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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기독교 영성 총론

영성묵상훈련 인보라............... 조회 수 2180 추천 수 0 2011.07.21 16: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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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gnuboard/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4&page=57 

기독교 영성 총론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은 세 가지 큰 특징이 있다. 첫째는 관계의 영성이며 둘째는 존재의 영성이고 셋째는 구속사적 영성이다.

Ⅰ. 관계의 영성(Spirituality of Relation)

1) 관계의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 바른 영적인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실제는 어떠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유익, 기쁨, 행복을 추구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섬겨 주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찾고 구한다. 물론 어릴 때에는 부모가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을 먼저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연수가 지날수록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지으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음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해야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교회 성도 중에 한 분은 모태신앙이고, 영성 훈련을 받은 지 2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나를 위한 하나님을 알고 있을 뿐 하나님을 위한 나를 알지 못하고 있다.

엡 1:3-6에서 말씀하시기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목적은 우리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요 17: 20-23 이하에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드리는 기도를 보면 믿는 우리와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데 저들이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는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기를 원하고 하나되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여 인생을 지으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주를 믿는 연수가 오래 되었다면 당연히 내 삶에서 나의 행복이나 평안이나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나를 통해서 얻어진 하나님의 유익과 기쁨과 영광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가 도무지 바뀌지 않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 늘 칭얼대는 아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을 반복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면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그 응답이 늦어지거나 되지 않을 때는 원망과 근심과 불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성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훈련의 목적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은사'란 역시 하나님을 위한 나의 존재 속에서 발견하면 은사는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한 수단에 불과하다. 은사는 나를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다. 은사를 받으면 내가 능력자로 높아지고 자랑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은사를 추구하는 목적이 이생의 자랑 곧 내가 높아지고 나타나고 자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사를 많이 받을수록 사랑의 빚을 많이 진자이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책임이 많을 뿐이다. 빚을 많이 지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대단히 우스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많은 은사자들은 은사를 자신을 나타내고 자랑하는 수단으로 삼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얻을 유익에 관심이 대단히 많다. 예언을 듣고 싶어하는 목적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대로 살아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만 내 삶이 형통할 것 같으니까 알고 싶어한다. 예언이 맞고 틀리고, 유익이 되고 해(害)가 되는 데는 관심이 있어도 오늘 나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냄 받았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에게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한 수단이다. 예언을 통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결과만 아는 것은 무익하다.

행 21장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바울을 말렸다. 성경에서는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행 21:4)고 기록한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당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전도자 빌립의 집에 유숙할 때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바울의 띠를 가져와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행 21:11)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며 말한다. "바울이 대답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고 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하나님과 제자들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은사를 가지고 똑같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되었는데 제자들과 아가보는 은사를 바울을 위한 '수단'으로써 이해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고,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한 성령이 하시는 예언에 대하여 바울과 제자들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기에 자신의 살고 죽는 것을 떠나있었다. 반대로 같은 은사를 통해서 같은 말씀을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제자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있지 않으므로 고작 사람을 위한 유익 밖에 계수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속에 잘못 이해되고 있는 은사적 영성의 한 모습이다.

예를 들어 내적 치유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내 마음의 평화와 내 삶의 평안, 안식, 유익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반대이다. 주님이 말씀한대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라고 하셨다. 즉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좇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죽는 삶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나는 죽어도 주를 위하여 하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나의 존재를 이해한 삶이다.

우리가 영성을 덧입고자하는 이유는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드리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라고 말씀하신다. 이 시대에 정말 주의 고난에 참여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 설사 자기의 죄로 인한 징계라 할지라도 이 징계를 묵묵히 감사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 또한 고난에 참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내가 연단 되기를 기뻐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지 않다. 우리가 영성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좋은 군사를 얻게 되어질 것이다.

2)관계의 영성이란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귀속)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나'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다. 여전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절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다. 맹목적으로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고백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 삶 속에서 주님이 인식되고, 느껴지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이 나를 통하여 사셔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아니라 '예수'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요 15:5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했다. 우리가 피상적인 지식으로 예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내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 안에 사는 것인지는 잘 모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란 바로 이처럼 내가 예수와 연합(귀속)하여 '내'가 아니라 '예수'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결국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이르고, 그리스도를 닮고, 오직 예수그리스도화 되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성훈련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생명적 연합을 이루고자 함이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영적 실제를 이루어야 하겠다.

