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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의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읽다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구절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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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죄의 절대적 지배와 상대적 지배

인간에 대한 죄의 지배는 절대적 지배와 상대적 지배로 나뉩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불신자들은 항상 죄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놓여있고, 거듭난 신자들은 은혜 안에 살지 아니할 때에 죄의 상대적 지배아래 있게 됩니다. 신자들의 경우에는 죄가 절대적으로 그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중생과 함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는 상대적인 지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영적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영적 생활이란 그의 영혼 안에 새롭게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신자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심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와 생명이 무성하게 자라는 법칙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법칙을 따라서 살면 풍부한 영적 생명을 누리며 승리하는 삶을 살고, 그렇지 않으면 핍절하고 가난한 영적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영혼과 마음은 죄의 지배로 가득 차게 되고 삶은 불순종과 악으로 뒤덮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에 따르는 영적 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불만족이나 고통이 없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가 경건을 잃어버리고 은혜로부터 벌어지게 될 때에는 반드시 마음에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3.구원받은 신자와 죄

어느 도시에서 가끔 총을 든 테러범들이 거리에 나타난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곧 경찰이 출동하여 그들을 사살해 버린다면 여전히 합법적인 정부의 공권력이 그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서너 명이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십 여명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들이 출연하는 즉시 공권력에 의하여 반드시 제압됩니다. 테러범이나 폭력배가 출현은 하지만, 그들은 곧 쉽게 제압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비록 작은 죄를 지을지라도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상태가 바로 그런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타난 테러범들이 동료들을 모아 구체적으로 조직을 갖추고, 도심 한복판을 점령하고 시민의 통행을 통제하고 거리를 활보하며 세금까지 거둔다면, 그것은 테러범들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불법 정부의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신자 안에서 죄가 이런 식으로 활동한다면, 그것은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입니다.


4.실효적인 힘

탁 트인 고속도로 위로 수 십 톤이 넘는 짐을 실은 커다란 트럭들이 엄청난 속도로 마구 지나갑니다. 그런 차를 만나면 소형차를 운전하던 운전자들은 아예 길을 비켜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멋대로 무섭게 달리던 큰 트럭도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온순하게 운전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앞에 교통경찰이 눈에 띕니다. 그토록 난폭하던 운전자가 조심스럽게 운전하게 된 것은, 그 경찰관 개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경찰관이라는 직무 뒤에 존재하는 법 때문입니다. 난폭 운전을 하던 사람의 마음에 나라의 실정법이 실효적으로 영향을 주자 경찰관은 그 거대한 트럭을 손짓 한번으로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이란 그 자체로 다스리는 힘을 갖습니다. 이것을 실효적인 힘이라고 부르는데, 죄의 법이 신자에 대하여 그러한 힘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죄의 법'은 신자의 영혼 안에서 힘을 얻게 된 죄가 그의 내면의 세계에서 실효적인 힘을 갖게 되어 그의 외적인 삶을 불순종과 죄로 이끌어 가는 상태를 낳습니다.


5.은혜의 계획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신자 안에 죄와 싸우도록 주어지는 은혜도 역시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순종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치른 희생일 수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통로이기는 하지만, 원천은 아닙니다. 은혜의 원천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속죄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적인 대속의 공로를 기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야기 할 때, 마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듯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순종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은혜의 원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랑하려면 은혜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의 속죄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6.죄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계획

 죄는 우리가 죄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격, 기호, 약한 부분과 강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우리는 마치 우리 속에 여전히 잔존하여 역사하는 암세포와도 같은 죄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삶에 있어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보다는 패배를 많이 경험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서 발붙일 곳을 얻은 죄는 계속 지배력을 확장해 가고자 애를 씁니다. 마치 한 두 그루의 나무에서 시작된 병충해가 온 삼림에 번지듯이 불법한 지배력을 확장하여 결국 신자를 불신자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가 신자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는 없지만,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실상 불신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계획입니다.


