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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의 <묵상시리즈5-성찬과 언약>를 읽다


1.언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처음으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에 맺은 계약으로, 주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기로 하신 언약입니다. 자신의 행위로는 도저히 영생을 얻을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인간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순종을 통해서 화해를 선언하시고 인치셨습니다.


2.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아담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과,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과의 언약은 파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 중보 사역의 수혜자인 성도는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높이고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신 그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읽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알려 주고자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물과 피를 다 쏟게 하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함께,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의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심각성이었습니다.


4.우리는 언약 관계 안에서 사죄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우리의 죄악은 전부 사해졌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마7:19)
자기 의를 믿고 헤엄치다 지쳐 표류하던 영혼은 새 언약의 대륙위에 상륙할 때,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표류하고 있다면 복음의 등대를 바라보고, 무사히 상륙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5.한번 맺은 언약은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문제 안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의 흔한 오류는 자신의 상태에만 집중한 나머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위에 서지 못하고 상태에 따라 흔들리는 것입니다. 상태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영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는 구원의 반석이 됩니다.


6.새 언약의 자비를 맛본 사람들은 언약의 수혜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언약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은 없습니다. 언약의 수혜자가 된 이후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입니다. 그에 합당한 삶이 이어질 때, 새 언약 안에 허락된 축복을 향유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7.성찬을 합당하게 받은 자들은 성찬을 통해 제사의 일반적 목적들의 성취를 재확인합니다. 그 목적은 구체적으로
첫째는 죄의 용서입니다.
둘째는 성결의 회복입니다.
셋째는 생명의 교통입니다.
넷째는 언약적 연대입니다.


8.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성찬은 반복될 필요가 없는 이 완전한 제사를 허락하신 은혤르 기리는 것입니다.


9.화목제 예물은 제사 이후, 예물을 드리는 자, 제사장, 하나님이 모두 함께 그 예물을 먹었다는 점에서 다른 예물과 달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려 한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비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마음으로 다시 채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실만한 예물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10.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평화뿐 아니라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이 이루어지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로 말미암은 평화가 삶으로 흘러나와 이웃과의 관계에까지 적용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명령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11.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사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말씀과 성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여기서 성례는 세례와 성만찬을 포함합니다.
은혜의 방편은 우리 편에서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은혜를 얻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통로로 정하신 하나님의 방편입니다.


12.성례로서의 성찬은 표(sign)이며, 동시에 인(seal)입니다

성례 자체가 어떠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례의 의식 자체가 성례에 참여하는 우리를 성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받을 때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성례가 우리에게 은혜 언약이 체결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일 뿐만 아니라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또 앞으로 계속적으로 부어지는 은혜에 대한 인이라는 의미를 깨닫고 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13.성찬이 표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우리도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 되었다는 것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서 받으셨던 모든 멸시와 육적인 고난, 의로우신 분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렬함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에 불타셨던 그분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살며 겪으셨던 모든 영적인 고통들, 이런 것들에 믿음으로 동참 하는 것입니다. 성찬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은혜를 주십니다.


14.성례인 성찬을 통해 신자는 실제적인 유익을 누립니다

성찬은 교제의 식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예수님과의 마지막 식사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서 새롭게 먹고 마실 것을 기대하며 성찰의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은 다시 오실 예수님과의 교제에 식사이며, 성령 안에서 기쁨과 환희가 있는 잔치입니다. 이러한 교재 속에서 나누는 성찬은 미래에 있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현재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맛볼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을 더 큰 즐거움과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기대하게 됩니다.


15.성례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의 표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백했던 사랑의 서약이 여러분의 인식 속에서는 희미해졌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 고백을 기쁘게 받으셨고, 여러분이 다시 그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16.설교와 성례는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개혁주의적 가르침에서 중요하게 강조되었던 원리 중 하나는 설교와 성례가 분리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리였습니다.
말씀은 성례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하지만, 성례는 말씀이 없이는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례의 모두를 은혜의 방편으로 제정 하셨고, 그 두 가지 방편 모두 그리스도를 중심적인 내용으로 소유합니다. 그 내용은 믿음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고, 말씀과 성례을 통하여 준비된 은혜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도 믿음입니다.


