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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하도 오래전 책이라 인터넷에서 구할 수 없네요.

다음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부분을 옮겼습니다.

1.무슨 근거에서

하늘이 인간을 냄에 즈음하여 기골이 장대한 놈과 그렇지 못한 놈, 두뇌가 명석하여 하나를 일러주면 열을 깨우치는 놈과 반대로 열을 일러 주어도 하나를 깨우치지 못하는 놈, 기질이 순박한 놈과 조잡한 놈, 뚱뚱한 놈과 마른 놈, 키가 큰놈과 작은 놈 온갖 놈 내놓기를 숲 속의 짐승들 저마다 제 멋 부리며 제 능력으로 어루러져 살아가게 함과 같이 하였거늘, 인간은 무슨 근거에서 힘있는 놈과 없는 놈이 더불어 경쟁하여 이기는 놈이 지는 놈의 주인 노릇을 하되 한오라기 양심의 가책조차 없이 오히려 당연하게 하더란 말이냐?
돌이켜 보매 역사를 어지럽히는 놈은 언제나 못난 놈들이 아니라 당대의 뛰어난 천재들이요, 수재들이었으니 을사년의 오적이 곧 당대의 재상들이요, 일찍부터 영특하다 소문난 것들이라,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들이 이른바 정치인들이요, 경제를 어지럽히는 것들이 돈 많은 경제인들이요, 문학을 더럽히는 것 또한 글 재주 깨나 있어서 그 잘난 문명(文名)을 드날리는 작가들이요, 종교를 타락시키는 것들 또한 밥 먹고 염불하기를 전문으로 하는 종교인들이 아니더냐? 전문가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이 또한 우습고도 같잖기는 마찬가지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태고 이래의 상식을 오히려 뒤집고 질식시켜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놓고는 법의 이름으로 질서를 세우노라 큰기침하고 계속하여 이런 법 저런 법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인 온갖 법 만들기에 주야로 골몰하니 법이 없어 무질서가 아니라 법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숨막히는 세상이 되었구나.

2.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과 생명을 만드실 때, 살아가는데 가장 귀중하고 가장 필수적인 것들일수록 나눠 쓰게 하셨고 나누기 쉽게 하셨다. 공기, 물, 햇볕, 그리고 불이 없이는 모든 생물이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다. 흙도 그렇다. 그러기에 공기는 아무도 독점 할 수 없도록(공기를 누가 독점할 수 있다면 그 날이 곧 지구의 종말이겠지)만드셨고 물도 햇빛도 불도 흙도 그렇게 만드셨다.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인 줄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이 어느 틈엔가 위로 떠오르더니 마침내 온 세상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독점과 착취의 성(城)을 쌓기에 이르렀다. 맨 먼저 흙을 독점 할 줄 안 인간에게 저주를! 맨 먼저 땅을 측량하고 금을 긋기 시작한 자들에게 온갖 비난과 욕설을! 동시에 독점과 착취의 성을 스스로 허물고 사유(私有)라는 악마의 유혹을 깨뜨리며 지닌 것을 이웃과 더불어 나눔으로써 넉넉함을 맨 처음 맛본 이들에게 한 없는 축복을!

3.뜬 눈 멀어야 비로소

제가 보는 것이 옳으니 모름지기 모두 저처럼 보아야 한다고 우겨대는 자, 저와 다른 식으로 사물을 보는 자는 모조리 잡아다가 콩밥을 먹이든지 숨통을 끊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자, 이를테면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았고 신앙의 열성 또한 누구보다 순수하며 뜨겁다고 확신하여 기고만장 높은 말에 우뚝 앉아 졸개들을 거느리고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곰팡이 같은 무리를 잡아들이러 다마스커스로 행진하던 당대의 바리사이 사울 같은 자가 곧 그요,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선천이든 후천이든 눈이 멀어버린 자, 맑은 눈을 지녔건만 옥에 갇혔거나 해서 볼 수가 없는 자, 배운 바 없고 깨우쳐주는 이 만나지 못하여 보고도 보지 못하는 자가 곧 그이다. 보아라. 뭇 소경이 예수님 만나서 눈을 떴는가 하면 사울처럼 스스로 보노라 하는 자는 예수님 만나 눈이 멀지 않았더냐? 세상사 오묘망측하여 어떤 사람은 먼 눈 떠서 사물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뜬 눈 멀어야 비로소 사물을 보는구나.

4.둘이 떨어질 수 없는 하나

"작은 일에 성실한 자에게 큰 일을 맡긴다"는 예수님 말씀은 작은 일 따로 큰 일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작은 일과 큰 일이 본디 하나인 즉 작은 일을 큰 일처럼 정성껏 하는 사람이 큰 일을 작은 일처럼 쉽게 한다는 그런 말씀으로 풀 일이다. 따라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강령 또한 일의 순서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평천하와 수신이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로 읽어 마땅하다.

5.살다보면

하늘에 오르려고 기둥을 세우면 기둥에 깔려 죽고, 날개를 만들면 날개에 묻혀 죽고, 돈을 벌려고 사업을 하면 사업에 물려 죽는다. 사람이 땅 위에서 목적해야 할 것이 유일하게 하나 있으니 곧 천명(天命)을 순(順)하는 것이라, 달리 말하면, 살아가라는 하늘의 명령을 오로지 좇아 어떤 처지에서든 살아가는 길을 걷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살아가는 것이니 생존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윤리도 법도 체면도 모두가 무력해지는 것이로되 때로 목숨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 또한 사실은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는 하늘의 명(命)에 따르는 것 아니고 무엇이랴.
바로 이 유일한 목적에 충실하는 데서 문화도 나오고 철학도 나오고 혁명도 열매 맺으니, 문화를 만들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다보니 문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요, 혁명을 이룩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남는 길을 목숨 걸고 찾아 지키며 싸우다 보니 마침내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이거늘...

