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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 속으로>를 읽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그은 부분 몇군데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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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해의 아픔 - 나는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며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하며 많은 헌금을 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거의 본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알기를 구하는 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애인은 그리워해도, 헤어진 자녀를 만나고 싶어서 눈물 흘리는 이들은 많이 보았어도 꿈속에서라도 한번 주님을 만나고 싶고 보고싶어하며 사모하는 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도 예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문제에 관심이 있고 자신들의 욕망에 관심이 있고 자신들의 꿈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많이 보았지만 예수를 그리워하고 추구하는 이들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지겨워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리워하지 않는 이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시간 외에는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 자체도 이상한 일로 여기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아는 사람들일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는 이들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아는 이들은 결코 주님과 무덤덤한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아는 이들은 주님께 매혹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오해는 어디에서 오는가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영혼의 깨어남, 심령에서 오는 것임을 이해하십시오. 그것은 논리적인 지식이 아니며 믿음과 경험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고 빛을 경험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빛이신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방해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방해하고 제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며, 우리 자신의 무지이며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은 우리의 낮은 인식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치신다는 것에 대하여 - 나는 '하나님이 치셨습니다'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글로서 읽기도 하고 귀로 듣기도 하였습니다. 어디서나 그러한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툭하면 하나님이 치셨다, 하나님이 치신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치셨을까요? 정말 하나님이 사람을 치시는 분이신가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러한 표현이나 사고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같은 고백이나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한 많은 오해를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영계의 법칙 - 사람은 각자가 영적인 자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끌어당깁니다. 죄를 좋아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면 그러한 기운, 그러한 영들이 가까이 오게 되고 어떤 사람이 빛과 진리와 사랑을 좋아하며 추구한다면 그는 날마다 빛과 진리와 사랑 쪽으로 발전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운과 성향을 통해서 환경과 미래를 끌어당깁니다. 자기의 안에 있는 것이 실체이며 환경과 미래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언젠가는 입으로 나오고 행동으로 나오며 환경에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운이 좋아서 좋은 일만 생기고, 어떤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상관없이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시고 결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5 징계의 의미 - 하나님의 징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들을 망하게 해서 신학교에 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나쁜 씨앗을 심고 나쁜 열매가 생긴 것을 징계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두움의 상념들이 재앙을 끌어들이는 것을 징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의 "아들"이며 "사랑하는 자"에게 영혼의 감각이 깨어나게 하고 영혼의 열매를 맺게 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6. 주님은 치유자이십니다. - 정말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괴로운 일이 생기거나 납득하기 어려운일이 생기면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인 냥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나는 왜 사람들이 아름답고 선하고 사랑으로 가득하신 주님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표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병을 주시는 분도, 일을 어렵게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치유자이십니다. 주님은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비와 긍휼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는 자녀에게 병을 주시고 삶을 힘들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오해입니다.

7. 주님은 우리의 곁에 계십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깊은 은총과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방에서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곁에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구하는지 아닌지를 조용히 지켜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구하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가 곁에 계신 분을 간절히 초청하지 않을 때 그분은 조용히 사라지십니다.
바로 곁에 서 계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삶이 힘들다고 울고  불고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화에 매달리고 컴퓨터에 매달리고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대신 옆에 계신 주님을 붙잡을 것입니다.

8. 함부로 전도하며 함부로 주님에 대해서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공포의 하나님을 가르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하철에서 무서운 얼굴과 사나운 말투로 지옥의 심판에 대해서 전하는 이들은 영혼을 깨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도구가 되기 쉬울 것입니다.
적지 않은 전도자들이 주님을 두려운 자로 묘사합니다. 주님의 친밀하심과 아름다우심, 친절하심과 사랑스러우심에 대해서 전달하고 가르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는 그 전달자들이 그러한 주님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거룩하심, 주님의 영광, 주님 친절하심, 주님의 감미로우심을 경험하고 먹고 마시지 않은 이들이 그것을 가르치고 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9 하나님은 예수님 -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세계의 4대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복음을 모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10 .마지막 소원 -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우리가 떠나야할 때가 가까워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할까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삶을 마무리하려고 할까요? 그 떠남이 삶을 끝내는 떠남이 아닌 작은, 일시적인 떠남일 경우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마지막 시간이 올 때 그 사람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행할 것입니다. 그의 가슴에 깊이 간직된 것을 말하고 행할 것입니다.
주님의 경우는 어떠하셨을까요? 주님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사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에 대한, 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기 때문입니다.  

11. 우리는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우리의 안에 주님의 영,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깥에 계신 주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주님, 주님의 영, 성령님은 우리의 행동과 마음과 생각의 동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시며 상처를 받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하여 근심하시고 안타까워하시며 소멸되십니다. 우리 안에서 완전히 떠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지배하시는 힘을 많이 상실하십니다. 그것이 소멸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감각은 차츰 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우리 영혼의 감각이 마비되면 우리는 기도생활에 기쁨을 잃고 예배와 찬송과 주님의 말씀이 지겨워지게 됩니다. TV를 통해서는 기쁨을 누리지만 주님을 통해서는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주님이 소멸되신 증거입니다.