17.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시려고 절기를 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때로는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그 놀라운 일들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묵상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크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배은망덕 하지 않는 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는 이것을 떠올리고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18.성찬은 성찬일 뿐입니다

성찬의식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 은혜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의식 안에 실제로 그 은혜가 포함 된 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 신앙적 유용성과 복된 의미들에도 불구하고 성찬은 성찬일 뿐입니다.


19.성령의 역사 없이 성찬에서 은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토록 가까이에서 들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비로소 그들은 보고 들었던 그 사실에 대하여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찬의 의례적인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예식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시면,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복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도 떡과 잔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로 보이는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우리를 위한 그 거룩한 죽음과 부활을 깨달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성찬은 초대교회의 규칙적 신앙 행위로 자리 잡았으며 초대교회 성도들은 떡을 떼기 위해 안식 후 첫날에 모이고는 했습니다.

성찬은 초대교회부터 규칙적 신앙 행위로 자리 잡았으며, 초대교회부터 놀라운 영적 유익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성찬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을 참된 연합에 세계로 초청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의 성찬을 외면 하시겠습니까?
혹시, 그저 형식적으로 성찬에 참석할 뿐 그것을 통해 특별한 의미를 누리지고 있지 못한 불쌍한 성도입니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여러분의 잘못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성찬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지 않기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1.십자가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가장 중심적인 구원 행동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향해 달려오신생애였고, 그뿐만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역사도 십자가를 향해, 십자가를 통해 펼쳐졌습니다. 이렇게 모든 역사의 중심이 되는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중심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22.십자가 진리에 대한 생생한 경험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대할 때, 우리를 향하여 격렬하게 타오르는 진노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치셔서 그 진노의 격렬함만큼 자녀들에게 사랑을 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 앞에 설 때, 인간은 진실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님을 뜨겁게 만났던 ‘그때’ 만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의 눈시울이 붉어집니까?


23.성찬은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게 하는 효과적인 방편입니다

칼빈의 따르면 성찬 예식의 목적은 “우리가 이제 주님의 몸을 먹고, 먹음으로서 그 유일한 희생제사의 공효를 우리 안에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몸이 우리를 위해 ‘단번에 완전히’ 희생 제물로 드려졌음을 우리에게 확정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몸이 단번에, 완전히 희생 제물로 드려진 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결국 성찬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4.성찬은 주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 고난을 기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엇이라 가르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깨달은 진리 위해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과 경외의 정세를 갖고, 장차 주어질 영광스러운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은 나그네처럼 순례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와 싸우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25.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창조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서 철저하게 ‘종’으로 사셨습니다. 종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시어,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필요하다고 하였을지라도 그렇게 자기를 버려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다면 그분은 결코 죽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이 감상적인 문제가 아니듯 성찬 또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예식이 아닙니다.


26.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순교의 죽음이 있기 전에 먼저 순교자적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십자가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삶은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알 수는 없지만, 예수는 그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웠던 어린이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성하신 예수님께서는 3년간 공생애 기간을 사시면서 문둥병자, 각색병자, 저는 자, 눈먼 자  등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또한 갈릴리와 온 유대를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 하셨으며, 그분을 따르다가 허기진 사람들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먹이셨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 하시 다가 오히려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으니 실로 초인적인 생애를 사셨습니다.


27.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영혼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고통하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풍성한 식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먼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눠먹은 우리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위에 죽으심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성실하게 행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28.성도는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입술로만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는 예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죽은 척만 할뿐 진정으로 예수를 위해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히 하나님만을 위해서 자기의 인생을 모두 쏟아 부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함께 완전히 죽었기에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29.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의 첫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은 정죄 받는 것 같은 의미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항상 자기 신분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2;1)라고 말입니다.


30.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짐을 지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가 확신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은혜에 맞는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역사 하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런 고백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31.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치유를 받습니다

성찬은 마음에 빛을 주는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합니다. 찬란한 십자가에 빛을 받으면서 우리가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십자가의 빛 아래서 의미 있는 것인지를 다시 점검해 보는 기회가 바로 성찬에 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던 헛된 것을 헛된 것인 줄 알고 버리며 우리의 인생이 어디에 매이고 묶여야 하는지를 바로 알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는 일들이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는 성찬 예식에서 일어납니다.