필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꼭 생일카드를 써보낸다. 어떤 성도들은 답장을 써주시기도 한다. 어느 여집사님이 답장을 썼는데 그 말미에 '목사님 사랑합니다'라고 써놓았다. 그렇게만 써놓으면 오해가 될 것 같으니까 '주님 안에서'라고 덧붙여 놓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보면서 왠지 슬픈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직도 내가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고, 주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는가? 도대체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는가?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그냥 공경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이렇게 이중적인 삶을 가지고 살아도 될까? 내 사랑과 주안에서의 사랑이 따로 있어 교회 안에서는 주안에서 사랑하고, 밖에서는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가? 그렇다보니 예수로 사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고 만다. 예수가 내 생명이 되어 내가 아니라, 오직 예수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내가 사랑하고 용서해 보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보려고 하는 율법적 신앙인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누구를 사랑하면 주안에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한다. 설사 남편이나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영성훈련은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 앞에 날마다 예수로 사는 삶이 되기 위하여 영성을 덧입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3) 관계의 영성이란 성령의 지도와 인도를 받는 삶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관계의 영성을 설명하면서 삼위(三位)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두 번째는 영성의 뿌리이며 시작과 목적인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세 번째는 바로 이것을 적용하시는 '성령'과의 관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바른 관계를 회복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실제 되게 하신다.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성령의 지도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도'란 '가르치심'이다. '인도'는 우리를 '이끄심'이다. 칼빈은 성령의 인도에 대해서 '성도의 견인'이라 표현했다. 실제적으로 성도의 삶이란 내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이끌고 가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 주님은 분명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묻는 자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 감정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종종 영성훈련을 받고있는 사람들에게서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을 듣곤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분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롬 8:5)이라 하셨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과 원수 된다"(롬 8:7,8)고 기록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며' 하는 말이 그리스도인의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이라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롬 8:7)가 된다.

우리는 성령을 묻는 자가 되야 한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일이었다(대상 13장). 그는 천부장과 백부장, 장로들에게 법궤를 옮겨오자 하면서 "사울 왕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 하였느니라"(대상 13:3)고 말했다. 다윗이 과연 하나님의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하나님을 묻는 자였다.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고자 한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보좌를 견고하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영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성령의 지도를 받는 자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뿐 아니라 내 생각과 뜻과 감정이 그대로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듣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훈련을 함으로 '자아파쇄', '자기상실'을 통하여 내 자아와 뜻과 생각과 감정이 버려지는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령께 물을 때 성령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종종 필자는 상담을 하러 오는 분들에게 주님께서 필자에게 말씀하셔도 내담자에게는 침묵하고 가르쳐 주지 않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연락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도 한 달여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필자가 미숙해서 주께서 가르쳐주시면 그대로 전달해 주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지 않으면 상담하는 자리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하면서도 돌아가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여집사님이 통신공사 교환원으로 일하시다가 구조조정을 할 때에 명퇴를 종용받았다 한다. 그래서 필자에게 와서 '명퇴를 할까요'라고 물었다. 기도를 했더니 주께서 그 집사님이 너무 육신에 곤핍해서 영혼이 피곤하고, 남편도 아내된 집사님이 몇 십년간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무능해져가는 등 여러 가지를 가르치셔서 그 집사님에게 사표를 내시라고 권면해드렸다. 이 집사님은 야간으로 훈련을 받으셨는데 그 이후에도 주간으로 바꾸시지 않고 계속 야간으로 훈련을 받으셨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얼마 전에 야간에 오실 분이 주간에 오셔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쭈었더니 그 집사님께서 연대파업에 참여 했다가 퇴출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때 목사님 말씀 들을걸 그랬어요' 하셨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묻고 성령의 지도와 인도를 받고 살아야한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관심, 즉 내 생각, 감정, 주장이 처리되지 않으면 성령을 들을 수 없다. 사울 왕도 자기를 지킬 왕위에만 관심을 가졌을 때 더 이상 하나님을 들을 수 없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지도를 받는 삶이다. 주 앞에서 나를 버리는 훈련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또한 '인도'는 '이끄심이다'. 성경은 "성령으로 봉사하고"(벧전 4:11)라고 말씀한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 자신이 자기 의, 자기열심, 자기신뢰가 무너져있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성령이 하셨어도 내가 했다고 생각한다. 이러다 보니 바른 영성인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자식을 주셨다. 이왕 주시려면 일찍 주시지 왜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을까?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을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과 같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너무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어 하나님이 그를 찾아가셨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7,18)라고 말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도 믿었지만 자신도 믿었던 것이다. 아직은 '젊은 나'를 믿었던 것이다. 이 젊음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믿을 수 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도록 무엇을 기다리셨을까? '아브라함' 자신이 없어지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견인'이다. 전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의 영성적 삶의 증거이다. 영성의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은사자들이 자꾸만 함정에 빠지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 "나"라는 식이다. '이 능력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또한 그리고 '능력 받는 내가 있습니다'라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교회 속에 무섭게 들어와 있다. 이것은 영성이 아니다. 모세가 높이든 놋뱀을 바라볼 때에 불뱀에 물린 자들은 나음을 받았다. 아무리 모세를 바라본들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수천 년이 지난 이스라엘 가운데 여전히 모세의 놋뱀이 우상이 되어 있기도 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 바른 영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영성은 오직 성령으로 사는 삶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갈 5:18)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될 때에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갈 5:22,23)라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우리자신이 나를 향한 신뢰 즉 나의 의지, 나의 열심, 나의 의가 아직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만큼은 아직도 나를 믿고 있다. 그래서 바른 영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철저하게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인도하실 줄로 믿는다.


