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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를 어떻게 하라고...

무엇이든 적당해야지 넘치거나 모자라면 문제가 됩니다. 이 책은 그 방향성에서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자존감(Self-esteem)'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걸러낸 자아'인데, 우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체제나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짜 자아를 가릴 수 있게끔 스스로 딱딱한 갑옷을 만들어 입고 삽니다. 이러한 갑옷 사이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진짜 자아의 크기가 바로 자존감입니다. 자아가치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는 위협이 클수록 자존감은 약해지고 방어행동은 커집니다.
자존감이 약할 때, 그것은 자기비하로 발전하고, 자존감이 너무 높을 때는 그것이 '자기 자랑'이 됩니다. 아니 그 반대로 자존감이 너무 낮을 때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자기자랑'으로 위장할 수도 있고, 자존감이 너무 높으면 그것이 자기 자랑의 극치인 '교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자기 부인'을 가르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에 철저하게 죄에 순종하는 본성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인간 속에서 나오는 것은 썩은 냄새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구제불능'입니다. 예수님이 있어야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랑이 아닌 '나'에 대한 자랑을 일삼는 것은 부패한 자아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이런 자기 사랑은 영혼의 은혜를 고갈시킵니다. 성경이 그토록 자기 부인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행위에는 자기 안에 이미 주어진 성화의 은혜를 고갈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화의 은혜가 자기 자랑에 의해 고갈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기 자랑의 동기 자체가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자랑은 항상 진실과 정확한 사실보다는 의도되고 과장된  스토리에 가깝습니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한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은밀한' -그렇습니다. 누구든 드러내놓고 잘난 척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도 자기자랑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자랑'은 안 그런 척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을 살기 위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죄입니다.
한 사람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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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밑줄그은 곳

1.어느 목사와 권총

어렴풋이 기억나는 가슴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권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고 2천만원의 돈을 빼앗은 사건입니다. 체포된 그는 범행의 동기가 "교회당 건물을 지을 돈이 필요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기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동기들의 교회에는 많은 교인들이 모이고 예배당도 크고 사택도 좋아 보였습니다. 동료들은 점점 성공해 가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의 신앙이 올발랐다면, 사역의 진정한 가치가 교회의 양적 성장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아마도 틀림없이 이런 일이 있기 전에 그의 여러 동기들이 모여 무심코 자기 교회, 자기자랑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비교의식을 느끼고 좌절하고 시기의 마음을 품은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2.거룩한 은혜를 고갈시킴

자기 자랑은 우리 내면의 거룩한 은혜를 고갈시킵니다. 혹시 사람들에게 자랑을 한 후에 마음이 공허해지고 고갈되는 것을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자랑 안에는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자랑을 일삼는 것은 부패한 자아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이런 자기 사랑은 영혼의 은혜를 고갈시킵니다. 성경이 그토록 자기 부인(自己 否認)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행위에는 자기 안에 이미 주어진 성화의 은혜를 고갈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교만으로 발전하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의 욕구를 따라 살게 합니다.

3.공동체를 오염시키는 자기자랑

교회 공동체의 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자기를 버려 사람의 모양을 취하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신 겸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러한 정신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의 육신적인 것을 자랑하고 다른 지체들은 맞장구를 쳐 주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자랑의 정도는 갈수록 심해질 것이고, 심지어는 그렇게 자랑하는 자를 닮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계속 생겨날 것이 분명합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런 악순환이 지속되지 않도록 자랑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에서 불붙은 가치관이 교회로 들어와 신자에게 옮겨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4.박수를 그치고 하늘을 보세요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곡가 '하이든'은 '천지창조'라는 유명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했습니다. 이 천지창조가 빈에서 초연될 때 하이든은 몸이 아파 공연장 뒤에 앉아서 관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 지휘자는 정말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휘자는 청중의 박수를 중단시키고 뒷좌석에 앉아있는 하이든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자, 하이든은 청중의 박수를 그치게 하고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위에 계시는 그분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5.하나님 자랑과 자기자랑