32.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성찬을 행하신 것은 제자들이 신앙을 강화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중요한 일을 이전에는 하시지 않으시고, 잡히시던 그날 밤에 되어서야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제 몇 시간 후면 사랑하는 제자들을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그들과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그 친밀함과 돌보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동행해 주셨던 예수님을 잃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 제자들의 모습은 아직도 미숙해 보였고, 여러모로 연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잡혀 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날 밤에 제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성찬을 행하심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 관계가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심어 주셨습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을 제자들에게 넣어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33.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성찬을 행하신 것은 구속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그 종 되었던 신분에서 풀어 줄 것을 애굽의 바로왕의 요구했으나 마음이 오히려 강퍅하여 풀어 주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 애굽의 모든 초태생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초태생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맺은 언약의 피를 상징했고, 초태생의 생명을 앗아갈 죽음의 사자는 그 피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일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예식이 행해지던 유월절에 죽으심으로 구약이 바라보던 모든 구속의 예언들을 완전히 성취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34.예수님께서 떼어 주신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한 음식이 ‘떡’으로 되어 있는데, 등가번역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이것은 떡보다는 밥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떡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중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식, 빵을 들고 예수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빵이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었듯이  그들 영혼의 에너지원은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알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35.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축사하시고 우리에게 양식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떼어 축사하사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인식한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36.그리스도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이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혈관을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이다.” 자신의 사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혈관을 흐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37.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생명은 ‘피’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피를 흘려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을 모두 쏟으심, 즉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다고 하심은 우리를 위한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셔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을 보여주시기 이전,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셨습니다.


38.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시려고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바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쏟아지는 그 모든 진노를 담당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파기한 인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우리가 마셔야할 진노의 잔을 대신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된 구원, 이 모든 내용이 성찬 예식 때 마시는 포도주 잔에 채워져 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39.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자는 그분과 생명적인 연합을 이룬 것입니다

성찬을 올바로 시행하고 받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성찬은 성도를 구원의 반석 위에 굳게 서도록 합니다. 여태까지 여러분이 경험해 온 성찬을 통해 이런 은혜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40.예수님께서는 거저 주시는 자신의 잔을 받을 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판테스’인데, 이 단어는 ‘모두, 완전하게’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마지막 만찬을 하고 있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것을 마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저 주시는 주님의 잔을 받을 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41.일용할 양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기근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저마다 채워지지 않은 곤고함을 경험합니다. 불신자는 영혼에 생명이 없음으로 고통하고, 신자는 생명이 더 풍성히 역사하지 않음으로 괴롭습니다. 이런 영혼의 배고품을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가지만을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2.우리가 성찬을 행하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참된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걸쳐 자신의 사역을 통해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은 비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다양한 현상들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가시적인 현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43.그리스도인은 보혈의 공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우리는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잊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으면 십자가에 대해 듣고, 말하는 것이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44.성찬은 영적인 회복의 기회입니다

성찬이 공고되면 자신의 영적 상태나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나타내는 떡과 잔을 받기에 자신이 합당한 존재인지 돌아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한다면, 영적으로 침체 가운데 있는 영혼은 소생함을, 하나님과 풍성히 교제하고 있는 영혼은 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45.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떼어 주신 떡을 받아 들고서야 비로소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는 떡을 떼어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눈이 밝아져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식에서뿐 아니라 일반 섭리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야 한다는 도전을 줍니다.


46.성찬을 받음은 그리스도처럼 살기로 서약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은 취소됨도 변질됨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변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찬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얻게 된 영적 연합을 순교의 각오로 자신의 삶 속에서 더 공고히 하겠다는 서원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47.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은 첫째로 성품에 있어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심

우리는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걸어 다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서 속에서 뵈올 때마다 한없이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를 생각할 때, 빌라도의 뜰에 선 주를 생각할 때, 갈보리 산 올라간 주를 생각할 때.... 나를 항상 버리고, 길이 참고 묵묵히 십자가를 짐으로 주를 따라 가겠네.


48.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은 둘째로 관계에 있어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 버림받고 누릴 것이 없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난해지신 모습을 보면서 배워야 할 인생관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물질도 모두 지나가고, 오직 주님과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긴 삶만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바쳐 기회가 닿는대로 자기의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비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며 봉사해야 합니다.