버나드의 하나님 사랑의 4단계
첫째 단계는 자신을 위한 자기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의 가장 낮은 단계로서, 모든 것이 자기에게 집중되는 철저한 이기적 사랑을 말한다. 둘째 단계는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다. 사랑의 둘째 단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하나님 사랑의 이면에 자기 사랑이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여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단계는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다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좋아서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하나님 사랑의 순수하고 높은 단계를 말한다. 넷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이다.
버나드에 의하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보다 한층 더 높은 단계는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인간의 하나님 사랑의 최고 단계로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지배된 사랑의 단계를 의미한다. 여기는 마치 주님의 성산, 높은 산성의 정상에 오름과 같은 것이다. 버나드는 우리의 전 생애에서 한 순간만이라도 이 사랑을 맛본 사람은 복 있는 자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하늘 나라의 지복을 미리 맛보는 일이며, 주기도문의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상태이고 우리 인간의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얻어진 사랑을 통해서 영혼은 황홀한 감정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적 연합을 영적 결혼으로 묘사하고 있다.

Ⅱ. 존재의 영성(Spirituality of Being)

재의 영성(Spirituality of Being)이란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비로소 장성한 자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해마다 연초가 되면 올해부터는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리라는 등등의 결심을 하곤 했다. 이제까지 하지 못하다가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 결심하는 자신이나 기대하는 자신이 참으로 우습다. 결과적으로 삼일이 지나면 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결심하고 노력하면 될 줄로 알고 또 안되면 내년을 기다리곤 했다.

또한 존재의 영성에서 기도생활을 이야기한다면 먼저 기도에 대한 가치관이 바꿔져야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또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성숙해지고, 누림이 있고, 그 안에 응답이 있는 기도의 비밀을 모르고 아직도 기도를 무거운 짐과 율법으로 여기는데 내가 결심하고 노력한들 바뀌어지겠냐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라고 고백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 장성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장성함(엡 4:13)에 이르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내 의지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한다. 기도원에서 성령 충만하여 세상을 손에 넣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내려오지만, 환경에 부닥치면 다시 코가 석자나 빠지고 만다. 왜 그러한가? 우리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 6 :1-3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벗어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라고 말씀한다. 무엇이 그리스도 도의 초보인가? 첫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죽은 행실을 하고 또 회개하고 또 한동안은 죽은 행실을 하고 또 탕자처럼 주 앞에 나올 것인가?

둘째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필자에게 와서 '이제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이 믿어집니다'라고 고백을 했다. 그분이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이사갈 집 옆에 무당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사가기가 두려워서 교회 사모님께 여쭈었더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괜찮다고 말씀하여 이사를 가게되었는데 정말 무섭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이제야 믿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안타까운 그리스도인의 현실인가? 이러한 일을 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또한 우리도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어졌다가, 어떤 때는 믿어지지 않곤 한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지만, 어떤 때는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지 않다. 또한 어떤 때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같지만 어떤 때는 전혀 무능한 하나님 같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앙 즉 하나님의 능력, 사랑, 동행하심에 대해서도 늘 의심한다. 이것이 믿음의 도의 초보를 다시 닦는 것이다.

바울은 신앙생활이 삼년이 넘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라고 탄식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은 지 10년, 20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구원의 확신조차 흔들리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줄로 믿는다.

영성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라고 말씀하신다. 필자는 종종 성도들에게 이사갈 준비가 되었냐고 확인시킨다. 우리가 단지 천국에 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도 있다(마 25:30).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영성을 덧입어 하나님 나라에 참여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내 삶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내세천국)에 있지 않다면 어찌 바른 영성인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존재의 영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주님 앞에 내가 성숙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 1년 전과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있는가? 무릇 '생명'이란 날마다 변화되는 것이요 자라나는 것인데 우리는 1년 전의 내 모습이나 한달 전의 내 모습이나 변화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고도 어떻게 살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께서 사데교회에 편지하시기를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b)라고 하신다. 변화되지 않고, 새로워지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 성도는 산 것 같으나 사실은 죽은 자이다. 내 안에 애통하고 통곡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주앞에서 완전한데 나아가기를 소원해야 한다.

