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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부분을 옮겼습니다.

1.소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가루는 서말씩 되지만 누룩은 언제나 한 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말의 가루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변화를 불러일으키기에는 한줌의 누룩이 충분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는 깨어 있는 소수는 이미 소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한 가지 평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소수가 곧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일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2. 오해로부터 벗어나라

  영적인 침체나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아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주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의 상처와 침체된 영혼을 부둥켜안고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영적 회복보다는 값싼 감상(감상)의 정서를 대가로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 실 수 있고, 죽은 자와 방불한 심령에 소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 소생, 상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우리가 받는 고통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절대 의존적인 소망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상처와 치유, 그리고 영적 침체에 대한 오해가 난무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회복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은 오직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3. 시편 23편

  우리는 흔히 시편23편을 읽으면서 다윗의 목동시절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러나 구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가 다윗의 어린 목동 시절에 쓰여진 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외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지만, 시 자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가 말년에 지은 시일 가능성이 많다는 판단을 내리게 합니다.
  이 시 속에 나오는 몇 가지의 표현이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등의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가적인 전원생활에서 비롯된 내용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치열한 싸움판과 같은 인생을 지나오면서 깨닫게 된 사실에 대한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가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공격을 받아서 도망가는 극심한 시련을 당한 직후에 쓰여졌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인생의 가장 곤고하고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4. 모든 곤고함의 원인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경험되는 모든 곤고함과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는 곳에는 언제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 인지를 보여 주는 외면할 수 없는 증거가 온 땅에, 우리의 경험 속에, 무엇보다도 풍성한 계시의 책인 성경 속에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먹고 사는 방법을 체득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만큼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 힘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가장 사모해야할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추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헛된 것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야말로 호세아가 예언한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자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내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5.신앙과 체험

우리는 우리보다 뛰어난 삶을 살았던 신앙의 위인들을 볼 때마다 항상 그들의 삶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로 하여금 그처럼 탁월한 신앙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비밀은 그들의 삶의 현장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내면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 속에 살아 계셔서 그들의 삶을 사로잡으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이 일회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자신의 삶 한가운데에 반복적으로 역사 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앎은 경험을 동반한 것이었으며 그 체험은 진리와 나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회복의 관건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그분 뵈옵기를 사모하십시오. 거룩하신 인격과 광대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도록 더욱 풍성한 인격적인 만남을 간구하십시오.

6.목자는 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스스로 설 수 없는 한 마리 어린양과 같은 존재임을 자신의 삶 속에서 고백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좋으신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는, 알면서도 그 목자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생활하다가 맹수에게 물리기도 하고 웅덩이에 빠지기도 합니다. 옆의 친구가 짐승들에게 팔, 다리를 찢기워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런 것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숙명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존재,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자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는 불신앙, 그래서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어둠 속에서 자기의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도대체 누구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 줄 것이며, 또 그 사랑이 그의 인생의 불행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받는 모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오직 그 상처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상처와 고통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7. 두가지 소망

  오늘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알고 계신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향하여 무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신다고 느끼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타까운 사연들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고 침묵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돌봄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느낌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곤핍한 영적인 상태에서 비롯된 불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의 불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생각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난관과 어떠한 역경 속에서 어떤 영적인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다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을 붙들면 소망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배로운 구원을 누리게 하신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들로 아니하시고 흠 없는 어린양의 보혈로,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로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것도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8. 양과 말을 다루는 방법
  
  목동들이 양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면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목자는 결코 양을 휘몰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이나 소를 몰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양은 결코 말처럼 휘몰아 갈 수 없는 짐승입니다. 왜냐하면 양은 말같이 빠르고 소같이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은 말처럼 달음박질을 할 수도 없고 소처럼 오래 달릴 수도 없는 동물입니다. 가장 다급한 때라고 해봐야 종종걸음을 치며 약간의 거리를 달아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신앙 안에서 인도하실 때 결코 우리를 몰아 가시지 않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몰아가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9.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즐기고 있느냐는 더더욱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심지어 얼마나 헌신하고 일을 많이 했느냐 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동기가 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표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모양은 같으나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지로 말미암아 복음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함으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의 요소는 "깨닫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10.  사람마다 달리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들마다 그들의 특성에 맞게 약점을 아시면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번도 당신의 자녀들을 획일화되고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몰아가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공포 가운데 강요된 복종 아래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의 인도를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서 사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기쁘고 신이 나서 결국은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납 증서에 기쁨으로 도장 찍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요한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특별한 때는 불같은 시련 가운데서 그의 뜻을 깨닫게 하시지만, 결국은 그 가운데서도 공포가 아니라 인격적인 깨달음과 승복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11.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지속하고 누리며 살아가는가에 달렸습니다. 세상 속에서 유혹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시련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드는 모든 힘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신앙고백은 위대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강제적인 물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체험함으로서 여호와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12. 아!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교인들에게 늘 말합니다. 자신들이 내는 몇 푼의 헌금 때문에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없는 사람들, 십일조 낸 것이 아까운 사람은 언제든지 돌려줄 터이니 가져가라고 말입니다. 혹시 자신이 낸 헌금의 액수를 목사가 알아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는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누가 얼마의 십일조를 내는지 저 자신이 헌금내역을 보지 않습니다. 저도 교인들의 헌금 주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바라보며 목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13.거품 신앙