7.죄의 역사-속임과 강압

 죄는 신자 안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그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속임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죄가 신자를 속이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죄가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숨김으로써 속입니다. 신자가 유혹 받을 때에 죄의 속성이 무엇이고 그 죄가 자기를 데려가려고 하는 그 끝이 어디인지를 안다면, 결코 그 죄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는 그것을 숨김으로써 신자를 속입니다.
둘째로, 죄는 용서하시는 은혜의 원리를 자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신자를 속입니다. 신자가 유혹 받을 때에 지.정.의가 그 죄에 대하여 공정한 반응을 한다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죄로 인식한다 할지라도 범죄 한 후에 하나님께서 쉽게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은혜에 대한 기대가 범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숨깁니다.
셋째로, 범죄 함으로 얻는 즐거움에 대하여 과다한 기대를 갖도록 속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다소나마 아는 신자라면, 죄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범죄한 자신의 영혼에는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신자가 유혹 받을 때에 마음이 죄에 기울어지게 되면, 범죄함으로써 후일 겪게 될 영혼의 고통보다는 죄를 저지름으로써 지금 당장 맛보는 즐거움이 훨씬 클 것이라는 죄의 속임에 넘어가게 됩니다. 이 모두 신자의 생각을 이탈시켜 속이는 것입니다.


8.경건의 비밀을 습득하라

 전쟁에서 잘 훈련된 한 명의 병사는 거의 훈련되지 않은 수 십 명의 병사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우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데 우리는 죄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의 은혜로 죄에 대한 영적인 통찰을 강화하고 또 복음의 도리를 부지런히 탐구함으로써 죄의 작용과 죄를 죽이는 은혜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거룩한 삶의 실천에 적용함으로써 경건의 비밀을 습득하여야 합니다.
단지 이론적이고 자연적인 빛뿐만 아니라, 실천적이고 영적인 빛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이며 사색적이고 사변적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마음과 영혼에 영향을 미쳐 본성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신령한 지식의 빛이 필요합니다. 이 신령하고 영적인 빛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빛 아래서 죄와 죄의 비참함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죄에 대해 알아 가는 것입니다.


9.죄의 지배는 부당한 것임 

신자는 비록 불순종과 범죄함으로 인하여 죄의 지배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삶이다. 내가 되의 지배를 받다니, 이는 부당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를 죽음에서 해방하셨다. 내가 이렇게 죄에 매여, 허약하게 죄와 타협하면서 사는 것은 마치 왕가에 대어난 왕의 자손들이 자신들의 신분에 맞지 않게 부당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다. 내 자리는 여기가 아니다. 이것은 결코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다. 이것은 죄가 부당하게 내 마음과 영혼에서 지배권을 강탈한 것이다.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이 부당한 지배는 반드시 종식될 것이다.”


10.인신매매와 죄의 유사성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잡혀온 사람들에게, 그 악한 조직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비인간적인 학대와 폭력을 일삼아 자존감을 완전히 버리게 하고 생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소망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나면, 그들은 자기의 옛 신분을 잊어버리고 강요된 생활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가 신자를 지배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철저하게 신자를 속이고 강압하여 그로 하여금 신령한 기쁨이 넘치는 은혜의 삶을 꿈꾸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는 신자에게 한번 은혜에서 미끄러져 죄의 지배아래 들어온 실패가 다시는 만회될 수 없는 패배인 것처럼 설득하면서 다시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엄포를 놓습니다. 그런데 죄는 신자를 단지 폭력과 강압으로만 다스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죄의 즐거움을 선사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죄의 지배에 길들여지게 만듭니다. 인신매매 조직이 끌고 온 부녀자들을 채찍뿐 아니라 마약으로도 길들이듯이 말입니다


