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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읽으면서 밑줄그은 부분입니다.

1.일곱째날의 약속

때때로 우리는 순간의 짧은 기도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마치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시고 오직 그 사람이 기도하기만을 기다리셨던 것처럼 기도하자마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강한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금방 응답하시면서 내 기도에는 묵묵부답이십니까?" 하고 불평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 응답의 순간만을 놓고 본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응답의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면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짧은 기도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오랜 동안 깊은 기도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여리고성 앞에서의 6일은 크고 위대한 능력의 일곱째 날을 위한 준비였던 것입니다.

2.여리고성의 교훈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리고성의 교훈을 통해 그 난공불락의 성을 허무는 방법을 우리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성을 무너뜨리고 싶다면 새벽에 나가 믿음으로 그 성을 도십시오.
여러분에게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여러분 자신일수도 있고,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가족일수도 있으며, 벽에 부딪힌 사업상의 위기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건강이나 학업성취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껏 극복할 수 없었던 상황을 극복하게 하시고, 넘을 수 없었던 벽을 넘게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에 그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위대함을 목격할 새벽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3.기적의 새벽을 기다리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수많은 이적적인 도우심을 자세히 관찰하며 느끼는 것은 우연히 생긴 기적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그저 기적일 뿐이지만,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린 당사자에게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그 기적은 절망의 어두운 밤을 믿음의 기도로 지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지는 고통과 절망들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절망과 고통을 가지고 기도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저 주어진 절망에 순응하며 고통받으며 살아가느냐를 결정하는 것이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절망의 밤을 히스기야처럼 기도로 보낸 사람에게만 새벽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의 밤을 원망과 슬픔과 무기력한 태만으로 보낸 사람에게도 새벽은 찾아옵니다. 하지만 두 새벽은 다릅니다.
히스기야는 비통한 절망의 때를 지나야 했지만, 기도에 자기를 바침으로써 환희에 찬 새벽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맞이하는 새벽은 달라야 합니다. 새벽마다 새로운 영광의 환희를 경험하는 날들이 되어야 합니다.

4.당신의 새벽은

성경은 새벽, 혹은 이른 아침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그날의 창조가 모두 끝난 후에 그날을 묘사하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고 표현합니다.
하루의 그 수많은 시간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침이 되는 시간에 주목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아른 아침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새벽이었습니다. 만나가 내린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이 무너짐을 믿으며 성을 돈 것도, 홍해가 갈라진 것도 역시 새벽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새벽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눈을 뜨는지는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사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부지런한 사람인지, 게으른 사람인지도 그 사람의 새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무슨 생각으로 눈을 뜨고, 누구와 함께 새벽을 맞이합니까?

5.근본을 해결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는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의 방법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보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 해결이 지니는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문제의 해결은 이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끝장을 보는 근원적인 해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리라는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근본적인 해결 대신 미봉책으로 때워 버리고 그것으로 잠시 평안함과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미련함이 우리의 삶을 자꾸만 같은 문제에서 거듭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6.누가 손을 들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손을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는 기도의 세계를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실 때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할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도록 그들은 온전히 그 기도하는 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보다 우선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해결받아야 할 문제의 한 가운데에는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실 때 누가 손을 들겠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모임에 끊임없이 문제가 생길 뿐 해결되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해결의 도구가 될 기도의 사람이 없어서일지도 모릅니다.
가정에는 마땅히 가장이 있어야 하듯, 성도의 가정에는 마땅히 영적인 가장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식구는 피곤하여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수 없어도 그 사람만큼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7.우리시대에 필요한 지도자

우리 시대는 특별히 기도하는 영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로서 목소리를 높이고 권위를 세우는 대신에, 그 공동체를 하나님의 뜻대로 세우기 위하여 기도로 자신을 구별하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여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늘 기도하는 신자들 가운데서 미래의 지도자들이 배출됩니다.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눈에 드러나는 섬김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도의 세계로 자신을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드러나는 문제들에 몰두하느라, 드러나지 않는 기본적인 섬김이 망가지면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로 구별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으며, 핍절하고 곤고한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8.기도하는 손

하나님께서는 다른 손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기도하고 들려지던 모세의 그 기도하던 손을 원하셨습니다. 그 기도하던 손이 펼쳐질 때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일 열렸고, 바다가 합쳐지며 이스라엘의 대적을 휩쓸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바다는 무엇입니까?
그 바다를 향해 당신은 손을 들고 있습니까?
당신의 그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까?