  오늘날 우리 가운데 있는 심각한 위기는 신앙의 피상성 입니다.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기 위하여는 우선 신앙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상식에서 거품을 걷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영적 특성을 깊이 파악하고 그 실체를 경험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문제와 다양한 세상의 요구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답하는지를 하나님의 말슴을 통해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신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가치와 특성을 깊이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는 대신, 복을 받아야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게 되면 문제는 점점 복잡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축복을 통해서 자기가 신앙적으로 올바르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부를 누리고 번창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다는 증거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여전히 그 가치관과 사고가 복음의 영향을 통해 거듭나지 못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4. 하나님의 음성에 고요히

  유대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자신의 아이들에게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그 인사말은 '쉐마'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듣다'라는 말의 명령형으로서 '들으라' 혹은 '귀기울일지니라'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수천년동안 잊혀지지 않는 한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선택된 백성들과의 관계는 그 백성들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고요히, 그리고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데서 출발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떠벌이는 것만을 즐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약한 사람들은 연약한 신앙생활을 떠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선생 되기만을 좋아하고, 말만 늘어놓기 즐겨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속빈 강정과 같은 허한 영적 생활을 이어가기 십상입니다.

15. 인정해야 될 것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 사람들이 여러분의 처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느낌에 의하여 당신의 의지를 강요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하여 하나님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한 가지 태도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대하여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정직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는 믿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4)

16. 피상적인 신앙생활

  영적 생활에 피상적인 것과 본질적으로 깊이 있는 것이 있듯이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상적인 회복은 회복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느낌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그것도 회복은 회복입니다. 피상적인 회복과 참된 영적인 회복이 있습니다. 피상적인 회복이 가져다 주는 신앙생활의 열매는 피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이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신앙생활입니다.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형식은 풍성하면서도 내면의 세게는 항상 허하고, 교회생활은 언제나 분주하면서도 언제나 영적으로 메마른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앙의 현실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러한 삶이 바로 피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17. 영적 침체의 가장 커다란 원인

하나님께 대한 범죄는 우리의 영적인 침체의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죄는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은 질에 있어서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영적인 침체 속에 들어가게 합니다. 태양을 등지고 걸어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앞길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침체의 그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크고 뚜렷한 범죄가 우리를 급격히 어두운 침체로 접어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인 침체가 언제나 다윗과 같이 종류와 시점이 뚜렷한 범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뚜렷하고 확실한 범죄일 수 있고 때로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서서히 쌓인 범죄일수도 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쌓여가는 우리의 악한 생각과 죄와 허물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점점 더 심각하게 벌여 놓습니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죄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영적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깊은 침체에 접어들게 합니다.

18.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힘쓰십시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 세계에 대한 인식의 천박함을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을 아는 크고 위대한 지식 속에서 살았던 성경의 저자들과 말씀을 맡은 사람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뛰어난 성경의 저자들과 설교자들의 말씀 선포에 귀를 기울이며, 성령께서 마음을 여사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를 사모하는 것이 영적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를 고백하고 겸비해 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세계 안에 묶여 계실 수 없는 분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인식의 세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그를 아는 지식을 버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지식이 여러분들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9.  주 없인 살 수 없네

  영적 침체의 원인중 세 번째는 환경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애워 싼 극도의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만 자신을 의지하며 살던 모든 삶의 방식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보호자시요 위로자 이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었던 인생의 길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포기의 지혜를 이러한 시련의 골짜기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대적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통과 시련가운데 두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곳에서 더욱더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원인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침체 가운데 있을 때에는 자신 속에 있는 교만과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려고 하지 아니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들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깨뜨려지는 변화가 곧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하나님만 최고의 선이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의 미래를 향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깊은 확신이 우리를 그 고통스러운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인격적인 신뢰의 필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겸비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오, 하나님, 이제 나의 삶의 보좌로 오시옵소서. 당신의 홀을 저의 삶 구석구석을 향하여 드심으로 나의 마음과 삶과 모든 영혼이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게 하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의 모든 감각이 당신의 다스리심을 인하여 가슴 시리도록 기뻐하게 하소서. 내 인생과 나의 시대가 오직 주님의 손안에 있사옵니다."