11.죄의 이중적 공격

 신자에 대한 죄의 능력은 안과 밖 두 가지 방향으로 역사 합니다. 첫째로, 안으로부터의 역사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밖으로부터의 역사는 죄의 유혹입니다. 스스로 신앙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전자에 대하여는 인식이 무딥니다. 그러나 후자에 대하여는, 비록 영적으로 덜 성숙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잘 인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죄의 유혹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두고 자신이 너무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혹받음으로써 자신이 점점 더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가 아무리 강력하게 유혹하며 생각 속에 힘을 가한다 할지라도 신자가 거기에 순종하지 않고 대항하는 하는 한, 결코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가 죄와 싸우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죄가 신자의 영혼 안에서 지배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때로 유혹하는 죄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신자의 생각이 강하게 영향을 받아 악한 생각에 압도되는 것 같은 때가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죄는 밖으로부터의 역사만을 가지고는 신자 안에 지배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신자가 그 유혹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복종하여 죄를 범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12.생명의 성령의 능력  

신자 안에 있는 죄의 능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 능력으로 신자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하시되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들을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는 죄의 능력보다 더 큰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있어서 신자를 자유하게 합니다. 신자가 죄에 사로잡히고 억압 가운데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죄의 요구에 스스로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게 살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입니다. 스스로 죄의 유혹에 이끌려 죄 가운데로 들어가는 동안에는 깨달을 수 없는 무서운 속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에서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비로 이 때문입니다.
아아,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희망 없는 죄인으로 죄악의 사슬에 매여 살던 삶은 옛날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빛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성령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로부터 모든 영생의 자원을 공급받으며 이 세상에 흐르는 강물처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13.하나님과의 평화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수시로 율법에 의해 송사당하고 정죄받을 때 신자는 자신을 쏟아 부어 깊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기도해도 응답의 확신이나 하늘의 은혜로 가득 차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것은 차가운 거절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기도의 문이 잠시 열리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라고 속단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있어도 죄는 여전히 그의 영혼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시적인 기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정욕과 거기에 강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쉽게 굴복하는 죄의 경향성은 잠시 주춤할 뿐 약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간헐적인 은혜의 순간이 사라지면 예전과 같은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죄의 지배아래 있지만,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회복으로 나아가도록 계기적인 은혜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며 죄와 구체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됩니다.


14.은혜의 현재적 통치를 갈망하라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이 죄의 지배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의 상태는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영원히 견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아래 있던 성경의 인물들이 그 복된 상태에서 미끄러져 죄에 빠졌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받은 은혜는 이전에 필요한 은혜였고, 지금은 오늘 하늘을 열고 부어 주시는 거룩한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 역사하는 은혜의 현재적인 지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헐적으로 맛보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죄의 지배를 벗어나 거룩한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은혜 생활에 만족하지 말고 더 깊고 열렬한 영적 상황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매 순간 마음을 지키며,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도록, 지정하신 은혜의 수단에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15.죄에 대한 인식

 오늘날, 많은 사람들, 심지어 신자들 사이에서도 죄는 단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불편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인체에 치명적인 해는 입히지 않지만 불쾌감을 주는 비위생적인 물건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는 본질상 하나님을 향한 적의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입니다. 또한 그것은 맹렬함, 대담함 그리고 광기로 역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대적하고 창조의 계획과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수포로 만들기 위하여 역사하는 실재입니다.


16.죄인도 영적 은사를 소유 할 수 있음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영적인 활기가 쇠퇴하고, 무기력한 가운데 정욕에 붙들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신령한 경험은 사라지게 되고 육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는 어떤 은사도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신자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판단의 표시로 주신 은사를 거두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절대적으로 은혜아래 있는 신자에게만 소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다고 해서 신자에게 영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영적 경험이 있습니다.


