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이 책은 이현주 목사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84년에 종로서적에서 초판이 나온 이후 지금은 종로서적이 없어지면서 절판이 된 책입니다.
결혼하기전 아내의 고향에 가면서 가방에 넣어가지고 가 뒷산 언덕에 앉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들꽃편지'라는 월간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 책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책입니다. 오랫만에 다시 꺼내어 밑줄친 부분만 읽어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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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실에서

이렇게 당신 앞에 무릎을 꿇으면
갑자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뭔가 드릴 말씀이 웅성거리고 남아 있다가도
당신 앞에만 이렇게 무릎을 꿇으면
어디 있지도 않은 구석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당신 앞에서 이 몸은 그림자가 됩니다.
빛을 가리우는 형체도 없는데 그림자가 됩니다.

드릴 말씀이야 왜 없겠습니까만
말씀드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당신은 아시거든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 앞에서 이 몸은 어디로 사라지는 겁니까?

기도하러 왔다가 말 한 마디 못드리고
기도실 벽에 묻은 주인 없는 손때만 바라보다가
돌아갑니다, 발이 저려 그만 돌아갑니다.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종로서적.1984) 중에서  

내 친구

내 친구는
무덤 속에 들어가
내 걱정을 하며
울고 있다

불쌍한 놈......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종로서적.1984) 중에서

겨울 산행(山行)

겨울 산
잡목들은
앙상한
뼈만 남아

잎 지고
열매 잃고
뼈 속엔
독만 남아

애꿎은
등산객의
얼굴만 할퀸다

할퀴다가
힘이 부치면


미련도 없이
부러진다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종로서적.1984) 중에서

살찌는 걸 걱정하는 당신들에게

아무리 걱정도 팔자라지만
참 너무들 하십니다, 당신들
이 시대에 배때기나 쓸면서
살찌는 걸 걱정하다니
하늘이 두렵지도 않소, 당신들?
아무리 자유 만세 민주 공화국이라지만
그래서 잘 먹고 잘 입는게
도무지 죄될 게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어디 사람의 탈을 쓰고
차마 그럴 수가 있소, 당신들?
아침 점심 저녁을 라면으로 때워
마침내 라면가락처럼 뇌랗게
고들고들 시들어가는 이 땅의 아이들이
당신 살고 있는 곳 동서남북에
그래도 개똥 같은 희망을 품고
기약도 없는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보겠다고 저러고들 있는데
기름진 배때기나 슬슬 쓸면서
살찌는 걸 걱정하다니, 당신들
인두겁을 쓰고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무심결에라도
굶주리는 아이가 있는 땅에서
배부르게 먹는 것이 오히려 죄인데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살찌는 걸 걱정하다니, 당신들!

그만둡시다, 허허, 그만둡시다
당신은 어서 기름진 배때기나 쓸면서
연속 방송으로 걱정하시오
살찌는 것이나 걱정하시오
하늘은 참 환장하게 맑고 푸른데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종로서적.198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