6.사람을 잡는 것은

알되 알아야 할 바를 바로 알지 못하는 지식,
부리되 그 힘의 원천과 동떨어진 힘 부림,
지키되 그 지켜야 할 내용을 잃고 오히려 엉뚱한 것을 지키는 보수,
나가되 그 나갈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진보,
믿되 그 믿어야 할 대상을 잃고 유형무형의 우상에게 무릎꿇는 눈먼 신앙,
병을 치료하되 병의 뿌리는 알 바 없이 이 약 저 약 소경 매질하듯 써보다가 들으면 다행이요 안 들어도 약값 받으니 그만이라는 돌팔이 의술, 그림을 그리고 시(詩)를 짓고 연극을 하되 현실의 핵심을 참으로 꿰뚫지 못하는 그림과 시와 연극이 마침내 사람을 잡는다.

7.성경은 하느님을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느님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존재를 논증하거나 해설하는 대신 묘사할 따름이다.
말을 아끼자. 현실은 모순이다. 모순 아닌 것은 현실이 아니다.
문제는 이 현실을 보는 관점 또는 현실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있다. 성경의 모든 자자구구(字字句句)가 이 현실 모순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한결같이 흐르고 있으니 과연 움직이지 아니하고 붙박혀 있는 성경의 구절이란 생각조차 해볼 수 없는 것!

8.세상에 아름다운 일이 있다면

사람이 살아있다 함은 그가 아직 돌아설 수 있다 함이라, 돌아설 줄 모르는 놈이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어찌 사람일 수 있을까보냐. 그런즉 세상에 아름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픔을 통해 이르는 깨달음이요 어둠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밝게 열리는 눈이요 마침내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사는 삶이다!

9.사람이 사람인 것은

사람이 사람인 것은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알기 때문이니, 은혜를 모르는 자라면 그가 제아무리 총명하고 위대하고 큰일을 이루고 막강하다 해도 우선 사람일 수가 없는 법.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 자체가 그 누군가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라, 태어날 적의 부모 은혜는 말할 것 없고 가르쳐 주는 스승의 은혜, 이끌어주는 선배의 은혜, 힘든 고비마다 붙들어주고 밀어주는 친구의 은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의 콧구멍을 드나드는 저 거대한 숨(氣)의 은혜... 이 모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이 그러므로 인간의 마땅한 도리렷다.  

10.하늘의 심판이란 무엇인가?

결국 사람이 저마다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게 하는 것, 제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둘 수 없고 심은 것을 거두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늘의 심판이렸다! 그럴진대 오늘 우리의 삶을 어찌 삼가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늘 가는 길은 땅에 있느니.

11.자기의 뜻을 꺾은 사람

르네상스 이후 이른바 인본주의(humanism)가 법과 제도와 관습에 억눌려 있던 사람을 일으켜 주인 자리에 앉힌 것은 좋았으나 사람으로 사람의 궁극을 삼은 것이 탈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스스로 믿을 수 없는 구석이 너무나도 많은 불완전함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보다 더 간교하고 미쁘지 않은 것이 천지간에 무엇이랴?
예수님이야말로 무위(無爲) 무기(無己)의 참사람이었으니 그에 관한 기록에서 어디 한군데 자신의 뜻을 관철코자 억지를 부린 대목을 찾아볼 수가 없구나. 오히려 그가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앞에서 꺾어버리는 최후의 기도(눅22:42)야말로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기도 아니던가?

12.땅에 살면서 하늘을 사는 법

땅에 살면서 하늘을 그리워함은 그의 삶이 허공에 둥둥 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전보다 더욱 땅에 밀착되어 착실하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들, 무게로 달고 자로 재어볼 수 있는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 측량되지 않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삶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골로새서3:1-2)

13.진실을 알고 있는 단 한사람

진실을 알고 있는 한 사람 앞에 허위로 무장한 수천만 군대가 오히려 무력한 법이니 이는 바늘 끝 같은 빛살 앞에 억겁 암흑이 찢어지는 것과 일반이다. 단 한 사람 예수, 그가 아무의 원조도 받지 아니하고 다만 홀로,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하였으니 오직 진리를 잡겠노라 밤낮으로 샤타그라하를 외친 간디 앞에서 해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그림자처럼 스러졌음은 예수님 하신 말씀이 과장된 허언(虛言) 아님을 역사로 증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14.유혹

유혹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눈에 띄는 힘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힘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15.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

1985년 로마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들한테 질문지를 돌리고 그 대답을 정리하여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본 한 작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가난을 구분해야 한다.
1.강요된 가난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므로 우리는 반드시 맞서서 대항해야 한다. 사회적 가난이란 결국 누군가의 독점으로 말미암아 강요된 가난이므로 이 가난에 대하여 우리는 오직 대항하고 투쟁할 의무를 질 뿐이다. 왜냐하면 독점은 곧 죽음이요 죽음에 저항하여 마침내 그것을 이김이 그리스도의 길임을 우리는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2.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가난은 해방이며 가치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그 가난을 포용해야 한다. 스스로 재물을 나눔으로써 누리게 되는 '복음적 가난'은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요 태초에 이미 정해진 하늘 이치(天理)인 까닭에 마땅히 바라고 지켜나가야 할 가난이다."
우리는 '사회적 가난'과 '복음적 가난'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