9.새벽에 기도하세요

새벽은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의 위대한 기도로 다져진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하심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환경적인 제약이 가장 적은 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로 자신의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시간으로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새벽에 기도하십시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길을 떠나는 마음으로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이른 새벽,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명상 속에서 눈뜨고 새벽 이슬 같은 은혜로 마음을 적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10.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라

유혹이 많고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광야를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만큼이나 곤고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이 공급해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만 은혜가 떨어져도,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무수한 결핍에 시달리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배부를 수도 만족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

11.새벽에 기대하라

새벽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촉촉이 적셔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새벽에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새벽에 성도의 삶에 어울리는 정상적인 하루의 출발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직장으로 나가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출발하는 하루의 삶에 거룩에 대한 갈망이 깃들일 수 없습니다. 그 삶에는 단지 치열하게 완수해야 할 일과가 있을 뿐입니다.
새벽에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난다면, 하나님을 묵상하고 얼마간의 시간을 기도에 바친다면, 아침시간을 은헤에 대한 사모함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하는 하루 하루가 쌓여서 그 사람의 삶을 새벽 기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생이 되게 합니다.

12.왕년의 신앙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꼭 10년, 2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년의 간증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옛날에 경험한 은혜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초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날마다 간증이 있습니다.
이전에 아무리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감격이 현재적으로 유지되고 있지 않다면, 은혜 없이 사는 지금의 처지에 대한 위로에 불과합니다. 마치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폐인이 된 운동 선수가 그 옛날의 화려했던 선수 시절을 회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곧 오늘 만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3.하늘 이슬에 젖으며 하루를 시작하라

우리에게는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심정으로 새벽에 행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말씀과 기도생활입니다. 교회 역사로 볼 때에도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보는 것, 이 두 가지는 개인의 경건의 삶을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두 날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매일매일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을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영혼에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아무리 특별한 사람이라 해도 매일 매일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14.어느 바이올리니스트의 고백

어느 바이올리니스트는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바이올린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삼일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들이 안다" 그렇게 일평생 바이올린만 연주하며 사는 사람도 연습의 공백이 표시 나기 마련인데, 하물며 완전히 숙련되지 않은 우리의 경건 생활의 공백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지대하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무리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로 다져지지 않은 모든 신앙과 활동과 섬김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5.가능한 시간은 언제입니까?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피곤하고 일이 많아서 새벽시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가능한 시간은 언제입니까?
새벽시간은 기도하고자 하는 신자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 새벽마저 안 된다면 경건의 시간을 가질 만한 다른 시간은 거의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16.시간을 밀도있게 주도적으로 사용하라

시간은 인간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뜻과 상관없이 그 나름의 질서를 따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밀도있게 주도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면, 늘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면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루라도 시간을 덧없이 흘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 조바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수개월 아니 수년을 허비하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가 위대한 경건의 사람들의 삶과 우리의 삶과의 매울 수 없는 간격의 출발입니다.

17.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새벽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체질이나 건강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벽의 가치를 어느 정도 중시하느냐입니다.
새벽기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다양하게 변명한다 할지라도, 성도가 기도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조깅을 하고,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자기 발전을 위하여 일과를 시작합니다

18.정말로 기도할 수 없다면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없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처럼 살려면 그러한 환경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희생하면서 쌓아 올린 일생의 업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왜냐하면 그 삶을 산 당사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19.기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간 기도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신을 기도에 바치며 산 사람들 치고 충분한 수면을 누렸던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기도의 사람들에게 이른 새벽은 잠자는 시간이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해도 아직 뜨지 않은 그 이른 새벽에 깨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헌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헌신입니다. 시간과 몸과 마음, 자신의 존재 전부를 헌신하여 밎는 열매가 기도입니다. 따라서 시간을 다스리고 육신의 욕망을 이기지 않고서는, 절대로 참된 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20.하루의 첫 열매를 드립니다

새벽에 드리는 기도는 번잡한 삶의 염려로 훼방 받지 않습니다. 새벽은 새롭게 소생하는 만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고백이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과 대면할 기회를 놓치면 하루 종일 그런 기회를 갖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벽기도는 그러한 시간적인 한적함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새벽 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전에는 이 땅의 것들을 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의 음성과 마음의 첫 열매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여 그 하루도 은혜의 날로 만들려는 거룩한 시도인 것입니다.

