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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의 <성화와 기도>를 읽다

기도에 관한 고민은 모든 진지한 성도들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나은 기도에의 진보는 모두의 열망이다. 이 책은 그러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성화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한 위치를 잘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는 성화를 '구원받은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롭고 계속적인 작용'으로 정의하고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화의 문제이다. 우리의 문제는 믿고 구원받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지상에서도 성도답게 거룩하게 사는가이다. 저자는 기도를 성화의 방편으로 보고 있다.
  사실 기도는 은혜의 세 가지 방편 중의 하나로서 성도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을 훈련시키시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말한다(31면).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을 알게 되지만, 기도의 실천으로 그분의 인격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종종 기도에 있어서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게으른 우리들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존 라일의 지적과 같이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32면). 저자는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보더라도 기도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기도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이루는 것도 사실상 없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놀라운 일들을 이룬다.
  우리는 모두 기도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들에게 이 책은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신자를 거룩하게 하는 열렬한 기도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영혼의 자유함을 반영하는 것이다(63면).
  저자는 기도가 죄를 죽인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도 자체 안에 있는 어떤 비범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기도의 실천 안에 깃들인 성령님의 죄를 죽이시는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67면).
  저자는 열렬한 기도에 이르는 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 정직의 빛이 필요하다, 2. 마음으로부터 기도해야 한다, 3.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는 기도 실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4.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함과 열렬함으로 길어 올려진 기도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열렬한 기도만이 가지는 성화의 작용 때문이다(135면).
  이 책은 우리가 성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충분한 동기부여를 주고 있다. 언젠가 김남준 목사의 교회에 다녔던 형제로부터 비록 그의 목회 방식에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그의 근면함과 기도 생활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노라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은 기도하는 목회자에 의해 쓰여진 경험적인 저서이기에 더 큰 힘이 있다. 말로만의 책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기도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포기해서도 안된다고 권고한다(176면). 그는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 그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 그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닌데, 그런 기도의 실천 안에서 그렇게 기도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라고 밝힌다(183면).
  한 가지 저자에게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청교도적 영성으로 조국 교회에 김남준 목사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설교자가 저자는 없다. 때문에 좀더 김 목사가 실제 그의 목회 스타일에 있어서도 대형교회의 성장 지향의 목회 방식보다는 좁고 협착한 청교도 목회 방식을 그의 목회 현장에 실천하고 접목한다면 후학들에게 더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미미한 청교도 저작을 소개하는 일에 앞장 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은 기도의 효능은 단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쇄신하고 우리 안의 죄를 죽이는 데 있다고 말한다. 기도를 통하여 죄를 죽이는 성화의 작용은 그 기도 제목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인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성화와 기도를 고민하는 모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읽어봄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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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밑줄친 부분을 나눕니다

1.기도, 성화의 방편

터널식 세차기에서 세차를 할 때면, 우리는 차 위로는 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지지만 차 안에는 한 방울도 물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 마음 자체를 쇄신시키는 어떤 변화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2.기도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가장 탁월한 방법입니다.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을 알게 되지만, 기도의 실천으로 그분의 인격을 실제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신 하나님께 또 다시 우리가 언어의 형태로 기도하여야 할 이유에 답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3.유혹과 죄와의 관계

신자가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 안에 남아있는 부패한 욕망을 계속해서 죽이며 생활하지 않으면, 유혹은 신자 안에 욕망을 집약하여 욕심을 잉태하게 하고 급기야 그것으로 죄를 산출시킵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산출된 죄는 이내 신자를 옭아매고 맙니다.
비록 만삭일지라도, 엄마에게는 그런 임신의 상태가 아이를 출산한 후의 상태보다 편할 것입니다.  뱃속에 있을 때의 태아는 엄마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서 움직이지만, 출산 후에는 엄마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뜻과 욕망대로 움직이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일단 출산을 하고 나면 그 아이에게 예속된 채, 양육에 힘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4.정욕과 죄와의 관계

개울을 건너가려고 할 때, 수심이 얕고 물살이 잔잔하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르면 위험합니다. 마찬가지로, 평상시에는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정욕에 대해서도 죄의 경향성이 힘을 얻어 강력해지면 저항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정욕에 굴복하는 일을 통해서 죄의 경향성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욕은 죄의 경향성의 먹이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려면 죄에게 그런 힘을 공급해 주는 먹이가 되는 마음의 정욕을 죽이는 삶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고 말합니다.