12.주님의 고독 - 오늘날 어떤 이들이 가르치기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풍요의 하나님을 믿으면 경제 문제가 해결되고 부유해지며 우리의 모든 꿈과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따를 것입니다. 그러한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며 사람들은 기뻐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가르치기를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며 목숨보다 더 주를 구하여야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치고 주를 따라야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벗어나 주님의 마음을 살피는 자는 복 받은 자입니다. 그는 만유의 주재이신 분과 연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천하의 보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3.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 -신앙의 위인으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안타까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의 그림자와 같은 모습이 주님의 십자가에 다가가더니 그의 손에 있는 못에 마구 망치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놀라서 내심 '아니, 저게 도대체 누구인가?'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유심히 보는 가운데 그 그림자가 곧 자기 자신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환상을 보고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다'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14. 주님의 사랑은 아픈 사랑 -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별 다른 감격과 충격 없이 성찬식을 합니다. 포도주의 잔과 떡에 참여하는 것이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태연하게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둔감하고 잔인한 것입니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간을 이식해주고 신장을 이식해주다가 죽었다면 그는 그것을 태연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고통과 찢김이 담긴, 그의 아픈 사랑이 담겨있는 피와 살에 그렇게 태연하게 접한다면 그것은 영감이 없는 것이며 영적인 실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15.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 주님은 옳고 정확한 사람을 찾는 것보다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분은 지혜와 능력과 명철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지혜와 능력으로 완전히 준비된 이를 부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고 어린 아이처럼 소박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면 하나님께서 그를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쟁을 하려 애쓰며 잘난이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겸손한 이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동기에 있어서 어린 아이처럼 순진하며 오직 교만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고 바라보는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16.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시킵니다. 주님은 우리와의 교제를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의 풍성함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합니다. 그가 가진 무한한 보화를 나누어주시려고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재산을 빼앗거나 자녀를 통해서 어떤 이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주고 또 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기쁨입니다.

17.사랑고백 - 주님은 사역을 맡기기 전에 반드시 사랑의 고백에 대하여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일을 맡기십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아무리 깊은 은사를 체험했어도 주님을 중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귀에게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는 교만해지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역을 하기 전에,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18. 많은 경우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욕망과 목적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리고 주를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열린 만큼 주님은 오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괜찮다. 얘들아... 너희들은 급할 때만 나를 찾지.. 문제가 없고 즐거울 때는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오너라.. 나는 항상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나를 찾을 때 나는 언제나 너희에게 와서 너희에게 기쁨과 치유와 행복을 줄 것이다. 너희가 나에게 오지 않더라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며 기다릴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게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으며 주님은 더 이상 은총을 베푸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19.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앞에 나타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하고 싶다면 우리는 주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해 보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귀하게 듣고 잘 기억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20.왜 사람들은 주님을 갈망하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를 다니면서도 왜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갈구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낮은 차원의 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리기 때문입니다. 아직 영혼의 눈이 떠지지 않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분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혹자는 물질이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인간적인 애정이 행복을 위해 중요한 것이며 저 사람을 놓치면 내 인생은 비참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명예를 그렇게 중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오직 주님을 갈망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알고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21.신앙의 기초와 중심 - 신앙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신앙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기본이며 중심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처음이며 마지막입니다.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내면적인 것입니다. 내적으로 주님을 알고 만나고 그 주님을 통하여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알기 위해 읽는 것이며, 기도도 주님을 알기 위해서, 주님의 실제를 경험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초보자의 기도는 항상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지만 조금 더 나아가고 영이 자라게 되면 주님 자신을 알기 위하여 사모하고 주님을 위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초입니다.

22.신앙의 중심은 관계입니다. 그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과 구원의 문제는 우리가 선하게 살았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그 대 비로소 신앙의 바른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신앙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주님' 나의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좀 더 신앙이 발전한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당신'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최종 목표는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23.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요? - 그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아기의 상태에서는 결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은 기계적인 것이지만 영혼은 인격적인 존재이므로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순종과 사랑 없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오래 해 왔고 사역과 봉사를 오래 했다고 해서 영혼의 몸이 자라고 영혼의 몸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신랑에 대한 간절한 생각이 나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그저 이성에 대한 호기심 그 이상은 아니지만, 결혼 적령기가 되면 배우자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열심히 찾아 헤매듯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랑을 간절히 염원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4.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 그들의 남편은 세상이며 욕망이며 명예이며 성공입니다. 주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주님을 아프게 합니다. 주님은 거짓말이나 욕심이나 그러한 구체적인 죄들 자체보다도 그들의 중심이 주님이 아닌 것을 슬퍼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 수준의 유치한 분노와 질투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하며 생명과 영광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 거룩한 질투와 분노와 아픔과 상처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마음을 보여 줄 사람을 찾으십니다.

25.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 자체가 일종의 영적 훈련소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교관으로서, 안내자로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 우연이란 없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각종 시험이나 환란도 이유 없이 다가오는 것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이 인도하시는 훈련장소에 입소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잘 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피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사람을 찾으며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찾습니다. 자신을 성장시키고 영혼을 깨우며 주님께로 이끌어주는 훈련과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훈련을 받으면서도 성장하지 못하고 훈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푸념만 하고 원망만 하면서 주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26.환경이 나빠 지옥에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그 영이 완악하고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불평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소한 불평은 결국 주님께 대한 공격입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스스로 상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우리에게 우연으로 다가오는 환경은 없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우리의 힘으로 하기 어려운 것을 요구받을 때 주님께 나아가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27.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나 환경이 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관용이 없으며 사랑이 부족한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분노와 혈기와 악성이 존재하는 것을 모르고 우리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무례한 대접을 받았을 때 그는 주님께 나아가서 엎드려 자신이 그렇게 주님을 무례하게 대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은 곧 훈련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꼭 맞는 특수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28.오늘날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아주 둔감합니다.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죄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을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자녀들이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가난에 대해서는 고통을 느끼지만 자신의 속에 있는 음란과 정욕과 시기와 거짓에 대해서는 별로 아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이미 중증이며 주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임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