존재의 영성(Spirituality of Being, 存在의 靈性)-장로회신학대학교 유해룡교수는 기독교영성세미나 강의안 151-152쪽에서 "영성훈련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재능을 개발하고 능숙하게 발달시키는 기능적인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훈련의 제 1차적인 훈련의 관심은 존재의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에 있다.

예를 들면 육군 사관 학교의 교육의 예를 들어 '형성(formation)' 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장차 군대간부로서 갖추어야할 통괄적인 인간 됨됨이나 명예심, 국가를 위한 충성심등을 함양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초적인 교과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그들은 매 학년마다 교육 목표를 정하여 각각 다른 이론적인 가르침과 훈련을 시키고 있다. 마침내 그들은 그 학교를 졸업할 때 군의 간부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현지로 나아간다. 거기서 그들은 현장에 필요한 세련된 훈련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포병병과 이면 포를 다루는 기능적인 훈련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기능적인 어떤 행동에 대한 강조 이전에 그러한 기능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존재 형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성훈련은 일차적으로 기능 훈련이라기 보다는 존재 훈련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외적인 닮음이나 기능적인 훈련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는 것으로 그의 책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43-47쪽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Ⅲ. 구속사적 영성

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게 될 때에 성경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다. 또한 우리는 성경이 영적인 비밀을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고 말씀하였으며, 또한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오직 성령께서 각 사람을 감동하셔서 기록한 영적인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자도 역시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영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속사의 이해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경륜의 역사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지으시고, 그 세상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자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모든 피조물 중에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셨는가?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릴 일꾼을 필요로 여기신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서 나타난다.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4-8) 라고 하며 세상 곧 온 땅을 다스릴 자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계획을 사람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다. 즉, 사람을 통하여 이 땅을 통치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존코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의 타락이 예정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통치하여 주기를 원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구속이 포함되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사람의 범죄가 예정된 것이 아니라면 구속도 예정된 것이 아니어야 옳다. 만일 구속이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사람은 반드시 죄를 범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한 광명의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며, 그 천사는 이미 범죄하여 타락하였고, 전에는 계명성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원수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이다(사 14:12-15). 하나님께서는 사탄이라 불리어진 타락한 천사가 이 땅을 침범치 못하도록, 또한 정복하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 땅을 통치하는 권세를 주시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직접 사탄을 무저갱으로 던지지 않으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을 통해서 사탄과 싸우기를 원하셨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계시하신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로 피조물을 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지위는 얼마나 놀라운지. 그러므로 다윗은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심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2-5)라고 경이로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은 특별한 어떤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에 의해서 정복당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멸하기 위해서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사람도 아니고, 능한 자도 아니고, 문벌이 좋은 사람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고전 1:26-31).

그러나 어떠한가? 사람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사탄을 대적하고 정복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오히려 사탄에게 속아서 범죄 하였고,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땅에 충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을 사탄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높은 곳에 올라가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고 말하여 이 땅의 권세가 바로 사람에게 넘겨받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 한 후에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한 분 구속자, 여자의 후손을 예정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하나님의 계획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비록 아담이 범죄하여 사람을 통하여 이 땅을 다스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기우일 뿐이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고, 사람은 타락할 수 있고, 범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복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람을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정복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심을 찬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셨다.