5. 죄를 아는 지식

신자들은 종종 죄를 지으면서도 ‘궁극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분은 오직 우리 예수님이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오웬이 지적했듯이, 신자가 죄를 범하는 순간 그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향한 강렬한 욕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신자에게 있어 이러한 생각을 품는 것은 죄를 짓는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더욱 무디게 할 뿐입니다.
신자가 지속적으로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죄를 아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목이 마르다고 할지라도 음료수가 담긴 병에 해골 표시가 그려져 있으면 안 마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표시는 ‘이 액체를 마시면 죽는다’는 사실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뿐만 아니라 죄를 아는 지식에서도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속적인 성화의 길을 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6.기도의 은혜를 보존하는 길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열렬함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하며, 또 그분과 얼마나 화목한지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친밀과 화목을 누리는 정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을 얼마나 이루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이 없이도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교도적인 열정주의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더욱 현저하게 방해되는 죄는 양심을 거스르거나 신자 자신이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함으로 남겨둔 죄입니다. 이러한 죄를 품은 채 신자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7.죄를 죽이려면

더러운 병균을 빨간 보자기에 싼다고 죽겠습니까, 노란 보자기에 싼다고 죽겠습니까? 유리그릇에 넣으면 죽겠습니까, 쇠그릇에 넣으면 죽겠습니까? 냉장고에 넣으면 죽겠습니까?
끓이기 전에는 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새벽기도를 나와도 엎드려서 졸다 가고, 나뉜 마음으로 횡설수설하거나, 기도하면서 다른 생각이나 한다면, 죄가 어떻게 죽겠습니까? 죄를 죽이는 기도의 실천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간절하고 진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 영혼은 죄와 맞붙어서 죽도록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8.기도의 씨름을 통한 죄 죽임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개인기도를 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우리가 기도를 처절한 씨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힘써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엎드려서 기도되면 하고 안 되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죄는 어떻습니까? 죄는 우리가 받는 은혜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투쟁하는 맹렬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러한 맹렬함을 대항하는 열렬함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정직하게 인식되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 기도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이제 죄와 우리의 마음이 분리되면서 죄가 객관적으로 파악되기 시작합니다. 그런 기도가 계속 열렬하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죄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9.마음을 바치는 기도만이

저는 큰 빌딩을 가진 교회도,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도 부러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사무치도록 그리운 교회는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성도들이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교회, 언제나 마음을 쏟아 붓는 애절한 통곡이 그치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가 가슴 시리도록 그립습니다.
조국교회가 그렇게 애절한 탄식과 경건한 통곡으로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죄와 타락으로 도탄에 빠진 이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실 까요? 하늘에서 얼른 내려와 거기에 임하고 싶어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가 시작될 때, 성도들은 거룩해져 갈 것이고, 세사엔 하나님의 구원이 찾아올 것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10.영혼의 싫증

기도의 의무를 총체적으로 무시한 채, 정해진 기도 시간도 없고 기도의 실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 안에 죄가 득세한 사람입니다. 그가 외면적으로 어떤 경건한 삶을 흉내내고 있든지 간에 그는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착실히 출석하고 있더라도, 교회에서 어떤 중요한 직분을 맡아서 섬긴다 할지라도, 예전에 받은 말씀의 빛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의 세계는 죄에 대한 모든 저항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11.마음을 쏟지 않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진실할 수도 없고 간절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드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신령한 의무일수록 심령의 헌신 없이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가 가져다 주는 신령한 효과를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도는 이러한 사실의 대표입니다. 마음을 쏟지 않는 기도 생활이 습관화 됨으로써 신자 안에 죄가 쉽게 깃들이게 되고, 한번 깃들인 죄는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2.짧은 기도의 이면에는

성경을 보면, 짧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으로 커다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열렬하기만 하면 짧은 기도라 할지라도 모두 그러한 능력을 불러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순간만을 본다면 그들의 기도가 짧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그렇게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 올 수 있기까지의 지속적이고도 긴 열렬한 기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13.관념적인 기도와 경험적인 기도

기도에는 지성적이고 관념적인 기도가 있고,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가 생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말로 하나님께 우리의 구할 것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경험이 동반되지 않는 관념적인 기도입니다. 마음의 깊은 곳의 움직임이 없는 냉랭한 기도, 의무적인 기도의 실천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그 안에 영적인 기운이 없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실천 과정에서 죄를 죽이는 신령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입니다. 의무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의 실천이 아니라 내적인 용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전 인격적인 체험을 동반합니다. 그런 기도의 실천 안에는 영혼의 마음의 틀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14.기도의 화살을 쏘자

기도에 관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쏘자. 쏘자. 하늘 높이 우리의 기도의 화살을 쏘자. 우리 마음의 시위를 떠난 기도의 화살이 새들 날아다니는 첫째 하늘을 지나고, 악한 영들이 권세를 잡은 둘째 하늘을 가로질러,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가 있는 삼층천에 오르도록, 오늘도 힘차게 기도의 화살을 쏘자!”