49.우리의 삶도 축사하여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식탁을 대할 때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시며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어떻게 반응함이 마땅할까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그 은혜로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모든 것을 내어 주셨으니 이제는 우리의 인생을 축사하여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50.주님을 위하여 축사하여 드리되 예수님처럼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동안의 행적들에 가장 알맞은 수식어를 찾아본다면 아마 ‘아낌없이’ 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입니다. 주님은 비록 30여년간 이 땅에서 사셨지만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사시지 않았고, 자신의 전 생애, 전 존재를 대속 제물로 드리기에 아낌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주님께서 잡히던 날 밤까지도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만찬을 베푸시며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셔야 하는지를 떡과 잔을 통해 가르치시고, 그 떡과 잔처럼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분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51.성찬을 함께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었다는 표증입니다

성도에게는 영적인 식구가 있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은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사용된 떡과 잔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보면 모두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떡과 잔은 모두 한 개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덩이의 떡을 놓고, 그 한 떡을 떼어서 나누어 주신 것이며, 잔도 하나여서 포도주를 가득 부어 모두 같은 잔에 마시게 하셨습니다.


52.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용서하십시오

혼자 성찬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하는 자들이 있어야 성찬은 더 의미 있고, 값진 것이 됩니다. 모든 지체들이 떡과 잔을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기억하게 되고 이전에 미움과 인간적인 갈등이 얼마나 졸렬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용남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한 식구로서 원수 맺지 않고 용서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겠노라는 신앙고백이 성찬예식을 담겨진 또 하나의 서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지체들 앞에서 하는 고백입니다.


53.우리들이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는 교제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지게 될 '성취된 교제'의 증거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며 우리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해 중보를 행하시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교재 기쁨은 누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야합니다.


54.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성찬에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인식한다면 우리는 성찬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장된 몸짓이나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 등이 성찬을 받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성찬이라는이 은혜로운 식탁이 하나님 앞에서 펼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개인적인 식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이라는 면전 의식 속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성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떡을 떼고 잔을 기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55. 합당하지 않게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죄입니다

합당치 않게 떡과 잔을 먹는다는 것은 주께서 세우신 성찬의 의도를 깨닫거나 기억함이 없이 행한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찬을 행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연합과 그로 인해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빛, 이제는 그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피 묻은 복음의 묶여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자각, 이러한 것에 대한 깨달음과 각성이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깊으신 경륜으로 재정하신 거룩한 예식들이 여러분의 만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56.습관적인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 초기만 해도 교회에 권징 가운데 ‘수찬정지’라고 하는 것은 자주 행해지는 징계였습니다. 수찬정지는 성찬을 받는 것을 당분간 금하는 징계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성도에게 아주 커다란 문제였고 두려운 징계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치리가 거의 사라졌지만 성찬에 참여하기 전,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 습관적으로 계속 반복하고 있는 죄가 있다면 그는 성찬에 참여 하지 말아야 합니다.


57. 성찬의 정신을 투영하는 삶을 구현해 나갈 때, 성찬 예식에도 거룩한 감회가 있습니다

성찬은 매번 돌아오는데, 성찬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적인 힘을 얻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정신과 예식의 정신이 일치된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찬의 정신을 투영하는 삶을 구현해 나갈 때, 성찬 예식 에도 거룩한 감화가 있습니다. 성찬의 정신과 분리된 삶, 삶과 분리된 성찬은 모두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58.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성찬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행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둡고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불굴의 사명감이 불타오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빛이라는 하나님의 선포만으로는 진정으로 빛 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히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59.성찬식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행복을 목표로 하여 제정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성찬을 나누시면서 작별을 고하고 계십니다. 그 작별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마26:29)에 대한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유월절의 잔, 성례의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죽음과 함께 이 세상에서 안락하게 누리고 있는 성례들과 다른 교제의 예식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들을 향유함으로 얻는 즐거움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하늘의 영광과 즐거움에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60. 예수님께서 찬송을 통해 성찬 의식을 폐회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찬양이 그치는 때는 언제입니까? 근심과 걱정으로 잠 못 드는 밤을 맞을 때입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입니까?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는 것 같은 극심한 외로움이 밀려올 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할 수 없는 마음이 생기는 모든 위기를 체휼 하셨습니다. 가장 큰 위기, 고난과 죽음을 대면하시면서도 그분은 입술에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숨질 때 되도록 찬양해 하는 이유를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