17.깨달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죄의 지배 아래서의 내적인 깨달음은 쉽게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신자가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이 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이 미치는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깨달은 바를 쉽게 실천에 옮기게 되고, 이는 신자의 순종하는 생활을 촉진합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서 사악한 고집이 꺾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길들여진 심령의 경우 작은 내적인 깨달음도 영혼 전체에 거룩한 영향을 미치는 작용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죄에 익숙해진 삶의 습관이나 내적인 경향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할 때에 그렇게 할 힘이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결심을 하고 뚜렷한 자극을 받는 것 같아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저항을 자신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18.교만

 교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높임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이 죄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가치 있는 존재로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이 교만의 죄는 영혼에 대하여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이 온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왜곡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교만은 이 세상에서 더욱 권세를 얻고 더 많이 높아지려는 강력한 열망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이사야 14장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에도 이미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높을 수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19.육욕

 육체의 욕심과 더러운 정욕의 추구는 죄가 상상력을 통해서 사고 작용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간의 육욕과 더러움은 음란함을 통하여 가장 잘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 죄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고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나 인간의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러한 사실을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음란함은 세상 사랑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상 숭배는 자기 사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두 그릇된 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인간을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더욱이 이 음란함은 그것이 영혼에 미치는 신속하고 강력한 불결의 영향력 때문에 자주 예수님에 의하여 그 심각성이 경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죄가 우리를 얼마나 순식간에 황폐하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 차던 신자의 마음을 정용으로 가득하게 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던 육체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끔찍한 상황의 발생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음란한 죄에 대한 상상이 신자의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하는 상황이 있고 난 후에 일어납니다.


20.불신앙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사고가 명료하고 행동의 동기가 명징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도 이어질 그 일의 전개 과정과 해결 방법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과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상황이 주는 비관보다는 주님의 약속이 주는 낙관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현실의 절망과 소망의 낙관 사이를 믿음과 순종으로 메우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그렇게 하기를 싫어하는 고집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는 악한 감정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마다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맞딱뜨리는 모든 상황이나 유혹에 대하여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자기의 힘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믿게 됩니다.


21.사랑의 감정

 사랑은 전 포괄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좋아하는 강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물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사랑스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이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들에 참여하기를 사랑하며, 그분께 연합된 사람들도 사랑하고,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도 불쌍히 여깁니다. 심지어 그분이 섭리 가운데 허락해주신 십자가도 사랑합니다.


22.신자의 착한 생활

 신자가 평생에 힘쓸 가장 큰 의무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 씀, 그리고 삶 전체가 그 유일한 동기에 의하여 지배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선(善)한 삶, 곧 착한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도, 성경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23.굳어진 마음의 증거

 신자의 마음이 죄의 지배 아래서 굳어진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향을 받으려는 마음의 기꺼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이 깨어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며, 예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힘을 공급받으려는 기꺼운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에 목마른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어찌하든지 정직하고 권위 있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을 피하게 되고, 진지하게 성경 진리를 탐구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 모두 굳어진 마음의 증거입니다.


24.죄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음

 신자가 죄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때에 그 마음은 굳어진 마음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하여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마음은 죄의 지배 아래서 굳어진 마음의 증거입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어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신자의 양심은 죄에 대하여 인식이 분명하고, 이에 따르는 죄책감도 뚜렷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심의 기능은 범죄의 무모함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서 자기 깨어짐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25.불신자들을 율법으로 다스리심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을 율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을 ‘법 아래’, 혹은 ‘율법의 아래’에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먼저 제시된 하나님의 요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다시, 이미 율법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이미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으로 다스리시고,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 즉 구약시대 이방인들과 오늘날 불신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 놓으신 율법인 양심으로 다스리십니다.
이 양심은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 속에 새겨진 본성적인 율법입니다. 이것의 존재는 다양한 문화들 속에 공존하는 도덕율의 일치로 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동서양 모두에서 형벌 받을 무서운 죄이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역시 문화권에 상관없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명권이 서로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 속에 양심이라는 본성적 율법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26.신자들은 은혜로 다스림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율법으로 다스리신다면, 거듭난 신자는 무엇으로 다스리실까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여기서 법은 정죄하고 죄를 확신케 하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너희’는 거듭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율법아래 있다면, 분명히 죄가 그들에게 주인 노릇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보여 주고 죄를 확신케 함으로 억압 가운데 있게 할 뿐 죄를 이길 어떤 힘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율법의 통치아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죄가 그들에 대하여 주인노릇 하지 못합니다. 신자인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방식으로서의 은혜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27.요즘 인터넷을 보면