20. 십자가는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악해지는 것을 인하여 한탄합니다. 어두운 밤 언덕 위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면 온통 붉은 십자가 천지인데 왜 이렇게 세상은 사랑이 메마르고 악해져만 가느냐고 반문합니다. 언제나 이러한 질문은 별 분명한 대답 없이 독백과 같이 끝나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상이 주는 가치관들을 그대로 붙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영혼은 거듭났는지 모르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의 체계들이 비성경적인 사고로 가득 차서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나라를 실현하는데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인생을 밀어 주시는 하나님의 후원을 받아 잘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뀌기 보다 하나님을 바꾸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21. 백두에서 한라산까지

  몇 해 전 우리나라 전역이 대통령 선거의 열기로 달아오르던 때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세 명의 대선 후보들이 전국을 누비며 유세하는 광경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특정 후보의 이름 석자를 연호하며 구름처럼 유세장으로 모여드는 인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당 몇 만원에 모여든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어 나라를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거기에 모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환호성은 서울의 여의도 광장만이 아니라 전국 크고 작은 도시 곳곳에 울려 퍼졌습니다. 방방곡곡 태극기가 나부끼고 열광하는 시민들이 인파를 이루었습니다. 멀리서 카메라로 비춰주는 태극기의 물결을 보며, 그때 저는 마음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옵소서. 바로 저것이옵나이다. 언젠가 이 조국의 백성들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온 땅에서 크고 작은 마을 방방곡곡마다 이렇게 손에 손에 십자가 깃발을 흔들며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 주소서 왕이신 예수여 오소서 좌정하사 이 나라를 다스리소서"라고 찬양하는 날이 이 척박한 조국의 통일된 강토 위에 오게 하소서. 종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 기쁜 날을 보게 하옵소서."

22.하나님의 계획

  우리의 곤고하고 갈급한 영혼이 무엇으로써 그 목마름으로부터 해갈되고 충만해집니까?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영혼에 곤고함을 벗어나게 할 수 없고 심령의 메마름을 흡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의 치료자가 되시고 우리의 심령을 고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손만이 우리의 영혼을 모든 상처로부터 회복시킬수 있으며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시고, 우리의 망가진 신앙의 자세를 바르게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언제나 그 행하심 자체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며, 인격적으로 설복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 승복하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진실한 바람들을 우리 안에 두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하시는 그 모든 일들은 하나의 목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23.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이유

우리에게는 단순한 영적인 회복 이상의 신령하고 위대한 역사가 필요합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의 영혼들을 소생시키시고, 소생한 그 위에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괄목할 만한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디에도 우리를 이렇게 살 수 있게 할 만한 원동력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으로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마음을 깨우시며 시체처럼 무감각한 죄인들의 심장에 다시 뜨거운 피가 흐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따라 울고 웃으며, 그분의 이름이 온 땅에 높이 들리워지고 경배를 받게 되는 세상을 위하여 평탄하고 안일한 넓은 길을 버리고 협착 하고 고난이 있는 의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이유입니다.

2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지금 혹시 여러분은 인생의 위기 가운데 홀로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도움이 끊어졌다고 절망하고 게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평범한 사실조차 믿어질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시련과 도전 앞에 허물어져 가는 자신을 지켜보고 게시지는 않습니까?
눈을 드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 하지 말라. 바로 거기서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기 때문이란다. 나의 어린 양들아, 나를 의뢰하라. 내가 너희를 지키리라."

25.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

골짜기를 지나며 양들이 목자도 없이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 오늘도 인생의 곤고한 계곡을 지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가장 홀로 있는 것 같은 절망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분은 쉬지않고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계곡에서 당신을 절망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주목하는 대신, 그 모든 환경을 통하여 당신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기울이십시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그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고 위기를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지혜를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시간도 우리가 신앙이라는미명 아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절망적인 인생의 상황에서 단지 참고 견디는 인내를 통하여 마음속에 사람을 향한 원망과 자신의 처지를 향한 한을 쌓아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시간도 골짜기의 위험을 능가하는 풍요로운 능력을 당신의 양떼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망인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양떼인 우리들에게 유일한 소망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하십니다

26.별빛조차 사라진 밤에

하나님의 인도를 갈망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한 채 살았던 수많은 날들의 불순종에 대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오.