물론 우리에게 예수님은 구세주이시지만 하나님에 대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을 정복하고 세상의 권세를 잡으시는 둘째 아담인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통하여 사탄을 정복하셨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다. 그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사람이셨다. 사탄을 멸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7~19)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곧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마귀를 완전히 멸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구속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위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통로로서의 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많은 사람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해서 그들을 구별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는 여기에서 더도 덜도 아니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통로로서 사용되어졌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다윗도 하나님의 구속의 통로로써 참여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셨다.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b)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후사된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과 같은 위치에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체포되시기 전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라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1,23) 예수님은 제자들을 얻으시고 그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아들들을 얻으셔서 그들로 마귀를 대적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사람의 참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로로써 존재할 뿐이다. 결국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하시기를 제자들이 삼위 하나님 안에 있게 하셔서 "세상으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도 또한 바울도 그리고 오늘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속사의 통로로써 존재할 뿐인 것이다. 우리는 이 거룩한 참여를 객관적인 구속사, 혹은 객관적인 구속사의 참여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통로로써 사용되어지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오직 하나님만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거룩하고 죄가 없는 사람들이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주셔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사 의롭게 하시고, 또한 성령을 보내서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신 것이다(이스라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시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하는 제사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던 것이다). 어찌 구원이 사람을 위한 것인가? 구원은 물론 우리로써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하기 위함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인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관심에서 벗어나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여 구원의 후사를 주께 얻어드리고 사탄을 대적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참여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으로 충분치 않다. 이는 다만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을 뿐이지 주를 위하여 사탄을 멸하는 일에 참여하는 일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각 사람을 의롭다 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온전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연단하신 것은 그들이 온전해야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요, 또한 오늘 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연단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여 주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 사용되어질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요,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이며, 자기로 행치 않고 오직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며, 육체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참여하게 하려고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라고 하였고, 또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고 말씀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이와 같이 각 사람을 택하사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케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주관적인 구속사라고 부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그 목적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는, 그의 장성함에 이르는 여정이다. 우리는 그의 장성함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에 참여되고, 장차 하나님 앞에 가서 부름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은 끝이 아니고 단지 시작일 뿐이다. 그런데 어떠한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통하여 삶의 일부분을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대부분의 삶은 하나님 앞에 받을 복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기 위하여 선택받았고, 애굽에서 구원받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 지어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위하여 받을 복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도 자신을 위해서였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은 이유도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 유리케 하시므로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훈련하신 것이다. 성숙으로 이르는 길은 선택이 아니라 인생의 한 목적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려 하지 않고, 오직 지금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구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스라엘과 같이 연단하실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반대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반대하신다. 오직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나도 그 목적을 가지고 살 때에 우리의 삶은 형통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예비과정 제 1 장
인 간 론

Ⅰ. 바울이 말하는 세 종류의 사람

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고전 2: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람을 세 종류(고전 2:14-3:3)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육에 속한 사람'(man without the Spirit, yuciko;")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로 이들은 거듭났으나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 sarknois)이다. 세 번째는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사람의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가르침대로 말을 하고 사는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pneumatiko;")이다.

1) 육에 속한 사람(man without the Spirit, yuciko;")

'육에 속한 사람'은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진노의 자녀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사단에게 속한 사람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사실 귀신에 들린 자이다. 육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산다.

2)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 sarknois)

만약 '육에 속한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좇아 영으로써 육체의 행실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며 살아야지 내 마음의 원하는 바를 행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요 "육신에 속한 자"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시기와 질투와 분쟁이 있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라고 바울은 탄식한다.

갈 5:16-20 말씀에 시기와 분쟁이나 질투는 '육체의 소욕'이라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육체의 소욕이 그들을 주장하므로 그들은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신에 속한 자이다. 이것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고 말씀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에는 아이가 그저 웃기만 해도 기뻐한다. 그러나 아이가 1년, 2년이 지나 성장해도 걷지 못한다면 부모는 근심하게 된다. 고부간의 갈등이 너무 심해서 날마다 죽음을 생각했던 어떤 젊은 새댁이 있었다. 첫째 아이는 잘 낳았지만 결국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그 런데 집을 나와서 둘째 아이를 낳았다. 이 둘째 아이는 시각이나 청각은 이상이 없지만 아이 스스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유아 자폐증이 나타났다. 어른의 죄 때문에 아이가 배속에서 너무 상처를 입어 자기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필자에게 맡기셔서 주일마다 기도를 하고 있다. 그 새댁은 이제는 영성훈련을 1년쯤 받아서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자신의 문제로 받고 다시 시어머니와 살고 있다.

이처럼 자라지 않는 아이는 부모의 큰 근심거리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믿은 지 3년이 지났어도 시기와 분쟁과 질투가 그들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바울이 그들을 향해 '아직 육신에 속한 자로다' 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3)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pneumatiko;")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자가 되어야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3-15)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자녀 삼으시려고 구원하신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신령한 사람이 되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자녀 삼으신 것이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430년 만에 출애굽을 시키셨다. 왜 애굽에서 구원하셨는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와서 그들로 광야에서 나와 살다가 죽으라고 구원하신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들을 통해 영광을 얻기 위함인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 목적이었는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는가? 후자이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살다가 죽었는가? 그들은 가나안에 가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면한 것에 만족하여 지금 잘먹고 사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이 '광야의 삶'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하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관심이 있다.

