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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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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기 깨어짐
17세기 영국의 경건하고 박학한 청교도 존 오웬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신 경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신 것은 성도들이 그를 통하여 참으로 신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목회자인 자에게 몇 천명의 교인을 목회 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은 한 사람을 목회 하는 일입니다. 그 한 삶은 여러분 중 가장 완고한 교인보다 더욱 고집스럽고 악합니다. 아직도 저의 목양의 손길에 들어오지 않는 한 사람은 바로 제 자신입니다.
2.자기 깨어짐과 회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회개는 구원에 이르도록 이미 이루어진 회심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부패한 옛 자아에 대하여는 죽어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겨진 새사람에 대하여는 살아나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회개를 통해 옛 사람이 죽고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게 살아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거룩한 삶을 위한 규칙입니다.
3.성화의 길을 가는 신자들에게는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생활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믿음을 통해 얻은 지식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아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믿게 되니, 믿음은 이성을 찾고 이성은 믿음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이어지는 우리의 성화의 여정 역시, 바로 그렇게 믿음과 이성을 통하여 얻는 지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길을 가는 신자들에게는 항상 다음의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눈부신 진리의 빛과, 불타는 마음의 기도, 그리고 목마른 지성의 탐구입니다.
4.죄는 지성을 속인다.
죄는 지성을 속임으로써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성을 심습니다. 지성은 영혼의 가장 탁월한 기능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지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성에 말씀하시며,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가장 탁월한 특성입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수단도 지성을 통해 철학적 사색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일시적 처방'입니다. 믿음은 지성의 작용을 통해 권위로써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때까지 이성의 활용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인간의 영혼에 뿌리내리기 위해 먼저 영혼의 주된 기능인 지성을 공격합니다. 죄는 생각과 영혼 전체를 올바르게 감시하는 지성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려고 애씁니다. 따라서 신자는 지성이 순수한 신앙 속에서 그 순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령과 진리의 작용으로 영혼이 쇄신되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합니다.
5.죄악의 낙(樂)
죄는 신자에게 즐거움을 줌으로써 그 마음에 뿌리내립니다. 죄가 신자의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방식은 소극적으로는 죄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죄를 실행하게 함으로써 즐거움을 줍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악의 낙(樂)'(히11:25-26)입니다.
6.모세의 신발
어떤 개별적인 죄의 실행이 반복될수록 신자의 본성은 그 죄에 대한 강한 고착력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집착은 신자로 하여금 더더욱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하여 결별할 수 없게 하여 지속적으로 같은 죄에 빠지게 합니다. 모세가 일평생 신고 다닌 신발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신고 있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모세는 그 신발을 한번도 불편하게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신자의 죄에 대한 집착도 오랜 기간에 걸쳐 신자의 본성 안에서 그의 마음의 취향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악덕스럽게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신자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처럼 죄에 대한 신자의 사랑은 죄를 버리지 못하는 집착으로 나타나고, 죄에 대한 집착은 다시금 신자가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7.두 가지 고독의 본성
신자에게는 두 가지 고독의 본성이 함께 있습니다. 신령한 고독과 육욕적 고독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한 고독은 신자로 하여금 외로울수록 하나님께 합일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육욕적 고독은 외로울수록 죄의 즐거움을 탐닉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경건한 신자에게는 은혜로운 정서가 있어서 고독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고, 타락한 신자에게는 타락한 정서가 있어서 고독의 본성으로 하여금 죄의 즐거움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한 신자 안에 있는 은혜로운 정서는 신령한 체험에서 비롯된 성령의 작용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8.복음적 의(義)
복음적 의는 의로워지는 자원을 그리스도께 둔 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의입니다. 율법적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극성으로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의라면, 복음적 의는 창기와 세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했던 의입니다.
복음적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의를 덧입게 되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따라서 복음적 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기가 의로워진 모든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사역에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충만한 사랑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극도의 미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랑의 최고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한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9.그리스도와 거룩한 생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최고의 명령은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반드시 의로운 삶이며, 의로운 삶의 열매를 거룩함의 뿌리에서 봅니다. 그리고 모든 거룩함은 복음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분투하며 의롭게 산 사람들은 신자들이지만 그들이 의로운 사람을 살아서 드러낸 겨룩함의 효과는 분투한 신자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렇게 살도록 은혜로써 함께 역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입니다. 따라서 내적인 은혜에 사로잡혀 그 거룩함의 효과로 흘러나온 의로운 삶만이 그 은혜의 원 저자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10.구원의 열매인 의로운 생활
구원받은 신자의 삶은 그 구원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의의 열매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비결이 의의 열매가 풍성한 것임을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고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로부터 영광 받으시는 방식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러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수준 높은 성화의 상태는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견딜 수 없는 목마름입니다.
11.복음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영광은 복음을 통하여 드러나는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토대가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율법 없이는 복음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지만, 거룩한 영광의 빛은 복음 안에서 비췹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이 죄로 가득한 상태를 인식하게 하실 때, 우선 양심과 율법을 사용하셔서 각성시키시지만,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십니다. 그 복음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그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 하찮음과 도덕적인 비참함을 보게 하십니다. 이 영광이 곧 복음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복음 안에서 가장 풍부하게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났습니다.
12.지성과 영혼의 관계
인간의 지성은 이성과 총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총명을 오성(悟性)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성은 사물들을 인식하고 거기서 획득된 개별적인 지식들을 연결하고 추론하는 지적인 기능입니다.
