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034.gif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생활성서/5500원

이 책은 이현주 목사님이 나이 50 되던해부터 월간 <생활성서>에 2년간 연재한 글을 였은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이미 '나의 어머니'라는 책에서 한번 이야기를 했던 것이라 신선감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과 좀 더 순화된 표현과 무게가 있어진 글은 훨씬 읽으면서 숨쉬기를 부드럽게 합니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수 없습니다. 1997년도 안양에 있는 분도서원에 갔다가 구입한 책입니다. 다음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 몇 군데를 옮겨적었습니다.
-최용우
--------------------------------------------------------
1.징검다리

고마운 징검다리
나로 하여금
물에 빠지지 않고
물을 건너게 하는
고마운 징검다리
나로 하여금
물에 빠지지 않고
물을 건너게 하면서
저는 언제나 물에
빠져 있는 징검다리  

나는 나의 고마운
징건다리  

2.그렇게 다짐했건만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하루는 어머니가 나에게 돼지죽을 주라고 하셨다. 그 무렵에는 집집마다 돼지나 닭을 서너 마리씩 길렀다.
돼지 울 밖에 까치발을 딛고 서서 울 안에 있는 여물통에 무거운 죽통을 기울여 부으려는 참인데 돼지란 놈이 배가 고파서 그랬던지 그 무지막지한 주둥이로 죽통을 치는 바람에 그만 돼지죽이 질퍽한 바닥에 쏟아지고 말았다. 마침 곁을 지나가시던 어머니가 이 광경을 보시고는 손에 들고 있던 댑싸리 빗자루로 나의 등판을 내리치며,
"넌 돼지죽도 제대로 못 주느냐? 형은 한 번도 쏟지 않았어!"
그 날 나는 늘 하던 대로 도망을 치는 대신,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빗자루 세례를 받으며 울었다. 울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만일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기른다면 절대로 절대로 이놈과 저놈을 비교하지 않으리라고!
이놈은 이놈이고 저놈은 저놈이다. 민들레는 민들레로 해바라기는 해바라기로 그렇게 피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다.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악마나 할 짓이다.
그러나 그 날 그렇게 울면서 다짐했건만 나는 얼마나 자연스레 또 얼마나 뻔뻔스레 나와 남을 비교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고 취사선택을 제멋대로 해왔던가? 아니, 지금도 그런 짓을 계속 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멀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나의 길은 아직도 까마득하다.

3.여기 있으면서

여기 있으면서
여기 아닌데 있는 사람
그래서
여기 아니 있지만 언제나
여기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4.뿔과 뿔 사이에

"성난 황소와 텅 빈 방에서 만났다. 출구는 없고 이리 저리 도망치다가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 좌로도 우로도 빠져나갈 길은 없다. 성난 황소의 두 뿔이 눈앞에 돌진해 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군들은 어떻게 하겠나?"
한 여학생이 대답했다.
"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솔직하기는 했지만 선생님이 요구한 '정답'은 아니었다. 아무도 '정답'을 찾아내지 못하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뿔과 뿔 사이에 틈이 있다. 그리로 빠져나가면 된다."
그 어떤 절망도 절망 자체 속에 희망이 있다는, 아니 절망 그것이 곧 희망이라는(뿔이 구멍이다) 엄청난 비밀을 나는 오늘 이 절망스런 기계기술문명 속에서 새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5.태어난다는 말은 태에서 나온다는 뜻?

내 생각에는 태에서 나온다는 말이 태어난다는 말로 간추려진 게 아닐까 싶다. 사람은 태어나기 위하여 그 직전까지 생명줄이던 탯줄을 끊어야 한다. 아니, 탯줄을 끊음으로써 비로소 그는 태어나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하나도 어긋남이 없다.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나'를 지탱시켜 준 생명줄을 끊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나'를 자르지 않고서는 영생하는 그리스도의 길에 동반자로 나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