15.기도의 열렬함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길어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이 육체적으로 열렬해지고자 몸부림을 치는 기도 행위는 순결한 영이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도의 실천입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고성의 기도, 자신이 드리는 기도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방언기도로 대부분의 기도 시간을 채우는 것은 참된 기도의 열렬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16.열렬하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

성령님께서는 간절하게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렬하게 만드십니다. 즉,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드려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모함을 가지고 그렇게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써 그들의 기도에 열렬함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열렬한 기도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없이 기도가 되면 하고 안되면 말겠다는 식의 자세를 가진다면 이러한 열렬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17.열렬한 기도에 이르는 길

열렬한 기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직의 빛이 필요합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성찰하는 정직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진실해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든지 지금 마음을 쏟아 붓는 열렬한 기도를 하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지적받는 일에 솔직하여야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정직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18.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

기도를 할 때는 항상 많은 기도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머리에 떠오른 기도의 제목을 마음에 잠기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기도가 되어서 그 기도 내용에 자신의 진액이 피같이 배게 하여야 합니다. 기도의 은혜가 메마른 상태에 있을 때, 처음에는 잘 안되겠지만 몇 번에 걸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기도의 열렬함에 불을 붙이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고 기도하면,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어 있던 자기 안의 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 인내하며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19.온전한 믿음

기도의 열렬함의 기초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만이 기도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진지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 속에서 우리가 성령의 작용을 통하여 순결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도 소망이 없다는 절대의존적인 믿음의 행사가 기도를 실천하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를 주장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에는 항상 하나님만 바라는 마음의 가난함이 있습니다.

20.간절한 기도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과 열렬함은 다릅니다. 기도에 있어서 열렬함은 맹렬하게 뜨거운 것을 의미하고, 간절함은 자신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을 향해 매달리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참된 열렬함 안에는 언제나 간절함이 있고, 지속적인 간절함은 열렬함을 불러옵니다.
은혜의 지배아래 있고 기도의 은혜가 충만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합니다. 나와는 아주 먼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심령의 아픔과 연약함이 내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 마음이 아프며, 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는 그 기도 속에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그러한 간절함을 죽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엉클어진 마음으로는 간절해질 수 없습니다.

21.간절함의 정체

우리가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간구할 때에는 항상 그에 대한 응답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실천하는 중에는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응답해 주실 것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간절함은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응답의 소망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함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와 성품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그렇게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보다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믿음입니다.

22.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

오로지 하나님께만 강력하게 달라붙어서 연합된 그 기도의 열렬함은 사람이 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통상적으로 아무나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이 가져다 주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 기도 응답의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간절한 것은 우리를 성화시키는 능력 있는 기도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간절할 수 있을 때까지만 간절해지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간절함이 아닙니다. 진정한 간절함은 그것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23.불이 났다고 해서

불이 났다고 소방서에 전화를 하면 소방서에서 무조건 수 십대의 소방차를 몰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불이 났는지를 물은 뒤, 제일 먼저 화재진압 지휘본부차가 소방차를 이끌고 출동합니다. 이어서 화재의 크기에 따라 소방차가 더 이상 안 오기도 하고 수 십대의 소방차와 사다리차, 심지어 소방헬기까지 동원되기도 합니다.
죄를 화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죄가 그런 맹렬함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로 죄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죄가 우리 안에 있는 은혜들을 모두 잠식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공급되는 은혜의 통로들도 막아버릴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2)

24.간절함으로 열렬히 드리는 기도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정직해지고 평판 좋은 사람이 된 것이 곧 죄와 싸워서 승리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내면의 죄를 죽이지 않고도 도덕주의에 의하여 길들여진 짐승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이념의 머슴이 되어서 자신의 신념에 충성하기를 하나님께 충성하기 보다 더 충실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죄의 맹렬함에 대항하여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하고도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렇게 진실하게 간절함으로 열렬히 드리는 기도는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처럼 힘있게 올라갑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열렬한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전쟁터에 은혜의 원근을 보내어 죄에 지던 영혼의 싸움의 전세를 뒤집어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신, 은혜로써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25.애끓는 기도소리

아아, 조국 교회에 성도들의 애끓는 기도 소리가 밤마다 가득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이 세상을 위하여 가슴을 찢으며 애통해 하는 성도들이 가득한 조국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때 우리는 멀리서 들리는 하늘나라 응원군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것이며, 악한 세력들은 혼비백산할 것입니다. 처처에 피 흘리며 쓰러진 악한 영들의 시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은 드높여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사람들로 나타날 것입니다.