하나님을 자랑할 때, 우리의 영혼에는 어떤 작용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 힘이 생겨남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대상16:10)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성령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고갈되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없습니까? 누구를 헐뜯지 않더라도 내용 없는 수다나 객담등으로 시간을 죽이면서, 유익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말 자체를 위해 늘어놓는 가운데 마음이 건조하고 고갈되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6.허탄한 꿈들

우리의 생각이 죄에 감염되면, 생각이 자기의 본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우리로 허탄한 것을 위해 헌신하도록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루종일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에 몰두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마땅히 창조의 목적에 기여해야 할 정신을 허탄한 것에 몰두함으로 낭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덕에 이 땅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안팎으로 낭비하며 사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7.혼자 씩씩하게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드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풍파 많은 이 세상,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씩씩하게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일할 건데, 너와 함께 하고 싶구나. 네가 혼자서도 잘 사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란다. 너와 함께 할 테니, 내가 이룰 테니 날 의지하렴."
하나님과 상담해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제하고 세운 인생의 계획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눈에는 너무도 선해 보이는 것이더라도, 오죽하면 자랑까지 서슴지 않게 하는 것이더라도, 모든 인생을 아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며, 영원을 하루처럼 살고 계시는 하나님께는 그리 중요한 일도, 감탄할 일도 아닙니다. 구차한 세상살이에서 좀더 배부르기 위해, 좀더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 애쓰는 헛된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8.소명을 따르지 않는 인생

소명을 따르지 않는 인생의 모든 계획은 허무합니다.
아무리 치열한 삶으로 그 허무를 채우려 하여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 계획은 하나님 앞에서 '더럽다'는 것 외에는 다른 평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워가고 있습니까? 치열한 삶으로 채우고 있다면 게으른 것보다는 낫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삶의 시작점은 어디였습니까? 소명이었습니까? 여러분 나름의 인생 계획이었습니까?

9.기독교의 법칙

어떤 사람이 어거스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했습니다.
"수사학자로서 웅변술의 제1법칙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거스틴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습니다. "발음(發音)입니다."
더 특별한 질문을 원했던지 질문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2, 제3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그것 역시 발음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문답을 예로 들면서 기독교의 법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명료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이 만일 누가 기독교의 법칙에 관하여 이런 식으로 각각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10.낙지 신자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아첨하는 사람은 성품이 올곧지 않습니다. 아첨의 대상이 반응하는 것에 따라 수시로 변화합니다. 마치 낙지가 접시에도 컵에도 사발에도 아무 저항 없이 담는 대로 그 용기에 담기듯이 흐느적거립니다. 낙지 같은 연체동물처럼 흐늘대는 부패한 성품을 고치지 않는 이상, 아첨하는 입술은 끊이지 않고 움직일 것입니다. 아첨하는 태도의 근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몹쓸 태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중심에 계시지 않는 뼈대 없는 '낙지 신자'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신자의 영혼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다면, 그 영혼의 건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은 가는 곳마다 자기만족을 위한 자랑을 합니다. 자랑을 하기 위해 자기 본래 모습은 감추고,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에게 아첨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11.세 아이의 아빠자랑

어린 아이 셋이 모여서 각자 가기 아버지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의사인 아이가 말했습니다. "너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지 알아? 한번 치료해 주면 돈을 이만큼 벌어." 하면서 자기 두 팔을 벌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변호사의 아들이 질세라 더 크게  팔을 벌리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더 많이 벌어. 한번 재판하면 돈이 이만큼 생긴다니까."
그 틈에 풀이 죽은 채 안아있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랑할게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잠시 후에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습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아빠가 한번 설교하면 돈 걷으려 일어나는 사람이 열 명도 넘는단 말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와 관련된 사람이나 사물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자랑함으로써 마음이 은혜로부터 떠나게 되고, 어떤 것은 자랑함으로써 마음에 은혜가 깃들이게 됩니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