'성숙함'과 '온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때로는 굶기도 해야하고, 고난도 받고, 자기를 부인하는 아픔도 경험하고, 나를 깨뜨리는 싸움도 해야하는데 오히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만나도 내려주시고, 물도 주시고, 나를 축복해서 잘살게 해달라'고 한다. 이렇게 신령한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육신에 속한 사람들만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고 하신다. "소망"이란 무엇인가? 환란이 지나고 나면 더 축복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환란은 인내와 연단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나를 인도하여 우리로 하여금 소망, 즉 '영생'을 얻게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가치관이 육신에 있어서 자꾸만 육신으로 받는다. 하나님께서 욥의 환란 후에 자녀도 다시 주시고, 재산은 두 배가 되게 하시고, 몸도 다시 건강하게 하셨다(욥 32:10-12). 그러나 이것이 욥의 소망은 아니다. 욥은 이전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한다. 바로 욥은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사람에서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영적 성장을 이룬 것이다. 이것이 참 '소망'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단지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여 지금 내 삶 속에 행복만을 추구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르는 길을 기뻐하고 소원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가나안에는 아낙자손과 같은 원수가 있어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희생도 싫어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면 불쌍하게도 세상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나라도 바르게 얻지 못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로라"(고후 15:19)라고 한다. 차라리 애굽에 있으면 애굽의 풍요는 누릴 수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이야 내 생각과 감정대로 살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그렇지도 못하다. 내 감정대로 하고 나면 주 앞에 죄책감이 든다. 언제까지 이러한 불쌍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가 인간론을 나누면서 바울이 나누는 영성적인 인간론 곧 '육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 '신령한 자'가 있음을 깨달아 내가 신령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Ⅱ.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1) 인간은 육신이 아니고 영적인 존재이다. 영적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창 1:2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 범죄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후(창 3장)에 '육체'가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세상을 내 집으로 알고 살다가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는 것이 육체가 된 인간의 결국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육체였던 우리를 다시 영으로 회복하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6)라고 말씀하신다. '중생 되었다'는 것은 육체였던 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며, 세상에 속하였던 자가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어졌음을 의미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세상에 속했다가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은 잘 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내 자신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나의 참 생명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라고 하신다. 당연히 우리가 영임을 안다면 육신을 거절해야한다. 우리의 목적이 영혼이 잘되는 것인가, 아니면 육신이 잘되는 것인가? 아직도 인생이 육신인 줄 알아 육신의 허상(虛像)을 좇아 살고 영혼을 사랑할 줄은 모른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피조물 곧 육신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처럼 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 삶의 주체가 영이 되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하고 새사람을 덧입게 하신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라고 골 3:9,10에서 말씀하신다. '옛사람'이란 육신 즉 육체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고 '새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영혼의 인격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육체를 거절하고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야 한다.

필자에게 찾아오는 많은 이들을 상담하다 보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한다. 자녀가 본드를 마시고, 방황하고, 학교에 가지를 않고, 가출하는 등... 얼마나 아픈 이야기인가. 바울의 고백을 이해할 것 같다. 바울은 우리의 육신은 아침 이슬 같고, 바람과 같은 장막 집에 불과하다(고후 5:1)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모든 근심을 버렸다. 주려도 웃고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웃었다(빌 4:12).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는 근심하고 고통받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날마다 해산하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고백한다.

어린이들은 장난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래서 결코 빼앗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자라면 그것이 '허상'(虛像)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육'이 아니라 '영'이다. 그러나 오늘도 육신을 돕는 자리는 사람들이 가득 찬다. 누가 병을 낫게 하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 찾아다닌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에 머물 것인가.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훈련에는 열심을 내고 사모하여 참여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아직도 육신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을 고쳐야 할 줄은 깨닫지 못하고 육신을 고치는 것에만 빠르다.

2) 사람이 영이라면 영으로 육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 하실 때 그들은 졸고 있었다(마 26:36-46). 그때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핑계를 대고 살 것인가? 성경은 롬 8: 12,13에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만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육신을 다스리면 살리니"라고 말씀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으로써 육신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스림'이란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다스리는 것이다. 육신은 죄성을 처리하고 나면 하나님 나라에 아름다운 도구가 된다. 육신을 다스려 의의병기가 되어야한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으로써 육을 다스릴 수 있는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충만하면 육신이 다스려진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행 1:4) 하셨다.

필자는 예전에는 아내에게조차 신뢰받지 못한 자였다. 하물며 밖에서 누구에게 신뢰를 받고 살았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필자의 가정이 변화되었다. 필자가 지금도 사람들에게 소망을 갖는 이유는 나 같은 자에게도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도 일을 행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주님의 연락함으로 성장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살게되니 놀랍게도 예전에 다스리지 못하던 죄들이 다스려졌다. 그리고 의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필자 한 명이 변화되니 광주에 천명이 넘는 훈련생들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으로써 육을 다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영이 강화되어야한다. 영이 힘을 가지면 육을 다스리게된다.