26.어느 자매의 고백

어느 자매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가정의 일로 기도가 방해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가정의 일이 방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기도를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은혜를 받고 보니 아이 기저귀 갈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시로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죄가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공격할 때는 먼저 기도실천의 형식을 겨냥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를 수십 년 동안 다녔는데 내일부터 당장 집어치우라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위해서는 마음이 그런 기도를 쏟아내기에 적합한 질서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공격합니다. 육체의 부지런함은 기도의 의무를 실천하게 하지만, 그러한 실천을 열렬하게 하는 것은 은혜 안에 있는 영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죄는 마음을 먼저 공격합니다.

27.기도의 지속성

바리새인들은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하나님께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실상 거의 기도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변화된 적이 거의 없으면서도 자신들이 많이 기도했다고 하는 생각 속에서 산 것입니다.
이런 잘못들은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화의 진전이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냉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28.마음과 영혼이 자유함을 얻기 위해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의 자유는 단번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떡같이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신분의 자유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상태의 자유도 필요합니다. 즉, 우리의 내면의 세계인 마음과 영혼이 죄로 말미암은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셔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다운 사람들이 됨으로써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마음과 영혼에 이러한 자유를 줍니다.

29.게으름의 탈을 쓴 죄

하나님:“이렇게 살거라.”
우리:“싫어요”
하나님:“왜?”
우리:“힘드니까요. 내가 싫으니까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게으름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가 게으름의 탈을 쓰고 들어오면 영혼의 경계를 받지 않습니다.
게으름은 거룩한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자기의 육체를 하나님 보다 더 위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그런 게으름을 이용하여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마치 적군의 병사들이 아군의 복장을 하고 문지기들이 서 있는 성문을 유유히 통과하듯이 말입니다.

30.게으름을 물리치는 비결

영혼:“기도하러 가자.”
육체:“힘들어, 나 잘래”
영혼:“그래? 많이 힘들어? 그러면 어떻게 하지... 기도하러 못 가겠네. 할 수 없지”
영혼과 육체 사이에 이러한 대화가 오가면 그 사람의 기도생활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죄가 이기도록 길을 열어주는 셈이 됩니다.
영혼:“기도하러 가자”
육체:“힘들어, 나 기도하러 안 갈래”
영혼:“뭐라고 이 망할 자식 같으니. 당장 일어나지 못해? 두들겨 맞을래?”
노예 제도가 있던 시대에 엄격한 주인과 게으른 노예 사이에 인격적인 대화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주인은 노예를 무섭게 길들일 뿐이었습니다. 악하고 지혜로운 주인은 자유롭던 사람을 노예로 삼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노예의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철저하게 채찍으로 다루어서 주인이 나타나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31.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육체가 주일날 교회 가기 싫어서 텔레비전보고 놀겠다고 하는데, 분명히 기도하러 가야 할 시간인데 누워서 책 보다가 자겠다는데, 방탕하고 싶어서 술 먹으러 가겠다는데, 그것을 그런 식으로 돌봐 주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그렇게 육체에 진다면 그것은 육체에 종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저희의 신은 배요”(빌3:19)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육체는 혼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32.왜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성경을 살펴보니 별 큰 뜻이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시간에 기도를 안 하셨으면 오전이나 오후에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시는 시간만큼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실 시간을 축내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기도하시고 그들이 깨어 있는 시간에는 자신도 깨어 있어서 그들을 섬기셨던 것입니다. 어디서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까?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러 오신 노예처럼 사셨습니다.

33.규칙적인 기도시간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기도의 사람들은 모두 기도 실천에 있어서 규칙적인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십니까? 아직도 기도하는 장소가 확정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환경이 어려워지거나 육체가 게으름을 피우면 여러분은 꼼짝없이 당하실 것입니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도생활을 원하신다면 규칙적인 기도의 습관을 굳건히 하십시오. 그런 단련된 굳건함이 여러분에게 성숙된 경건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34.열렬함과 지속성을 잃어버린 기도 생활의 비극

교회에는 연약한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규칙적인 습관이 없는 사람 중 영적으로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참 신자 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기도의 세계가 없는데, 규칙적인 기도의 시간도 없고 기도의 실천을 결심하지도 않는데,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에 대한 실천적인 경험도 없는데, 가끔 교회에 우루루 모여서 받는 은혜에 참 신자가 되는 기대를 모두 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졌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그와 같은 다수의 무리중 한사람이 될 것입니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