27.지난날의 죄와 허물은

지난날의 죄와 허물과 상처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그 악한 영향으로부터 단절하는 유일한 길은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허물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상처를 능가하는 크신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상처는 상처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오늘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 우리의 존재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그분의 목양 아래 살아가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오.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28. 지상 최대의 약속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시의 가장 커다란 죄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두가지 죄악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분이 자신들의 하나님 되심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29.뒤틀린 신앙의 교훈

우리는 매우 물질 중심적인 사고 체계속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재해석한 뒤틀린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자심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감격을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너무나 소수이고 더우기 그러한 특권을 늘 체험하는 풍요한 영적인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욱 소수입니다. 오늘날의 피상적인 신앙생활, 복음이 빠진 영적 삶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대사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우리들: 하나님, 내가 주님을 믿은후로 당신께서 제게 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사옵나이까? 저는 여전히 결핍과 불만족 가운데 살아가고 있사옵니다.
하나님: 나는 이미 내 자신을 모두 네게 주었단다.
우리들: 너무나 어렵사옵나이다. 뭔가 우리 입에 씹히는 게 있어야 주님을 믿어 드리지 않겠사옵니이까? 저희를 너무 고상하게 대하지 마옵소서. 우리는목사가 아니옵니다.
하나님: 내가 구원받은 너를 위하여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우리들: 주님의 계획 보다는 나의 계획이 더 근사할 걸요. 우리에게  급한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옵나이다.

30.구름같이 허다한 대적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탁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적들 앞에 소망이 없는 희생물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들을 단숨에 격퇴시키고 모든 멸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는 비록 약하나 우리의 대적들 보다 훨씬 강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식탁을 마주하시는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적들이 우리를 영적으로 파멸시키고자 하는 가장 뛰어난 궤계는,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게를 의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악한 대적들도 하나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푸신 구원의 관계를 취소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들의 목표는 우리들로 하여금 거의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 사람들과 다름 없는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31. 하나님과 마주하는 식탁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식탁을 통해서만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사망의 위협 가운데 좌절하지 아니하고, 인생의 위기 가운데 낙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노래 부르며 광야를 지나고, 기도하며 골짜기를 헤쳐 나올 수 있는 은혜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식탁에서 마음껏 누리는 단 한끼의 식사를 통해서도 우리는잃었던 원기를 회복하고 삶의 의욕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식탁을 마주하여야 할 분이 아버지이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푸시는 식사의 자리에 참여하여 배불리 먹는 대신 오히려 타락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식탁을 찾아다니기 일쑤입니다.
합리주의의 집에서 세상이 베풀어 준 식탁과 마주하는 사람들은 배부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길 신령한 능력이 그 식탁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세속주의의 집에서 원수들이 베풀어 주는 식탁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의 노예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32. 왕국보다 소중한 것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시는 것은 곧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을 의미하였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형벌로 왕위를 잃어버리거나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시는 것조차 겁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성령을 거두시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어 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자신과 동행하는 축복과 그것을 거두실때 자신에게 임하게 될 불행에 대하여 깊이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께서 한때 함께 하셨으나 성령을 거두심으로 불행한 최후를 마쳤던 사울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시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33. 성령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는 다윗이 누렸던 이 세상의 지위와 그가 향유하였던 수많은 세상의 여광을 부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아름다운 지위와 영화가 그의 인생에 대치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져다 주는 위로와 소망으로 새 힘을 얻는 시간 외에는 이 세상에서 그의 인생에 즐거움을 주는 일들이 거의 없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의 대적은 처처에서 일어나 있었고 그는 일평생 거의 전쟁터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부러워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34.하나님으로 만족하라

초라한 영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을 갈망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시고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삶의 동기를 정화시키고 헌신의 목표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거룩한 성령의 기름부으심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과 교회 사이를 오가는 메마르고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교회 생활에 작별을 고하고, 신령하고 거룩한 부르심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구별되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변혁을 위하여서도 이러한 성령의 은혜가 필수적입니다.