 요즘 인터넷을 보면 걱정이 됩니다. 아침에 개인 이메일을 열어보면 이상한 편지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어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란한 메일들을 우연히 한번 열어 봤다면 그게 죄겠습니까? 죄라고 해도 그게 얼마나 큰 죄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자체가 큰 죄인지 작은 죄인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음란 메일을 한번 열어보는 것은 큰 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계속 반복되고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드럽던 마음은 굳어지고 신령한 욕구는 감퇴하고 사악한 욕망은 촉진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습관이나 환경은 은혜가 죽고 죄는 성장할 수 있는 여건입니다. 그 유혹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다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그만 두기로 결심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터넷의 편리함이나 유용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소중할 수 있습니까?


28.율법의 기능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나면 양심에 가책을 받습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죄를 보여줄 뿐입니다. 죄가 어두운 밤에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라면 율법은 가로등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한 죄에 대한 깨달음은 그 가로등에 환한 불이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예전에는 자기 안에 죄가 있어도 있는 줄 몰았는데, 이제는 율법을 깨달음으로써 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며 심판이 있을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드러난 까닭에 양심에 가책을 받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율법은 그 이상의 일은 하지 못합니다.


29.내적인 역사의 자유

 강아지 한 마리가 기둥에 묶여 있습니다. 강아지가 그 줄의 범위 안에서 움직일 때는 묶여 있어도 불편한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줄의 길이보다 먼 바깥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면 기둥에 매인 줄에 잡아 채입니다. 죄인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는 불편하지 않게 움직일 수 있지만, 죄를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향해서 뛰어나가려고 하면 그 줄에 의하여 내면이 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영혼과 마음이 크고 강력한 사슬에 매여 있어서 뛰쳐나가도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속박 중에 있음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신분과 상태에 있어서 자유를 주고 또 내적인 사역에 있어서 죄에 매여 있는 상태를 끊고 마음껏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죄가 신자인 우리에게 줄 수는 있어도, 그 죄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이 믿는 자의 영혼과 마음에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유롭게 역사 하실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30.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신자가 어떤 특정한 죄에 계속해서 말려들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기 교회의 장로, 혹은 목사인데 이런 게 알려지면 무슨 망신인가? 사람들이 알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 할거야.” 이런 생각을 하니 계속해서 그 죄를 지을 마음이 잠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맛있게 음식을 먹다가 비위 상하는 물건을 보고 잠시 식욕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죄는 죽지 않고 움츠러든 것입니다.
신자가 죄와 싸우는 참된 동기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신 속죄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부름받았는데, 죄가 그것을 깨뜨리고 구원의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죽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구원의 계획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도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31.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죄와 싸움

 신자가 죄를 지으면 죄가 즐거움도 주지만 괴로움도 줍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만 싫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도 권태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들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더 이상의 평강을 바라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순간적인 즐거움이 있지만, 그 즐거움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잠시 누린 죄의 즐거움보다 몇 배 더 커다란 심리적인 외로움과 생각의 혼란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마치 마구 뒤얽힌 실타래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리 풀어보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실뭉치를 가지고 씨름하던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다른 실타래로 바느질하고 싶어하듯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 죄를 떨쳐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버린 것도 아니고, 죄를 죽인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실천들은 죄와의 싸움을 위한 복음적인 원리들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32.미신적인 맹종과 실천

 제가 만난 한 자매는 수년동안 자기 교회의 화장실을 도맡아서 청소하였습니다. 그의 섬김 실천 동기는 이러하였습니다. 어느 부흥회를 갔더니 부흥 강사가 교회에 가서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하면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다고 설교하더랍니다. 그 강사는 몇 사람의 예를 들어서 증거까지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건강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기기 힘들어하는 더러운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은 아름다운 섬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그렇게 되는 것은 미신적인 맹종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미신적인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 안에서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습니다. 미신적인 맹종과 실천은 지성을 요하지 않습니다.