21.새벽기도를 외면하면

새벽기도의 이 소중한 의미를 외면한 채 경건의 시간을 놓치며 살아가게 되면 그 영혼은 점점 피폐해져 나중에는 기도하려는 욕구조차 잃어버리고 맙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기도하기 싫어서 기도시간을 놓치지만, 나중에는 기도가 그 사람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경건 생활을 놓치고 살던 날이 길면 길수록, 나중에 그 곤고함을 견딜 수 없어 무릎을 꿇게 되었을 때 느끼는 거절감이 커질 것입니다.
우선 직접 시도해 보십시오. 새벽기도는 이성적으로 예상하고 계획하여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되었을 때 시작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으로 담대히 결단하고 시행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상황이 주어지기를, 시간이 나기를 기다려서는 영원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22.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시간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팔을 드시고 시간을 축복하시면 똑같은 시간을 가지고도 이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 매일 여덟시간을 자야 하던 사람이 여섯 시간 자고도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고, 네 시간 걸리던 일을 두 시간 만에 마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뢰하며 용기 있게 자신을 새벽기도에 헌신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이 누리던 시간 위에도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3.예수님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함으로 십자가를 맞이하고, 기도함으로 그 인생을 끝낼 수 있으셨던 것은 그분의 삶이 오랫동안 기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한일이었습니다. 바쁘고 고단한 공생애 기간의 삶 속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생애 전반이 기도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 기도 생활이 깊이 뿌리를 박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누적된 기도의 습관이 만들어 낸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생을 기도로 살아오셨기에 기도로 인생을 마칠 수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삶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이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24.예수님의 능력의 비결

예수님의 교훈 속에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없던 그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영적 권세였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두고 하는 비슷한 이야기인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서기관들의 그것에는 없었던 감화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큰 힘과 권세를 느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끊임없이 이 영적인 능력을 솟아나게 하였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희생적인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을 드리는 희생이 없이는 결코 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줄 만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밤늦도록 귀신을 내어 쫒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하늘나라의 참된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에야 겨우 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새벽 미명에 그분은 일어나셨습니다. 가장 꿀 같은 잠이 쏟아져 올 그 시간을 기도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25.기도의 시간

기도를 하면서 느끼는 것 한가지는 기도는 많이 한다고 숙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친밀한 상태는 기도자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 늘 가변적입니다. 기도에는 숙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하면 기도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는 합니다. 이것은 숙련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도가 구체적이 되고 기도의 제목이 많아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처음 기도하는 사람은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날들이 쌓이고 쌓여 10분하던 기도가 30분이 되고 30분 하던 기도가 3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26.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

신앙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꼭 기도하게 되는 사람은 평소에 늘 기도로 살아오던 사람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사랑하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자 사랑이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품고 있던 사랑의 마음이 필연적으로 그 순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논리보다 뛰어나며 수많은 은사의 체험보다도 훨씬 뛰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논리, 모든 두려움, 모든 역경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7.사랑의 본질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댈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며 신앙의 모든 신비한 영적 체험도 초월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나 영적인 상태는 쇠할 때가 있고 성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주실 때가 있고 거두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쇠하거나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된 사랑의 본질입니다.  

28.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돌이키고 회개할 것을 권면 하는 것은, 사실 성도로 하여금 양심에 자유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죄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는데도, 그들의 양심이 그 해방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그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이 자신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29.주님 앞에 홀로서기

신자에게 있어서 명예, 지위, 직분, 이 모든 것들은 껍질에 불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는 그러한 껍질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것이 영적인 회복의 지름길입니다.
껍질을 붙들기 시작하면 점점 더 자신의 진솔한 모습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의 세계에서 솔직함과 정직함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진실해지지 않으면 깊이 기도할 수 없는데, 이는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겉치레는 세상에서만 통용 될 뿐, 하나님께 통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자신을 비우기 원하십니다. 그런 모습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겸비하여 지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낮아질 때 회복이 시작됩니다.
주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정직한 홀로서기 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는 목사도, 전도사도, 구역장도 아니며 그저 주님이 사랑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한 마리 어린양일 뿐입니다.

30.주님을 사랑하는 삶은 다릅니다.

어떠한 역경도 주님을 사랑하는 삶에 어두움을 드리울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이기에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슬픔을 당해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늘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