35. 누가 나더러 제왕이 되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불태워 하나님만을 위해 바치며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였으나 그들의 삶은 사자와 같이 용맹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일이라면 그들은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아낌없이 허비하여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뛰어난 종된 삶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평생을 살았던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젼 목사는 그의 한 설교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나더러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제왕이 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노라. 나는 나의 온 삶을 좋으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하여 모두 사용하겠노라."

36.하나님을 위한 시간

하나님의 자녀가 염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그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걱정을 가지고 씨름하느라고 자신의 세월을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새로운 인생 경험에 대한 여러 가지 호기심과 시집가고 장가들 궁리를 하느라고 불안해 하며 세월을 보내고, 결혼한 후에는 벌어 먹고 사는 일과 자녀 양육을 위하여 근심하느라 시절을 보냅니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서는 일에 대한 성취욕과 노후에 대한 염려로 더욱 열심히 일하며 걱정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가며 망설이며 세월을 보냅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세상을 따라 살까? 신앙을 좇아 살까?"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오락가락하며 결단하지 못하는 가운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됐네, 이 사람아! 이제는 내가 네 영혼을 취하여야 하겠노라."
도대체 우리가 인생을 사는 날 동안 얼마만큼의 시간을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37. 염려를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내재하는 영적인 본성의 감각으로 자신들의 그러한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신앙이 뛰어난 사람들은 매우 뚜렷하게 느끼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희미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슬퍼하시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런 문제들을 정직하게 인식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옳지 않으며, 성경은 그러한 마지막 결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하여 깨닫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38. 미래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는 목자되신 하나님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의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미래의 문제는 미래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현재의 하나님과의 관계문제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우리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고는 마음 편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게 하지 못하는 요인이 될 줄 알면서도 그 불안과 염려를 끌어안고 살아기지 않고는 못배기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날이 밝으면 총부리를 맞대고 싸우지 않으면 안될 적인줄 알면서도 하룻밤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 적과 동침하는 것것과 같습니다.

39. 善에 대한 시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기서 '합력한다'는 말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쉰엘게이'로서 원래 '함께 작동한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시계 뒷뚜껑을 열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개의 톱니 바퀴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어떤 때는 스프링처럼 만들어진 고리 같은 것들이 열심히 움직이기도 합니다. 많은 부속이 무질서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 모든 움직임들은 하나의 궁극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 면에 있는 세 개의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의미했던 '합력하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40.날 빚으소서

언젠가 토기를 만드는 공장을 다녀온 기억이 있습니다.그때에 인상깊었던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진흙덩어리로 토기를 빚다가 잘 못 만들어지거나 망친 것들을 처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도기공들은 잘 못 빚어진 도기들을 녹로에서 취하여 물이 있는 연못 같은 데로 집어 던지고 있었습니다. 잘못 빚어진 그릇들은 즉시 거기로 던져져서 다시 물속에서 원형을 해체하여 진흙으로 사용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깨뜨려져야 합니다. 잘못 만들어진 토기와 같은 우리 인생에 대한 잘못된 우리들의 설계와 사고 방식들을 해체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새로 빚어 주시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41.스펄전의 마지막 말

설교자 스펄전은 부인과 함께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생한 사람이었습니다. 늘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를 돌보면서 살아가는 스펄젼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 부인을 먼저 천국에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펄젼이 아직 오십대 초반의 나이에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세상을 하직하며 위대한 설교자가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리고 그의 유언은 바로 하나님의 선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보여 줍니다. 평생을 복음과 함께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그토록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오"

42. 징검다리 건너듯

때로는 인생을 너무 멀리 바라보지 않고 사는 것도 한 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치 넓은 개울을 징검다리로 건너는 길손처럼 말입니다. 너무 멀리 보면 개울에 빠집니다. 징검다리가 강 건너편으로 이어졌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돌맹이를 밟으며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강 건너편에 다다르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43.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

동구 공산정권 치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중형을 선고 받고 이십여년 간 옥살이를 하신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석방되어 나온 그분을 뵈오며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 동안 고달프고 외로운 옥살이를 견디실 수 있었습니까?" 질문을 받은 목사님은 그 긴 세월을 반추하는 듯, 나지막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스러운 때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고, 한없이 외로울 때 지하 교회에서 나누던 성도의 교제를 생각하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과 환희와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고,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풍성한 은혜는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잘 발견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넘치는 사랑과 체험적인 신앙을 가장 잘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44.더 중요한 일은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며 몸 바쳐 헌신하는 것보다 급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승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완전하신 목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선하심과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으로 행복을 느끼며 만족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똑같은 이유로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과 같은 까닭으로 슬퍼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