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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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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대의 마음이 가득 차 있는데

어떤 불교의 대 학자가 선승(禪僧)을 찾아가, 어디 네가 얼마나 아는지 내 시험해 보리라 생각하고, 교(敎)에 관하여 한 말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선승은 찻잔 두 개를 내 놓고는
"차나 한잔 드시지요"
말을 마치고 차를 따르는데, 자기 잔에는 알맞게 따른 다음 학자의 잔에는 철철 넘치도록 붓고도 자꾸만 부어 차가 방바닥에 흘러 내렸다.
어리둥절한 대 학자가 은근히 화가 나서 이를 말리자, 선승이 하는 말, "그대의 마음이 이와 같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으니 내 무슨 말로 더 가르치리요?" 교만 방자한 대 학자가 얼굴을 붉히고 꽁무니를 뺐다는 이야기다.

2.성경이 나를 읽어주지 못하면

어떤 랍비가 맨들에게 와서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가 무엇을 하였느냐?"
"탈무드를 세 번 통독하였습니다." 자랑스런 일이다. 굉장한 일이다. 탈무드의 방대함을 아는 이는 입을 쩍 벌리고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맨들은 차가운 어조로 다시 물었다.
"그대가 탈무드를 세 번 읽었다고?"
"그렇습니다."
"그런 탈무드는 그대를 몇 번 읽었는가?"
"........."
성경을 골백번 읽어도 그 말씀 한 마디가 나를 읽어 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랴?

3.하와는 열매를 먹는 순간 "죽었다"

그리하여 자기의 짝을 죄악으로 인도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호흡의 정지가 아니라 바르지 못한 길로 떨어지는 것이요 또한 남을 그리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 날로 그들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동작의 정지가 아니라 있어야 할 곳으로부터 쫓겨남이다. 사람이 저 있을 곳을 찾지 못하여 때로는 짐승처럼 허덕이고 때로는 기계처럼 차디차니 오늘 우리는 과연 무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죽어 가는 인간들의 죽어 가는 세계에 새 생명의 씨앗으로 오신 주님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라고 큰 소리 치시고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저주의 씨앗인 죽음을 삼켜 오히려 축복의 열매로 싹틔우신 것!
이것이 말하자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다.

4.바벨탑 이야기

인간의 문명은 도시를 낳고 도시는 일사분란한 전체를 형성하고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창11:4) 그것은 마침내 모든 인간을 하나의 탑을 쌓는 부속품으로 만들어 간다. 성서의 하느님은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땅으로 내려오시는(창11:7)"그런 하느님이시다.
바벨탑이야기에서 우리는 본다. '언어의 혼돈'이 (이념의 혼돈 또는 사상의 혼돈이기도 하다.) 오히려 인간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적 교훈을! 일치는 인류의 아름다운 꿈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일치는 사람을 사람 아닌 부속품으로 만든다. 하느님은 그런 것을 다시 붕괴시켜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실 것이다.

5."생존권"과 윤리 도덕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역사는 공평하게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기득권을 소유한 족속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족속이 있었다. 기득권자에게 있어서는 생존한다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창25:34) 일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생존" 그 자체가 지상과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대개의 경우 "있는 자"들이 그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속담에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자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생존하라"는 명령 앞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윤리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하는 속담이라 하겠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물론 윤리, 도덕도 있어야 하고 율법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규범들은 "생존권"앞에서는 상대화되고 만다. 배가 고픈 사람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지 못한다"는 법을 어길 수 있고, 나아가서 어겨야 한다.(눅6:1-5)

6. 어물어물 하는 사이에 부자가 된 야곱

야곱이 남의 땅에 더부살이를 하는 동안, 야곱은 교묘한 술책으로 막대한 재산을 긁어모은다. 맨몸에 맨손으로 하란 땅을 밟았던 그가 어느새 양떼 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 낙타와 나귀도 많이 거느리는 거부가 되었다. 물론 무슨 폭력으로 또는 사기수법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은 것은 아니다. 라반과 맺어진 합법적인 계약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했을 뿐이다. 야곱이 거부가 된 것은 법적으로 보아 아무런 하자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금융가를 주름 잡으며 경제계를 좌우하는 "큰손"들이 유대계라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는 바다. 그들이 치부하는 수단 역시 옛날 야곱의 그 수법 그대로다. 그들은 이탈리아인들처럼 폭력단(마피아)을 조직하지도 않는다. 어느 나라든 그곳의 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 법을 오히려 이용함으로써 어느 결에 부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본 토박이들이 보면, 처음에는 맨손으로 건너와 붙어먹던 "거지"들이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오히려 자기네보다 더 돈이 많은 부자가 되어 있으니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옛날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을 미워했듯이!

7.호흡을 멈춘 순간

역도 선수는 무거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순간 호흡을 끊는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최대의 힘을 한 곳에 집중시켜야 하는 그런 순간에는 사람도 입을 다물고 호흡을 끊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숨가쁘게 부르짖으며 당신의 아들이 마지막 숨을 가다듬을 때에, 하느님은 오히려 잠잠했다. 태양은 빛을 잃었고 사방에 귀를 기울여 보나 어디에서도 들리는 소리 없었다. 마침내 그가 숨이 끊어져 남의 무덤에 초라하게 묻힐 때에도(조문 사절도, 분향도, 합동기도도, 조가도 없는-그것은 참으로 초라한 장례였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날 때까지 하늘은 잠잠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침묵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가? 하느님은 그 사흘동안 호흡을 중단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셨다. 거기서 피어난 첫 생명의 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8.억울한 일을 당할 때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궁지에 몰릴 때,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기울여 주지도 아니하고 어디 호소할 데도 없을 때, 기도를 하고자 하나 말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을 때... 그러한 때 우리는 호흡조차 중단하고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저토록 말이 없으니 하느님은 이제 죽었다고 할 때 우리는 새 역사, 새 인생을 창조하시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아버리는 자들이 계속 득세하는 것 같은 이 시대, 하느님을 부르는 행위가 오히려 초라하게만 여겨지는 이 시대야말로 조심 조심 살아가야 하는 하느님의 "침묵의 순간"인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은 핑계다. 우리에게는 이미 삶의 길이 바르게 주어졌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수고스럽더라도 요한복음 15:12절을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9.어린아이같이 순진한 모세의 기도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죽일 것만 같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모세의 기도이다. 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이렇게 천진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좀 더 의젓하게
"전능하신 야훼여!, 이 믿음 없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마실 물을 주시옵소서" 운운하며 기도하지 않았다 해서 그가 지도자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고 본다면, 그런 판단의 뒤에는 지도자란 적당히 자신을 속여야 한다는 비뚤어진 관념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훈장과 견장과 흉장으로 감싸지 않고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 아이처럼 살아가는 그런 지도자라야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 자기를 속이지 못하는 사람만이 남도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