3)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주인은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인간을 이해하는데 이분설이나 삼분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오늘 내 삶을 하나님께서 주장해야지 내가 주장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라는 복음성가 가사처럼 언제까지 내가 앞서고 하나님께서는 가끔 나의 등뒤에 나타나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 되어야하는가? 물론 신앙의 초기에는 그러한 하나님을 발견해야한다. 당연히 나를 도우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식해서 나의 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過程)'이지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라,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주장하는 분이 되어야 한다. 인간론을 나누며 반드시 깨달아야할 주제이다.

여전히 많은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選擇)'하려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어떤 집사님이 다른 집사님과 다툼이 생겼다. 그가 얼마나 잘못했으며 자신이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지 한참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필자가 한참을 듣고 있다가 '그래요 집사님이 억울한 것은 이해하겠네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에 대하여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입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이 어떤 것인지 잘 깨달아 알아야 한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주석에서 요한복음 3장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에서 "육(육체)"이라는 것은 몸만이 아닌 혼과 혼의 각 부분을 뜻한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육체라는 것이 몸과 혼을 합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예비과정 제 2 장
영혼과 영성

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의 말씀은 사람은 먼저 영이 아니라 육으로 낳음을 받기 때문에 육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 5:3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모양 곧 자기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하셨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려 육체가 되어 아담이 낳은 아들은 영이 아니고 육이 되었다. 우리는 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먼저 육으로 낳음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한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영생을 살게 된다. '영생'이란 영원히 산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라고 하셨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별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속에 '영원'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 낳아 어느 시점에 죽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7) 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 인생의 한 시점에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우리는 거듭나게 된다. '거듭났다'는 것은 곧 영생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전에 먼저 '육'으로 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라고 하셨다. 곧 먼저 난 '육'은 미워하시고 '영'은 사랑하심을 의미한다.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고 말씀한다.
1. 영혼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영혼과 영성을 나눔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은 '거듭나야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는 영성훈련을 받는다 할지라도 도덕적 교훈을 받아 삶의 경건을 이룰지 몰라도 영적 경건은 이룰 수 없다. 이방인 중에도 수련과 훈련을 통해서 경건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때때로 육체를 벗어나기도 한다. '육체를 벗어난다'는 것은 육신의 욕망에 대해서 자유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 육신의 경건일 뿐이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라고 말씀한다.

영성 훈련은 내가 거룩해지고 온전해지고 성화(聖化)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적인 제사 즉 산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다. 단순히 내가 거룩해지고 온전해지는 자기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 열 가지 큰 재앙이 있었다. 애굽에서 볼 때는 재앙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기적, 곧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로로 하여금 항복하게 했던 열 번째 재앙은 초 태생의 죽음의 재앙이었다. 곧 처음 난 것(육)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이후 초 태생을 하나님께 드린다(출 13장).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부터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우리의 육신을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병기로 드리라(롬 6:13).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이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가 되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한다. 오직 하나님 앞에 발견되어 하나님께 드려져 의의 병기(롬 6:13)로 살아지지 않을 때 우리의 육신을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롬 8:7). 그러므로 먼저 내가 "십자가와 연합"이 되어져야한다. 바울은 자기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지녔다고 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요 3:5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물'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롬 6:3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면서 '물'이란 예수그리스도의 피라 할 수도 있고 육의 사망을 의미한다. 단순히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거듭났다고 하지 않는다. 세례요한이 씻음의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람이 물로 씻김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말한다. 예수그리스도와 합하여 장사지내지 아니하면 주님과 만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먼저 물로 씻고 그 다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롬 6장).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그가 내 안에 들어와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중생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그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때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다. 우리가 씻김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고 의인으로 보신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에 이른다. 자칫하면 구원조차도 어떤 훈련이나 방법에 의해서 되는 줄로 착각할 수 있다.

2. 영혼이 성장해야 한다.

무릇 살아있는 '생명'은 성장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거듭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한다(엡 4:13). 이것은 존재의 영성을 나눔에 있어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하려고 하기보다 성숙한 삶을 살아보려고 했다. 마치 이것은 어린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면서 엄마 아빠 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고전 13:11에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성장해야 성장한 영혼 속에 성숙한 가치관이 생겨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를 다스려서 의의 열매를 맺어드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교육은 '성숙'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삶의 윤리, 즉 율법적으로 접근을 하므로 문제이다.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다(딤전 4:8)했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의 자랑이 되고 사람의 공로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교회 안에 판단과 정죄가 많다. 오히려 주님 앞에 성숙한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하는 데 육체의 연습만을 해왔기 때문에 자기 의를 나타내기가 쉽다. 이것은 큰 함정이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자라나야 한다. 영혼이 성장해야할 것에 관하여 히 5:12-14에서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 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한다.

