고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구원하신다고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야 우리는 진실로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통에 예민하다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은사이다. 그러나 여타의 많은 은사가 그렇듯 그것으로 통제하고 군림하려 한다면, 파멸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곤고해 보이는 사역자들을 보면 걱정스럽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내 십자가가 아니다."(존 던)

2.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귀하게 보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 어떤 사역자들은 교만, 탐욕, 음행, 폭력, 시기, 불의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름받아 살아가지만, 생존 그 자체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안식과 여유를 갖기 힘든 현실 문제로 힘들어 한다. "아무도 나를 존중하는 것 같지 않다. 교회 재무위원들은 언제고 예산을 절감하려고 애쓰는데, 만만한 게 내 상여금 따위다. 그러면 내 사역은 존중하느냐고? 교인들은 내가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보고서를 쓸 정도로 꿰고 있다." 한 목사의 말처럼, 공동체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느낌은 공동체 내에서 사역자들을 보조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해결될 수 있다. 사역자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로 그들은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도 있다. 세상의 기구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중심을 표하는데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가? 과연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믿음의 대표자들에게 존중심을 표하기 위해 마땅한 자리를 마련하는가?

3. 나는 하나님과 삶을 혼돈하고 있지 않은가? 더글러스라는 사람은 도심지 빈민사역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결단을 하는 순간, 아내가 암에 걸렸고, 열두 살 난 딸이 중상을 입었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과 삶을 혼돈하지 않는 법, 나는 이것을 오래 전부터, 특별히 이번 비극을 통해서는 더더욱 절실하게 배웠습니다.…나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도 내게 닥친 이 비극을 보시며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나와 같이 분노와 비탄에 잠기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내게 닥친 일로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공평하시므로 삶도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이 아닙니다. 삶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다면 그것은 항구적인 관계가 못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형성시켜 나간다면, 우리의 육체적 실재가 무너져도 능히 견딜 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삶의 불공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4. 나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내부로부터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 갇힌 자의 신음, 상처입은 마음의 괴로움, 불의, 테러, 공포, 잔악에서 백성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강한 압력을 느꼈을 것이다.…온 세상을 복음화 하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아무도 일할 수 없는 어둔 밤이 되기 전에 서둘러, 불같이, 쉬지 않고, 일하고 일하면 안 되는가? 그러나 예수의 실재는 얼마나 달랐던가!…그는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도, 길을 가다 조용히 멈추어 서서 한 사람과 이야기한다…나사렛과 베들레헴이라는 작고 작은 고을 한 귀퉁이에서 순종한다…이것이 그가 길거리에 선 한 사람에게 시간을 내주는 이유이다. 모든 시간은 아버지의 것이 아니던가. 이것이 그에게서 불안이 아니라 평화가 흘러나오는 이유이다."(기다리는 아버지) 테레사의 수녀회 수녀들은 분주하지 않고 봉사 활동을 한다. 그들은 손님을 맞이 하기 전에, 일찍 일어나 예배와 하나님의 사랑에 잠긴다. 방문객들이 오면 그들은, 먼저 예배실에 가서 기도하는 것으로 그곳 방문을 시작해 달라고 권고한다. "이 집의 주인께 먼저 인사합시다." 자기들 힘으로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해 번민하지 않는다. 펌프의 물이 마른 것처럼, 탈진한 러셀 교회 목사에게 한 여성이 말했다. "목사님, 목사님의 우물이 말랐으면 더 깊이 파야 합니다." 일 주일간의 은둔을 통해 그는 깨달았다. 밖으로의 여행을 지속하려면 안으로의 여행을 더 마음써야 함을.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초연함을 얻으셨다. 나는 내게도 예수님과 같은 초연함을 달라고 기도한다. 아버지께서 맡아주시므로 나는 고요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만이 타인을 위한 사랑과 나를 위한 사랑 사이의 어려운 길을 능히 걸어가도록 도우실 것이다. 여리고 예민한 마음과 강하고 둔감한 마음 사이로 난 그 길을 말이다.

교회는 정확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인간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사명에 실패하고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험이다. 완벽을 기대하고 교회에 들어가는 자는 이 모험의 본질도, 인간 조건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한다. 비난자들은 위선적이고 실패 일색이며 신약성서의 높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무능력한 교회는 해산해야 한다며 분란을 야기할 수 있다. 해산? 교회 예배가 지루해도 우리는 비록 작곡가가 애초에 구상한 음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겠지만, 불완전한 그 음이나마 세상에 들려줄 사람들은 우리 외에는 없다.  (강대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