총명(聰明)은 변천하고 있는 사물과 일에 대하여 실재를 직관하는 능력입니다. 특히 이 총명은 영혼의 중요한 기능으로서 그것이 속한 영혼의 밝고 어두운 상태에 의하여 그 기능이 잘 발휘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욕망, 미움, 헛된 기쁨, 두려움, 슬픔 등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물들을 인식함에 있어서 부패하여 오염된 영혼의 상태로 인하여 동요된 감정의 영향을 받음으로 그것들이 전달하는 표상에 매여서 사물의 참된 본질인 실재를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잠세적인 것들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영원한 것을 잠세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가치 있는 것들을 사소하게 생각하고, 사소한 것들을 가치 있게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이 인간 안에 있는 죄는 그의 영혼의 총명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13.확신케 하시는 성령
죄를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죄를 확신하게 하시는 주체는 성령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악에 대한 이성적 추론 자체가 그 악을 멀리 하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악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가르쳐 주기만 하면 그 악을 행하는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음에 대하여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죄를 확신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이성에 의한 인식 없이는 죄를 확신할 수 없고, 자신의 죄를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그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도 확신할 수 없지만, 죄 자체를 확신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14.삶의 허무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으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인간의 운명은 삶의 허무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사랑했던 처음 인간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 거기로 감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없는 것을 사랑'하는 삶의 허무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요일2:17).
정확히 그러합니다. 모두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집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무(無)로 돌아갑니다.
15.영혼의 고통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통하도록 창조되었으나, 끊어진 교제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형편이 영혼의 고통을 말해줍니다. 허탄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악을 좇으며 사는 모든 인간들, 그리고 진실한 참회가 거의 없이 그들처럼 살아가는 신자들의 영혼 안에는 극심한 고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들은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당할 최후 심판의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앙을 고집하며 창조 목적을 거부하던 인간들과 신자라 불리지만 사실상 창조 목적을 따르지 아니하는 허위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6.욕망을 죽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을 죄의 자리에 두고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욕망을 따라서 죄의 자리로 점점 더 이끌리면서,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는 진실성이 없는 거짓이 되고, 그가 드리는 기도의 향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과 죄에 대한 갈망이 함께 타올라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것은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내면에서 구정물처럼 올라오고 있는 욕망을 힘겹게 억누르는 데에 소진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죄와의 싸움에서 충분히 불리하도록 자신을 욕망에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정으로 죄를 이기기 원한다면 환경이 그를 유혹하기 전에, 생각이 이탈하기 전에, 의지가 동의하여 욕망을 잉태하기 전에, 자기 안에 내재하는 부패한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재하는 죄의 잔존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자의 영혼과 삶에는 생명이 넘칠 것입니다.
17.자기에 대한 유죄선고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신데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최고 가치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이시며, 최고 진리이신 하나님 자신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실재로 존재하는 질서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질서를 따라 사랑함으로써 오는 혼란과 고통들입니다. 자기 부인의 의지 안에서 조명을 통해 드러난 죄의 확신을 통해 마치 자신을 또 하나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심판하게 되는데, 신자는 이를 통하여 자기 깨어짐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배향하였던 신자는 자신의 전일성을 회복하고 거룩한 신자로 성화되어 갈 것입니다.
18.죄를 올바로 인식하는 고통
죄를 지은 것이 단지 '본인에게도 유감스러운 일'정도로 생각되는 식으로는 죄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의 생기를 다시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신자가 언제나 통절한 참회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혼의 생기를 회복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진실한 참회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참된 '신앙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이러한 참회를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정하게 엄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기 처벌을 통한 자기 깨어짐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본성이 참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새사람의 살아남을 경험함
옛사람이 죽임을 당할 때, 새사람이 살아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순명(順命)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순명의 삶은 그분을 향한 신자의 사랑을 입증하는 열매가 되고, 그러한 사랑 안에서 사는 삶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는 사랑과 순명의 실천 안에서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됩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영적인 성장과 열매를 맺는 삶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 같은 묘사입니다.
20.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신앙은 단지 종교생활에 갇힌 신앙이 아니며, 더욱이 교회 생활 안에 묶인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 신앙은 신자를 비롯하여 참 행복을 찾기 위하여 고민하는 이교도들은 물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대답이 될 수 있는 사상을 지닌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단지 종교의 교리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들을 토대로 철학적 사유, 곧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이교사상이 다다르지 못한 철학적인 결론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21 회복되는 세 감각
자기 깨어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된 신자의 세 감각이 회복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이고
둘째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각이며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입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적용될 때 각각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용서를 경험한 것만큼 감사할 수 있고, 영광을 경험한 것만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22.왜 신자에게 참된 헌신이 없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만 헌신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다 드리도록 부름 받은 헌제자들 입니다. 그럼에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여야 할 마땅한 본분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계획으로부터 멀리 이탈한 채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렇게 산 삶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한 것인지 성경이 수없이 증언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신자의 잘못된 자기사랑으로 집약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로 변화되어 자기를 기뻐하지 않는 인간의 악덕스러운 자기 사랑의 본성이 허탄한 것들에 굴복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23.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기쁨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의 온 삶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회복을 위해 주어진 개별적인 의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의 내면의 세계가 깨뜨려져야 할 다른 세계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는 일할 때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활동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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