1) '생명'은 반드시 성장해야한다.

눅 13:18-21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菜田)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하셨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는 성장을 말씀하고, 둘째는 확장을 말씀한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누룩도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넣으면 부풀어서 온 그릇을 가득 채운다. 겨자씨도 작지만 생명이 있기에 심으면 반드시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생명적인 영향력을 미쳐야한다. 나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일 뿐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나눌 때 다른 이들이 예수를 얻어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뿐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채워져 더 이상 육신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좇아 사는 사람으로 바꾸어져야한다.

필자가 오래 전의 강의 중에 '예수그리스도는 마치 내 안에 초청한 손님 같다. 때로는 불청객 같아서 외면하고 있는 줄 모르고 살다가 자기 필요할 때만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집사님이 많이 우셨다. 나중에 그 집사님의 담임목사님이 필자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 그 목사님도 교회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는 울지 않더니 필자가 할 때는 울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생명의 영향력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불청객으로 모시면서 다른 이들에게 아무리 설교해도 영혼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될 수는 없다. 말씀은 언제나 삶이어야한다. 내가 그렇게 살 때에 그 삶이 그 말씀을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확장은 각 사람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뿐 아니라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외적 확장에 관하여는 한국교회가 큰 이룸이 있지만 성장에 있어서는 주 앞에 참 부끄럽다.

*성장에 관한 말씀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 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벧전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2) 성장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근심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이란 세상을 상징하고 바로는 사단을 상징한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사단을 왕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엡 2:3 말씀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하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사단에게 속한 사람만 있다. 이 둘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귀신들린 사람은 사단에게 '사로잡힌' 상태이다. 우리도 성령께 사로잡히면 이방 사람들에게는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방 사람들은 높아지고 부(富)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으로 인한 핍박으로 기뻐하고,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고, 허비하는 것으로 기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 미쳐야한다. 곧 '충만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건설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께서 왕 노릇 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 간 후에도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수 백년 동안 사사시대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 광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 속에 있는 '애굽'을 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출애굽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여전히 애굽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들은 종이 아님에도 여전히 종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과 환경, 육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서 왕 노릇하기 위해서 그들 속에 있는 세상을 버리도록 훈련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리기를 싫어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이 된다.

아이가 막 태어날 때는 말하지 못하고 걷지 못해도 태어난 것으로 부모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1년,2년이 지나도 말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면 부모의 근심이 된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오래했어도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근심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에 대해서 다루신다. 이것이 '광야'이다. 성경은 이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34:14)이라고 표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다룸을 받고 난 후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광야'는 우리에게 축복이다.

3. 어떻게 성장하는가?

첫째, 영혼이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게되면 나의 실상(육체, 자아)을 보게된다.

어느 집사님께서 자신은 이웃에게 나누고 베푸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집사님의 집의 상하 방을 세를 내놓았는데, 셋방의 엄마가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아빠가 아이들을 돌보는 집이었다. 아이들이 엄마의 품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음식 냄새만 나면 집사님댁의 문 앞에 모두들 달려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이 집사님에게 보기 싫었다. 원래 이웃에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이들의 그러한 모습을 싫어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동안 자신을 착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실제는 참으로 인색하고 사랑이 없는 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이웃에게 나누어준 것은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육체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나를 발견하기 어렵다. 하물며 영혼을 발견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거듭났음에도 내 영혼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말씀해도 도대체 우리는 영혼의 생각이 무엇이고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 살았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죽은 자 일 수 있다. 내가 귀신을 좇아내고 병자도 고치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주님은 악한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 너는 나와 도무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마 7:22-23). 그러므로 영혼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영혼이 발견되어 영으로 육신을 다스리고, 생명의 열매를 맺어드릴 수 있어야한다. '영혼의 발견'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할 수 있고 또한 훈련 속에서 가능하다. 오늘날 교회 속에 이러한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고 자꾸 율법을 말한다. 영혼이 발견되지 못함으로 사실 성경 속에 이해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말씀이 많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하셨는데 도대체 주안에서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

둘째, 성령과 말씀으로 성장한다.

영혼의 성장을 다룸에 있어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아 파쇄의 문제, 곧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내 안에 영혼이 있다. 그러나 육체가 가로막아 영혼이 활동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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