33.말씀의 빛과 기도의 열

 의무감으로 주일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만을 가지고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를 이기게 하는 은혜의 원리들을 터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죄 죽임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가 좋은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으면 뭐합니까? 신간서적을 아무리 많이 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의 정체가 무엇이고, 신자가 그것을 어떻게 죽이고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는데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분투하며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의 지배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거기서 벗어나 실제적으로 은혜 아래 살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시고 다시 성결한 은혜 속에서 살게 하시는 주체이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실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의 빛과 기도의 열(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영혼의 싫증과 게으름 속에서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깨달았어도 실제로 분투하는 실천이 없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34.어디 있습니까? 

아아,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무엇이고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피묻은 복음 대신 인간의 사상에 물든 이념들이 환영을 받고, 복음의 참 뜻을 알고 거룩한 신자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행복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시려고 했던 참된 복음 신앙은 어디 있습니까? 선지자들이 피 뿌리며 바라보고 즐거워하였고, 사도들이 순교하기 까지 위하여 증인 신앙이 되었던 복음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영혼에 직접 내려 주시는 영적 축복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복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의 거룩한 삶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축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분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35.승리를 확신하게 됨

 신자가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여 죄에 순종하거나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싸우는 대신 단지 갈등하고만 있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위로와 격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자도 용납하시고, 약한 자도 용납하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이시고, 넘어진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자신의 신실하심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와 회복의 경험 안에서 신자는 놀라운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죄와 은밀히 타협하는 신자들은 이러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지만, 죄와 싸우는 신자들에게는 풍성한 위로와 격려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는 신자들이 절망 속에서 죽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외로운 싸움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기도록...


36.열등한 아름다움

 죄는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절실한 고백을 읽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들 모두가 짐승처럼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악한 욕구를 스스로 누르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따르는 총체적인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이차적인 선’ 혹은 ‘열등한 아름다움’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비 중생자가 양심과 본성의 빛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고 죄를 이기려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과 영혼 안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양심이나 본성의 빛에 의해서 죄의 욕구를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비중생자에게는 죄 죽임의 실천보다 복음을 듣고 거듭나는 일이 필요합니다.


37.신앙의 목적은 행복함이 아닙니다.

신자로서의 참된 기쁨을 이 세상에서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신자가 추구하는 가치는 신앙 때문에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지만, 진실한 신자가 찾는 가치는 이 세상에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스스로 중심이 된 제왕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은 피조물적 가치관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장엄한 목적도 모르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죄에서 구속하셔서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어하시는 거룩한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신앙을 자기 번영의 기회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 속에 살기 위하여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38.빛 잃은 많은 등불이 아니라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불이 다 꺼진 크고 웅장한 등대보다는 작고 볼품 없더라도 깜빡거리며 빛을 발하는 등대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어두워져 가는 세상 때문에 아파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빛을 발할 사람들이 소수인 것을 인하여 아파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세상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진실한 신자들입니다. 자신을 감추고 오직 그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여 줄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릇된 길을 걸어도 그 현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이나 판단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질입니다.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 목표는 멸망할 인간을 단지 심판의 위험에서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참된 예배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39.행복의 조건

 어느 사회심리학자가 의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일당 2만 5천원을 받는 한 노동자를 불러, 일당 5만원을 주며 땅을 파도록 시켰습니다. 파격적인 보수의 대가로 이 노동자에게 요구한 사항은 아주 간단했는데, 바로 그 일을 하는 이유를 묻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는 흔쾌히 수락했고, 심리학자는 노동자에게 공터에 너비가 1m, 깊이가 30cm 정도 되는 도랑을 트랙처럼 파도록 지시했습니다. 정해진 작업량을 완수하는데 닷새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구덩이가 완성되자마자 심리학자는 다시 처음처럼 메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상태로 메워지자, 예전처럼 다시 파도록 지시했습니다. 계속해서 같은 작업이 반복되자, 일을 하던 노동자는 5만원의 일당을 팽개치고 2만 5천원을 받던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돈이나 안정성에만 달인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보람을 느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행복에 대한 오해부터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아, 이렇게 하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